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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목회 40년(2)
2024년 05월 31일 (금) 18:58:53 김태복 목사 www.cry.or.kr

제1부 초년목회 여담

 
1. 친구 따라 신학교 입학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친구 따라 신학교에 입학함으로 일생 목회자 길을 갔다. 이원직이라는 친구인데 ‘이런 인연도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친구와 나는 인연이 깊었다. 춘천고등학교 3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고, 대학도 같은 대학이었다. 당시 가정 형편상 서울로 진학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춘천농과대학(강원대학교 전신)에 진학했다. 대학생 때 나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농학에 대한 강의를 마지못해 청강하고 있었으나 뒷자리에 앉아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문학, 철학,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농문학과에 다닌다.‘고 자위(自慰)하고는 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낸 후에 학보병(學步兵)으로 입대했다. 학보병은 복무 기간(18개월)이 짧은 만큼 최전방에서 근무해야 했다. 그런데 입대하면서 이원직과 동행하고 논산훈련소에서 군번을 받을 때도 나는 0045855이고 그 친구는 0045854로 훈련소에서 같은 중대, 전방으로 배치받을 때도 7사단 5연대였다.
 
우리는 1년 반 동안 화천 사창리와 임진강 변에서 복무했다. 그러면서 임진강 건너편에 북한군을 보면서 분단된 조국과 아픔의 역사, 전쟁이 남긴 상처들, 그리고 조국의 앞날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틈날 때마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로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그 친구의 소개로 그가 창립한 광염회(光鹽會)에 가입했다. 광염회는 춘천 시내 크리스천으로 뜻 있고 우수한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으로 조직된 모임이었다. 그 친구가 그 회의 창립자이고 대표였다.
 
그 회의 회원들은 장래 희망을 써내야 했는데 나는 언제나 희망란에 소설가로 표기했다. 복학(復學) 후 군대의 체험을 중심으로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여기저기 투고했다. 결과, ‘새생명’이라는 크리스천 잡지와 경북대학교 학보지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제대로 문학 수업을 받지 못한 탓인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대학 4년 때, 3년 연상이던 형이 서울 양평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하숙집에서 연탄가스로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 비보(悲報)는 우리 가정에 큰 풍랑을 몰고 왔다. 형은 가정의 기둥이었고 자랑이었다.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한 형은 춘천방송국에서는 어린이 합창의 지도자로, 동요(童謠) 작가로서도 꽤나 이름을 날림으로 서울 교사로 전임되었는데 이런 비보를 접하니 온 가족의 충격은 대단했다. 나는 신앙적으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저 어둑한 골짜기를 응시하며 죽음의 망령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가 신학교 입학을 권고했다. 그 친구는 먼저 장신대 입학하여 재학 중이었는데 신앙적인 회의에 빠져있는 내가 재기할 수 있는 것은 신학교 입학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친구의 말에 끌린 것은 신학교에 입학하여 죽음의 문제를 풀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나에게 목회자의 길을 열어준 친구는 중도에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교사의 길을 갔다. 그러면서 늘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자기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라고 하면서 늘 죄스러워했다.
 
입학 첫 예배에서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늘의 나팔 소리인가, 주일학교 때부터 낡은 풍금에만 익숙해 있던 나에게 신학교 채플실을 가득 울리는 전자 오르간의 장엄한 음률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 오르간의 반주를 따라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라는 개회 송영을 부르면서 솟구치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어찌 그 음악 소리 때문만이겠는가?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에 대해 한껏 부푼 기대로 불타 있었다.
 
4년 동안 지루하기만 하던, 땅의 기초학문인 농학(農學)과는 달리 서울이라는 환경에서 최고학문인 신학(神學)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을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에 되돌아보아도 장신대 3년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는 신학교 채플실과 침침한 기숙사 방, 도서관과 칠층 탑, 신학교 뒤편 숲을 배회하며 어두운 사색을 했고 때로 형을 먼저 데려간 하나님에 대해 항변이 담긴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메섹 도상에서 깨어졌고 나를 부르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떨면서 부르신 분께 나의 생(生)을 드리기로 약속했다. 그 순간, 문학에서 주던 창작의 희열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영적인 기쁨을 체험했다. 사실, 대학 4년과 신학교 3년 동안 광염회는 내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 회가 자금을 대줌으로 「회칠한 무덤, 한국교회여」라는 최초의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다. 비록 소설가는 못되었으나, 그 책을 계기로 한국교회에서 문필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1975년)
 
2. 장신대 63기 동기들 50년 사역이야기
(장신대 졸업 50주년 기념대회 동기회 홍보문)
2020년은 장신대 63기들이 졸업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는 졸업한 지 25주년 되는 해에서는 ’홈커밍데이‘를, 50주년이 되는 해에는 졸업생 부부들을 초청하여 '희년 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금년 대회는 우리 63기 동기회 차례가 된다. 동기회 총무를 맡은 입장에서 여러 재료를 수집하면서 장신대 시절을 많이 회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회고해도 장신대 3년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 기간 나는 세 번의 귀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2학년부터 농촌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하면서 만난 30여 명의 청소년이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들은 전기도 없는 낙후된 산골에서 중학교도 진학 못한 채 불우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가며 그들을 교육했다. 그들에 대한 나의 꿈은 상록수가 되어 농촌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만남은 일생 반려자가 되어준 아내였다. 같은 교회, 같은 대학에서 만난 사이였다. 고향교회 1년, 농촌교회 8년, 홍익교회 32년, 은퇴 후 10년 등, 50년 동안을 동고동락해 준 동역자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만남은 신학교 동기들이었다. 각 대학교와 지방신학교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로 신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술에 찌든 채 음담패설을 일삼던 지방대학 친구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소명감을 가지고 신앙과 학문을 향해 전념하는 그들과 함께 기숙사와 식당, 채플실과 도서관에서 함께 토론하고 함께 기도하던 삶은 보석 같은 날들이었다. 또 하나 빛나던 추억은 장신대 학보(學報)인 ‘신학춘추(神學春秋)’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격월(隔月)로 2,000부씩 발간해서 학우들과 교단 교회들에 배송했던 일이었다.
 
