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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처럼 신록이 짙어지는 산
2024년 04월 17일 (수) 11:11:26 이승철 장로 www.cry.or.kr
 
 
▲ 공주봉에서 바라본 의상대
 
ⓒ 이승철
 
"저 노인네들 오늘은 집에서 효도 받으며 호강하는 날인데 왜 모두 산으로 왔지?"

어버이날인 5월 8일 찾은 경기도 동두천의 소요산에는 노인들이 유난히 많은 것 같았다. 대부분 삼삼오오 친구들과 함께 한 모습들이다.

"왜 저 노인들뿐이겠어? 우리들은 뭐 효도 받으면 안 되는 사람들인가?"

그래도 아직 60대 초반인 우리 일행들 중 스스로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아침에 자식들이 가슴에 달아준 카네이션도 쑥스럽다고 슬쩍 빼놓고 왔다고 한다.

전철이 소요산입구까지 개통되어서 교통이 편리해진 탓인지 이날따라 평일인데도 평소보다 등산객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주차장에는 멀리 지방에서 온 듯한 관광버스들이 7대나 주차되어 있었다. 자재암 입구 원효폭포를 잠깐 둘러보고 속리교를 지나 바로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아 공주봉으로 향했다.

공주봉을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길이다. 더구나 너덜바윗길(잘게 부서진 바위들이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는 길)이어서 조심해야 한다. 아차하면 바윗덩어리에 부딪쳐 부상을 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 길 옆으로 쇠말뚝을 세우고 밧줄과 쇠파이프를 연결해 놓아서 좋은 손잡이가 되어 주었다.

"아니 그런데, 산길은 이리 험한데 왜 봉우리 이름은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공주봉이지.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청년시절에 단 한 번 이 산에 와본 기억 밖에 없다는 일행이 묻는다.

"물론 봉우리 이름에 얽힌 전설이 있지"

원효와 요석공주 그리고 설총
 
▲ 산길에서 만난 붓꽃 한 송이
 
ⓒ 이승철
 
 
▲ 자재암 입구 원효폭포풍경
 
ⓒ 이승철
 
서라벌에서 태종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는 승려인 원효를 사랑하여 결국 아들 설총을 낳는다. 이 설총이 바로 후에 이두 문자를 집대성한 대 학자이고, 신라 10현 중 한 사람이며, 순창 설씨의 조상 중 한 사람인 바로 그 빙월당 설총이다.

요석공주와 사이에 아들까지 낳은 원효대사는 그러나 수행정진하기 위하여 훌쩍 서라벌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요석공주로서는 깊이 사랑하는 원효를 쉽게 포기하고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수소문 끝에 바로 이 소요산 골짜기의 한 바위동굴에서 수행 중인 원효를 찾아 이곳까지 왔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원효가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를 두고 다시 훌쩍 서라벌로 돌아갈 요석공주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효가 수행 중인 바위동굴을 바라볼 수 있는 한 봉우리에 별궁을 짓고 살면서 아들 설총과 함께 원효가 수도하고 있는 바위동굴을 향하여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렸다고 한다.

"결국은 이들 모두 이 소요산을 떠나갔지만 후에 원효대사는 아들 설총과 요석공주가 아침저녁으로 자신에게 절했던 산봉우리를 공주봉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는군."
"그럼 그 요석공주가 살았었다던 별궁터도 남아 있겠네."

그러나 그들 모자가 머물렀던 별궁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다보니 어느새 공주봉 정상이었다. 그러나 정상에는 무슨 특별한 표시는 되어 있지 않았다.
 
▲ 소요산 정상, 의상대 표지석
 
ⓒ 이승철
 
 
 
▲ 참 예쁜 노란 꽃 한송이
 
ⓒ 이승철
 
"이 쯤에 작은 정자라도 하나 세워져 있었으면 좋을 뻔 했구먼, 요석공주와 설총의 사랑과 효심의 흔적으로 말이야."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대수로운 의미가 있겠는가. 전설은 그저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들이 연녹색으로 짙어지는 풍경이 설총의 효심처럼 싱그러워 보인다.

"이게 붓꽃이지 아마?"

