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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강 시30편 산 같이 굳게 세우시는 주님
2021년 12월 30일 (목) 10:02:01 조무웅 강도사 www.cry.or.kr
걱정은 인간이 타고 난 것이 아니겠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에덴의 동쪽에 사는 사람은 불안입니다. 인간이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불안이 있어요 시간 속에는 불안이 있는 것이어요.
 
어거스틴이 이야기 한 것 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 까지는 불안이 우리의 삶속에 없어져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 말고 불안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 삶을 본질적으로 돌려 놓는 기회가 되기도 하거든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게 다가오는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내게 어떤 재료가 변형 시킬 수 있는 내적 능력이 내게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지요. 공연을 앞두고 불안해 하는 것 어떻게 보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일 수도 있지요.
 
어떤 사람은 문제가 있는대도 평안하게 자는 것이야 조금 밉지 그러니까 정말 좋은 공연을 하고 싶어서 애쓰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하지만 애쓰기도 해야 되고 그래서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리다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너무 걱정만 해 기도해 놓고 이것도 좋은 것이 아니어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생애 재료가 무엇이든 이것을 내적으로 받아드려서 성찰하고 그것을 기해서 더 낳은 디딤돌로 삼는 다고 한다면 걱정도 좋은 것이지요
 
바울 사도가 이야기 했어요 우리가 쓸대 없는 세상일에 근심하기도 하지만 근심하기 때문에 우리 맑아진다고 하면 고마운 일이지요 자기 영혼이 망해가고 있는 데도 걱정도 안 하고 근심도 안 하거든요
 
오늘은 시편은 시편 30편입니다.
이 시는 보면 보면 감사시이지요. 감사의 마음이 넘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개인 감사시입니다. 어떤 민족이 겪은 고백이라기 보다는 한 개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회복되었는가 하는 상세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요
 
그런데 낯 설게도 이 시의 표제 다윗의 시 그렇게 되어 있고 곧 성전 낙성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성전이 다 건립되어 가지고 이제 축하하는 노래인데 그런 이야기라고 하는 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여러 절기들이 있지요.
 
여러분 보면 삼대 순례의 명절이 있지 않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어떤 명절이 있지요 유월절 칠칠절 (오순절) 가을이 되어서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장막절 혹 수장절이라는 것이 있지요 3대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3대 절기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중요한 절기를 지켜요 예를 들면 부림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에스더에서 나오는 것인데 유다인들을 다 죽이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이제 유다인들이 죽지 않고 유다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하만과 이런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요 그 날을 축하는 날이 부림절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 날도 유대인들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날을 기억을 하기 위해서 그 날을 기념일을 삼고 있습니다. 또 오늘 하루카라고 하는 축제가 있어요 하루카라는 것이 여기 성전 낙성식하고 관련이 되는 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세워진 다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가 성전으로 집중되었지 않아요
 
성전은 너무 거룩한 곳이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했습니다. 전에도 성전은 딱 위계 질서가 되어 있었어요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고 유대인 남자들의 뜰이 있고 여성들의 뜰이 있고 이방인의 뜰이 있고 이렇게 위계질서로 계층화 되어 있지 않아요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 보면 통곡의 벽이라고 하는 데 예루살렘 서쪽 벽만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벽 너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행여라도 지성소가 있는 곳을 밟게 될까봐 그래서 그들은 벽에다가 머리를 되고 울면서 기도하거든요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통곡의 벽이라고 말하거든요 넘지 못하는 선이 있는 것이지요
공간 자체에도 거룩함이 있다고 그들은 믿은 것이지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소가 전쟁 때문에 철저히 파괴된 적이 있었지요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이 다 무너지고 이런 일을 겪습니다.
 
자중에 돌아와 가지고 귀환한 공동체가 스룹바벨 성전을 짓지 않아요 이전에 비하면 규묘가 작은 제 2성전이 지냐지 않지만 그럼에도 성전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감격 스러웠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어떤 문제인가 하면 그리스가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의 세개로 나누어 가지고 쟁패를 해요. 그 가운데 하나가 세리코스 왕자라고 시리아에 터전을 두고 세리코스 왕조가 항상 애굽에 바탕을 두고 있는 투톨레미라는 왕조하고 다툰 것이어요 이 왕조하고 다툽니다.
 
보니까 세리코스 왕조와 투톨레미 왕조 사이에 이스라엘이 끼어 있지 않아요. 어려움을 겪지 않아요. 세리코스 왕조의 왕이었더 안티오코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정신이 악간 이상한 사람 같았어요
 
자기를 신의 현현이라고 해 가지고 자기 이름 앞에 이런 말을 부칩니다. 에피파네스 에피파네스 신이 현현했다 그런 뜻입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토타리미오 왕조하고 전쟁을 하러 갔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화풀이를 한 대상이 있어요
 
예루살렘에 와 가지고 성전을 더럽혀요 어떤 방식으로 더럽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제물을 잡아 바치는 제단이 있지 않아요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를 잡는데 이런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율율법을 소지 하지 못하도록하고 안식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고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다 무너트리고 했던 것이 안테오파스 에피파네스 4세라는 사람이어요. 이것이 주전 4세기에 속합니다.
 
