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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인생, 그러나”
2021년 07월 23일 (금) 08:43:50 양의섭 목사 www.cry.or.kr

(빌립보서 1:12) 
 
1.
미국의 어느 교회 주일 설교 제목이 ‘술 마시는 죄악’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열을 올려 술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시고, 이렇게 설교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전 세계의 모든 술을 몽땅 모아 강물에 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의 마지막 찬송, 즉 설교 직후 부르는 교인들의 찬송 소리가 여느 때 보다 훨씬 더 컸다고 합니다. 어떤 찬송이기에? 이거였답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거기서 모이세”
 
유머이지만, 현대 교인의 이중적인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입으론 안 된다 하면서도 마음은 거기 가 있는 모습입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오늘 술 설교하려는 게 아닙니다.
 
2.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성경에서 유일하게 술을 좀 마시라고 권함을 받아 몇몇 성도들의 부러움을 사는 이가 있습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디모데!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5:23)
 
왜 디모데에게 술을 권하는 걸까요? 분위기로 봐서 당시 교회는 절주, 금주하는 것이 교인의 덕목(德目)같이 보이는데, 어째서 디모데에게만은 마시라고 권하는 걸까요? 혹자는 디모데가 약한 체질이라 그렇다고 합니다. 정말일까요?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함께 세계전도여행을 한 인물입니다.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든지 ‘마가’ 같은 이는 중간에 포기하고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끝까지 그 힘든 전도 여행을 다 감당한 인물입니다. 결코 약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디모데에게 술을 권하는 걸까요? 말씀에 보면 위장과 자주 나는 병 때문이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병인가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속병입니다. 그래서 그 속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디모데에게 속병이 생긴 걸까요? 디모데는 지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즉 디모데는 목사입니다. 이렇게 목회를 하고 있는 디모데 목사에게 사도 바울이 목회에 관한 권면을 한 것이 디모데전.후서입니다. 그러면 감이 잡힙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목회를 하며 속병이 생긴 것입니다.
 
교인들이 속 무지 썩인 것으로 보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딤전4:12)라는 말씀이 나올 정도입니다. 디모데 목사가 어리다고, 순하다고 우습게 보고 별의별 말을 다 하며 속을 무지 무지 썩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우스개 말로 그러더라구요. 자기 교인 중에는 이건 뭐 목사 속 썩이는 재미로 교회 나오는 것 같은 이가 있답니다. 형제인지 웬수인지, 동역자인지 대적자인지, ... 디모데 목사가 그런 처지에서 속이 무지무지 썩었답니다. 그래서 그에게 속병을 위해 포도주라도 마시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 왕중교회에는 그런 분들이 없지만, 그래도 목회자들 속 썩이지 마십시오. 코로나 시대에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염려하며 기도하는 목회자를 위해 더욱 기도하며 격려해 주십시오. 이 힘든 시절에 일군이 부족하여 쩔쩔매는 목사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인생살이,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다 있지만, 목회 스트레스는 정말 큽니다. 자기가 원한 것도, 의도한 것도, 예상한 것도 아닙니다. 터놓고 말도 못합니다. 그러면서 일방적으로 당합니다. 한마디 변명 못 하고 당합니다. 그러니 그 속이 얼마나 상하겠습니까?
 
3.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고 열렬한 사도인가요? 그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 가히 따라잡기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의 마음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이 모두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의 일을 위해,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은 의미 없고,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고, 성도들이 올바로 서기만 한다면, 교회가 든든히 성장만 한다면 자기는 죽어도 좋다고 할 정도로 그런 열정을 갖고 주의 일을 한 사도입니다.
 
이 정도의 사도라면 그의 앞에는 형통함만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들, 주님 나라 위해 간구하는 역사들이 쫙쫙 열리고 이루어질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짧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상한 표현을 하나 씁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당했답니다! 당하다니? 그렇게 능력 있고, 권세 있고,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 그야말로 교회 역사에서 최고의 리더이며, 사역자인 사도 바울이 당하다니? 이해 안 되는 말입니다. 뭐든지 기도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사도가 당하다니? 뭘 당한 걸까요?
 
감옥에 갇혔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전국을 훨훨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전도자였습니다. 원하는 곳이면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 달려가 자신의 평생소원, 복음 전파하는 일에 온 전력을 쏟던 이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세계를 다니던 위대한 전도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갇혔습니다.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 없으면 복음은 누가 전한단 말인가요? 그야말로 소는 누가 키운단 말인가요? 자기를 기다리는, 찾아와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는 갈급한 영혼들이 그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갇힌단 말인가요?
 
