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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순 목사
2017년 01월 22일 (일) 23:03:45 김태복 목사 webmaster@cry.or.kr

조화순 목사는 어떤 분인가? 

일    자: 2013년 11월 17일 
장    소: 더불어교회 
대담자: 유경재, 김태복 목사


(편집자주:인터뷰 했으나 녹음이 제대로 안되어 글로 옮겼습니다.)

   
 

두어 시간 인터뷰하면서 만나본 조화순 목사를 한 마디로 인물평을 해본다면 ‘작은 예수로 산 사람’ ‘목회와 노동 현장, 그곳에서 몸과 마음으로 부딪히면서 신학을 깨닫고 민중신학자가 된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인터뷰 시간 내내 그 분에게서 발산되는 진실과 열정의 밝은 활기가 우리 두 사람을 감동의 역사현장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참 대단한 신념의 사람이요, 대단한 일생의 족적(足跡)이 아닐 수 없다.

‘조화순 목사, 그 분은 어떤 분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쓰기 위해 여기저기 많은 지인들이나 기자들이 스케취한 단편적인 글들을 모았고, 편집하는 심정으로 그 글들을 엮어 펼치고자 한다. 감리교는 1930년에, 기독교장로회 1955년에 여성안수를 시행하였고, 1995년부터 예장 통합도 여성안수법을 통과 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아직도 여성 목회자들의 목회 입지는 협소하고 그 활동 영역이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단연 돋보이게 활동하신 여성 목사가 바로 감리교 조화순 목사이다.

「낮추고 사는 즐거움」(2005년)이라는 책에 보면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한 때 여성노동자들의 친구였고, 언니였고, 어머니였던 사람! 동일방직사건을 통해 노동운동에 불을 지피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 찾기를 주도하다가 혼연 현장을 떠나 해발 750m 고지 봉평 태기산에 집을 짓고 십년 동안 혼자 살고 있는 사람, 조화순 목사.”라고 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노동운동의 대모(代母)이다.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한 유 소녀 시절

조화순 목사는 인천에서 1934년 조영호 인천내리교회 장로와 전복순 여사 사이에서 6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당시 가정은 부유했다. 아버지가 일제시대 어느 부잣집에서 마부(馬夫) 노릇을 하셨는데 얼마나 성실하셨는지, 주인이 감동하여 말 한 필을 주면서 자립하라고 했다. 그 말 한 필을 밑천으로 열심히 일한 결과 나중에는 12필의 말을 소유하게 되었다.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면 열 두 대의 차를 가진 운수업체인 셈이다.

그러므로 가난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부모님이 교회 장로였기 때문에 신앙을 갖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평범한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평범하지 않은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 분은 개똥 철학자였다. 마치 세상 짐을 혼자 다 지고 사는 아이 같았다.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이런 고민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여주인공 채영신이 모델이 됐다.

그때부터 농촌에 가서 농촌계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래서 교회 청년 때도 모임을 만들어서 한 농촌을 선택해서 '함께 살자' '이상촌을 만들자'고 주장 했었다. 부모님은 이런 그녀를 더욱더 격려해주고 세워줬다. 그녀의 어머니는 항상 유관순 같은 딸을 뒀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면서 많은 사랑과 격려를 받았기에 조 목사의 인성이 진실되고 적극적인 성품, 남을 향해 나눔의 희생을 보이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신학교에 가게된 계기

부유했던 가정이, 1950년 한국전쟁으로 형편이 어려워 졌다. 인천 여중고(사범학교)재학 때는 인천기독청년회 자원봉사단 자격으로 부산 전상자 병원에서 간호보조사로 일하기도 했다. 사범학교 졸업 후에는, 갑자기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지만, 용인군 남사면 남사초등학교 선생으로 부임했다. 채영신처럼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농촌봉사활동도 병행했다.

처음에는 너무나 보람이 있었지만, 3년 정도 이런 활동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농촌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받은 대가를 놀음을 해서 탕진 하는 것이었다. 죽어라고 농사짓고, 놀음해서 다 써버리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그랬다. 농촌에 정신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농촌은 변화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 계기로 감리교신학대학에 지원하게 되었다.