우리 장신대 63기들은 1970년 2월 26일 75명이 졸업했다. 62기생들이 신학교 교수가 많고 64기들은 특수 선교에서 많이 활동하는 것과 달리 우리 동기들은 거의 교회 목회에만 매진했던 것이 특징이다. 1995년 통계에 의하면 서울 20명, 경기도 4명, 인천 3명, 충북 3명, 충남 4명, 광주 3명, 전북 11명, 전남 4명, 대구 3명, 경북 2명, 부산 7명, 경남 2명, 제주 2명, 해외 8명이 목회를 하고 있었다. 이는 전국 각지에 골고루 배치되어 목회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 63기들은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 강북제일교회 윤덕수 목사, 순천제일교회 박정식 목사 등, 부산, 광주, 대구, 순천, 익산, 태안, 남원, 의정부, 제주의 굴지 교회들의 담임목사가 우리 동기들이었다. 특히 대부분 동기가 한 교회에서 장기목회를 하므로 원로목사(30여 명)가 많았고, 박성운 목사가 백석교회의 원로목사요, 서울서북노회장을 역임한 것처럼 노회에서도 열심히 한 결과 노회장 출신(20여 명)들이 상당수이다.
 
또한, 총회와 교계에서 활동한 분들은 아래와 같다. 정길재(교육부장), 주연도(교육부장, 세계선교부장, 사회부장, 남북한선교위원장, 특별재판위원장, 총동문회장), 정해동(사회봉사부장), 박도재(규칙부장) 손인웅(농어촌부장, 신학교육부장, 교육자원부장,훈련원장), 이만규(고시위원장, 선거관리위원장),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20대:이만규), 박정식(총회전도학교 교장), 정현성(고시위원장, 특별재판국장), 호남신학대학 이사장(4대:정길재, 7대:정현성, 9대:정해동, 10대:백종대), 광주 기독병원 이사장(정해동), 대전신학대학 이사장(남제현), 전주예수병원 이사장(정길재, 정일환).
 
그뿐만 아니라 박정식 목사는 85대 총회장을 역임했고, 부총회장 후보였던 동기들로 이만규, 정길재, 정현성, 주연도 목사 등이 있을 정도로 인재가 풍부했다. 또한, 손인웅 목사는 한국목회자협의회 대표와 실천신학대학교 총장을, 장영출 목사는 공군군종감과 예수제자선교회 회장을, 변희관 목사는 세계로선교회 회장을, 이경춘 목사는 총회전도부 총무를, 박도재 목사는 한국외항선교회 선교사훈련원 총무와 늘푸른선교회 회장을, 정요세 목사는 교정선교회 및 사형폐지운동을, 임병선 박형구 목사는 인권운동에 힘썼었다.
 
이만규 목사는 1987년 총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총회연금재단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총회개혁에 앞장섰으며, 김상석 목사는 총회연금재단 이사장을, 김대균 목사는 미국 장로교 전국 한인교회협의회 총회장을, 최양선 목사는 미주장신대 학장을 역임했다. 그 외 대전신학대학교 교수(정기덕) 한남대학교 교목실장(황청일), 부흥사(김원복, 장균철), 해외선교사 (박무수-일본, 이순각-페루, 서성주-카차흐스탄, 박도재-필리핀) 등으로 크게 활약했다.
 
임한택 목사는 육일선교회(미자립교회와 세계선교 후원회)와 한민족 밀알공동체(탈북민 돕기 사역)의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소망교회 부목사 때부터 35년 간 지도하던 한길회를 통해 농어촌교회와 개척교회 교역자 자녀 1,500명에게 3년 간 장학금을 지급했다.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윤두혁 목사는 교회학교 교재 저술과 교사강습회 강사로 다년간 활동하면서 교단 교회학교 교육에 기초를 세웠으며, 박도재 목사는 총회교육부가 발행하는 새벽기도회 자료 및 구역예배 공과 집필자로 봉사하면서 교단 장년 교육에 이바지했다.
 
지금도 손인응 목사는 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로, 남제현 목사는 태안에서 복지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고, 김홍규 목사는 찬송가위원회의 위원장과 대표회장, 영남신학대학교 26년간 음악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교회의 찬송가 발전과 개혁에 크게 이바지했고 지금도 음악찬양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은퇴 후, 백종대 목사는 캄보디아 오웬교회 등 세 교회를, 주연도 목사는 월드비전에서, 박 황 목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이희옥 여사는 모스크바 부근 뜰라지방 개척교회를 적극 후원하고 있다. 또한, 한병철 목사, 서윤갑 목사는 시각장애인교회를, 조석오 목사는 교회연합운동을, 목원경 목사는 서울역 노숙자 봉사에 다년간 힘써왔다.
 
이런 동기들과 일생 친구와 동역자로 교제하고 있음에 자랑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제는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므로 31명이 소천했고 국내 38명, 국외 6명이 남아 있는데 점점 병약한 분들이 증가하고 있어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먼저 소천한 동기들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크지만, 특히 그들 중에 1941-1942년생인 내 또래가 많다는 점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동익, 윤덕수, 권정석, 이동성, 박정식, 황문선, 정기덕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죽음의 문제를 풀고자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아직도 죽음 저편의 세계에 대해서는 성경이 언급한 말씀 외에는 여전히 희미하다는 점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더욱이나 내 또래들이 먼저 죽음의 강을 건너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죽음이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주변 가까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동기들이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움직일 여력이 남아 있다면 한 번이라도 더 만납시다. 특히 이번 10월 16일에 개최되는 졸업 50주년 모교 행사에서.(2021년)
 
3. 농촌교회 목회의 성공과 실패
1970년 가을, 결혼했다. 나와 아내는 대학을 졸업하자 너무 멀리 떨어져 있게 됨으로 주변 어른들의 권고로 조촐한 약혼식을 했다. 나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교육전도사로 있던, 경기도 마석에서 천마산 쪽으로 10리 떨어진 농촌 마을 가곡교회에서 계속 일하게 되었고, 아내는 동해안 묵호에 있는 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우리는 안타까움을 편지로 해소할 수밖에 더 없었다. 몇 개월 만에 만나면 약혼녀는 묵호로 돌아가기를 너무나 싫어했다.
 
