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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재 목사 인터뷰
2017년 01월 22일 (일) 23:18:23 크리스천웹진소리 webmaster@cry.or.kr

(출처: 안동교회 홈페이지)1

   
 

1970~1990년 민주화의 진통이 온 나라를 뒤흔들 때, 개인을 넘어 사회와 공적 영성의 소명을 일깨워 온 유경재 목사. 교회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으로 목회 활동을 했던 그는 은퇴 후에도 세상과의 소통을 활발히 하며 진정한 나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지나온 28년 목회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 목사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중국 천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유경재 목사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해방이 되고 그 이듬해에 한국으로 들어오지만, 6학년 때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는 등 해방과 전란의 틈에서 순탄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1939년 어린 시절 형님들과 찍은 사진으로, 앞줄 가운데가 유 목사다.

중국에 있는 천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해방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죠. 용산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청량리로 이사를 간 뒤 6학년까지 보냈는데 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세상이 어수선해 많이 옮겨 다닌 편인데 특별히 함정을 타고 천진에서 인천까지 건너던 날이 생각나네요. 칠흑 같은 밤에 인천항 부두에 도착했는데 비까지 맞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1·4 후퇴 때 화물열차를 얻어 타고 대구까지 피난 갔던 일도 생생하게 생각이 납니다. 미 공군부대의 트럭을 얻어 타보기도 했으니 어린 시절 그 일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부산으로 피난 가서는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서울과 부산은 전혀 다른 문화권이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죠. 중학생 시절도 부산에서 보냈는데, 피난학교인 중앙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산 중턱에 임시 막사를 짓고 공부를 했습니다. 한겨울에는 막사 안이 추웠지만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별로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특별히 저는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선생님도 좋은 분을 만나 다른 과목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봤을 때도 수학은 만점을 받았죠. 대학입학시험도 수학 점수를 잘 받아서 합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학창시절은 피난을 다니기도 했고 전쟁을 겪은 직후여서 놀이문화도 변변치 않았죠. 즐길 거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TV는 물론 없던 때고, 라디오도 없었거든요.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제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은 오직 교회뿐이었습니다. 주보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활동을 했어요. 그래서 학창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교회에서의 일들뿐입니다.

 (문) 가정환경은 어떠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신앙이 돈독하셨나요?

저희는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은 집안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제가 28년 동안 시무한 안동교회의 창립 멤버이신데, 제일 처음 장로가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도 할아버지의 신앙을 물려받아 아주 열심히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자녀들을 양육하실 때 엄격하게 신앙적으로 키우려고 노력하셨죠.

저희가 8형제였고 부모님과 조부모님까지 합하면 식구가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그 많은 인원이 한 집에서 살아야 하니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께서는 저희 형제들을 신앙적으로 키우시려고 매일 가정 예배를 드렸어요. 저희 형제들은 아버지의 뜻을 잘 받들었고, 그래서 지금도 8형제 모두 신앙의 가정을 꾸려서 잘 살고 있습니다.

(문) 목회자의 길을 갖게 되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963년 8월 대학 졸업사진.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였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 목사가 되는 게 과연 자신이 가야 할 길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는 유경재 목사. 그때 그를 신학교의 길로 이끈 것은 성경 시편의 말씀이었다.

 아버지께서 아들 여덟 명 중 한 명은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여덟 명 중 다섯째였던 저에게 줄곧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때는 목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는데도 어떤 거부감 없이 ‘아, 나는 이다음에 목사가 될 거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계셨던 아버지께서 기독교서회가 발간하는 서적을 받아 오셨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그 책들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읽으면서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물론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제 적성은 이과 쪽이었는데 목사가 되고자 문과를 가야 했거든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신학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했죠.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목사가 되는 게 과연 내가 가야 할 길인지 고민이 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시편 37편 23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 하시나니”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번뜩 들더군요. ‘아, 하나님께서 내 길을 이미 정하셨구나. 그리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 구나’라고요. 그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문) 진취적이고 개혁적이라는 평을 듣고 계시는 목사님의 지나온 목회 여정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닌 대학은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그것이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죠. 장준하 선생이 편집한 [사상계]와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와서 목회학 석사(M.div) 1기 과정을 밟는데, 처음에는 교수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신학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보니 저를 비롯해 자유로운 대학풍토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는 적응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말썽도 많이 피웠고, 교수님들께 따지기도 많이 했어요. 3년 동안 교수들과 싸우다가 졸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경신중고등학교의 교목으로 들어가 8년을 지냈습니다. 학교 교목은 교회 목사들보다 비교적 자유로운 데다 방학도 있어서 여러 가지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 여러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진보적인 신학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존 교회로 바로 갔으면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그 시절에 많이 누렸습니다.

