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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목사와 삯꾼(1)
2022년 07월 09일 (토) 16:20:35 김태복 목사 www.cry.or.kr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5~26)
 
목사, 너 탓이다
 
오늘 한국교회 환경은 목사의 공해(公害)로 오염되고 있다. 목사라는 자들이 내뿜는 독한 가스로 인해서 교회는 질식할 것 같은 상태가 되고 있다. 고장 난 차량들이 용케도 들썩거리며, 아니 울리는 꽹과리 꼴이 되어 요란한 소음(騷音)과 매연(煤煙)을 풍기며 돌아다니므로 이제 그 위험도가 넘어선 지 오래다. 고장 난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
너무나 날뛴다.
「서울 예수」라는 책자에는 1983년 7월 7일 중앙일보에 게재한 김윤숙 씨의 글이 소개되고 있다.
 
<건강하면서도 인삼 녹용을 복용하는 목사, 사우나탕의 안마가 취미인 목사, 교회 사택을 마다하고 맨션아파트를 찾는 목사, 사채놀이를 즐기는 사모, 성지순례란 명목으로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즐기는 목사, 자가용·전화·주택 유지비를 교회 재정에 떠미는 목사, 성경 본문 전체는 안 생각하고 한 구절만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 인간성까지 율법에 묶어 버리는 목사, 신앙의 척도를 돈의 액수에 비례시키며 부정한 돈이라도 많이만 내면 믿음이 강한 양 광고 시간에 누누이 추켜세우는 목사, 교인들이 입만 뻥끗하면 종을 핍박하고 눈물 흘리게 한다고 강대상에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 목사, 돈 봉투 없으면 안수기도를 안 해주는 목사, 기도원 곳곳에 매표소를 두고 입장료를 받는 목사들도 있다. 주님께서는 돈 받고 치료해 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안 믿는 이에게 전도를 해보면 첫 마디가 돈이 없어서 교회에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것이다. 누가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위의 글은 가정주부인 평신도의 글이다.
그 글을 읽으면 필자에게 해당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혹 필자에게 해당 사항이 안 되어 보이는 것도 다만 정도의 차이 뿐, 50보, 100보의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초장부터 이러한 글을 쓸 의욕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투의 글일수록 자신은 세례 요한의 위치쯤 있고, 독자는 '독사의 자식들'의 위치에 있어야 조자룡 칼춤 추듯이 신이 나는 법인데, 먼저 자신부터 꿀리는 구석이 많으니 글 쓸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너 살고, 나 살기 위해 여리고 도상의 바디매오나 열 문둥이처럼 외치기는 해야 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어느 날, 비판 의식이 높아진 평신도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목회자 '무용론(無用論)'을 들고 나와 본격적으로 배척 운동을 돌리고 자기들이 무보수로 설교하고 행정 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목회자 스스로가 자기를 매질해 보는 것이 훨씬 속 편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우리 목회자들이 자성(自省)의 소리를 내지 못하면, 돌들을 통해서라도 소리 지르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평신도들로 하여금 한없이 순복하기만 하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판의 소리를 외치게 하실지 어찌 알겠는가?
 
목사는 다섯 달란트의 중책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의 책임은커녕, 한 달란트의 효과도 못 내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 때문이다. 이렇게 회칠한 무덤 꼴이 되어 버린 책임의 대부분이 목사 너, 목사 나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오늘은 그 90% 이상이 한국교회 지도자들, 즉 목사들의 책임이다. 한국교회의 위신을 떨어뜨린 자도 목사요,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자도 교직자들이다.>
(조향록:「한국교회의 딜렘마」기독교사상 62년 3월호)
 
예수께서 처음 유리하는 자기 백성들 앞에 섰을 때, 누구를 향해 제일 먼저 ‘화 있을진저.’라고 꾸짖으셨는가? 몸을 파는 창기였는가? 로마의 앞잡이 세리였는가? 38년 동안 지지리 못나게 누워 있던 무기력한 중풍 병자였는가? 아니다. 내노라 하던 종교가들을 공박하셨다.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율법을 지키노라 힘쓰고 구제와 금식에 애쓰던 종교가들이었다.
 
왜인가? 뻔하지 않은가?
백성들이 유리방황하게 하던 그 근본 이유가 압제자(壓制者)들에 의한 것보다 종교가들 때문이었다. 자기들이 제조한 율법의 사슬로 묶은 채 위선의 손으로, 거룩을 도금한 손으로 백성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잠시 창칼로 위협하는 로마 압제자들과 싸우기보다 영원을 가로막고 있던 종교가들의 위선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싸우셨고 고난을 당하셨다.
문제의 책임은 정치가 아니다. 경제의 부강(富强)도 아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공해도 아니다. 영원한 정신을 책임진 종교인들, 바로 너, 목사에게 있다. 여기 바로 나에게 있다.「한국교회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책자에서 김준곤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대로 교회의 타락은 목회자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도덕성이란 것은 전염병처럼 오염이 됩니다. 교회의 도덕적 체험을 볼 때, 한 10년 목회를 하면 모두 목사를 닮아서 신비주의적인 은사 같은 것도 사모하기도 하지만,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면이 완전히 동화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제 친구 중에 아주 수도사적인 위치에서 목회 하는 분이 있는데 교인들의 숫자는 적지만, 얼마나 교인들의 생활이 목사를 쫓아가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 출석하는 교사 한 분이 회계를 보는데 저에게 상담을 하러 왔어요. 교회 예산 집행 시 부정이 많은데 목사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지적하면 장로들이 다 목사님을 편들고 나선다는 것이에요.
또 어떤 교인이 와서는 목사가 미국에서 명예박사를 받는다고 야단인데 그것을 보고 괴로움을 느껴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하는 일도 있었어요. 또 교권 싸움을 하는데 목사가 가장 싸움 잘하는 패거리를 몰고 와서는 당회니 제직회니 모두 위협을 하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교인도 보았어요.>
 