교회 쪽에서는 보기가 안되었는지 여러 가지로 힘쓴 결과 교회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수동중학교로 부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 그해 가을에 우리는 결혼을 했고, 교회가 건립한 두 칸짜리 사택에서 신혼의 살림이 시작되었다. 그 농촌은 당시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몹시 낙후된 곳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일생 잊을 수 없는 목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신혼의 단꿈이 이루어졌고, 세 자녀가 태어났으며 거기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첫사랑을 그곳에 아낌없이 부었기 때문이다. 서재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천마산의 높은 산정(山頂), 그 위로 사계(四季)가 흘러감에 따라 달라지는 색채들, 여름이면 골안개가 골짜기를 드리우면 신비스러움 마저 느끼게 되고, 겨울이면 온 산은 하얀 눈을 입은 모습이 마치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선구자(先驅者)의 모습처럼 하늘과 조국을 향해 서 있는 의연함에 옷깃을 여민다.
 
우리는 가난했으나 그 아름다움과 의연함, 신비스러움 속에서 마음은 언제나 배불러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상록수가 되려고 애썼다. 나는 토요일이면 중, 고등학교를 가지 못한 많은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성경과 교양을 가르쳤고, 모 심을 때는 논에 가서 농부들과 모를 심기도 하고 혹은 밭을 매며, 뽕을 따기도 하는 등,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내는 장인께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교사로 근무하면서 처가를 도와야 했다.
 
고등학교와 교육대학에 다니는 처남들의 학비를 돕기 위해 버스도 드문드문 다니는 시골길을 걸어서 출근하고는 했다. 수학이나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였으나, 시골 중학교는 딱히 음악선생이 따로 없어서 가을 같은 때는 학교 운동회 매스게임을 연습시키거나 가정방문 하다가 아주 늦은 밤에 귀가하다가 산 짐승에 놀라 지금도 심장이 약해지기도 했다. 그때는 마을에 비상 전화 한 대만 있을 때라 연락할 길이 없어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얼마나 자주 했던가?
 
반면에 목회자 부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송구스러움이 있는지. 주일 예배 후에 사택의 문을 열고 원거리 교인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대접하기에 힘썼다. 그것이 점점 확대되다 보니 나중에는 가까운 교인들까지 그 식사 자리에 참여하기가 일쑤여서 우리의 가난한 사례비로서는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아마 교인들의 생각에는 교사 봉급의 상당액이 처남들의 학비로 지출된다는 점을 전혀 모른 채, 충분한 수입이 있으리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대접받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내는 주일이면 사렙다 과부처럼 양식통의 밑에 깔린 쌀을 퍼서라도 대접하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기적의 만나로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하고는 했다. 어느 때는 친구들이 놀러 왔다가 몰래 두고 간 선물에서, 어느 교우가 방아를 찧었다고 두고 간 푸대 속에서, 서울에서 휴가를 왔던 어느 교회의 중직이 주일날 설교의 은혜를 받았다고 몰래 아내의 손에 쥐어주고 가는 봉투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만나를 발견하고는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여하튼 교인들이 처음에는 다 미안스러워하고 성미라도 열심히 바치더니, 세월이 가고 습관이 되어 버린 다음에는 주일 예배를 마치면 사택을 서슴없이 찾아오고 점심을 먹고는 그냥 서재에 죽치고 앉아 밤예배까지 버티고 있음으로 우리 부부를 점점 지치게 했다. 사랑의 목회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주기만 해서는 교인과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더 병적인 교인만 양산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녀도 오냐오냐 키운 자식은 나중에 더 불효한 자녀가 되어 버리기 쉽다.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고 때론 사랑의 매도 아끼지 않아야 바른 자녀교육이 된다는 점이 목회에도 해당한다는 것을 초년 목회에서 일찍 깨달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가지게 된 것은 우리가 농촌교회를 떠난 후에 나타난 좋지 못한 결과 탓이었다. 우리가 떠나온 후, 다른 목회자들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장애 요소는 바로 전임자인 우리였다.
 
10년 동안 6~7명의 목회자가 정착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떠났는데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공통점은 '전임 목회자는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라는 내용이다. 몇 년 동안 이미 버릇이 된 교인들은 예배를 마치고 사택에 들러 대접받고 싶은 데 새로 부임한 사모님은 전혀 음식을 대접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목회자와 교우들 간에 삐걱거림이 생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인간에게는 먹는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기가 쉬운 치사스러움이 있다.
 
원거리에서 온 교인들이 집에까지 가지 못한 채 주변에 음식점도 없음으로 굶게 되는 경우, 전임 목회자 사모님의 사랑이 다시 그리워지게 될 것이고, 반면에 예배를 마치고 자기 식구들끼리만 염치 좋게 식사하는 지금의 목회자와 사모님의 인정 없음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지 않겠는가? 차마 그 말을 구지레하게 하지 않았을 뿐 다른 면에서 계속 약점을 잡을 것이 뻔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가 일반적인 교회에서 하던 목회 방법대로 했음에도 그 교회에서는 먹혀들지 않는 것은, 편식을 시킨 우리 부부 탓이다. 우리는 교인들로 하여금 대접하는 훈련, 목회자를 받드는 훈련을 시켜 놓음으로 누가 와서 목회하더라도 쉬울 정도의 교회를 만들었어야 옳았다. 아니면, 원거리 교인들을 위해 주일이면 식당을 운영하도록 제도를 만들었어야 했다.
 
