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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강변에서
2018년 01월 17일 (수) 11:17:52 조무웅 강도사 webmaster@cry.or.kr
(시137:1-9)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시편‬ ‭137: 5, 8‬ ‭RNKSV‬‬
 
1. 1~ 6 바벨론 강변에서 운 이유
2. 7~ 9 바벨론 강변에 대한 보응읗 기원함
  여러분 사람이 늘 해피하고 명랑할 수만 없지요. 늘 명랑한 사람 보면 불안해요. 왠지 그렇지요. 때때로 나는 커피를 마시러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조증이 걸린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울증 말고 조증  너무 명랑한 것이야 왜냐하면 고요하게 이야기를 못해 누구하고 이야기 하면 엑션이라고 하지요. 엑션이 너무 큰 것이야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면 아 그렇겠네 그 정도면 괜찮은데 맞아 맞아 그래서 이제 좀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너무 시끄럽고 정신이 없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명랑한 것이 좋지요. 그러나 명랑하도록 누군가에 강요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그늘이 없는 사람은 깊이가 없어 보여요. 사실은 저는 가만히 못 있어요. 그게 때때로 인생에 마음 아프고 힘들 때도 있지요.
  왜냐하면 내 삶에 대한 주체로 있지 못하고 누군가가 요구하는 바를 내가 연기를 해야 되니까 이런 것들이 어렵지요.
  여러분들이 살다보면 인생이 고단하다고 느낄 때가 있지요.  그때 느끼는 것이 어디 편안한대 가서 쉬고 싶으면 좋겠다 그렇지요 가고 싶은 그 곳을 마음의 고향이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그래요.
  내가 장소로서의 고향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내 마음을 둘 대가 없는 것이지요. 이게 고향 상실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지요.
  현대인들도 그렇고 고대인들도 그렇게 마음 둘대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도시에 살면서 마음 둘곳이 없는데가 있는데  특히 이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말 할 수 없지요.
  특히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 교포분들을 우리가 자이니치라고 부르는데 그분들도 어쩧던 일본 사회에 살고 있지만 힘들지요. 그 속에 동화되어 살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동화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한국에 가면 일본 사람이라고 어중간한 그 속에 어떻게 보면 계속적인 떠남속에 있는 것이거든요.
  실지로 발전하는 것을 보면 자기에게 익숙한 자리에만 있으면 발전이 없거든요. 익숙한 사람에게만 만나도 내 영혼이 깊어 질 수가 없지요. 내 영혼이 끝 없이 낯선 것을 향해 가야 하는 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있다면 바벨론 포로기이거든요.
  그 때 그들이 느꼈던 아픔이 무엇인지 오늘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해요.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내 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마지막 구절은 굉장히 강력하지요. 아멘을 못하고 망설인 것을 눈치를 쳈어요.
이 시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150편에 이르는 시 가운데 그 시의 삶의 자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분명히 시가 탄생한 삶의 자리가 바벨론 포로기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것을 알 수 있는데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고 하는 것 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포로가 된 경험이 없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포로로 잡혀 갔다고 하는 것은 참 참담한 일이지요.
  자기의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폭력적으로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살아야 합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마치 스타린 체제 하에서 우리나라에 간도나 이런 데 있었던 고려인들이 기차에 태워져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 끌려 가다가 내리라고 해서 내렸더니 중앙아시아 허허 벌판에 탁 내려놓지요.
  그것도 겨울에 그러니까 죽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이 포로민들의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이 바벨론에 포로민들에게 좋은 땅을 주겠어요. 너희들 먼대서 왔으니 좋은 땅에 살아라 그럴리가 없지 않아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화된 땅에 살게 하는 것이지요. 다행히 고마운 것이 공동체를 살 수 있도록 허용을 해 주었다는 것이어요.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화라고 하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파레스타인 땅에 사는 동안 아주 발전된 시각적인 문화 이런 것 발전시키지 못했어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이라고 하는 곳은 문화가 어마 어마하게 발달된 곳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제가 베르린에 있는 레르가몸 미술관에 들려서 앗시리아와 바벨론을 유물들을 보다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앗시리아 문에 있는 화려한 동물 문양들인데요 흙을 빚어 채색해서 구워낸 것인데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것이어요. 어떻게 이런 문화가 지금부터 2천 6백년전 문화가 그런 것이어요.