   
안동교회 목사 부임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유경재 목사이다. 유 목사는 1976년 12월 서울 종로구 안동교회에 목사로 부임했다. 서른아홉의 젊은 목사는 유서 깊은 대표적인 보수교회였던 안동교회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안동교회에는 1976년 12월에 부임했는데 그때 제 나이가 서른아홉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보수교회였고 역사가 깊었지만, 처음 부임했을 당시 한국의 여타 다른 교회들이 성장하는 것에 비해 많이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움직이는 교회, 생기 있는 교회로 변화시키는 것이 우선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제 설교의 방향을 두 가지로 잡았는데, 하나는 활력을 불어넣는 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설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낡은 에배당을 헐고 새로 건축하겠다고 작정을 하였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도 새 예배당 건축은 꼭 이루어야 했습니다.부임한지 3년 만에 건축에 착수하여 완공하고, 그 이듬해 봉헌하였습니다. 이 건축이 교회에 활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서둘지 않고 차근차근 잘못 알고 있던 생각들을 바꾸고, 행정을 새롭게 하며 제도를 바꾸어나갔습니다.

꽉 막힌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여성 장로의 선출이었습니다. 교단 총회에서 여성 안수법을 통과시키기 전이었는데, 안동교회는 장로란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여성도 장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거든요. 우리 교단이 아직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을 때, 안동교회에서는 미리 여성 장로를 선출하였습니다. 법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자 장로라는 명칭은 주지 않았고, 안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장로들이 참석하는 당회에 참석하게 하였고, 장로가 하는 일을 모두 맡겼습니다. 그러다가 총회에서 여성안수법이 통과되면서 그 분이 제1호 여성장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개혁적인 일로 이해된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여성평등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문화와 교육에도 관심을 두고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 성화, 파이프 오르간, 종(鐘) 등을 설치했습니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토요일 오후 1부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세상과 기독교 문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자 꾸준히 노력했죠. 그런 것들이 모두 제 안에 있었던 개혁적인 영성의 표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문) 남북한 화해를 위한 사업과 지역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셨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 가족은 선친 때부터 안동교회의 교인이었다. 영부인 공덕귀 여사는 새로 부임한 유 목사가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설교를 하고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을 강조할 수 있도록 신도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82년 4월 부활절 축일 다과회에 참석한 윤 전 대통령 부부와 유 목사(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차례로).

 안동교회에는 해위 윤보선(尹潽善, 1879~1990) 전 대통령 가족이 나오셨습니다. 이분들이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서 일하실 때 제가 안동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두 분은 언제나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오셨고, 맨 앞줄에 앉으셨습니다. 해위 선생님은 교회 내에서 한 번도 정치적인 발언을 하시거나 선동하신 적이 없습니다.

부인인 공덕귀(孔德貴, 1911~1997) 권사님이 노인권사님들 성경반을 오랫동안 가르치셨는데, 거기서 늘 당시 도시산업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하게 억압받은 근로자 사건에 대해서서 말씀을 하셨지요. 그래서 안동교회는 전체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다 목사의 설교도 역사의식을 강조하면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1990년대에 특별신앙운동을 시작하였는데, 환경보호운동과 통일운동, 경제정의 실현, 생명나누기 운동이었습니다. 이를 고취하기 위한 강연회를 자주 가졌고, 지침서와 기도문을 만들어 매일 그 기도문으로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북방선교헌금을 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가지 환경운동을 행하였으며, 지역사회의 독거노인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배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을 통하여 많은 것이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운동이 신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문) 초대시대의 아픔을 안고 구국운동에 참여를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 책임을 얼마나 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1960~1980년대에는 한국 교회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죠. 초기 지도자들은 3ㆍ1운동에도 많이 참여했고요.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잖아요. 그 명단에는 없지만 안동교회 장로님 중에서도 3·1운동에 직접 지원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통일을 위해서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가 1988년에 발표한 선언문도 통일운동에 물꼬를 텄다고 볼 수 있고요. 교회가 사회문제에 앞장 서왔던 겁니다.

