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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시절 이야기
2019년 06월 12일 (수) 05:59:12 김태복 목사 www.cry.or.kr
   
 
내년이면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지 50년이 된다. 장신대(長神大)에서는 졸업한 지 25주년 되는 해에서는 ’홈커밍데이‘를, 50주년이 되는 해에는 졸업생 부부들을 초청하여 ’희년 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내년 대회에는 우리 63기 동기회 차례가 된다. 동기회 총무를 맡은 입장에서 여러 재료를 수집하면서 장신대 시절을 많이 회상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대학생 때 나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 집안 형편상 서울로 진학할 입장이 못 되어 입학한 곳이 춘천농과대학이었다. 마지못해 강의를 청강하고 있었으나 뒷자리에 앉아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문학, 철학, 역사에 관한 책들을 설렵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낸 후에 학보병(學步兵)으로 입대했다. 학보병은 복무 기간(18개월)이 짧은 만큼 최전방에서 근무해야 했다.
 
1년 반 동안 화천 사창리와 임진강 변에서 복무하면서 분단된 조국과 아픔의 역사, 전쟁이 남긴 상처들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가졌다. 복학(復學) 후 군대의 체험을 중심으로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여기저기 투고하기 시작했다. 결과, ‘새생명’이라는 크리스천 잡지와 경북대학교 학보지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대로 문학 수업을 받지 못한 탓인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대학 4년 때, 3년 연상이던 형이 서울 양평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하숙집에서 연탄가스로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 비보(悲報)는 우리 가정에 큰 풍랑을 몰고 왔다. 형은 가정의 기둥이었고 자랑이었다.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한 형은 춘천방송국에서는 어린이 합창의 지도자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동요(童謠) 작가로서도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울 교사로 전임하면서 음악 활동의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하던 때였기 때문에 온 가족의 충격은 대단했다. 나는 신앙적으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저 어둑한 골짜기를 응시하며 죽음의 망령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대학을 졸업하자 장신대에 입학했다.
 
첫 예배에서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늘의 나팔소리인가, 주일학교 때부터 낡은 풍금에만 익숙해 있던 나에게 신학교 채플실을 가득 울리는 전자 오르간의 장엄한 음률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 오르간의 반주를 따라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라는 개회 송영을 부르면서 솟구치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어찌 그 음악 소리 때문만이겠는가?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에 대해 한껏 부푼 기대로 불타 있었다. 4년 동안 지루하기만 하던, 땅의 기초학문인 농학(農學)과는 달리 서울이라는 환경에서 하늘의 최고학문인 신학(神學)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을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에 되돌아보아도 장신대 3년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는 신학교 채플실과 침침한 기숙사 방, 도서관과 칠층 탑, 신학교 뒤편 숲을 배회하며 어두운 사색을 했고 때로 형을 먼저 데려간 하나님에 대해 항변이 담긴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메섹 도상에서 깨어졌고 나를 부르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떨면서 부르신 분께 나의 생(生)을 드리기로 약속했다. 그 순간, 문학에서 주던 창작의 희열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기쁨을 체험했다.
 
그 황금기에서 나는 세 번의 귀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2학년부터 농촌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하면서 만난 30여 명의 청소년이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들은 전기도 없는 낙후된 산골에서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불우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가며 그들을 교육했다. 그들에 대한 나의 꿈은 그들이 상록수가 되어 농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만남은 일생 반려자로 함께 해준 아내였다. 같은 교회, 같은 대학에서 만난 사이였다. 그 가난했던 시골교회 8년, 청계천 변 홍익교회 32년, 은퇴 후 10년 등 50년 동안을 동고동락해준 목회 동역자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만남은 신학교에서 만난 동기들이었다. 나이 차이는 컸으나 각 대학교와 지방신학교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로 신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심한 열등의식 탓인지 모였다 하면 술에 취해 음담패설로 소일하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희롱하기 일수이고 막판에는 싸움질로 끝내고는 하던 저질스러운 행태를 보이던 지방대학 친구들과는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소명감을 가지고 신앙과 학문을 향해 전념하는 신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와 식당, 채플실과 도서관에서 함께 토론하고 함께 기도하던 3년의 삶은 너무나 보석 같은 날들이었다.
 