  오늘 살고있는 나도 보고 압도적이다고 느끼는데 자기 문화라고 할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처지야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번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요. 주전 606년에 여호와김 왕때 한번 잡혀 가고 그 다음에 주전 597년 여호야긴 때 잡혀가고 마지막에 주전 586년에 시드기야 때 세 차레에 걸쳐서 잡혀 갑니다.
  그래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나중에 고레스 측령에 의해서 돌아 오는 것도 세 번에 걸쳐서 귀환을 해요. 스룹바벨 총독과 더불어 돌아와요. 그래서 스룹바벨이 두 번째 성전을 짓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게 학사 에스라와 함께 오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느헤미야하고 함께 오는 귀환이어요.
  세 번에 걸친 귀환이 있는데 오늘 이야기는 귀환 이야기가 아니고 그 땅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에 살던 사람들 우리가 살면서 고단한 일 만나지만 우리가 희망이 있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오늘을 견디어 낼 수 있거든요.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지요. 이것이 문제인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희망이 별로 없었어요. 왜냐하면 강성한 이 나라가 망할 것 같지 않은 것이야 바벨론이 그들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어요. 하찮게 여겨집니다. 상황이 변할 것같은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에 중심 하나는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비록 우리를 패배하도록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 살아 계시다면 그리고 예루살렘이 제대로 서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돌아갈 것이다 그 희망 그야말로 실날같은 희망하나 붙들고 가는 것이야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큰 죄가 무엇인지 아세요 사람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간 죄가 게 제일 큰 죄야 너 희망 없어하는 것이야  너는 앞날이 캄캄해 이렇게 하는 것 이것이 죄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를 잡혀가서 자기들 나름대로 공동생활을 영위했다고 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름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디아스포라라 해요. 이것은 여러분 디아스포라인데 이것이 유대인들의 공동생활을 하는 유대인의 공동체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일반 명사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일 조선인들도 디아스포라고 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화교들도 디아스포라고 할 수 있고 오늘 우리나라에 이주 노동자들이 그들이 함께 사니까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이 디아스포라인데 문제는 내가 우리 문화속에 이렇게 그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데 자기들끼리만 뭉치고 음식도 자기들끼리만 해 먹는 음식이 따로 있고 그리고 유별나게 자기들끼리만 있어요.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그러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이 미워 보이지요  그래서 디아스포라들은 미움을 받습니다. 때때로 그 문화 속에서 동화되기도 하고 그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고 탁 문을 닫고 지내는 것이지요
  때때로 문을 닫는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동화되지 않겠어라는 뜻이 우선은 있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자기 정체성의 위기가 그들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자부심 같은 것들이 있지요. 그래서 유대인 디아스 포라들은 미움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런 미움을 받습니다.  그게 이 시의 배경입니다.
1. 1~ 6 바벨론 강변에서 운 이유
  137: 1~ 6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에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 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의 재주를 잃으리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내 입 천장에 붙을 지로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우리가 낭만적으로 보면 팔자 좋아서 노래 불렀구나 할 수 있지만 우리 옛날 키타 치면서 조개 껍질 먹고 그녀의 목에 걸고 그런 상황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어요.
  강변이라고 하는 것은 메소포타미야 문명이 두 개의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지 않아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들이 물들이 범람하지요. 이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 강변 범람지에 살고 있었어요.
  이들이 주로 살았던 것이 범람지에 살고 있었어요.  홍수가 나면 지금 여기서 이야기 하는 강변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어요. 참담한 것이야 지금 그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알겠지요. 큰 물이 쓸고 지나갔어 그러니까 언제나 우리가 이 삶으로부터 지긋 지긋한 삶에서 벗어나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그 날이 올까 그렇지요.
  그런데 여러분
  2 그 중에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우리가 바벨론 강변에 버드나무하면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쩻던 버드나무하면 보통 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어 있지요. 버드나무는 느낌이 있지 않아요
  버들도 수양버들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지만 버드나무는 이렇게 쳐 지지 않아요. 힘이 없어 보여요. 머리를 늘어 뜨리는 여인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여인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요. 그러니까 기가 막힌 것이어요.
