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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신은
2019년 10월 09일 (수) 09:48:34 양의섭 목사 www.cry.or.kr

사도행전 17:22-31
[행]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행]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행]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17: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1.
    어릴 적에 읽은 인상적인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촌 동네에 가난한 백정의 집안에서 크는 아이가 있었는데, 늘 동네 아이들로 백정의 자식이라고 놀림을 당하며 컸습니다. 그런 어느 날 역시 그 날도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자, 그날 밤, 그 부모가 아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마마, 우리는 당신의 부모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 나라의 왕손이십니다.” 하며 출생의 비밀을 전해줍니다.
 
    천한 백정의 자식인줄 알았는데, 실은 자신이 왕손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알고는 삶이 달라지는 그런 내용. 그리곤 마침내 궁에서 모셔 가는 그런 이야기. 그야말로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되어 날아가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 동네에서 놀다가 멋진 승용차가 우리 동네에 나타나면 ‘실은 너는 재벌 집 외 아들이란다’ 하며 날 데리려 온 건가 하는 망상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뿌리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고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뿌리는 누군가요? 개천절만 되면 곰이라 하기도 하고, 학교에 가면 원숭이라 하기도 하던데...
 
    2.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제 2차전도 여행 때, 아테네에서 행한 연설입니다.
 
    아테네는 헬라의 수도이며, 헬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삼대 도시의 하나로, “헬라의 눈,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철학과 문학, 예술의 중심지이며,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고향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큐러스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에서는 날마다 토론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곳, 아테네에서의 전도는 사실 바울의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데살로니가인들의 극렬한 핍박을 피해 잠시 들린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전을 위해 잠시 들린 도시이지만, 도시를 둘러보다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곳곳에 우상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네로 시대에 아테네 광장에 서 있던 우상만 300개가 넘으며, 도시 곳곳에 세워진 우상이 모두 3만개를 헤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사람을 찾기보다 신을 찾기가 훨씬 쉽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답니다.
 
    왜 이렇게 신들이 많아야 할까요? 옛날에는 말이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신들도 모두 자기 구역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산신령은 산에서만 힘쓰고, 용왕은 바다에서만 힘쓰고, 터줏대감은 자기 무대가 집입니다. 자기 동네 신은 자기 동네에서만 힘을 쓸 수 있습니다. 남의 동네에 가면 힘을 못 씁니다. 그러기에 동네마다 입구에는 성황당이 있고, 제단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 신이 그 동네를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행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곳의 산당에 들려 제사를 지내야했습니다. 이른바 그 동네 신에게 신고를 해야만 잘 지낼 수 있고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 입구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뱃사람들도 고기 잡으러 나가기 전에 바다의 신 용왕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신들은 다 자기 영역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유대인에게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집을 떠나 멀고 먼 삼촌 집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홀로 잠이 듭니다. 정말이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고,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때에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까지 하나님의 축복권을 자기 것으로 했음에도 그 서럽고 무서운 광야에서 홀로 잠이 듭니다. 그 축복권을 사용하여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곳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자기 동네가 아니기에, 더군다나 그곳은 광야로, 광야신의 무대라고 여겼기에 그저 조용히, 말썽 부리지 않고 얌전히 두려움 속에 잠이 듭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그러자 야곱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6-17)
 
    야곱은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와,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네?” 그리곤 일어나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습니다.
 
    야곱이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배우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당대, 모두들, 신들은 다 자기 영역, 자기 구역이 있다고 믿던 시절인데, 아브라함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어느 곳에 가든 하나님께 제단을 먼저 쌓았는데, 이는 그곳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계시고, 역사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에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대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여기엔 땅의 경계 의식이 없습니다.
 
    반면에 많은 구약의 인물들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네가 어디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너를 지키며 너와 함께 하리라!’ 이른바 ‘임마누엘!’,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심이 큰 축복이요 격려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있다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다 그 분야와 지역의 신들이 필요했기에 사람들에겐 수많은 신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3.
    이렇게 수많은 신들의 상, 우상이 널려있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을 향하여 설교를 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아테네 시민들을 한층 띄워주며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알지 못하는 신! 뭔가가 있긴 있습니다. 살다보면 뭔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인식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가 있는 곳은 그 어디든 다 종교가 있습니다. 일반 상식으론 해결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는 곳들을 소개하는데, 공통적인 장소로 이런 곳이 나열됩니다. “상수리나무 사이, 푸른 나무 아래,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 높은 산 위!” 왜 이런 곳엔 어김없이 제단이 있고, 우상 숭배가 있는 것일까요?
 