1975년 가을걷이가 다 끝나가는 쓸쓸한 늦가을에 우리 식구들은 가곡리를 떠났다. 아내는 석 달 뿐이 안되는 막내를 트럭 앞자리에서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몇 번이고 마을을 되돌아보았다. 나도 많은 감회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7년 동안 상록수적인 목회, 사랑의 목회를 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후임자들이 수도 없이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장기적인 교회의 발전에 우리가 장애 요소가 되었다는 점에 죄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1993년)
 
4. 농촌교회 새벽기도
2009년 10월 하순 경, 우리 부부는 단풍 구경도 할 겸 경기도 수동에 위치한 축령산 휴양림을 목표로 여행을 떠났다. 춘천고속도로를 타고 마석 IC를 빠진 후 번화한 도시가 되어 버린 마석 읍내를 지나 1968년부터 1975년 가을까지 7년 동안 목회했던 가곡리를 향해 고개를 넘어가면서 우리 부부는 깊은 감회에 젖게 되었다. 교육전도사 때는 마석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버스가 없으면 한 시간여 걸어서 넘어가던 고갯길이었다.
 
어느 해인가는 아픈 딸아이를 부부가 교대로 둘러업고 마석 보건소까지 걷는다고 비 오듯 땀을 흘리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승용차로 10분도 안 되어 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당시는 온통 숲으로 덮인 산속으로 겨우 차 한 대 다닐 정도의 좁은 비포장 도로였는데 이제는 넓은 포장도로는 물론이고 고개 마루턱까지 아파트와 주택 단지로 변해 있으니 어찌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있으랴. 더 놀라운 것은 가곡리 지역의 대변화였다.
 
40여 년 전만 해도 마을은 초가집 중심으로 200여 호에 불과했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지나면서 차창으로 내다본 가곡리는 온통 울긋불긋한 지붕의 주택들과 제법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길에는 간판이 요란스러운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교회당도, 과거에는 30평에 불과한 스레이트 지붕의 낡은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300명 정도 모일 수 있는 제법 큰 건물로 변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는 이 골짜기에서 초년목회 시절을 보내면서 만났던 온갖 고생담을 늘어놓으면서 가슴이 젖어지는 것을 느꼈다. 농촌교회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가를 누가 묻는다면 우리 부부는 대답할 거리가 적지 않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사택은 방이 두 개일 뿐 아니라 나무로 불을 때면 온 집안이 연기로 자욱할 정도로 형편없었기에 겨울이면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다. 물론 부엌도 구식이요, 변소도 푸세식으로 교회와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그런 처지에 목욕실을 갖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장인께서 직장을 갑자기 퇴직하시는 바람에 아내의 중학교 교사 봉급을 대부분 처남과 처제의 학비로 보내야 했기에 남들이 보면 풍족할 것처럼 보이는 생활비도 늘 부족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초년 목회자인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은 새벽기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 교회가 새벽기도회를 5시나 5시 반에 시작하지만 그 당시는 새벽 4시 반에 예배를 드리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4시에 초종을 치고 교회당에 호롱불을 밝히어야 했기에 적어도 3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그러므로 결혼 초기였던 내게는 너무나 큰 고역이었다. 더욱이나 그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후에 새벽기도 중 가장 힘든 때가 월요일이었다. 전기가 들어온 후에 장로 가정을 통해서 흑색 텔레비전을 선물 받았는데 저녁예배를 드린 후에 우리 부부가 가장 기다리는 프로가 주말 명화(名畵) 시간이었다.
 
문화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던 산골에서 유명한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은 너무나 꿀맛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온종일 예배 인도하랴, 회의하랴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우리 부부는 눈을 비벼 가며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나면 거의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한참 잠이 많은 젊은 나이에 1시 가까이 잠자리에 든 입장에서 3시 30분에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그 시간에 일어나서 기어나가듯 하는 월요일 새벽 시간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느 때는 자명종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어나지 못하다가 교인들이 깨워서 허겁지겁 옷을 입고 나가서 횡설수설 설교를 한 적도 여러 번 이었다. 아마 모든 목회자들을 통해서 초년 목회 시 새벽기도회 실수담을 모으면 책 한두 권은 넉넉하리라. 어느 동기 목사는 기다리다 못한 교인이 와서 깨워 정신없이 나가 새벽 예배를 인도하다 보니 위에는 복장을 제대로 착용했는데 밑에는 파자마 바람인 것을 발견하고 진땀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새벽 예배 시간이 늦어버린 어느 목회자는 허겁지겁 나가서 예배를 인도하는 데 교인들이 자꾸 웃더란다. 알고 보니 러닝셔츠 차림에 넥타이만 매고 있더란다. 초년 목회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대부분 새벽기도라고 답할 것이 분명하다. 어느 해 동기 목사들 모임에서였다. 입이 걸쭉한 어떤 친구가 농담 반 진담 반 “어떤 놈이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이렇게 한국 목사들을 골탕을 먹이는가?”라고 떠들자 온 동기들은 홀이 떠나갈 듯이 웃어젖혔다.
 
그 웃음 속에는 그동안 새벽기도회로 쌓인 불만들이 풀리는 느낌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40대 중반에 넘어서서는 새벽기도회 시간이면 자명종 시계가 없어도 저절로 깨게 되었지만, 젊은 날에는 새벽기도회는 큰 올무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홍익교회 시무할 때는 밤 9시 기도회는 주로 내가 담당하고 새벽기도회는 부목사들 세 분이 돌아가면서 맡았는데, 나는 언제나 나름대로 새벽 설교를 준비하고 나간다.
 