  버드나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 수금을 걸어놓았다  왜 걸어 놓았느냐 하면 언제라도 꺼내 가지고 치기 위해서 걸어 놓은 것이 아니고
  3 이는 우리를 사로 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자기 중에 하나가 시온의 노래를 하라 함이로다.
  3절을 잘 이해를 해야 하는 데 적들이 이 바벨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노래를 좀 들려 달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야기이냐 하면 정규씨 노래 하나 불러줘 이것하고 달라요. 비아냥이 섞인 것이어요.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대게 어떤 노래들이지요? 이스라엘의 노래는 찬양이지요. 그러니까 너희 하나님 믿는다면 한번 그 노래 불러봐 이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야기입니까? 이런 이야기이지요.
  고대 세계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신들의 싸움이어요. 그러니까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혀갔다고 하는 것은 바벨론 사람들이 보기에는 자기들이 믿고 있었던 주신 그들이 믿었던 것은 마르둑이라고 하는 신인데 태양의 수 송아지라는 뜻의 신이다.
  그 신과 야훼 하나님이 있는데 누가 이겼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생각할 때 패배한 것이어요. 여기서는 그러니까  야훼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 보라지 그것이지요. 이것이 얼마나 모멸감을 느껴주는 노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표현이 나오는가 하면 우리를 사로 잡은자가 우리를 황폐케 하는자가 자기들을 위하여 노래를 불러요. 하나님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을 위하여 노래를 불러 보라는 것이어요. 시온의 노래를 불러보래요.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래라고 하는 것은 대게 이스라엘에는 노래가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수금을 타면서 부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위하여 부르라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들을 위하여 적대자들을 위하여 패배한 자들이 승리한 자를 위하여 노래를 부르래 이것은 모멸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기가 막힌 상황을 노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것은 그 무기력을 일깨우기 위해서요. 너희들은 이미 패배한 것이야 여러분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재판을 받지요.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하두 민중들을 선동하고 설득하고 그러자 결국은 내 주지요.
  예수님을 넘겨줍니다.  그 때에 군인들이 무엇을 했느냐하면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에게 홍포를 씌우고 이 홍포는 군인들이 입던 투닉 같은 것이어요. 이렇게 씌었어요 손에다가 갈대 지팡이 같은 것 들려줍니다.
  무엇이어요. 왕이지요. 면류관 쓰고 홍포 입고 붉은 색 면류관을 썼어요. 어떻게 합니까? 침 뱉고 머리를 때리고 조롱하지요.  여러분 수난 이야기 가운데 제일 아픈 것이 그 대목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속에 아이러니가 있어요.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가 자기를 지배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 드릴 수 없는 자들이지 않아요. 그런데 그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이 예수를 넘겨주었을 때 그 군인들이 조롱하고 있는 것이 예수가 아니라 예수로 상징되고 있는 유대입니다.
  유대 너희가 왕이라고 하는 유대인의 왕 아무것도 아니지아니야 조롱하지 않아요  이것이 기가 막힌 이야기다고 하는 데  여기에서  그들의 무기력을 일깨우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그들의 정체성의 존엄함을 빼앗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기들은 그 노래 차마 부를 수 없기 때문에
  2절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만해 하용운 님의 시 가운데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가 있어요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니 보다 나를 위함보다 당신을 위함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여기 나오는데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우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라고 말하였습니다.
  기가 막히지요 그리고 그 다음 이렇게 나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거지는 인격이 없어 거지는 인격이 없데요.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도 없고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야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모독을 당한 것이지요.
  눈물을 흘렸어요. 기가 막혀요 쏟아지는 눈물 속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자 그 다음을 보세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요즘으로 이야기 하면 호적등본 백성으로서의 적이 없다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려는 찰라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뒤에 나오는 부분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알겠는데  기가 막힌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서 당신을 보는 그 때가 언제인가 했더니 내가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때가 아니어요. 인생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때에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 지는 그 때에 당신을 본 것이야   남에게 대한 격분이 나에 대한 슬픔으로 화하는 찰라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것이지요.  윤동주가 팔복이라는 시에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8번 이야기 한다고요. 그리고 연을 바꾸어 가지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야 그렇게 말해요.
