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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목회 40년(1)
2024년 05월 31일 (금) 17:56:31 김태복 목사 www.cry.or.kr
제 1 장 큰아들 김용민 목사와의 대담
(편집자 주: 문서 대담이어서 답변도 존대어를 사용했습니다.)
 
1. 아버지가 태어나신 1941년 강원도 춘천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1941년이라는 시간과 강원도 춘천이라는 공간에 대해 말입니다.
 
(답) 내가 1941년 3월에 출생했는데 그 시기는 일제(日帝)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때였습니다. 1941년 10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들어서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은 터지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를 차례로 점령하는 일본에게 미국은 모든 물자 수출금지령을 내렸고, 미국에 있는 일본 회사들의 재산도 몰수하였습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일본에겐 최악의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 중이던 일본에게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굴복하지 않고 진주만 폭격을 감행했습니다. 일본의 야망은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강탈하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일본이 기선을 잡았으나 미드웨이 해전을 전환점으로 대세가 기울어갔습니다. 1945년 미국은 오키나와 섬을 점령한 데 이어 도쿄에 대한 야간 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의 대도시들을 공습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각각 투하함으로 일본 천왕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올인 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파쇼 통치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학원 병영체제 전환, 학생의 노동력 동원, 문화재 강탈, 도공들 납치,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강제 연행, 심지어 12살 어린 여자아이까지도 위안부로 강제 납치, 창씨개명, 신사참배, 식량과 전쟁물자 갈취, 요주의 인물 탄압과 살해 등등 극도의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나는 그런 참담한 시대에 태어나 유아 시절과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자주 방공호에 들어가 공포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인장업(印章業)을 운영하시는 평범한 서민에 불과하기에 일제의 직접적인 박해는 받지 않았으나 민초들이 겪는 고난 속에서 지내야 했고, 혼란스럽던 해방과 아울러 만 9살 나이에 맞았던 6.25 전쟁의 참상으로 큰 충격을 겪어야 했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춘천은 전쟁 이후에는 동부전선의 중심 도시여서인지 육군 보충대와 많은 부대들이 도시 주변에 주둔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중심 지역 20만 평에 미2사단 헬리콥터 부대가 차지할 정도로 군사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외출이나 휴가 나온 많은 병사들과 미군들, 그들 상대로 몸 파는 반라(半裸) 여인들과 음란한 그림으로 가득한 잡지들이 청소년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 타락한 분위기를 피해 다니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2. 1941년생을 어떻게 분석하세요? 대표적인 인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꼽히는데 또 어떤 분들이 있는지 말씀해 주신다면요. 이 세대의 공통된 의식이나 지향점 이런 것이 있다면...
 
(답) 2016년 박근혜 정권 말기에는 70대가 온 나라를 흔들었습니다. 김기춘(1939년생), 김종인(1940년생), 한광옥(1942년생), 박지원(1942년생), 이원종(1942년생), 남재준(1944년생), 서청원(1943년생), 반기문(1944년생)이 정치의 주역이나 된 듯이 활약했습니다. 또한 촛불집회에 맞서 태극기를 든 60-70대 노인들이 거센 집회를 벌임으로 온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나는 제 또래들인 올드 보이들의 망령 비슷한 행보들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했습니다. 내가 목회를 60대 중반에 그만둔 것은, 그 나이가 되면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그런 분들이 물러가고 60대의 대통령과 50대 중심의 내각이 구성되어 새 시대를 열어가는 모습은 안개가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열린 느낌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 세대의 사명은 끝난 것입니다.
 
나는 ‘한국교회 이대로 안 된다.’라는 책에서 각 세대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사명은 조국의 독립이었다면,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명은 독립 국가였습니다. 또한 우리 형님들의 사명은 민주주의 국가이었다면, 우리 세대의 사명은 부강국가였습니다. 이어서 우리 동생들의 사명은 민주화이었다면, 우리 아들들의 세대의 사명은 남북통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940년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의 사명은 부강국가였습니다. 4․ 19의 혁명 이후의 혼란을 핑계로 총칼로 5․16을 일으킨 군사정권이 국민들에게 강제로 쇠뇌(洗腦) 시킨 것으로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구호는 우리 세대에게 너무나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배고프게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말기와 혼란한 해방정국 가운데 유년기를 보냈다면, 6.25 전쟁 전후에 소년기를 보내면서 극심한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구호미였던 안남미(安南米)가 전부였고 어쩌다 운 좋은 경우에는 미군(美軍)이 내다 버린 꿀꿀이죽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덕지덕지 꿰맨 낡은 내의와 양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자란 우리에게는 오직 소원이 하얀 이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어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희망의 노래였습니다. 그러한 꿈을 이룩하려고 우리 세대는 목숨을 담보로 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서양인들의 멸시를 삼켜가며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혹은 중동의 열대지역에서 근로자로 파견하여 노동하며 달러를 모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피땀 흘려 모은 달러들이 밑거름이 되어 한국 경제의 급성장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그를 통해서 하얀 이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어 보는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 세대의 영웅이었습니다. 기아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대한민국 60년의 가장 위대한 성취로 꼽는 해방둥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해방둥이들은 박정희를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았다.
 
