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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018년 12월 15일 (토) 05:55:05 김태복 목사 webmaster@cry,or.kr

                 (요21:15-17)

오늘 58주년 창립주일에 교우 여러분들의 모습을 뵈니 너무나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날로 든든히 서가는 모습이 너무나 흐뭇합니다. 특별히 오늘 오전에는 오랜 세월 동안 젊음을 다 바쳐 충성해 오신 8분의 은퇴와 3분이 명예집사와 권사로 추대되고 오후에는 장로 2분, 안수집사 7분, 권사 14분, 취임 4분이 임직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택했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베드로의 사도 임직식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임직하시는 28분뿐 아니라 이미 중직이 되신 분들과 내년도에 여러 가지 직책을 맡을 교우들은 깊이 명심하여 들으셨으면 바랍니다. 우리가 많은 시간과 물질을 바쳐서 열심히 충성했지만,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음으로 주님으로부터 외면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충성을 해야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잘 배우면 그 대답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과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 일꾼들은 반드시 명심할 말씀은 교인들이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일꾼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양들을 잘 먹이고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은 무슨 계급장이나 훈장을 받는 것처럼 결코 우쭐거릴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목회자들이나 교회 일꾼들이 자기가 맡은 교회학교 학생들이나 각 기관이나 사랑방 교우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거나 내 것인 양 함부로 갑질함으로 실족케 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책망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제자들의 너무나 한심한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많은 날들이 흘렀으나 제자들은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에는 아주 놀라운 일들이 전개되리라는 기대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많은 날들이 흘러가도 주님은 바람처럼 나타나셨다가 다시 사라지실 뿐, 아무 역사, 아무 지시도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대단히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손을 드셨는가?’ ‘우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셨는가?’ 특별히 그 중에 가장 안절부절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성격이 급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마냥 허송할 수만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은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감히 나서서 “주여, 이제는 무엇을 하리이까? 명령만 하옵소서. 우리는 아골 골짜기, 빈들에라도 가겠나이다.”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성급하게 나섰다가는 참고 계시던 주님이 “시몬 베드로야, 네가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유월절 만찬 때에 네가 단호하게 나서서 ‘다 주를 버릴지언정 나만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뻔뻔스럽게 장담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내 입에 감히 담기도 싫은 말이지만 네가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자가 아니냐?”라고 하시면서 화를 내실 것 같아 너무 조마조마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번번이 나타나셨지만 베드로에게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다시 떠나가십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지치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완전히 자기를 단념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본문 3절에 나오는 대로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고향 바다에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 일 없이 시간만 보내던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따라 일어나서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제자들의 이름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또 다른 두 제자 등, 일곱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곳은 디베랴 바다였습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이제 영육이 완전히 지친 채 자기들의 고향과 일터로 낙향한 것입니다. 모든 고향 사람들은 이 실패하고 돌아온 베드로 일행들에 대해서 아마 냉소를 보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피하듯 바다에 나가서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집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매사가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지쳐 버린 채 밝아오는 새벽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닷가 언덕 위에서 누구인가 서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 분은 예수님이셨으나 저들은 새벽의 희뿌연 빛 탓인지, 아니면 주님이 여기까지 오시리라고 생각을 못 했는지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아마, 고기를 사려고 온 사람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고기가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따라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히어 그물을 들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순간 지혜가 많은 요한은 예전에 주님이 자기들을 부르실 때와 똑같은 방법임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의 심정은 절망 그대로였습니다. 3년 동안 열심히 주님을 따라 다녔으나 결과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 입장인 데다, 어젯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함으로 무력감에 휩싸이면서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이제는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라는 생각으로 차라리 이 바다에 풍덩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처럼 회복하고 싶어 하는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라”라는 말을 전달받는 순간, 베드로는 터질 듯한 감격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주저할 것도 없이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언덕을 향해 헤엄쳐 갑니다.

거리는 오십 간 쯤 됩니다. 약 100미터 되는 거리입니다. 새벽의 바다를 헤치며 주님을 향해 헤엄쳐 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갈망 그대로입니다. 물살을 휘젖는 그의 손은 기도 그 자체였습니다. ‘주여, 여기 큰 죄인이 다시금 주 앞에 나가오니 이 몸을 다시금 용납하시고 품꾼의 하나로도 써 주옵소서.’라는 강한 바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바로 베드로의 그 갈망, 그 안타까움, 그 불붙는 마음을 보시면서 속으로 울고 계셨을 것입니다. “오냐, 과연 너는 시몬이구나. 내가 너를 찾아올 때마다 네가 내 앞에 엎드려 회개하기를 기다렸는데 너는 죄가 너무 커서인지 눈치만 보고 있더구나. 그러나 이제야 네가 내게로 전심을 다해 달려오는구나.” 예수님의 가슴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눈물로 가득 차셨을 줄 압니다.