그 3년 동안 또 하나 빛나던 추억은 신학교 학보(神學春秋)에 대한 것으로, 1학년 때 기자로 들어가서 마지막에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를 향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많은 분이 그 글에 감동을 받았다는 격려를 받으면서 소설가의 꿈은 슬그머니 접었다. 격월(隔月)로 2,000부씩 발간했다. 명동 어느 경제 신문사에서 인쇄한 후 초교(初校)를 마친 학보지를 읽으며 흥분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우리 장신대 63기들은 1970년 2월 26일(목) 73명이 졸업하였다. 62기생들이 신학교 교수가 많고 64기들은 특수 선교에서 많이 활동하는 것과 달리 우리 63기 동기들은 거의 일반 목회에 전념한 것이 특징이다. 1995년 통계에 의하면 서울 20명, 경기도 4명, 인천 3명, 충북 3명, 충남 4명, 광주 3명, 전북 11명, 전남 4명, 대구 3명, 경북 2명, 부산 7명, 경남 2명, 제주 2명, 해외 8명이 목회를 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 골고루 배치되어 목회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평가하기를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 우리 동기들은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 동기가 한 교회에서 장기목회를 하므로 원로목사가 많고, 노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한 결과 노회장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아울러 총회 활동도 대단하여 많은 부장과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정식 목사가 85대 총회장을 역임했고, 총회장 후보였던 동기들도 이만규, 정길재, 정현성, 주연도 목사 등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손인웅 목사는 한국목회자협의회 대표와 실천신학대학교 총장을, 장영출 목사는 군군종감을, 변희관 목사는 세계로선교회 회장을, 이경춘 목사는 총회전도부 총무를, 김홍규 목사는 한국찬송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해외에서도 김대균 목사는 미국 장로교 전국 한인교회협의회 총회장을, 최양선 목사는 미주장신대 학장을 역임했고, 남제현 목사는 태안 벧엘요양원 원장에 재직 중이다. 그 외 교수(정기덕), 교목(황청일), 부흥사(김원복, 장균철) 선교사(박무수, 이순각, 서성주) 등으로 크게 활동했다. 은퇴한 후 지금도 백종대 목사는 캄보디아에서, 박 황 목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 은퇴한 동기들의 목회나 선교 활동은 적지 않을 것이나 미처 파악하지 못하므로 여기 기록에 남기지 못한 것은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다. 이런 분들과 3년을 함께 수학하고 일생 친구로서 살아가고 있음에 자랑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이제는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므로 30여 명이 소천했고 국내 38명, 국외 6명이 남아 있는데 건강이 약한 분들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먼저 소천한 동기생들에 대한 아쉬움이 크지만, 그들 중에 1941년생인 내 또래가 많다는 점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동익, 윤덕수, 권정석, 박정식, 이동성, 황문선, 정기덕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내 또래들이 먼저 죽음의 강을 건너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죽음이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주변에 가까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실감하고는 했었다
 
내가 형의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아직도 죽음 저 넘어 세계에 대해서는 성경이 언급한 말씀 외에는 거의 희미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더 이상 동기들이 소천하기 전에, 더 몸이 약하여 거동이 불편하기 전에, 이번 희년 대회에 모두 동참하도록 권유하여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목회 열정에 불탔던 신학교 시절 이야기와 목회 시절 이야기로 꽃피우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더 강하게 되었다.
 
“주여, 모든 동기들 부부에게 건강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희년대회에 참석함으로 마지막 우정의 교제를 꽃피움으로 온갖 수고로 넘쳤던 목회 50년에 대해 큰 위로를 받는 시간이 되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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