합격은 되었으나 학비 마련이 막연하였다. 자연적으로 많은 아르바이트하게 되었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렇게 수년 동안 막일을 한 경험이 훗날 노동현장에서 사역하는 일로 연결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하튼 남들은 기숙사에서 우거하면서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는 시간에 수업만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인천을 오가다 보니 신학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그러므로 졸업까지 6년이 걸렸다.

그러나 조화순 목사는 고백하기를, 자기가 어디에 가서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배웠겠는가? 조용한 서재나 연구실에서 신학을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지만, 농촌교회와 공장, 그 고난의 현장에서 온갖 수모와 박해를 겪으면서 예수의 삶을 따라 혼신의 힘을 다해 사역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른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민중신학자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서재에서가 아닌 현장에서 체득한 신학이라는 말에 우리는 감동을 느꼈다.

농촌교회 전도사 시절의 체험

1962년 신학대학 졸업 후, 덕적도 북리교회 담임전도사로 부임했다. 그 당시 28세 나이요, 처녀의 몸이요, 더욱이나 문제 신앙적인 체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목회를 시작하려니 얼마나 암담한 마음이었겠는가? 어릴 때부터 신앙적인 가정, 너무나 분위기가 좋은 인천내리감리교회에서 교사나 성가대 등 온갖 활동은 다했으나 신앙적인 체험은 거의 없었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 등은 거의 믿지 못하는 상태였다.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에 불과했다.

신학교 6년 동안도 그런 신앙상태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니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런데 부임 초기,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런 체험이 일생 사역에 큰 기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에 귀신 들린 교인을 심방하게 되었다. 어떻게 심방할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가서 설교하고 기도해 준다는 것은 너무나 떨리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심방하기 전날 밤은 밤새도록 교회당을 빙빙 돌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다. 그렇게 전력을 다해 기도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침내 심방 시간이 되었다. 심방대원들과 두려운 마음으로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너무나 충격적인 벌어졌다. 귀신들린 여인은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동석했던 여인의 오빠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자기 쪽으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그 때 그를 붙들고 담대히 기도했더니 귀신이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 때 조화순 목사는 큰 감격을 느꼈다. 자기같이 성경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형편없는 전도사라도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할 때 이런 기적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때부터 자기 따위는 전혀 의지하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갈 때에 어느 누구도, 심지어 자기를 고문하는 안기부 요원도 전혀 두렵지 않고 담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시험 당할 때 쯤 감당할 능력이나 피할 길을 허락하시는 분을 깨달은 것이다.

농촌교회에서 노동현장으로

1962년에 감리교에 도시산업선교회가 생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도시로 왔다. 그때 미국의 조지 오글 감리교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왔다. 그 선교사는 우리에게 시대 상황에 맞는 전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도를) 공장에 가서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3년 동안 시무하던 농촌교회를 사임하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조화순 목사가 자기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조지 오글 선교사(한국명:오명걸)은 누구이며 조 목사는 그를 통해서 무엇을 배웠는가? 조지 오글 선교사는 1955년 쳐음 선교사로 한국을 방문하였다가 귀국 후 1962년 결혼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부임한 미국 선교사이다. 그는 1962년부터 인천 동구 화수동에 초라한 한옥을 구입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 인혁당사건은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고발하고 인혁당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희생자들은 ‘제 2의 예수’, ‘작은 예수’라며 박정희 군사정권을 비판하다가 추방된 분이다. 조 목사는 산업선교 활동을 위한 모든 훈련이 오글 선교사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산업선교 실무자 훈련과정으로 동일방직에 취업하였을 때 조지 오늘 선교사는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라. 노동사회에도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배우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을 선교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버리라’는 오글 목사의 말은 조 목사에게는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오글 선교사사는 또 ’예수를 찾으라”고 말하면서 매일 저녁마다 찾은 예수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다고 한다, 조 목사는 공장 생활 중에도 밤마다 오글 선교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신학서적을 뒤적이며 ‘예수를 찾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번번이 리포트는 찢겨지고 ’구체적인 예수를 적어내라‘는 호통만 들으면서 훈련 받았다고 한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거의 초등학교만 졸업한 경우가 많았다. 월급은 80원. 지금으로 따지면 8만 원도 안 될 듯하다. 위장 취업을 한 후 깨달은 첫 번째가 노동자들의 심정이었다. 그들의 삶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측이 얼마나 착취를 했는지 모른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배웠다. 당시 노동자들은 저임금은 물론, 병이 안 걸리면 이상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그들의 현실은 처참했다. 노동을 하면서 이들이 제대로 일한 대가를 받게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노동자와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보게 됐다. 이들은 죄와 율법을 떠나 인간다운 대접조차 받지 못했다. 이들의 권리를 찾아 줘야 하는 게 그에게는 '선교'였다. 그때부터 노동조합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동의·개의·회칙도 몰랐던 그들의 인권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솔직히 하나님이 사람이 됐다는 것을 위장 취업을 통해 깨달았다. 성육신을 하려면 얼마나 처참하게 버림받아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과 십자가 고난을 깨달으면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면서 회개했다. 예수님은 가난의 현장에서 절대 떠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예수님처럼 가난의 현장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면서 일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동일방직 분뇨사건