전설을 현실로 반추해보려는 우리들의 마음을 꽃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일까. 마른 억새줄기 사이에서 피어난 작고 예쁜 꽃 한 송이가 우리들을 향하여 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우리 일행들은 다시 다음 봉우리를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다음 목적지는 이 산의 정상인 의상대다. 공주봉에서 의상대로 가는 길은 능선 길이었지만 결코 밋밋하거나 평탄한 길이 아니다. 공주봉에서는 능선이 아래쪽으로 깊이 내려 앉아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의상대로 올라야 하는 것이다.

"거참, 산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데 상당히 험하고 가파른 길이구먼."

공주봉이 526미터, 주봉인 의상대가 536미터로 나지막한 산이지만 칼바위능선 같은 험하고 날카로운 봉우리와 능선길이 등산객들이 결코 만만히 대할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날씨가 초여름처럼 기온이 올라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동안 선선한 날씨에 등산을 하다가 갑자기 더워진 날씨 때문에 몸이 느끼는 피로가 한결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나는 지난주부터 앓기 시작한 봄 감기가 아직 완쾌되지 않아서 더욱 힘이 들었다.

지친 일행들...감기에...과음에...
 
▲ 나한전 옆 옥류폭포전경
 
ⓒ 이승철
 
 
▲ 나한전 앞 연등 풍경
 
ⓒ 이승철
 
가까스로 의상대에 오르니 우리들보다 먼저 오른 몇 사람이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우리들도 준비해간 산식을 나누어 먹고 땀을 식혔다.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일품이다.

산 아래쪽은 대부분 부대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지역이 전방지역임을 실감케 한다. 남쪽으로는 동두천 시내가 내려 보인다. 동두천은 남북분단이 만들어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지촌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포천과 가평쪽의 산줄기가 첩첩이 늘어서 있는 풍경이다.

이 소요산은 소요천과 자재암을 가운데 두고 하백운대와 중백운대, 그리고 상백운대와 나한대, 우리들이 서 있는 의상대, 공주봉으로 이어지는 말발굽형의 산줄기가 오목하게 감싸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의상대에서 내려서자 상백운대로 향하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지쳐 있었다. 나는 감기 때문에 그렇지만 또 다른 일행 두 명은 전날의 과음 때문에 역시 힘들어하고 있었다. 선녀탕을 거쳐 자재암 쪽으로 직접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어르신 지금 이 길로 가시면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조금 전부터 우리들의 뒤를 따르던 30~40대 젊은이들 몇 명이 내게 길을 묻는다. 우리들은 지금 하산하는 길이라고 하자 그들은 어이없어 한다. 그들은 이 소요산이 초행인데 무턱대고 우리들만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 자재암 마당을 뒤덮은 연등 풍경
 
ⓒ 이승철
 
 
 
▲ 의상대에서 바라본 공주봉
 
ⓒ 이승철
 
상백운대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자 그들도 힘이 드는지 머리를 흔들며 그냥 하산하겠다고 한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 때문인 것 같았다. 선녀탕으로 가는 길은 출입금지를 하고 있었다. 시원한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는 곳에서 잠깐 쉬며 손발을 씻고 나자 피로가 많이 풀리는 것 같다.

자재암과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바위동굴인 나한전 앞은 석탄일이 가까워져서인지 온통 연등으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나한전 옆의 옥룡폭포는 봄 가뭄 때문에 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줄어 폭포의 물줄기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골짜기를 빠져나와 다시 원효폭포 앞 벤치에 앉아 잠깐 쉬었다. 골짜기 쪽엔 커다란 바위가 입을 쩍 벌린 모습으로 벌어진 사이에서 몇 사람이 더위를 피해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시간은 오후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소요산역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 선배님 아니십니까?"

누군가 갑자기 길을 막아서며 인사를 한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살펴보니 전에 일했던 회사의 후배였다. 그도 나이가 50대 초반인데 70대 후반의 노모를 모시고 소요산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어버이날을 맞아 하루를 노모와 함께 보내려고 소요산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자넨 여전히 착하고 효자로구먼."
"효자는요, 변변히 모시지도 못하는 걸요, 선배님 건강하시죠?"

몇 년 만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만난 이 후배가 이날따라 참으로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 신록이 짙어지는 골짜기 풍경
 
ⓒ 이승철
 
그들 후배 모자와 작별하고 내려오는 내 마음이 왠지 모를 흡족함으로 충만한 느낌이다. 소요산은 신라시대의 원효와 설총의 전설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외로운 늙은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는 한 중년 후배의 효심이 짙어지는 신록처럼 싱그럽게 묻어나고 있었다.
 
/홍익교회 장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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