그리고 잔치를 배설하시듯이 숯불을 피우시고 음식을 마련하신 후에 지치고 피곤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큰소리로 “베드로야”라고 부르십니다. 그때에 베드로의 가슴은 얼마나 뛰기 시작했을까요? 이제는 본격적으로 책망하시겠구나.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의 입에서 난데없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아니, 책망은커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베드로는 울먹이며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명하십니다. 드디어 사명을 맡기십니다.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라는 큰 감격이 베드로의 마음에 가득찼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입니까? 주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내 사랑을 믿지 못하시는가? 베드로는 떨리는 음성으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다시금 사명을 확인해 주십니다.

자, 그런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베드로를 다시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너무나 근심이 되어 목맨 음성으로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과 당부를 하셨습니까?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 뜰 숯불 옆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밤에 잠이 오지를 않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어느 누구에게도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쓴 뿌리요 열등의식이었습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 같은 예식 행사가 없이 양떼만 맡기시고 승천하셨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겠습니까?

훗날 수제자로서 설교하려고 설 때마다 ‘나 같은 비겁자가 무슨 설교를 할 것인가?’라는 자책감으로 힘을 잃었을 것이요, 무슨 일을 할 때에 반대자들이 “당신 같은 배신자가 무슨 지도자로 나서는가?”라는 비난을 하므로 교회를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를 아시기 때문에 베드로의 쓴 뿌리요, 올무가 되는 그 사건을 모든 제자들 앞에서 사면을 선포해 주시고 동시에 수제자의 권위를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임직자 여러분들이여, 교회 일꾼 여러분이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l. 예수님은 양떼를 맡기시기 전에 먼저 최우선적인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들 보다’라는 것은 여기 있는 제자들, 여기 있는 친구들, 이 부근에 사는 아내와 자녀들, 부모나 친척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 보다’에 해당하는 말은 헬라어로 ‘풀레온 투톤’인데 이를 번역하면 ‘이것들 보다’라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이것들 보다’라는 말은 ‘네가 의지하고 있는 이 배나 그물이나 아니면, 너희 재산들보다’라는 뜻이 담기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베드로야, 너는 여기 있는 너의 친구들, 너의 동료들, 너의 식구들, 너의 재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즉, 최우선적인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질문하십니다.

“아무개야, 너는 너의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이나 재산들, 지위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는 단호하게 대답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이 모든 식구들이나 친구들, 이 모든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 고백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할 때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강대상에서 손을 높이 들고 “나는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라고 고백하고는 했는데 그 때마다 주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통해서 활로가 열리는 것을 체험하고는 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자기 외에는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라는 마음으로 주님께 최우선의 사랑은 드리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귀한 사랑을 주님께 드릴 때 바로 그러한 사람에게 귀한 직분을 맡기시는 것이요, 또한 우리 식구와 생명, 우리 건강과 재산도 다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부산에 사는 어느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 장로님은 1.4후퇴 때 자기의 아내와 같이 임진강을 건너 피난을 하려고 하는 데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다 부인이 어린 아기를 해산하려 하니 어찌할 수가 없어서 어떤 빈집에 들어갔는데 그날 밤 12시 쯤 누가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었더니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총을 겨냥하고 “손들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동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동무는 인민공화국이 좋은가, 대한민국이 좋은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장로님은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나 너무나 똑똑한 체하면 안 되겠으므로 “그저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호박 같은 세상에서 둥글둥글 살아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무는 회색분자구만”하더니 밖으로 끌고 나가 총살을 집행하려고 합니다.

그 광경을 방에 누워 있던 부인이 보니까 너무나 비참합니다. 밖이 너무 춥습니다. 그래서 벽에 걸린 남편의 저고리를 잡아당겨 전해 주려다 보니 주머니에서 회중 성경이 떨어졌습니다. 그걸 보더니 인민군이 “동무! 예수 믿소?”라고 묻습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되고 보니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사실은 교회 장로외다.”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인민군이 속에 입은 군복을 보이면서 “나는 인민군이 아니고 국방군 수색대원입니다. 진작 말씀하시지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부대에서 쌀도 갖다 주고 약품과 옷을 갖다 주어서 배불리 먹고 전쟁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고 간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임직받는 분들이여, 여러분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강하게 역사 하시는 삶을 체험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대답을 들으신 후에는 계속해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그 사랑을 갚을 길이 전혀 없습니다. 주님에게 최고급 음식점에서 갈비라도 사드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성탄절에 주님에게 선물을 드리려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을 지금 베드로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누구인가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린양이란 앞으로 베드로가 목회해야 될 신자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전혀 의지 가지가 없는 주님의 소자들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마25:31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고 벗은 자에게 입히고 갇힌 자를 돌아본 것이 곧 자기에게 대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인 주린 자, 벗은 자, 나그네 된 자, 갇힌 자, 병든 자를 외면하고 갑질이나 하면서 박대하는 것은 곧 자기를 외면하고 박대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여, 이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특별한 사랑이 필요한 자들인 주님의 어린양, 의지가지없는 주님의 소자들을 돌봐 주십시오. 대부분 많은 신자들은 주님에게 하고 싶은 사랑을 대신 목회자들에게 합니다. 특별한 대접도 하고 때가 되면 선물도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들보다 먼저 사랑이 필요한 분들은 주님의 어린양과 소자들입니다.