조 목사는 1973년부터 1983년까지 인천도시산업선교위원회 총무로 활동했다. 그 기간 중 잊지 못할 사건은 분뇨사건이었다. 1978년 노조를 없애려고 노조 선거가 있는 날 사무실에 분뇨를 뿌리고 기물을 파손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전에는 노조 집행부는 모두 남성이 맡았다. 하지만 1973년에 모두 여성으로 바뀌었다. 세계적인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놀랐다. 인권을 외치는 여성노동자들의 권력이 확대되어가는 걸 정부도 그리 좋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정부는 심한 탄압을 가했다. 노조운동을 못하도록 별짓을 다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웠다. 1973년에 노조 집행부가 여성으로 구성되면서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1978년에 노조 집행부 선거가 있는 날 안기부와 회사 그리고 어용 노조가 합해져서 여자 집행부가 없어졌다. 그게 유명한 분뇨사건이다. 그날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침 근무조가 야근 조와 교대하기 위해 오전 5시 30분 쯤 출근을 하는데 회사정문에 들어서자, 방화수통에 분뇨를 담아 선거하려 들어오는 여성 근로자들에게 뿌렸다. 또 노조사무실 안에 있는 40여 개의 투표함과 사무실 기물을 파손해버렸다. 당시현장에는 몇 사람의 경찰이 있었으나 그들은 남의 일처럼 방관만 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도시산업선교회가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여성노동자들은 조화순 목사, 도시산업선교회, 노조와 관계를 갖지 말라"라고 정부에서 정할 정도였다.

연속된 수난, 어떻게 극복했나?

노동운동을 하던 1972년 반도상사 노조결성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2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또한 1976년 KNCC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셨지만, 1978년 11월 긴급조치 9호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3년 언도를 받고 1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후 민주화의 봄이 오는가 싶었으나 신군부의 쿠테타가 일어나면서 75일간 안기부에 구금되었다.

그 뿐인가,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항의사건으로 구속(1년형 언도, 집행유예 2년)이 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조 목사가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한번은 안기부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수사관이 “왜 노동자를 선동했냐?”고 심문했다. 조 목사는 “내 평생 소원이 예수님 닮는 거요. 예수가 죽을 때 선동자로 낙인 찍혔소. 당신이 날 예수처럼 선동자라고 하니 기분이 좋군”이라고 되받았다. 수사관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아냐?”며 화를 냈다. “어디긴 어디야. 사람 사는 데지”라며 조 목사는 웃었다. 수사관들은 아연실색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난 용기였다. 그 용기로 그 많은 수난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 운동에 앞장 섰던 조화순 목사

정치적인 억압이 극심한 시기에는 누구든지 몸을 사리게 마련인데 조 목사는 남이 지지 않으려는 많은 고난의 직무들을 마다 않고 졌다. 1987년 감리교전국여교역자 회장, 1986년 한국여자신학자협이회 회장, 1987-89년 기독교민주․민중여성회 회장, 1989-91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1991년 기독교사회운동연합회 공동의장, 1991-94년 아시아여성연합회 중앙위원, 1992-94년 한국여성단체연합회장 등이다.