어떼에 누루고 누르면 또 누르면 억눌리지만 폭발하지 않아요 독립운동이 벌어져요. 이 때 등장하는 가족이 마케베오 가족이 독립운동이 벌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몰아내고 더러워진 성전을 께끗하게 정화해서 다시 한번 예배드린 곳으로 바꾸거든요 그 축제가 하누카 축제입니다. 성전을 새롭게 하나님께 봉헌하는 절기라고 보면 됩니다.
 
어떻게 보면 개인이 너무 큰 시련을 겪고 있었는데 그 시련으로부터 회복하는 경험과 성전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경험을 매치시켜 놓은 시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일절 비슷한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어요 아무튼 이런 맥락을 가진 시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은 개인이 고통을 겪는 개인의 경험이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어떤 어려움이냐 하면 질병이어요. 죽을 병에 걸린 것이어요 이 사람이 여러분 병에 걸리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언제나 어쩌면 내가 죽을 지도 몰라 가끔 병원에 가보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환자는 언제는 을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갑이고 제가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날 때 제가 환자로 갈 때 말고 목사로 말씀을 전하러 갈 때는 을의 마음을 헤아리는 갑이 되어 달라고 이야기 할 때가 있는데 질병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이 병이라고 하는 게 인간이 경험하는 한계상황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계상황이라고 하는 게 칼 아스퍼스라고 하는 철학자가 만들어 낸 개념이어요 인간이 어찌 할 수 없이 인간에서 다가오는 것이어요 죽음이라든지 죄책의식라든지 질병도 그렇고 인간의 유한함 같은 것 이런 것들이 나는 벗어나고 쉽지만 벗어날 수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한계상황 속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밖에 없어요. 그 속에 짓눌린 사람도 있고 그 한계 상황을 뒤딤돌 삼고 더 큰 정신을 만들어 내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이 도약이어요 정신적 도약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때때로 보면 인간의 한계 상황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 고마운 일이기도 합니다.
질병이 좋은 것이라고 할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플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아픔을 그냥 상실로만 경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을 통해서 내 삶을 성찰해 볼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결국은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은 밖을 내다보는 시선을 자기를 돌아보기 시작해요 이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우리가 유한다는 사실이 참 고마운 게 때때로 고난이 고마울 때도 있는 그것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요.
 
그러나 모든 고통과 고난이 무의미하다고 함부로 이야기 하면 안 되어요 왜냐 하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뜻을 있을 것이야라고 이야기 하면 안 되어요. 나중에 그분이 그 고통에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그 고통 속에서 못 견디어 하는 사람에게 가 가지고 다 뜻이 있어 이야기 하는 것 요즈음 애들 말로 재수 없는 말이어요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가서 그 의미를 해설해 주려고 하지 말고 제발 가서 고통 받은 사람 손잡고 그 옆에 있어 주어라.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이게 여러분 목사들의 버릇 가운데 하나도 자꾸 무엇인가를 설명해 내려고 하는 것이어요.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때때로 그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서 거리 두기가 가능할 때 비로서 사람은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거든요 그 때까지 어떤 과정이냐 하면 스스로가 뜸들이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 과정을 생략하면 안 된다 하는 이야기이지요 이것이 중요한대요
 
오늘 이 시가 아주 중요하게 시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1절 내가 주님을 높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끌어 내 주어서 원수로 하여금 나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아주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수렁에서 건져 주셨어 질병이라는 수렁이었어요 이 사람의 경우는 그러나 원수가 비웃지 못하게 해 주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큰 병이 찾아 왔을 때 시인이 했던 것이 무엇이냐
2절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부르짖었다 고치셨다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 속에 틈이 없습니다. 내가 부르짖자 하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 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3절 스올로 내려 갔던 내 영혼을 하나님게 끌어 올려 주셨습니다.
몇가지의 동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절 나를 끌어 내사 그런 동사가 있습니다.
2절 나를 고치셨나이다 단어가 나옵니다.
3절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 내여라고 이야기 했어요
3절 하번절에 보니까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해 주셨다 살려 주셨다 하는 이야기 합니다.
 
네가지 동사가 나와요 끌어내다 고치시다 끌어내다 살리다 이렇게 되는 데 세 번째 끌어 내다는 단어는 끌어 올리다 서로 다른 동사들입니다. 번역이 단지 그렇게 나와 있을 뿐이지요.
 
