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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온달장군은 정말 '바보'였을까?
단양 온달공원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를 다시보다
2011년 07월 18일 (월) 11:08:29 이승철 시인 seung812@hanmail.net

 
 
▲ 온달장군상
 
ⓒ 이승철
 
구인사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부마이며, 그 유명한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의 유적지인 온달공원을 찾았다. 국도 옆에 위치한 공원은 소백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남한강 상류 하천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유적지라기보다 유원지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일단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 평강공주의 상이 새겨진 동굴형 좌대 위에 세워진 온달장군상이 강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옛 고구려 장군의 멋진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공원 안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기괴한 모양의 장승들을 모아 세워 놓은 장승공원도 보인다. 그 중에는 온달장군 장승과 평강공주 장승도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움푹 들어간 바위 위에는 손톱부위가 밑으로 세워진 사람의 손가락 모양도 보인다. 온달 장군이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손가락으로 바위를 꾹 누르면 움푹 들어갔었다는 좀 희화적인 상징물인 셈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어린이들은 우와! 하고 감탄을 하기도 한다.

온달관에는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에 대한 이야기들이 약간의 유물들과 함께 그림과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신라와 격전을 벌였다고 전하는 온달산성의 모형도 전시되어 있어서 산성에 직접 오르지 않고도 산성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온달산성 바로 아래 평강공주가 죽은 온달을 그리며 살다가 죽었다는 길이 800m의 온달동굴로 가는 길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붉은 용이 꿈틀거리듯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져 잇어서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 공원 안에 만들어 놓은 거대한 모조 용
 
ⓒ 이승철
 
"그런데 온달장군이 원래 바보였다는데 그 말이 맞는 말일까? 어떻게 바보가 장군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다 전설로 꾸며낸 말이겠지?"

일행 중 한 명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의문을 제기 한다. 우리들은 대개 고구려사에서 재미있는 얘깃거리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라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 한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은 사람이 아무려면 바보였을까? 하는 의문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바보 온달, 정말 바보였을까

 
▲ 뒷산 봉우리의 둥그스럼한 부분이 온달산성
 
ⓒ 이승철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가르쳐 훌륭한 장수로 키웠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이야기가 아닌 다른 시각으로 한번 되짚어보자. 평강공주의 아버지인 평원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의 왕권은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21대 문자명왕 때까지 고구려의 왕권은 강력했다.

그러나 문자명왕 다음에 즉위한 안장왕이 왕권다툼에 의하여 피살됨에 따라 고구려의 왕권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안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23대 안원왕마저 일찍 죽게 되자 왕실은 왕위를 놓고 전왕의 둘째부인인 녹군과 셋째부인인 세군이 자기 자식을 왕으로 세우려고 각기 사병 2천여 명 씩을 일으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결국 둘째부인이 승리함으로써 녹군의 아들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평강공주의 할아버지인 양원왕이다. 양원왕이 즉위했을 때 왕권은 형편없이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있었다. 평원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도 왕권은 역시 약했다.

 
▲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장승
 
ⓒ 이승철
 
평원왕은 귀족들에 의하여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기를 지지해줄 기반을 평민들 중에서 찾았고 그것이 무사양병이었다. 그 한 방편으로 평원왕은 자기 딸을 평민출신인 온달에게 시집보내 온달을 일약 뛰어난 장수로 키운 것이다. 온달을 계기로 하여 많은 평민무사들을 양성함으로써 왕권강화를 도모했다는 말이다.

온달장군이 바보였었다는 설화는 결국 그 시대 귀족이 아닌 평민출신의 사회적 시각을 드러낸 한 단면이라는 말이다. 귀족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평민의 지위나 삶이야 오죽 초라하고 바보처럼 보였을 것인가. 그는 특별한 바보가 아니라 평범한 평민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평범한 사람을 이야기의 극적 요소를 높이기 위하여 바보로 만든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이 아닌가.