그런 직책을 통해서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여성운동에서도 늘 앞장 서 일했다. 유신반대, 노동악법 쳘폐, 국가보안법 쳘폐, 양심수 석방에도 참여했고, 감리교 민주화운동 모임을 중심으로 여전도사들에 대한 은급제도, 여성 목사에 대한 성차별제도의 폐지, 교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에 앞장섰다. 또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가족법개정운동, 반전반핵과 성매매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정부가 이런 공로를 인정하여 2007년 국민훈장동백장, 한국여성지도자 대상을 수여했다.

다시 돌아온 달월교회

조 목사는 1983년 노동운동 사역을 마감하고 과거 시무하던 달월교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1989-1991년까지 중부연회 시흥지방 감리사를 역임하고 2003년 사역하시던 달월교회에서 정년 은퇴하셨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62세에 조기 은퇴한 것이다. 달월교회에 돌아온 후 조 목사는 자기가 고난의 현장에서 만났던 예수를 담대히 전했다. 처음에는 거부반응이 많았다. 주변에서도 오래가지 못하고 밀려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 의지하고 담대히 전할 뿐 아니라 강대상에서 내려온 다음에는 노동현장에서처럼 열심히 섬기는 삶을 살았다.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낮은 자, 병든 자들을 찾아 열심히 돌보는 삶을 살았다. 그러자 교인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교인들이 변하자 이번에는 지역사회가 변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심지어는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교회가 영향을 줄 정도가 되는 모습을 보았다.

조 목사는 후배 목회자들이나 여성 목회자들에게 남길 말을 해달라고 하자 말하기를 “요즈음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큰 교회의 목회 스타일만 따라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너무나 보기가 싫습니다. 예수님은 혁명적이었습니다. 정치적인 혁명이 아니라 정신적인 혁명입니다. 가진 자가 귀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귀합니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이지, 제자가 선생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처럼 혁명적인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 우리 목사가 달라져야 합니다. ”

“목사가 달라지면 교회는 변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고난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의 문제는 고난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 많은 목사들이 십자가는 지지 않고 영광의 자리만 탐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의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잘못되는 건 우리가 가차 없이 말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라 했다.

은퇴 후 강원도 봉평에서의 삶 

   
 

조화순 목사는 62세에 조기은퇴 후 강원도 봉평 태기산 기슭에 아담한 주택을 짓고 살고 있다. 이 주택은 그를 존경하는 후배 목사들이 손수 건축했다. 조 목사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리나라는 농촌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산업화가 됐고, 민주화가 됐다. 은퇴를 앞에 놓고 고민을 했다. 그녀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니 그녀의 꿈이 있는 곳, 바로 농촌이었다.

그래서 이곳 봉평에서 자연과 함께 감사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 하나는 목사라면 예수님처럼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난 어떤 모습이 가장 낮은 모습일까 생각했다. 그것은 모두가 외면하는 농촌에서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사는 것이다.

봉평면 자택 주변에는 나무가 많았다. 나무 사이로 희귀한 새가 여러 마리 있었는데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흙으로 손수 지은 집의 뜨락에는 다람쥐가 오가고, 방에는 개미나 무당벌레가 떼 지어 다녔다. “모두 다 귀한 생명이야. 다같이 살아야지”라며 조 목사가 그대로 두기 때문이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까 귀가 순화돼요. 하나님이 우주이고 그 우주 속에 내가 있다는 감동을 받습니다.” 자연을 스승 삼아 살고 있는 조 목사는 산중에서도 ‘목회 중’이었다.

볼모지와 같은 여성목회자와 산업선교 분야에서 일생을 바쳐 온몸으로 헌신하여 오신 조화순 목사의 생애는 한국교회의 귀한 본이 되었으며, 그 헌신의 결과로 많은 여성 목회자가 배출되고, 저들에 의해 새로운 선교 분야들이 개척되는 길이 열렸다. 조화순 목사께서 더욱 건강하셔서 후배들을 격려해주시고 저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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