어느 부목사가 시간이 되어도 미처 나오지 못하면 나가서 찬송 한 장 부르면서 기다리다가 다행히 나오면 ‘아무개 목사님 나오셔서 설교하시겠습니다.’하고 소개하고 내려오지만, 아닐 때는 설교까지 하고 마친다. 그날 담당했던 부목사는 나중에 큰 죄를 지은 양 사과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 때마다 젊은 날 TV를 통해서 영화를 관람하고 그다음 날 새벽이면 죽을 맛을 느끼며 예배를 인도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러므로 부목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럴 때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웃어줄 수가 있었다.
초년 목회자들은 새벽 예배에 늦지 않기 위해 몇 번씩이나 깨어 일어나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6시 훨씬 넘어서 깨었을 때 그 황당한 느낌을 젊은 목회자들은 수없이 경험한다. 초년 목회에서 대부분의 젊은 목회자들은 새벽기도라는 좁은 길을 통해서 목회를 배워간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5. 사찰 목사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기가 차기도 하다. "목사를 보고 사찰이라니." 지난 여름이었다. 도시의 큰 교회에서 중고등부 수양회를 하러 왔다. 그런데 100여 명이 넘는 숫자였다. 조그마한 예배당과 새로 짓고 있는, 겨우 슬레이트만 해 씌운 새 예배당,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천막 겸해서 겨우 수용은 됐으나 조용하던 농촌교회가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수영팬티 차림으로 왔다 갔다 하기가 예사이고, 기타를 둥둥거리며 유행가를 불러대고, 강대상까지 올라가서 야단이라 순진한 교인들이 기웃거릴 때마다 낯이 뜨겁다. 문명(文明)의 눈이 띄었다는 나도 그들을 이해하기가 어렵거늘 처음 믿기 시작하는 초신자들이 이렇게 요란을 떠는 반나(半裸)의 무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너무 기가 찬 모양이다.
 
그러니 이왕지사 빌려준 처지에, 또 그 지도자가 있고 보면 나서서 뭐라고 한다는 것도 도리가 아니어서 대부분 내 자신이 피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욱 난처한 것은 변소였다. 농촌교회의 작은 변소는 100여 명의 거대한 위(胃)들이 잔치 기분에 들떠서 한껏 섭취하는 터라 언제나 러시아워였다. 이런 상태로 금요일까지 갔을 때는 극치에 도달했다. 나는 변소 문을 열어 보고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발 디디는 곳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염치도 없이 뱃속에 소화된 찌꺼기들은 그 사정을 모르는지 학생들을 변소로 사정없이 몰아넣는다. 그러면 으레 문을 열어 보고 도망칠 듯 소리 지르다가도 어쩔 수 없이 들어가고는 한다. 그리고 나올 때에 에이 하고 침을 뱉거나 저주를 퍼붓는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뒤처리가 문제였다. 그들이 떠날 때 그냥 떠나 버린 것이다. 정말 미련도 없이 떠나버린 것이다. 뒤에 정리하는 학생과 어느 청년이 남아 텐트 등을 정리하고 있고, 전부는 대절 버스로 떠났다.
 
서재에 앉아 있자니 너무 끔찍한 생각이 들어 ‘에라’ 하고 용기를 내고는 헌 옷으로 갈아입고 헌 모자를 쓰고 나섰다. 마음을 오지게 먹고 변소 문을 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인간이여! 인간이여! 그러나 마음공부가 덜 됐지. 시체를 만져도 태연해야지. 처음에만 고통이었지, 그다음부터는 수월했다. 그런데 문제의 이야기는 이제부터이다.
 
작업 중일 때, 남아서 정리하던 지도자 중의 한 청년이 이러한 장면을 보자, 참으로 안되었는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실 나도 내심으로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나선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 청년은 사택으로 가더니 나의 아내를 불러냈다. 아내는 어리둥절해 나왔다. 청년은 헌 모자와 헌 옷을 보고서 일하는 나를 몰라보았든지 아내 더러, "저분은 교회 사찰인가요?“라고 물었다.
 
아내는 난처해졌다. 목사라니 위신이 안 서고, 미처 대답 못하고 있을 때, 청년은 당시 적지 않은 금액이었던 오백 원짜리 두 장을 내놓으면서 ‘사찰 사례비’를 지불하고는 쫓기듯 가버렸다. 아내는 울상이었다. 목사를 보고 사찰이라니 기가 막혔다. 농촌교회에 있으니 사람을 깔보는 것 같다. 그러나 잠시 후에 나는 익살이 생기었다. '사찰은 사찰이지.' 농촌교회 목사야 사실 사찰이지, 하는 생각이 나서 웃었다.
 
농촌교회 목회자는 초등학교 교사처럼 만능선수라야 적격자이다. 설교도 옛날이야기 하듯 하면서도 복음의 진수가 들어 있어야 하며, 풍금이 없이도 찬송을 인도해야 하고 심방을 가서는 때때로 농사일도 도와줄 만한 소탈성과 체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밝고 떳떳한 면이다. 그러나 남이 보지 않는 일을 시골 목회자는 하게 된다. 사찰 일이다.
 
한창 농번기에는 교인들이 재종을 쳐서야 모이기 때문에 텅 빈 교회당에 손수 불을 켜고, 자리를 정돈하며, 종도 내 손으로 쳐야 한다. 때로는 못질도 해야 하고 겨울에는 때때로 난로를 피우느라 손이 새까맣게 되고 청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생각은 나로 하여금 도시교회에서 높은 사례비와 으리으리한 저택, 비싼 승용차 등, 상등(上等) 대우받는 목회자들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농촌 목회자의 처지를 생각하며 울분이 솟구쳤다.
 
