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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에 기권하면 벌금을 물렸으면 좋겠어요."
2024년 04월 05일 (금) 11:20:00 이승철 장로 www.cry.or.kr
 
 
▲ 장애인 아내를 부축하여 투표장으로 들어가는 초로의 부부
 
ⓒ 이승철
 
5.31 지방 선거 날 아침, 서둘러 아침을 먹고 투표소를 향했다. 투표를 끝내고 등산하기로 친구와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투표소는 다행히(?) 한가한 모습이다.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기표용지 3장씩을 받아 두 번에 걸쳐 투표를 한 시간은 불과 5분도 채 안 걸린 것 같았다.

투표를 끝내고 나오는 인근 여자중고등하교 정문 앞에서는 장애인 아주머니가 보조 장구를 밀며 투표를 하기 위해 교문을 들어섰다. 그 옆에서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편인 듯한 남자가 오르막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부축하고 있었다.

승용차를 몰고 중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이천 나들목을 나서니 금방 도드람산 입구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을 시작했다. 등산로 입구의 안내판에는 세 갈래 길이 안내되어 있었다.
 
▲ 도드람산 제1봉
 
ⓒ 이승철
 
오른 쪽 길은 영보사를 거쳐 올라가는 길이고, 왼쪽 길은 2등산로와 3등산로였다. 우리들은 2등산로를 택하였다. 산길은 상당히 가파른 편이어서 무더워진 날씨에 금방 땀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산이 크지 않고 높지 않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몇 번 씻어내는 사이 제1봉에 닿았다. 산봉우리 너덜바위에 오르니 희부연 매연 속에서도 시야가 툭 트였다. 발 아래로는 막힘없이 씽씽 달리는 중부고속도로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는 설봉산이 지척이다.

잠깐 땀을 식히고 제2봉을 향했다. 그러나 불과 몇 분을 걷지 않아 눈앞에 나타난 바위봉우리가 2봉이었다. 역시 바위들은 매끈한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울퉁불퉁 못 생긴 너덜바위들이다.
 
▲ 도드람산 제2봉에서 바라본 풍경
 
ⓒ 이승철
 
제2봉에서 제3봉은 곧바로 올려다 보인다. 직선으로 쭉 뻗어 올라간 봉우리가 제법 우람한 모습이어서 1봉이나 2봉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2봉에서 바위 길을 따라 곧장 오르는 길을 피하여 왼편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역시 그리 높지 않은 산봉우리라 금방 제3봉에 도착했다. 이 제3봉이 도드람산의 정상이다. 해발 349미터, 이 정도 높이와 규모의 산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산이다. 그러나 산세는 그게 아니었다.

이천의 금강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도드람산은 부드러운 느낌의 산 이름과는 달리 능선 길과 봉우리들이 상당히 거친 바위산이다. 능선과 봉우리들이 바위투성이인 데다가 그 바위들도 매끄럽고 부드러운 느낌이 전혀 없는 제멋대로 울퉁불퉁 여간 거친 모습이 아닌 것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니 바람도 시원하고 시야도 넓게 열려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잠깐 쉬고 있는 사이 밑에서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50~60대로 보이는 다섯 명의 남자들이 올라왔다.
 
▲ 제2봉에서 바라본 제3봉
 
ⓒ 이승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인사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들도 봉우리로 올라와 땀을 식혔다.

"투표는 하고 오셨습니까?" 내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묻자 그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요. 당연히 투표를 하고 왔지요. 그런데 아마 지금 산에 오른 사람들 중에 투표도 하지 않고 아침 일찍 온 사람들도 많을 걸요." 한 사람이 나의 짧은 질문에 기다란 대답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 내 아들 녀석도 그냥 나갔는걸 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투표하고 가라니까 귀찮다는 거야. 친구들이랑 계룡산 등산을 간다는 것 같더라고. 내가 따라가 보지는 않았지만 서두르는 폼이 아마 그냥 갔을 거야." 내 질문 한마디에 산 위에서 난데없이 선거와 투표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앞으로는 기권하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한 5만원씩 물렸으면 좋겠어. 투표도 하지 않고 정치가 어떻다느니 지방자치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것 잘못 된 것 아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한 사람이 불쑥 던진 말이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야. 정말 벌금을 물리면 기권자가 많이 줄어들지 않겠어?"
 