  그러면 슬픔이 복이야 이런 장면입니다. 결국 그 슬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의 세계를 본 것이야 그래서 여러분 아까 우리 이야기 시작할 때 무엇이라고 이야기 했는가 하면 그늘이 없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고 이야기 했지요.
  슬픔을 알지 못하는 존재는 기쁨이 없는 것이야  너희들 하나님 노래한다고 하는 시온의 노래 불러봐 이렇게 했지 않아요.
  이게 한용운이 이야기 했던 그 상황과 같지 않아요.  장군이 능욕하려는 상황과 같지 않아요.
  그 때 4절에서 시인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합니다. 어찌 이방 땅에서 저들에게 잘 보이려고 그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 찬양하는 그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이것이 기가 막힌 이야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5절에 말합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 진대 내 오른 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라고 합니다. 내 재주 수금을 탈런지 무엇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예루살렘 내가 너를 잊는다면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자 예루살렘은  처음부터 이야기를 모든 게 파괴되었어 희망이 없어 그들에게 실날같은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이야 그래서 여러분 다니엘도 어떻게 했습니까? 하루에 세번씩 자기 집 옥상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에서 그 곳을 바라보고 기도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주체적으로 구성이 되는 것이야 희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애써서 희망을 내가 만들어 가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야  여러분 희망을 만들 수 있는 건더기 그들에게 예루살렘이 있어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이곳이 성전이 있는 곳이고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곳이어요  그러니까 결국 이것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릴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요.
  시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5절 내가 예루살렘을 잊는다고 한다면 내 손에 재주가 사라지기를 내 오른 손이 그들을 잊을지어다.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한다해도 그 예루살렘은 여전히 희망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기가 막히지요. 우리가 제일 슬픈 것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부모님이 년노하시고 병드시고 또 어떤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도 가물거리고 그렇지요.
  그렇게 늙어가시는 모습을 보면 참 슬프지요.  슬퍼요. 옛날에 보았던 영화가 기억이 나는대 아이리스라는 영화입니다. 아이리스 머독이라고 하는 영국의 작가가 있어요. 소설가인데 아주 위대한 소설가입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그분의 실화를 다룬 영화이지요.  이 작가가 어느 날 발츠 하이머 병이 찾아와요. 우리가 치매라고 하는 방송국에 대담을 하는 데 말을 정말 잘 하는 분인데 말이 막혀 왜 이러지 어쩧던 촬영 마치고 돌아와서 집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퍼프렉스트라는 단어를 쓰는데 스펠링이 틀린 것이야  긁고 긁고 다시 쓰고  그런데 당황해요.
  창 밖에서 개 울음소리가 들려 컹컹 내다보기도 하고 이상하게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해요. 그래서 발츠 하이머가 진행이 되는 것이어요. 그래서 대학 교수인 남편이 아내를 돌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가 살고 있는 바닷가에 마음에 가 가지고 옛날 별장에 있는 곳에 데리고 갑니다.
  거기 가 있는데 작가니까 아이러스 머덕이 작가니까 글 쓰는 종이를 들고 바닷가에 이렇게 앉아서 쳐다보고 있어요. 무언가 떠 올리기를 기다리지  그러다가 종이 한 장을 놓고 그 위에다가 조약돌을 놓고 종이 한 장을 놓고 조약돌을 놓고 이렇게 쭉 해요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데 그렇게 해요.  바람이 불어가지고 조약돌이 움직이고 이 종이가 팔랑 팔랑 날라가 그 광경이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영화 아이러스 중에서 내가 붙잡고 싶은 대 붙잡을 수 없는 것이야 이게 가물 가물 사라져 가는 것이지요.
  어른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 그것이지 않아요. 내가 붙잡고 싶은데 내 기억이 그렇게 사라지면 어떻게 할까 그런 부모님이라고 해도 계신것과 그분이 계신다는 든든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 분이 계신다는 자체가 힘들기도 하지만 그 분이 계시다는 자체가 어떤 든든함을 주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이 폐허로 변했어요. 성벽도 무너지고 성문에 불이 탔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루살렘 내가 돌아갈 수 있어요.