그러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건 자기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가 받은 스트레스,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 쓴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빌립보서의 주제가 뭔지 아는가여? 이상하게도 ‘기쁨’입니다! 기쁨이란 단어가 빌립보서 넉 장에서 총 16회나 나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8)
 
어떻게 이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 게 아닙니다. 자기는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기분 나빠 죽겠습니다.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답답합니다.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기뻐한다구요? 정신병자 아니고서야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좀 모자라는 사람 아니고서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된 게 아니고 당한 건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생선 중에 성질이 급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물에 걸려 배 위로 올라오면 제 성질에 못 이겨 펄떡대다가 곧 죽어버리고 마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유롭게 살다가 그물에 걸려 자기 뜻대로 못하게 되자, 일방적으로 당하게 되자 참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도 자기가 하고픈 대로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산다면 그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 지수는 매우 커서,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늘 당하는 인생으로 산 사도 바울은 어떻게 도리어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에겐 어째서 실패자의 그림자가 없고 늘 승리자의 기쁨과 기개만 있습니까? 당하면서도 당하면서도 웃으며 살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그의 삶의 비결은 뭘까요?
 
4.
사도 바울도 처음엔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했을 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그것도 자기의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으로 몰려갈 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왜 이렇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더 이상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하게 되자, 바울을 사랑하는 이들, 바울을 존경하던 이들이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감옥에 갇혀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를 대신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합시다. 이로써 그를 위로해 주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전에는 뒷짐 지고 있던 이들이 바울이 갇히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교회의 위기이다 싶어 전과 달리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여기저기 전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열심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평상시 바울의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이 적대적인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고 하니까 잘 됐다 싶어, ‘기회는 이때다. 바울이 자유롭게 일하지 못할 때 우리가 더 열심히 전도하여 주도권을 빼앗아 오자. 교회의 헤게모니를 우리 것으로 만들자’하여 열심히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아주 악한 의도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이 소식을 듣고, 가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자기가 그렇게 당함으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요? 자기 혼자 복음 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이 일어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 이하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7-18)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하나님의 사역에 진전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당하는 인생이지만, 그러나 거기엔 분명 하나님의 뜻, 비록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허나 분명 심오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기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당하며 삽니다. 우리 중에 당하지 않고 도리어 가해자로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당하며 삽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때로 힘들고 벅찹니다. 재미도 없습니다. 맨날 참고 살랍니다. 인내하며 살랍니다.
 
한번은 집에서 집사람과 목회 이야기를 하는데, 뭔가 답답한 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벌컥 화를 내며 그랬습니다. “아니,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당신은 아직도 그걸 몰라?” 그러자 이분께서 이러십니다. “나는 서당 개가 아니라 보신탕집 개입니다.”
 
엉뚱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 웃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게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같이 목회하며 자기는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보신탕 집 개가 죽지 않고 3년이나 있으면 이상한 거듯이 목회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죽지 않았으면 이상한 겁니다. 이미 죽은 겁니다.
 
사도 바울 표현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는 이미 죽은 건데, 죽지 못해 아직도 펄떡이며 당한다고 서러워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당한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맙시다. 너무 분해하지도 맙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당하여도 당하여도 당하여도! 계속 당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목합시다. 당하여도 어떻게 한다구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평생 당하는 인생이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
 
거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압니다! 아니 모르기에 차라리 이 고통, 이 아픔을 하나님 나라에 연계시킵니다. 분명 이 슬픔, 이 아픔을 통해 하나님께서 뭔가를 이루실 것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나갑니다.
 
내가 당하는 이 일들, 이 속상함, 이 곤욕스러움, 이 아픔, ... 그냥 그대로라면 정말이지 싫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하는 이 일들, 이 상황들, 나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면, 하나님의 계획의 한 도구라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것을 들어 멋진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전화위복의 역사,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는 그 놀라운 축복의 세월이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코로나 상황도 그리 될 것이라 믿습니다.
 
5.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사도 바울, 무지 당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당한 일들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해합니다.
 
당할 때, 얼마나 아픈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함이 되었다고 마음의 자세를 바꿉니다. 당한 것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았다고 감사합니다. 그게 성숙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늘 당하고 삽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당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아프고 속상하고, 남모르는 눈물 꽤나 흘리고 삽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당하는 것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함께한다면, 그건 비극이 아닙니다. 그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분노하는 대신에, 아파하는 대신에, 절망하는 대신에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기를 간구합시다. 그 당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 받고, 사용되고, 열매를 낳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뜻밖의 일을 당했을 때, 기대 밖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다 믿고 범사에 감사하는 이들에게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b), 이 주의 약속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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