더욱이나 보조금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도시교회를 찾아 구걸하다시피 해야 하는 모습들, 그리고 농촌교회가 이제는 오직 도시교회의 휴양 터가 되어버렸다는 분노가, 도시교회의 횡포들이 가슴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 옷을 갈아입고 서재에 돌아와 창문에 비친 천마산(天摩山)의 높은 봉우리를 보면서 깊이 깨달아지는 것은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거룩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결코 섬김을 받던 자가 아니라 섬기던 자인데, 어느새 나부터 이런 물이 들었나 하는 자책이었다.
('월간목회'에 게재했던 글)
 
6. 진땀 흘린 심방 설교
미신사회에서 깊이 젖은 생각 탓인지 나이가 연로한 신자들은 목회자가 심방 시에 하는 설교를 무슨 점괘(占卦)나 받는 양 생각하는 때가 있어 목회자를 당황하게 할 때가 있다. 또는 목회자가 자기 가정에 와서 하는 설교를 통해서 자기에 대한 목회자의 심정을 헤아려 보려는 경향이 있기에 심방 설교에 어려움을 느낀다. 갓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목회할 때였다. 한 번은 어느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간 적이 있었는데 본문으로 택한 성경 구절에 착각을 일으켜서 내용이 그 가정의 상황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 가정은 화평(和平)을 긍지로 삼고 있는 가정이요, 또 늘 자기 가정은 그렇게 인정받고 있다고 믿는 터였다. 그런데 내가 택한 본문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이었다. 시 35편의 말씀인데 그 내용은 다윗이 사울의 모함에 몰리어 은둔 행각을 다니는 동안에 너무나 괴로워서 중심을 다해 부르짖는 기도였다. 내용은 ‘어서 속히 원수를 물리쳐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내용은 격렬한 것이었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몹시 당황한 것은 그 가정보다 나였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구절이 하나쯤 나오겠지 생각하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 가정에 부합되는 내용이 나타나기는커녕 점점 그 내용이 격렬해 가고 있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읽다 보니 마지막 28절까지 되고 말았다. 그 본문을 설교하는 나는 완전히 낭패감에 빠졌다.
 
진땀만 바짝바짝 나고 입은 이 소리 했다가 저 소리 했다가 횡설수설로 가득 찼다. 그에 따라 상대방의 얼굴은 의아와 어떤 불만으로 가득 찼던 그 일이 지금도 내 얼굴을 붉히게 한다. 설교를 마치고 아무래도 큰 오해가 생길 것 같아 비록 목회자의 위신은 떨어져도 내가 착각을 일으킴으로 이런 결과를 빚었음을 사과하자 그 때야 그 집사님이 얼굴을 펴며 한바탕 웃어넘기므로 오해를 모면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후부터 심방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월간목회'에 게재했던 글)
 
7. 나의 목회와 문학병
나의 초년목회에서 앓고 있던 병이 있다면 문학병(病)이었다. 특별히 여름날에 쏟아지는 폭우를 보거나 8월 초부터 시작하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면 내 심연 속에 가라앉았던 문학에 대한 열병이 나의 삶을 휘저어 놓고는 했다. 11월이면 신문사마다 ‘신춘문예(新春文藝)’를 통해서 문학 지망생들에게 데뷔의 길을 열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더했다. 그러기에 매년 여름만 되면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면서 원고지를 앞에 두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내가 문학에 눈을 뜬 것은 군대 시절이었다. 그전까지는 다만 책이 좋아서 닥치는 대로 읽었을 뿐 무슨 작품을 쓴다는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 1년 때 입대하면서 문학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1년 반만 복무하면 제대의 특혜를 주는 학보병(學步兵) 제도가 있어서 지방대학 1년을 마치고 친구들과 지원하여 논산훈련소로 가는 밤 열차를 탔다. 군대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동안 가정과 학교, 교회를 맴돌면서 순진함의 동정(童貞)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논산훈련소에 입대하는 순간부터 군홧발에 짓이기고 말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욕지거리를 귀에 박힐 정도로 들으며 강요되는 훈련에 시달려야 했다. 철조망에 갇힌 채, 구보, 점호, 사격, 군가, 단체기압, 배고픔 시달리며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첫 배치를 받은 곳이 북한 선전 스피커 소리가 쩌렁쩌렁 들리는 임진강을 마주한 최전선 부대였다.
 
그곳에서 민족과 세계 역사의 눈이 개안(開眼)되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지는 임진강물을 보면서 핏물처럼 느껴졌다. 미·소·중·일 4대 강대국 틈에서 끝없이 고난받아온 민족, 전쟁의 참화에서 죽어간 민초들, 분단된 조국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순진의 비늘로 가려있던 눈이 뜨고 있었다. 그 안타까움을 글로 쓰기 시작한 것이 문학 수업의 시작이었다. 더 나가서는 제대하고 복학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여기저기 투고하기 시작했다. 결과, ‘새생명’이라는 기독교 잡지와 경북대학교 학보지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3년과 신학대학 1학년까지 응모한 신춘문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문학 수업을 대학교 국문학과나 어느 소설가에서 사사(師司)를 제대로 받았더라면 하는 생각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독학으로 배운 문학 수업이라도 글을 쓸 수 있는 기초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가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대신 신학교 때부터 학보지 기자로, 편집국장으로 마음껏 글을 쓰게 되었고, 더 나가서는 한국 교계에서 소신껏 많은 글을 쓸 수 있게 됨으로 많은 책을 출간한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0대 초반에 소설을 포기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음에도, 장마가 시작되고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때가 되면 다시금 소설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고는 했다. 서점에 가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책이 신학적인 책이 아니고 소설이다. 그것은 오직 목회에만 전념해야 할 때 외도(外道)와 같은 행위였음에도 말이다. 아니, 이제 인생의 종반전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에도 내 심연 저 밑바닥에서 통증처럼 조그맣게 퍼덕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2010년)
 
8. 성탄절과 새벽송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많다. 성탄절 전야에 장년 교우들 앞에서의 교회학교 발표회 시간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인정받아 연극 시 무대 뒤에 장식할 거대한 그림을 하루 온종일 그리던 일이며, 일주일 내내 연습하던 찬양대 시간과 간식 시간들, 중고등부와 청년부간 친교회 시간과 선물 교환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탄절 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새벽 송이다. 거의 2000년도 이후부터 사라진 교회 행사가 되고 말았지만, 그 당시는 모든 교회가 의례적으로 새벽 송을 돌았다.
 