▲ 산꼭대기의 돼지 굴과 효자문 이정표
 
ⓒ 이승철
 
제3봉에서 내려와 그들과 함께 돼지 굴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여전히 선거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누구를 찍었어?"
"누구를 찍긴 후보자들이 하도 많아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이어야지, 그냥 당을 보고 내리 찍었지."
"그런데 마누라나 아이들은 어때? 같은 후보를 찍었어?" 그는 가족들이 같은 후보를 찍었는지 아닌지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니 요즘 자식들이 애비 말 듣는 세상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
한 사람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탄식하듯 말한다.
"그건 자네 생각이 잘못 된 거야. 아무리 자식이래도 투표는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것이지, 부모라고 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
"하긴, 요즘 세상에 다 큰 자식들이 어디 부모 말 듣나. 더구나 투표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자식들에 대하여 심한 불평을 했던 사람이 다른 일행의 말에 수긍을 하는 건지, 부모 말을 따르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말로 마무리를 짓는다.
 
▲ 효자문
 
ⓒ 이승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는 사이 돼지 굴과 효자문으로 가는 갈림 길 벼랑바위에 도착했다. 절벽 오른편에는 한자로 효자문(孝子門)이라고 쓴 안내판이 서 있고 앞 쪽으로는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바위능선이 아슬아슬하게 길을 열고 있었다. 효자문과 돼지 굴, 도드람산은 저명산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저명산은 한문으로는 돼지 저(猪)자에 울 명(鳴)자를 써서 저명산이라고 한다. 이 저명산이라는 이름에는 효자와 돼지에 얽힌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이 산 근처에 어떤 효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중병이 들자 효자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며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약을 지어드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효자는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심하던 중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 바위에서 석이버섯을 채취하여 드시게 하면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아찔한 바위 굴 협곡
 
ⓒ 이승철
 
효자는 산 위에 올라 바위에 줄을 매고 석이버섯을 채취하다가 위에서 돼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올라가보니 돼지는 보이지 않고 밧줄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산신령이 효자를 구하기 위해 돼지 울음소리를 들려주어 효성이 지극한 효자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제3봉 정상에는 효자봉이라고 새긴 돌 명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 효자의 전설이 있는 산에서 나이든 등산객들은 당치 않은 이유를 들어 자식들을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드람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바위가 도드라져 있다는 것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 한글 문패를 단 영보사 큰법당과 장독대
 
ⓒ 이승철
 
위험한 코스를 생략하고 철사다리가 깊게 놓인 협곡을 돌아보고 제3코스를 돌아 내려오다가 영보사를 찾았다. 영보사는 법당을 대웅전이라고 하는 대개의 절과는 달리 한글로 '큰 법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자그마한 암자였다. 영보사를 둘러보고 산 아래로 내려오자 처음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효자 멧돼지 상'이 등산로 옆 산자락에 당당히 서 있어 효자와 멧돼지에 얽힌 전설을 말해주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의 식당을 찾았다. 식당 앞 논은 언제 모내기를 했는지 벼 포기가 굵어져 푸른빛이 가득하고 논 가운데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정겹다. 가지런하게 자란 고추밭도 풍요롭고 음식점 창문을 뒤덮은 담쟁이 넝쿨이 시원한 풍경이다.
 
▲ 등산로 입구의 효자 멧돼지 상
 
ⓒ 이승철
 
"자! 우리들의 000 모임을 위하여 건배!" 음식점 안의 분위기는 산 위에서 만난 나이든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들보다 산에서 먼저 내려온 20여명의 30대로 보이는 사람들은 활기찬 분위기 속에 음식을 먹으며 담소가 오갔지만 선거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바로 우리 옆자리에서 점심을 먹은 30대 전후로 보이는 네 명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대화 중에서도 선거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이번 5.31 지방선거도 역시 젊은 유권자들의 무관심 속에 나이든 유권자들에 의하여 당락이 결정지어졌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등산로 입구 마을의 고추밭
 
ⓒ 이승철
 
"너희들은 오늘 투표도 안 하고 여기 왔지? 나도 오늘은 선거 덕분에 5분간 일하고 하루를 쉬게 돼 기분이 좋은 걸."

옆자리 젊은이들 중 한사람이 이야기 중에 선거에 대하여 던진 딱 한 마디 말이었다.
 
 
/홍익교회 장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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