  하나님이 돌아가게 해 줄 것이야 기억이 가물거리는 어머니 아버지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6절에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 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 하지 아니할 진데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
  이것이 5절에 이어지는 이야기이지요.  내가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을 잊는다면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 한다면 내가 내 입 천장에 붙을 지어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애써 희망을 자기 속에 북돋는 것이어야 나는 잊지 않을 것이야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빅터 프랭클 (1905 ~ 1997)이라고하는  오스트리아에 정신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아이스치 나치 수용소에 잡혀 있었어요.
  수용소에 들어가는 오른 쪽 왼 쪽 한 방향은 개스실로 들어가서 용광로 속에서 태워지는 것이야 한쪽은 강제 노동을 하는 것이야 살아남아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잡혀가는 그날 가족들은 죽었어요.  아내와 아이들은 이 빅터 프랭클이 아내와 아이들이 죽은지 몰라 강제 노역을 하는데 힘들지 않아요. 먹지도 못하고 노동을 하는데 그러다가 빅터 프랭클이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애를 많이 쓸수록 내 가족들이 평안해 지기를 마음속에 가져요. 힘들게 노동할수록 내 가족이 평안할 것이야 생각하고 노동하니까 이 힘겨운 사람은 어떨 때 사느냐 하면 의미가 있을 때 삽니다.
  그가 이야기 했던 것이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
  그래서 그가 이야기 했던 것은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에 나중에 정신이 이상이 있는 사람들을 고칠 때 어떤 방식으로 로고 테라피라고 하는 데 로고스는 말씀이기도 하는 데요. 그에게 의미를 되찾게 해 주면 그가 치유되더라 그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폐허로 되어 있는 그 땅 이 바벨론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그들이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 예루살렘이야 나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잊지 않을 것이야
  6 내가 예루살렘을 잊는다든지 예루살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기가 막힌 희망이지요. 아슬 아슬한 희망이 있는 것을 압니다.
2. 7~ 9 바벨론 강변에 대한 보응을 기원함
  7~ 9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버리라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내 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7절에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이것은 어떤 이야기냐 하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침입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에 동남쪽에 있었던 에돔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오래동안 적대 관계이기는 했지만 이 나라가 강대국의 침입을 받는 것을 보니까 좋은 것이야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에돔이 이스라엘에 변경을 쳐들어 옵니다.
  그러니까 가장 고통스러울 때 더 고통을 주었던 것이 에돔이다 그러니 그들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고 그들을 쳐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더 일어설 수 없도록 그 기초부터 허물어 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어요.
  에돔 뿐만 아니라 8절에 멸망할 딸 바벨론아 복이 있으리로다 그렇게 말합니다.
  바벨론이 약자들에게 보였던 적의와 폭력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것이야 이 사람들은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는 불편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느데 어떻게 그대로 돌려주라고 하나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어요. 성경에서 지워요 어떻게 해야 되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말만 가려서 하면 기도가 안 되어요.
  하나님께 드려내야 하는 것은  나의 추하고 난폭하고 못난 마음까지 하나님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게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9절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내어 치는 자는 복이 있다. 고대세계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애가 나중에 커서 보복할런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 까지도 보복하는 것이지요. 잔인한 세계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 마음 속에 미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했지요. 이것을 노래라고 이야기 했지요. 희환한 것이 내 마음속에 무거운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누군가에 이야기 해놓고 나면 조금 마음이 시원해질 때가 있지요.
  그래서 이 노래는 사람들끼리 그 녀석 어떻게 해 버리고 싶어 이야기 하면 우리 속에 적대감이 증폭이 되어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게 솔직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 시켜요.
  그래서 어떤 분은 이야기 했어요.  시편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야 된다 하나님 앞에 우리 그대로 드러내게될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을 씻어 주기 시작한 것이이어요. 이것이 하나의 희망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쩼던 우리가  시편137편을 보았는데요. 고대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까 이야기 한 대로 북해도로 끌려갔던 우리 선조들 그런 마음이 아니었겠어요.
  우리 정신대의 할머니들 정부로 위안부로 그분들의 한도 이 노래로 읽을 수 있지 않아요. 그 아픔을 이해한다면 땅의 디아스포라를 우리가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것 이 시가 우리들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우리가 불러야 하는 노래는 그런 조화의 노래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조롱하거나 멸시 하지않고 그들이 자기의 몫을 살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지지요. 기가 막힌 시였지요.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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