의지가지없는 거지 노인이 문 앞에 올 때에 박대하거나 추운 겨울에 육교 위에서 벌벌 떨고 구걸하는 거지나 노숙자들을 외면하면서도, 자기 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에게 갑질이나 하면서 목회자에게는 비싼 음식을 대접한다고 요란을 떤다면 주님이 잘했다고 하시겠습니까? 또한 우리 목회자들도 그런 사람의 대접은 결코 받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진정 주님을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맡기시는 어린양을 먹이고 돌보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의지가지없는 주님의 소자들이 굶주릴 때에 먹이고 헐벗을 때에 입히고 갇혔을 때에 돌아보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줌으로 주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주님이 맡기신 양떼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을 자기의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양이라는 동물은 아무 무기가 없습니다. 잘 뛰지도 못하고 사나운 이빨도 없습니다. 그나마 있는 뿔마저도 동그랗게 말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소의 뿔이 공격용인 반면 양의 뿔은 방어용입니다. 양의 유일한 무기는 목자를 잘 따르는 것입니다. 귀가 엄청나게 발달되어 자기 목자의 목소리만 듣고 따라갑니다.  

다른 목자가 명령하면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한10:3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목자의 음성에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냅니다. 목자들은 자기 양떼들을 뒤에서 몰기보다 앞장서서 인도해야 합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를 따라 어디든지 따라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뒤에 서서 교인들에게 지시하기 보다 앞장서서 인도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베드로도 벧전5:3에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베드로 사도 일지라도 말년에 다시 한번 주님을 배신할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A.D 64년 로마시에서 발생한 대화재의 범인으로 네로 황제는 기독교 신자들을 지목하고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한테 물어 뜯겨 죽이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화형식을 자행했습니다.

이때 신도들은 베드로 사도마져 처형당하면 기독교가 무너진다면서 속히 피신하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런 권유를 따라 로마를 등지고 베드로는 부지런히 도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로마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손을 쳐들며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버린 내 양들을 위해 내가 또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올라가노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회개하고 로마로 되돌아가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주님과 똑같은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박힌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결국 베드로 사도의 이러한 본을 따라  모든 성도들이 담대하게 순교의 자리에 들어가므로 마침내 그 잔인한 로마가 복음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가장 명심할 것은 양무리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백 마디의 교훈보다 한 번의 본이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우리 지도자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언제가 말씀드린 예화를 소개하면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주미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김명배란 젊은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고 즉시 서울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을 끝냈습니다. 의사인 큰형이나 사업가인 둘째 형은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례식 후, 가족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큰 형이 “어머님이 남기신 재산은 외무 공무원으로 제일 어렵게 사는 막내에게 주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둘째 형이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하면서 찬성을 표시했습니다. 그러자 셋째인 막내가 나서서 “형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재산은 당연히 장자이신 큰형이 맡든지 아니면 사업가신 둘째 형님이 맡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사실 제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큰형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머님이 평생에 보시던 성경책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큰형은 “그것은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당연히 장자에게 가져야지.”라고 했습니다. 둘째도 “사실, 저도 성경책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막내는 “두 형님들은 언제나 어머님이 묻혀 계신 고국 땅에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언제나 해외로 떠도는 몸이니 어머님을 모시고 다니듯 어머님의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읽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형들은 동생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요즈음 형제자매들 사이에 부모의 유산 때문에 싸우고 심지어 법정에까지 고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재산보다는 어머니 눈물의 기도가 밴 성경을 서로 가지려는 모습은 가정의 복중에 가장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어머니가 평소에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모습,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 언제나 성경을 읽는 모습의 본을 보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임직자 여러분, 교회 일꾼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 전, 먼저 ‘나는 과연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이 맡겨주신 양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는가?’ ‘나는 과연 양무리의 본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보시고 ’예‘라는 대답과 더불어 충성봉사 하심으로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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