여러분 이 경험 끌어내다 고치다 끌어 올리다 회복하다 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하고 있어요 내가 어딘가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어두움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바치 수렁 속에 빠진 것이 있어요
 
대게 떠오른 그림 하나가 고야하고 하는 화가가 있습니다. 스페인의 화가인데요 그 화가의 그림 가운데 개가 있어요. 이 개 그림이 기가 막힙니다. 무엇이냐 하면 흐르는 물에 유사 유사 속에 개가 빠집니다. 몸이 다 빠지고 머리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개는 공포속에서 위를 쳐다보고 있어요 그 모래가 황토빛이지요 하늘까지도 황토빛이어요. 공허하게 공간을 위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 와서 구조해 주는 개의 모습이 떠 오르는 데 그런 상황이지요
 
내가 어떻게 벗어날 수 없어 그 흐르는 그 때 내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고쳐 주셨어 끌어 오려 주셨고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경험으로 승화 시킵니다.
4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어요 성도는 하시드 라는 사람들인데 계약에 신실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은혜에 의지해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인의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그 개인의 경험을 나만의 자산으로 삼지 않고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보편적 경험으로 지금 만들어 내고 있어요
 
자기의 놀라운 은혜 체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5절이 그 내용이지요. 그의 노여움은 잠간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진노하신 것 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가 늘 고통 스럽지만 않아요. 다만 고통이라는 게 우리에게 도드라진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이 고통이 많은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시인은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노여워 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은총은 주님에게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 시인의 고백이어요
 
저녁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그런 운명론적인 낙관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지라도 노염은 잠간이고 은총은 평생이다 저녁에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이 기쁨이 온다는 것은 다 잘될 것이야 이게 아닙니다.
 
이런 태도가 아니어요 잘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무엇이지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렇지요 언약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는 아주 적극적 낙관주의에 이르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은 16장 20절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여기 이야기 하는 대로 노여움 속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울음 속에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노여움을 넘는 은총을 발견함이요 울음을 넘는 기쁨을 차치함이어요 신앙이라는 것이 그것은 운명론적 낙관론이 아니어요 그것은 우리아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그러한 변화를 이루어 낼 것이지요 이 시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인이 정직하게 자기가 어떤 오류를 범했는지 이야기 하고 있어요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그리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늘이 다 잘되고 그러면 이 세상이 지속될 것 처럼 느껴집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여러분들은 인기를 먹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과거에는 그러다 보니 인기가 높아졌을 때는 이 인기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데 매정하게도 대중들의 그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그게 우리의 생의 비애를 가져 오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유한함을 몰라요 자기가 시간 여행자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올 변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순간이 영원할 것이다 생각한 것은 결국 악마와 계약을 맺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제 이야기가 무섭게 들릴지 모릅니다.
자 제가 했던 이야기는 괘테의 파우스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와 계약을 맺거든요. 파우스트는 방황하는 사람이어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서 어느 순간이 너무 좋아서 이 순간이 영혼이 멈추어라 하는 순간 메피스트 펠리스가 그 영혼을 데려 가도록 하거든요
 
그가 하는 이야기는 중요하거든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내 삶이 불안정한 것이야 방황한다는 것은 무엇이지요 늘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나는 것이어요 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나는 것이어요 우리도 살면서 때때로 좋은 일이 내가 대단한 것 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의 생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전도서에서 이야기 하거든요 심을 때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웃을 때 우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인생의 좋은 때가 올 때는 내게 인생의 조건이 왔다고 감사함으로 생각하지만 천년 만년 누린다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어요.
 
계속 그 반대로 생각해야 되어요.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나와 반대 자리에 고통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어요 내게 고통이 있을 때는 그 고통이 영원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나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원망 사고로서 낙관론인비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지나갈 것을 믿는 것이지요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도다
형통할 때 주님이 나를 산처럼 굳게 세우신 것 같아요
그런데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그래요 우리가 잘 되는 것 처럼 보여요 잘 될 때 우리가 잊는 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누군가게 덕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어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별명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들에게만 해당된 말인데 내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덕분네입니다. 덕분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내가 덕분에 산다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살고요 그가 있는 덕분에 내가 살고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여기에 오는 데 전철을 타고 왔는데 전철을 운행해 준 분도 있어요.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가 안심하고 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살지 않아요. 이것을 우리들이 알아 차려야 한다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지요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세우신다 고마운 일이어요
 