아마, 이러한 비난을 받는 목회자는 나름대로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는지 모르며, 하고 싶은 변명이 대단히 많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는 이유야 여하튼 이러한 비난을 만난 것은 ‘나의 부덕한 탓’'임을 고백하는 것이 성경적인 자세이다. 요나는 니느웨를 피해서 다시스로 가게 된 동기에 대해서 얼마든지 논지(論旨)를 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변명하지 않고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나의 연고라.’고 자복했고,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신 회개했다 (느 1:6).
 
여하튼 교회를 말씀으로 가르치고 다스리는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다면 교회가 잘못된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자세이다. 우리 한국 목회자들이 바르지 못했기에 한국교회는 이처럼 한국 사회 앞에 제 구실을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것이라는 고백이 선행될 때만이 한국교회는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물질욕, 과시욕, 명예욕의 공해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너나없이 욕심에 매여 지내는 것 같다. 목회자들의 모임에 가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대화 내용이 너무나 비성경적이다. 큰 교회 만들기, 목회자 권위 세우기, 사례금, 자가용, 박사 학위 취득, 해외여행, 건강, 사우나와 골프, 노회와 총회의 정치, 정부에 대한 비판 등, 물질욕과 명예욕으로 압축되기가 일쑤이다. 경건과 영성(靈性) 향상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그런 면에 성취를 이룬 자는 배를 내밀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전전긍긍하며 부러움과 불만으로 흥분을 나타내기 일쑤이다. 이 시대의 훌륭한 목사의 표준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부끄럽게도 많은 교인들과 큰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산이 풍부한 데 두고 있다는 데 있다. 교인 수가 500명이 넘어서야 겨우 대접을 받기 시작하고, 1,000명이 넘어서면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3,000명 이상이 넘어서면 신흥 재벌 흉내쯤 내는지 교만의 배를 내밀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눈에 거슬린다.
 
'야, 이놈아, 교인이 많은 것은 그만큼 달란트를 많이 남겼다는 증거로 칭찬받을 일이지, 왜 비난의 조건이 되는가?'라고 멱살을 잡을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옳은 말이다. 도시 교회에서 몇 년 가도 교인의 수가 그 모양, 그 꼴이라면 분명 그것은 책망받을 일이요,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땀 흘려 충성했다는 결과라면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큰 교회를 이룩한 후에 거들먹거리는 그 자세에 대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전력투구하여 큰 교회를 이룩했다 할지라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하는 것이 바른 자세임에도, 말끝마다 자기 공과를 내세우고, 쩍하면 작은 교회 목회자나 농촌 교회의 목회자를 하대(下待)하는 모습은 너무 볼 상이 사납다.
 
사실, ‘큰 교회를 이룩했다고 하나 그 교회가 땀 흘려 전도해서 거둔 열매가 과연 몇이냐?’고 묻고 싶다. 아파트 대단지, 몫이 좋은 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버스를 동원하여 교인 쟁탈전으로 끌어들인 고기가 아니냐? 아파트 단지에 개척 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의 탄식은 ‘대형 교회들이 버스를 동원하여 닥치는 대로 실어 가므로 겨우 일한만 한 교인들을 놓치게 되니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그게 전도냐, 교인 납치 강도지.
 
그러면 네 놈은 네가 비난하고 있는 것에서 예외자인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30대 나이에 농촌에서 희생적으로 목회할 때는 마치 아모스나 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필자 자신이 이제 목회 종반에 들어서서 스스로를 살펴보면 필자가 비판하던 사람들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한 부끄러움에 시달린다.
 
어느 목회자의 모임에 가서 누구와 인사를 나누면 ‘주일날 교인이 몇 명이 모이느냐?’라고 묻고 싶어서 목구멍이 근질거리고, 어느 교회의 주보를 보면 먼저 통계표부터 살피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만 못하면 은근히 경시한다. 우리 교회의 자랑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교회가 성장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고, 우리 교회가 돕는 농촌 교회의 목회자가 필자 앞에 와서 쩔쩔매는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슨 노회나 총회 모임에서 위원 한 자리라도 주면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지고, 누가 별 노력 없이 박사 학위라도 취득한 것을 보면 은근히 비판하지만, 필자 마음 한구석에는 ‘나도 어디 가서 적당히 받을 길 없을까?’ 하는 욕구가 웅크리고 있음을 보고 혼자 낯을 붉힌다. 언제부터 필자는 큰 봉급, 큰 대우, 큰 자리, 큰 칭찬에 이리도 연연하는 자로 전락되고 있는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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