고등부 때부터 시작하여 60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니 거의 45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탄 전야에 교회학교 발표회와 친교회가 끝나고 정리가 끝나는 대로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식당에서 뜨끈한 국밥이나 만둣국으로 몸을 덥힌 후 여러 대로 나누어 임시 지휘자와 구역장의 인도를 따라 수십 가정의 집을 집마다 방문하여 찬송을 부르고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가정에 가서 팥죽이나 음식을 먹고 끝나는 행사이다.
 
사실 새벽 송은, 들에서 양을 치든 목자들이 들었든 천사들의 찬양과 구주탄생 예고에 감동하여 구유로 달려가 아기 예수님을 맞이한 것처럼, 모든 교우가 깨어 있다가 대원들이 문 앞에 와서 찬양할 때 주님을 영접하는 심정으로 문을 열고 함께 찬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가정은 찬양을 시작하면 즉시 나와 맞으며 즐겁게 찬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느 가정은 찬양을 다 마치고 떠나감에도 나오지 않거나 떠난 후에야 부리나케 나와서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볼 상 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새벽 송은 떠나기 전에 준비할 일이 많았다. 대원들을 인도할 등(燈)과 각 가정에 주는 선물을 담을 부대를 준비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대원들이 좋은 소식을 전하던 천사들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경건한 태도를 가지는 것과 찬양할 때도 진정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사전에 주지시켜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장년이나 청년층이 너무 피곤하다는 이유로 불참하고 대신 대다수가 중고등학생들 위주로 이루어지다 보니 너무나 시끄럽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어 교회 지도층으로부터 ‘새벽 송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느 때는 눈이 너무 많이 온 상태에서 노면이 얼어서, 홍익교회처럼 산동네나 좁은 골목이 많은 지역을 다닌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지만, 천사들을 대행한다는 사명감과 성탄절이라는 낭만이 곁들면서 나름대로 신이 나는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담임목사가 된 이후에는 새벽 송 대열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성탄절 오전 예배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천 고향교회에서와 농촌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활동할 때는 새벽 송에 반드시 참석했다. 농촌교회 때는 너무 눈이 많이 쌓여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며 고생한 기억도 잊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새벽 송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각 가정이 정성껏 준비한 선물들이다. 그 선물들이 부대 자루에 채워갈 때 모든 대원들의 마음은 뿌듯해지는 것이다. 그 선물은 나중에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불우이웃 기관에 전달되기도 한다. 어느 때는 다른 교회가 먼저 찬양하고 선물을 가져가는 난처한 일도 있다. 몇 시간에 걸쳐 다니다 보면 대부분 대원들이 지치게 된다. 그러다가 교회가 지정해준 마지막 가정에 가면 뜨끈한 음식들을 통해서 몸을 녹이는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교회에 돌아와서 이 구석 저 구석에 웅크리고 잠을 자는 맛도 일미다. 그래서 홍익교회에 부임하고 ‘성탄절을 가족과 함께’라면서 성탄절에 예배만 드리고 제반 행사를 줄이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감에도 성탄절 전야에는 교회학교 발표회와 각 기관 친교회 시간을 장려했고 새벽 송 때는 친히 대원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홍익교회 시무할 때 보면, 각 기관 별 친교회에 나이가 많은 장년들이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회원 간에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을 본다.
 
특별히 늦은 나이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분들이 더 신나 하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청소년은 성탄절의 즐거운 경험들이 쌓이면서 기독교인의 자리를 굳히기도 한다. 일반사회가 성탄절에 점점 타락적인 모임들을 확대해가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너무나 문화적인 축제가 별로 없는 것이 아쉽다. 사실 축제는 인간 중심에 빠지기도 쉽게 하지만, 소속감과 공동체의 깊은 결속을 만들어 주는 연결고리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벽 송이 주는 문제는 성탄절 오전에 드리는 대원들의 태도에서 보인다. 예배 시간 내내 반수면 상태이다. 설교 시간에는 아예 잠에 빠져 있다. 거의 날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무쇠 몸이 아니고야 견딜 수 있겠는가? 여하튼 새벽 송이 주는 부작용도 적지 않지만, 성탄절에 가까워져 오면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새벽 송이다.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가 새벽 송 대열에 참여하여 눈길을 걸으며 각 가정을 돌아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가정에서 맛보던 만둣국이나 팥죽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이유는 나이 탓일까?(2011년)
 
9. 학부형 노릇과 농촌교회 아쉬움
은퇴한 후 2009년부터는 본의 아니게 학부형 노릇을 하고 있다. 아내가 금년 봄부터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서울장신대학교에 재학하고 있기 때문이다. 2학기 들어서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집중적으로 수강 신청을 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때문에 아침 7시 30분에 덕소에서 승용차로 통학버스 정류장이 있는 상일동까지 실어다 준다. 그리고 수업이 모두 끝나는 시간 저녁 6시 30분 맞추어 학교까지 데리러 가야 한다.
 
통학버스는 오후 5시 30분에 떠나기 때문에 혼자 돌아오려면 다른 학생들의 승용차 신세를 지거나 하남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20여 분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10월인 요즈음은 오후 6시면 어둑해 짐으로 그 먼 거리를 터덜터덜 걸어서 버스를 타고 다시 하남에서 덕소로 오는 버스를 갈아타고 온다면 거의 밤 9시쯤이나 도착하는 곤욕을 치러야 하므로 내가 자청하여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것이다.
 
때로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맞추어 학교 캠퍼스를 찾아가면 수업이 아직 끝나지 않아 숲이 우거진 정원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어느 날인가, 이미 어둑해진 정원 벤치에 앉아 아내가 수업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수줍은 모습을 드러낸 숲속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노래하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문득 농촌교회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거의 40여 년 전 시절이다.
 