    상수리나무는 큰 나무입니다. 사람은 이런 큰 나무 밑에 가면 뭔가 압도됨을 느낍니다. 푸른 나무란 짙은 숲을 말합니다. 게다가 푸른빛이 도는 숲이라면 어떤 신비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은 뭔가 음침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높은 산 위는 뭔가 하늘에 닿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곳, 뭔가 느껴지는데,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그 곳,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지각이 없으면, 올바른 지각이 없으면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딜 가나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에 제단을 쌓을 수밖에 없고, 숭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토록 수많은 신들을 섬기면서도 불안합니다. 혹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가 깨닫지 못해 빼놓은 신이 있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그 신이 혹시 삐져서 자신을 노여워하지 않을까, 저주하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어느 집안에서 혼인 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집안이 대가족, 복잡한 집안이라 오랜만에 집안 식구들에게 일일이 청첩장을 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당일 아침, 그날 야외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을 빠뜨린 먼 친척 되는 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삐지기 잘하는 분인데 이걸 어쩌나 ... 어쩌자고 이 분을 빠트렸을까 ... 걱정하며 부랴부랴 당일 오전에 전화하여 죄송하다 말하며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께서 하시는 말씀, “괜찮아. 오늘 야외 결혼식 못할 거야. 내가 비오라고 어제부터 철야 기도하고 있거든.”
 
    자기가 미처 알지 못하는 신이 삐져서 자기를 저주할까봐 두려운 게 영적으로 무지한 세상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교회 다니면서도 날을 잡아 이사를 가고, 사주를 보고 결혼을 합니다. 무지한 것입니다.
 
     예수 신앙을 제대로 든든히 가지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어리석은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곳엘 가보면 때로는 악한 영의 역사로 뭔가를 느낄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 때 막연한 두려움, 불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보다 기분이 나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이미 거룩한 영, 성령께서 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b)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심을 믿으십시오!.

    4.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려 하는 그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17:27)
 
    그 알지 못하는 신을 사람들은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대충 더듬은 이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짐승들의 형상이나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 내어 ‘이것이 신’이라며 숭배하기 시작했고, 좀 고상한 이들은 여전히 더듬고 더듬으면서 아직도 알 수 없다고 신중한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그 신을 제대로 아는 구원을 얻으려면 얼마의 세월이 필요하냐 하면, ‘억겁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억겁’의 세월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1겁이란 시간은 천년에 한 번씩 선녀가 지상에 내려와 집체만한 바위를 옷깃으로 한번 슬쩍 쓸고 다시 천상으로 올라갔다 천 년 뒤에 내려와 다시 쓸고 가기를 반복하여 그 큰 바위가 모래알만 해지는 시간을 1겁이라 합니다.
 
    상상도 안 되지요? 그런데 ‘억겁’의 세월이란 이 ‘겁’의 시간을 억 번 곱한 시간입니다. 불교의 뿌리 힌두교에서는 1겁을 43억 2000만 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억겁이란 시간이 실제로 얼마가 되는가요? 상상도 안 됩니다.
 
    왜 이런 엄청난 세월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을 더듬더듬 더듬어 찾으려니 그런 세월이 필요한 겁니다. 이렇게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들은 윤회를 통해 수많은 세월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우리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복인 줄 알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의 반열에 섭니다. 고백하는 순간,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단번에 구원해 주십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단번에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더듬어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 세월, 끝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머리 속에서 더듬고 또 더듬어 봐야 세월만 갑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단입니다. 결단하는 그 순간에,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구원의 역사는 완성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더듬기에 말을 애매하게 합니다. 이건가 저건가 애매하게 한 마디씩 툭 던집니다. 알아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더듬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분명합니다. 애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경책을 통해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의 말씀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 다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제자 빌립의 요구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더듬을 필요 없이 단번에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그 분을 찾을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5.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알 수 없는 신, 하나님을 그들에게 알려주며 이런 증언을 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답니다. 어떤 혈통? 하나님 혈통! 인류는 하나입니다. 인류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그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존엄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의 뿌리가 누구는 곰이고, 누구는 원숭이라면, 제각각 다르다면 인간의 가치, 존엄성은 다 종족마다 다릅니다. 누구는 천하고 누구는 고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인간은 다 하나님의 자녀로 존귀하다고 합니다.
 
    누가 우리 조상이 곰이라 하는가요? 누가 우리 조상이 원숭이라 하는가요? 웃기는 말입니다. 곰은 곰이고, 원숭이는 원숭이입니다. 뭐 땜시 곰이 인간이 되겠으며, 뭐 땜에 원숭이가 인간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곰은 곰으로 필요하기에 만드셨고, 원숭이는 원숭이로 필요해서 만드셨는데 뭐 때문에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뭐 곰 중에 특별하게 마늘을 잘 먹는 유별난 곰이 있었다 하던지, 뭐 원숭이 중에 재주가 비상한 놈이 있어서 그 놈을 손오공이라고 하였다 하던지 ... 아무리 잘나고 잘나도 원숭이는 원숭이고, 곰은 곰입니다.
 
    원숭이가 인간과 비슷하다고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 하지 말고, 도리어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비슷한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함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니 인간을 원숭이에 연결하지 말고, 인간이 하나님 같다고 하나님께 연결하십시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뿌리가 분명 하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나의 뿌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칭하여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라고.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6.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표현하지만 우리는 분명 압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야훼 하나님, 우리 아버지임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아름다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영적으로 우왕좌왕하지만 그 알지 못하는 신은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이라고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여호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능한 주의 백성으로 삼으시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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