그런데 1987년 이후 군사독재정권에서 선거에 의한 민주적인 정부로 바뀌고 사회체제가 변해가는 과정에서 교회가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힘쓰던 부분들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때부터 교회는 오로지 성장에만 열심을 내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교회 내부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된 것이죠. 이제는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어려운 문제들을 함께 풀어나가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문) 강단의 설교는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교회가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경재 목사. 유 목사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는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옳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반드시 정치적으로 어느 편을 들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어요.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정치와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정교분리란 교회가 정치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리를 차지하는 정치 세력이 되지 말라는 것이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치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 강단에서도 정치에 대한 비판, 또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왕권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을 때는 가차 없이 심판을 선언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 하거든요.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문제를 외면하면 안 되지요.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옳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복음이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 세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를 외면한 설교는 진정한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문) 정치를 비판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시면서 갈등이나 두려움은 없으셨나요? 목사님 뒤에 늘 형사가 따라붙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늘 형사가 따라붙지는 않았어요. 제가 박정희 정권 말기 어려운 시기에 안동교회에 부임했는데, 설교를 통해 유신정권을 비판하고 교인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니 직·간접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거죠. 그때 교인들을 심방하러 다니면 형사들이 따라다니긴 했어요. 저의 비판적 성향을 감시하기 위해서였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혹시나 잡혀갈까봐 내심 걱정도 됐고 그래서 용기를 구하는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갈등은 오히려 교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설교를 할 때마다 교인들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거든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이죠. 그에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어요. 교회 안에 대통령의 친척이었던 분이 있었는데 사회적으로도 지위가 있던 분이셨어요. 제가 강단에서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면 설교 후에 찾아오셔서 막 화를 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지는 않더라도 속으로 못마땅해 하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러니 고민이 될 수밖에요.

갈등이 있을 때마다 비판적인 설교를 계속해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면서도, 그런 설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감정이나 지식에 근거한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을 설교로 준비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인간적인 내면의 갈등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봅니다.

(문) 좋은 설교를 듣는 데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교는 일주일에 한 시간, 예배 드릴 때 듣습니다. 그런데 반해 우리는 매일 신문을 보고, 매일 텔레비전을 봅니다. 아무리 신앙이 돈독해도 이 매체들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가기 마련입니다. 설교보다 훨씬 강력한 이념과 정보로 우리를 세뇌시킵니다. 그러니 설교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설교는 하느님 나라를 중심으로 하기에 너무 비현실적이며, 실제로 그 이상을 따라가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설교를 하는 것은, 물방울이 오랜 시간을 통하여 바위에 구멍을 내듯이 사람들의 영혼을 뚫기 위하여 계속하는 것입니다.

(문) 기독교 영성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표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영성이 필요한 것은 하느님과 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 하느님을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목회자가 추구해야 할 영성은 바로 하느님이 뜻이 펼쳐지는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기도도 많이 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난날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리고 급격하게 변하는 오늘의 역사를 통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결국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성을 회복할 때 이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면서 나가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 2004년에 조기 은퇴를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요? 

   
1999년 3월 안동교회 창립 90주년 예배에서 설교하는 유 목사. 28년간 안동교회를 지켜온 유 목사는 조기 은퇴를 결심한 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늘 새로운 시대의 등불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8년 동안 한 교회에서 시무를 했는데, 아무리 목사가 잘한다고 해도 너무 오래 있으면 교인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변화와 새로움을 원하기 때문에 목사가 아무리 목회를 잘해도 너무 오래하는 것은 원치 않아요. 66세에 은퇴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끝까지 좀 더 해주세요”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걸 보면 은퇴하기를 잘한 것이지요. 또한 제 나름대로 한계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쉬고 싶기도 했고요. 28년 동안 목회를 했기에 저에게서 더 새로운 것이 나올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회는 늘 새로워야 하고 시대의 등불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조기 은퇴를 결심하게 된 외부적인 요인이나 문제는 전혀 없었어요. 단지 한국교계에 조기 은퇴의 선례를 남기고 싶기는 했습니다. 은퇴를 결심할 당시 조기 은퇴 하신 장로님들이 있었기에 목사인 제가 은퇴를 한다고 얘기했을 때도 사람들이 그런 맥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 목회를 그만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라 봅니다.

(문) 그렇다면 은퇴 이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은퇴 후 5년 동안은 실천신학대학원에서 임상교수 자격으로 교회론, 목회론, 종교사회학 등에 참여했습니다. 사회를 보는 눈과 사회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안동교회에 관련된 자료들을 디지털 자료로 만들어 올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주보나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정리해서 파일로 만든 뒤 인터넷에 올려놓는 작업들이죠. 안동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른 교회에 없는 자료들이 꽤 많습니다. 지금 당장은 관심을 못 받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귀한 자료로 남게 될 겁니다.

작년부터는 팟캐스트에 ‘10분 설교’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은퇴한 목사님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와 목회 이야기도 녹음해서 같이 올리고 있습니다. 현재 열세 분을 인터뷰했고 대개 한 시간 반 정도의 방송이 나가는데, 그런 일들을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문)사람들에게 저마다 진실을 추구하고 그렇게 살기를 소망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진실을 말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문제를 솔직하게 드러내면 손해를 보잖아요. 정치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함부로 진실을 말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많죠.

사실 오늘날에는 정치권력보다 언론이 장악하고 있는 부분이 큽니다. 매체들이 쏟아내는 정보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잖아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시대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언론의 이면까지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죠.