신학대학 시절(1976년), 교육전도사로 처음 부임하였던 곳이 경기도 마석에서 산골로 10리 들어간 가곡교회였다. 천마산 아래 위치한 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그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었다. 아내와 결혼하고 신혼살림을 차리고 그곳에서 세 남매를 낳고 길렀다. 아내는 가곡교회에서 다시 15리 떨어진 수동(물골안)이라는 곳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그 동리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 밑에서 예배를 드리는 상태였고 전화는 마을 이장 댁에만 한 대 있을 뿐이었다. 버스도 하루 서너 번 지나감으로 마석에서 장이 서는 날이면 대만원이라 차라리 10리 고갯길을 걸어 넘어가는 것이 심간이 편할 정도였다. 그때를 비하면 40년이 지난 지금은 상상을 초월한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집마다 전화는 물론이고 개인마다 전부 핸드폰을 소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둑한 캠퍼스에 앉아서 농촌교회를 생각하면서 문득 너무나 진한 아쉬움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당시 아내는 15리 떨어진 중학교를 출퇴근하면서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것을 물론이고 때로 학교에서 학예회나 가을 운동회 개최 시에는 매스게임이나 농악놀이 등을 도맡아서 가르쳐야 했음으로 버스가 끊긴 밤늦은 시간에 걸어서 귀가하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때는 밤늦은 시간에 돌아오다가 야생 살쾡이에게 시달림으로 심장병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세 남매가 잉태함으로 무거운 몸으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내가 오토바이라고 사서 운행함으로 아내가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는 뒤에라도 싣고 올 수 있었지 않을까? 왜 그런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작해야 걸어서 마중 나가는 궁색으로 끝냈을까?’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라도 아내에게 보상하는 심정으로 아침저녁으로 승용차 기사가 되어 통학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숲 사이로 바라보는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빛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하나님, 지금까지 40여 년간 사역 중에 아내가 헌신적으로 내조한 것을, 이제라도 조그마한 외조를 통해서 보상할 수 있게 된 것을 참으로 감사합니다.”(2009년)
 
10. 변방 목회 40년
2012년 말부터 선배인 유경재 목사님과 함께 ‘원로목사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다. 그 방송을 위해 몇 분과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은 ‘나의 목회 40년은 변방 목회였다’는 사실이다. 먼저 원로들 세 분(강동수, 이형기, 김종렬 목사)과 인터뷰를 마쳤고 네 번째로 연동교회 원로목사인 김형태 목사와의 만남을 1월 말로 예정하고 있다. 주로 유경재 목사님이 주관하고 나는 그분들과 인터뷰하기 위해 질문지를 작성하는 일이다.
 
여기저기서 수집한 자료를 꼼꼼히 검토하면서 그분들의 인생과 목회를 살펴보면서 진수(眞髓)를 찾아내야 하는 작업이다. 공교롭게도 네 분은 하나같이 일찍 외국 유학을 경험한 분들이었고 한국교회 중심부에서 활약한 분들이라는 점이다. 소위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신 분들이다. 신대원 시절부터 수준 높은 도심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시작해서 부목사, 이어서 미국이나 독일에서 학위를 받는 코스를 밟았다.
 
그분들을 인터뷰하고 돌아오면서 왜인지 마음 한구석에서 나도 그런 코스를 밝았더라면 훨씬 화려한 목회 경력을 쌓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끼고는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신학교 시절부터 멀리 변방의 코스를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가곡교회 교육전도사 일을 했다. 토요일 밤에는 ‘상록회’라는 청소년 모임을 지도하고 주일이면 교회학교 예배 인도, 11시 아침 예배 시간에는 성가대 지휘, 밤 예배 설교, 월요일에는 가정 심방 등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졸업 후에는 그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어 5년을 보내고 나니 30대 중반이 된 것이다. 7년의 사역 후 남은 것은 허탈이었다. 가장 희망을 걸었던 청소년들이 70년대 초 불어 닥친 경제 근대화 바람을 타고 직공이나 버스 안내원, 가정부가 되어 서울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 중등교육도 받지 못한 저들을 교육하기 위해 교회는 재건학교를 만들고 나는 교사로서 일주일 내내 동분서주 했지 않은가?
 
그러나 어느 날 새 떼처럼 날아가 버리고 나이 많은 이들만 고목처럼 교회에 남게 되니 의욕이 상실될 수밖에 없다. 다른 목회자들은 그동안 학위를 쌓는 등 차근히 스펙을 쌓고 있었는데 말이다. 다행히 그처럼 의욕이 상실된 때에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서 홍익교회로 목회지를 옮길 수 있었다. 당시 홍익교회는 장년 회집 수에서는 농촌교회와 비슷했고 청계천 하류 판자촌 일대 지역으로 빈촌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그 교회에서 새로운 의욕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에는 많은 중,고등생들이 출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임하는 때부터 불철주야 쉬지 않고 기도하며 교회 성장과 교회 건축에 전력했다. 장년 50여 명에서 500명 이상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는 동안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대부분 목회자가 일 년에 몇 주 정도 외국에 드나들며 명예박사 학위(D.Min)를 취득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학위 취득보다는, 많은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보람을 찾으려 했다. 그런 외고집으로 변방 코스를 돌다가 은퇴했다. 화려한 코스를 밟았던 분들을 통해 그들이 쌓은 실력과 업적에 비해 너무 미약한 자신을 보면서 마음 한편으로 아쉬움은 적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변방을 따라 사역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나마 위로받고는 했다.
 
높고 화려한 왕궁이나 권세가 등등했던 상류층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가정을 통해서 오시지 않고 낮은 자들 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가장 보잘것없는 작은 고을,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높은 학문과 심오한 율례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니고 변방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오가시며 가장 천하고 낮은 자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돌보시며 치유하시는 사역에 전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코스를 그림자이나마 밟고 따르려 했던 점이 보람되지 않았나 스스로 자위(自慰)해 본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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