평원왕, 왕권 강화를 위해 '온달'같은 무사 양병

온달동굴 안으로 들어서니 온몸이 서늘해진다. 상당히 무더운 날씨인데 굴 안의 온도는 섭씨 16도라고 하였다. 천연기념물 261호로 지정된 온달굴은 남굴 또는 성산굴이라고도 불렸었다고 한다.

4억5천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온달굴은 총 길이 800여m의 주굴과 5개의 갈래굴에 종유석과 석순이 상당히 많았다. 통로가 엎드리거나 때로는 기어 다녀야 할 만큼 낮고 비좁은 곳도 있지만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동굴이었다.

용, 망부석, 부부상, 만물상, 코끼리상, 온달과 평강공주상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모습들로 형성된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입구에서부터 돌아 나올 때까지 눈길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30여분 동안 굴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니 밖의 날씨는 여전히 후덥지근하다.

 
▲ 온달동굴의 종유석 1
 
ⓒ 이승철
 
온달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길이다. 일행들은 전날의 신선봉 등산에 따른 피로와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산성에 오르기를 포기한다. 산성 아래 산자락을 휘감고 흐르는 남한강은 상당히 많은 물이 흐르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쉬며 바라보는 온달산성은 그리 높아보이지는 않았지만 옅은 구름에 휩싸여 희미한 모습이다. 온달장군은 정말 저 산성에서 신라군을 맞아 싸우다가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을까? 온달장군이 죽은 장소는 이곳 온달산성과 함께 서울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성이라는 설로 나뉘어져 있다.

역시 삼국사기에는 온달의 최후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온달장군의 고구려군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온달장군은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퇴각하다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아단성이 어디인가다. 서울의 아차산성이라는 설은 역사학자 이병도와 실학자 정약용 등이 주장하여 아차산성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워커힐 호텔 뒤 아차산성에 오르면 온달이 숨을 거둔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온달샘과 석탑, 온달장군의 주먹바위라는 것도 있다.

또 온달장군이 전사할 당시의 고구려의 왕은 영양왕인데 이 영양왕 때 신라와 싸운 곳은 북한산성 한 곳 뿐이라는 것이다. 북한산성을 빼앗길까봐 신라의 진평왕은 1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고구려 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 온달관의 온달산성 모형
 
ⓒ 이승철
 
이때 싸움에서 패한 고구려의 장군은 고승장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신라의 북한산성은 지금의 아차산성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함께 편다. 삼국사기<온달전>에서 평강공주가 시집가기로 결정된 집안은 고씨 집안이었다고 하니, 바로 아차산성에서 전사한 고승 장군이 온달장군이라는 설이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전해오는 단양 온달공원

또 다른 설에는 고구려 평원왕의 뒤를 이어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장군은 신라에 빼앗긴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을 되찾기 위하여 출전한다. 온달이 죽령 북쪽인 단양의 영춘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 서기 590년의 일.

그러나 서울의 아차산성은 온달이 회복하겠다던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 땅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에 비하면 이 온달산성에서는 죽령이 지도 상의 직선거리로 18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계립현은 지금의 하늘재로서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석불입상이 있는 뒷산 고갯길로 죽령에서 직선거리로 30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 온달산성이야말로 온달장군이 최후를 맞은 곳이라고 주장하는 설의 근거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곳에서 전사한 온달장군을 장사지내려 하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달려온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그만 돌아갑시다"라고 달래자 그때서야 관을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온달장군의 본래 모습과 전사한 장소는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고구려의 유적들은 대부분 북한지역에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한 땅에서는 보기 드문 고구려 유적이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는 단양의 온달공원은 역사적 가치도 높은 곳이다.

 
▲ 온달동굴의 종유석 2
 
ⓒ 이승철
 
그러나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탓인지 공원은 몇 년 전에 찾았을 때보다도 더 쓸쓸한 모습이었다. 역사적인 가치보다 유원지로서의 기능만 강조된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공원 근무자들의 적극적이고 친절한 근무 자세를 주문해 보고 싶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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