문제는 우리는 잘 될 때 주의 은혜를 망각하도록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내가 잘한 줄 알아요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얼굴을 가리셔요 그러자 내가 근심하게 되더라 이게 기가 막힌 역전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 해요 그래서 지혜롭다고 현실을 감사함으로 누리되 정 반대를 상정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신다는 이야기가 어떤 것일까요 때때로 내게 찾아온 질병 실패 가난의 경험 하나님이 내게 얼굴을 느낄 때이지요 하나님의 부재체험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이야기 하지요 자기가 그렇게 기고만장했었는데 하나님의 부재하심이 내게 느껴지는 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이야기여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없었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이라고 은혜를 간구했느냐 하면
9절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으로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고통 스러워 이게 아니고요 내가 이렇게 죽음의 세계로 옮겨간다고 한다면 내가 주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주님께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무덤과 진토는 시인과 하나님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찬송할 수도 진리를 선포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간절히 구했던 것은
 
10절 내 기도를 들어달라는 것이고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 했더니
11절 12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힘이 되게 하시며 나의 배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하여 무엇 무엇 되게 하시고 하고 있어요 여러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입니다. 신앙은 변화인데요 이렇게 이야기 해 볼까요. 호두 알갱이가 있습니다. 포도 알갱이를 으깨어 즙을 짰어 그러면 무엇이 되지요 포도즙 포도 알갱이에서 포도즙으로 변화는 무엇이 되지요 물리적인 변화입니다.
 
물리적인 변화여요. 그런데 그 포도즙을 발효시켜서 포도주로 변했어요 물리적 변화가 아니고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이 포도주를 성찬에 사용하였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성찬에 썼어 그랬을 때 그것은 물리적 변화에서 화학적 변화 그 다음에는 어떤 변화가 성스러운 변화 영적 변화가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포도 송이같은 우리의 삶 어떻게 보면 보잘것 즙으로 짜냈을 때 조금 더 보관하고 있어요. 이것이 포도주로 변화 되었을 때 조금 더 오래 보관 되지 않아요. 이것이 성찬으로 변화 시킨 영원한 변화를 가지지 않아요 신앙은 이런 변화의 과정이라고요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살고 있지만 죄도 많이 짓지 않아요 이것이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영혼을 나타내는 존재로 변화되어요 이것이 성스러운 삶으로위 변화라고요
 
이것을 시인이 이야기 하는 것이어요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나의 춤이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슬픔을 없에 주는 것이 아니고 기쁨의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어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기뻐할 수도 없거든요
 
내가 배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을 기쁨으로 띠 띠었습니다.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연회복으로 바뀌어 준 것이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해 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었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12절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시니
결국은 이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 사람이 무엇이라고
 
이 사람이 무엇이라고 했지지 앞에서 1절 3절에서 거듭 나왔던 이야기가 끌어내사 고치시고 끌어내어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세요 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는데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그것이 이루어 졌어요
 
11절과 12절에서 결국 변화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삶 하나님의 은혜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영광의 찬양을 드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렵습니다. 살다 보면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얼굴들이 어떻습니까? 보면 찌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의기 소침하고 표정이 없어요. 무감각하고 어떤 때에 그 건널목에서 신호를 대기하고 이렇게 있다가 저 건너편을 바라봅니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지 않아요. 화난 사람들 같아요 양쪽에서 대치하고 있다가 불이 바뀌는 순간 싸우러 가는 사람들 처럼 다 지쳐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시무룩한 의기 소침한 표정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표정으로 바뀌어야 하지요
그래서 시인이 말미에 하는 이야기가
12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정현정 선생님의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그런 시가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아름다울까요? 여러분 보면 요즈음 아름다운 사람들이 참 많아요 세상에 예쁜 그런데 아름다우면서도 인격에 향기가 느껴지는 사람 만나는 것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인형같은 아름다움은 있는데 그 속에 인품의 향기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이 슬픔이지요 정현정의 시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자기를 벗어날 때 처럼 사람이 아름다울 때는 없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냐 자기를 벗어날 때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벗어나는 사람이라야 남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온통 사로 잡힌 사람은 그 표정이 행복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이야기 하는 것 처럼 우리는 누군가에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지요
우리는 누군가에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서는 내가 안락한 자리에 나의 타성을 깨지 않고는 이웃에게 다가갈 수 없어요.
 
정말 자기를 벗어날 때인데 변화가 일어나야 물리적 변화 화학적 변화 그것이 영적 변화로 바뀌어져야 해 그래서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 났을 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야기 하시지요 나는 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온 사람이 아니야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어 이것이 선물이 되는 비결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가 인격의 향기를 그가 자기에게만 사로 잡혀 있지 않고 자기로부터 벗어났을 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고야의 개 이야기 했던 것 처럼 때때로 흐르는 노래 유사속에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공허한 하늘을 부르짖었더니 내 영혼의 자리로 하나님을 영원히 인도하겠습니다.
 
그 자리로 누군가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들이겠지요 여러분의 삶이 이런 아름다운 변화의 과정으로 성숙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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