(문)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교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유 목사는 교회가 사회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지, 그렇게 만드는 사회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며, 교회가 그들과 함께 울고 헤아려주며 도움을 주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해 악수하는 유 목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교회가 무심히 듣고 넘기면 안 됩니다.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지, 그렇게 만드는 사회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또 그에 따른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있지요. 대한문 앞에서 촛불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농성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교회가 찾아가서 살펴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히 목사들은 강단 위에서 설교할 때 그런 문제들을 성경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교인들이 함께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아쉽게도 그런 교회들은 극히 드물거든요. 자살을 죄로만 규정할 것이 아니라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짐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살을 하지 않도록 다른 대처방안들을 논의해야죠. 교회가 그들과 함께 울고 헤아려주며 도움을 주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문) 목사님도 삶의 위기나 절망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러면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절망이나 위기를 겪었다기보다는 생의 고비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저를 맡겼습니다. 제가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정하셨고 그 길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으니 그냥 믿었어요. 그리고 제가 넘어진다 해도 아주 엎어지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늘 기억했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모든 것을 맡겨드렸더니 고비마다 이겨낼 수 있더라고요.

목회할 때도 성도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를 찾아오지 말고 직접 하나님께로 찾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근심하고 염려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저 자신도 지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제 능력 밖의 것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모두 맡겨라, 근심과 걱정을 버리라’고 가르쳤어요. 성경에 근거한 가르침이었고 저 또한 그렇게 살려고 애썼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서 길이 열리고 문제의 해결점을 찾았습니다. 모든 위기를 그렇게 극복해왔습니다.

(문)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희망이 없는 시대일수록 내면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욕망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하는 유경재 목사. 유 목사는 욕심을 비워낼 줄 알아야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희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라고 봅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서 오는 희망은 오히려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희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모두 경제성장을 바라지만 저는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 거라고 예상합니다. 사실 복지도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해야 가능하지 않습니까? 경제성장이 없으면 복지도 불가능하거든요. 세계가 경제위기 속에 있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한 시대에 끝나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늘 더 좋아지고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갖지만, 사실상 갈수록 희망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욕망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비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히려 희망이 생길 겁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 헛된 욕망을 다 버리고 비워내야 비로소 새로운 문이 열려서 나아갈 길이 보이고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문) 인간을 진정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은퇴 후 안동교회에 관한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팟캐스트에 설교를 올리는 일을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유경재 목사. 그는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이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삶, 자신과 역사를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히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 혹은 도덕성이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간직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쓰여 있죠.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라면 지식과 지혜가 아무리 많고 가진 것이 넘쳐도 사랑이 없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을 때 진정한 성숙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도 상당히 부족하다 싶어요. 성숙해지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봐요. 죽음 이후의 삶까지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 오직 사랑뿐이라면 우리 인격에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랑이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은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할 거라고 봅니다.

사실 요즈음이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더욱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의 때입니다. 시대적인 징후들을 깊이 살펴봐야 해요. 온난화로 인한 기후의 변화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나빴다가 좋아지지 않을 겁니다. 자원이 고갈되고 석유가 동나고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 또한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심각한 문제로 드러날 겁니다. 빈부의 격차도 줄어들지 않고 어려운 사람은 계속 어려운 현실을 살게 될 거고요. 이런 현상이 일시적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앞으로도 지속되고 점점 더 심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종말의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물질적으로 번영할 때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그 꿈만을 따라간다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취직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고난에 직면한 것이 단순히 정권 때문에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본다면, 정권이 바뀌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뀐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는 현실입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꿈꾸기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자연과 같이 호흡하면서 사는 삶,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형성해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인 거죠.

급격하게 변하는 세태와 흐름에 자신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그 흐름 속에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폭넓게 사람과 세계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히는 일에 힘쓰는 젊은이들이 되길 바랍니다.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향해 제가 더 등을 두드려주고 격려해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부족한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1957년 2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경재 목사다. 전쟁 직후 마땅한 놀이문화나 즐길 거리가 별로 없던 학창 시절, 유 목사는 교회에서 주보를 만드는 봉사활동 등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인터뷰어 소개

   
유경재 목사

 1938년생. 조부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목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그 시절 목사의 길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성경 시편에서 깨달음을 얻고 신학교에 입학,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6년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서 깊은 안동교회의 목사로 부임해 보수적인 교회에 진취적인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개혁을 주도했다. 통일, 환경문제 등이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 교회가 이들 사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했고, 교회의 설교를 통해 신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자 노력했다. 교회는 늘 새로워야 하고 시대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28년간의 목회 활동을 뒤로 하고 2004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된 신앙생활과 목회인의 자세에 대해 고민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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