55명의 해방둥이에게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박정희 11명, 안창호 5명, 김구 4명, 이순신 3명이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세대는 가장 어린 나이에 배고픔에 너무 시달렸던 경험을 상처처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박정희와 닮은 인물을 우리 또래의 신화적인 인물 이명박 대통령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30대 나이에 현대기업의 사장을 역임했고 서울 시장을 역임하면서 오늘의 청계천과 버스 전용차선을 만든 인물, 그가 대통령이 되면 또 한 번의 경제 신화를 이룩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2008년 대선에서 우리 세대는 앞장서서 당선을 도왔습니다. 한국교회도 장로 대통령을 세우자는 여론몰이를 대대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매스컴의 평가입니다.
 
<'경제 살리기 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의 경제성과가 4단계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17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2011년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제성과 분야 순위가 지난해 21위에서 올해 25위로 4단계 하락했다. 국제투자(53위), 물가(52위), 기업관련 법규(44위), 사회적 여건(38위) 분야가 취약한 것으로 나타나 경제성과 하락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더 나가서는 이명박 정권의 주력 사업이었던 4대강이 엄청난 재정파탄은 물론이고 상상을 초월한 환경오염을 몰고 왔고, 국정원을 통한 국정농단 비리들이 구정물처럼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또한 장로 대통령을 선출하자고 앞장서서 독려했던 한국교회 목회자 한 사람으로 국민들과 교인들 앞에 너무나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3. 1950년 한국전쟁을 만나셨을 때는 유소년기였을 텐데 전쟁에 대한 기억은 어떠셨어요?
 
(답) 6.25 전쟁은 1950년 주일 새벽 4시에 발발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9살 나이로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날이 주일이었는데 새벽부터 춘천 북쪽으로부터 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함으로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전쟁이 일어났다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오리나 떨어진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앞동산에 올라 포 소리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춘천은 삼팔선에서 30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금은 휴전선 아래 있는 화천, 양구, 인제 등이 그 당시는 모두 북한 땅에 속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춘천은 거의 최전방에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오전부터 보따리를 진 피난민들이 춘천 외곽에 있는 우리 동네를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전하는 소식은 엄청난 수의 인민군과 탱크가 몰려옴으로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대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도 간단한 짐들을 준비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이 1953년까지 이 땅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피난길을 떠났던 대부분의 시민들은 포위당하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동네 친구들은 3개월 동안 인민학교에 다니면서 공산주의와 ‘김일성 장군’ 노래를 배워야 했습니다. 10월 초인가, 국군이 진주함으로 잠시 평화가 왔으나 다시 중공군이 개입함으로 1.4 후퇴 시, 그 추운 겨울에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피난 노정은 강촌과 팔봉산을 거쳐서 원주 문막 취병초등학교에 설치된 수용소까지 수백 리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10살 된 내게 주어진 짐은 소금 석 되였습니다. 피난 가다가 배고프면 개울가나 산 밑에 솥을 걸고 밥을 짓고 주변 밭에서 얼어버린 푸성귀를 뜯어다가 소금을 넣고 국을 끓여 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지금도 피난 수용소 천막학교에서 공부하던 생각이 납니다. 어른들조차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른 채 강대국들의 농간으로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고 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어제까지 ‘형님 아우’하던 사이에 서로 고문하고 죽이는 끔찍한 만행에 동참했으니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어린아이들의 백지장 같은 심성에 그려진 전쟁의 상흔(傷痕)은 엄청났습니다. 그러한 상처를 문학만이 풀 수 있는 출구라고 느꼈는지, 우리 세대는 문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김승옥(1941년생), 조정래(943년생), 황석영(1943년생), 이청준(1939년생), 김주영(1929년생), 최인호(1945년생), 이문열(1946년생), 김훈(1948년생) 등등.
 
4. 아버지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어떤 것인지요?
 
(답) 나는 모태(母胎) 신앙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머니의 일생을 요약하면 ‘오직 신앙’입니다. 아버지의 고집도 대단하지만, 어머니의 신앙만은 꺾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인장업(印章業)을 하시면서 모은 돈으로 집 주변의 논밭을 매입하시고 틈틈이 농사 일을 하신 분입니다. 한 번은 동네 사람들과 논에 모를 심는 순서를 정했는데, 하필이면 우리 집 순번이 주일로 정해졌습니다.
 
어머니가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해 결국 다른 날로 모를 심게 만들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서 어머니와 우리 자식들을 향해 밤늦게까지 술주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온갖 반대 속에서도 신앙적으로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훗날에는 아버지를 교회로 인도해 장로직까지 맡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또 매일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식구들이 모두 참석하도록 강권하셨습니다. 당신 스스로는 날마다 도보로 5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시면서 새벽기도회를 다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분으로 한글도 교회 나오셔서 익히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6남매는 어머니로부터 ‘공부 하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주일성수와 가정예배 참석하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야 했습니다. 만약 주일을 범하는 날이면 얼마나 혼쭐을 내시는 지, 그런 어머니 때문이라도 교회를 빠질 수 없었습니다. 먼 길임에도 주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출석하다 보니 교회 어른들로부터 칭찬받고는 했기에 힘든 줄을 모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회의가 오기 시작한 것이 사춘기 때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중학교 때는 성탄 전야에 교회학교 주최로 축하순서 중 연극을 할 때면 내가 배경 그림을 그리고는 했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탕자의 비유’로 탕자가 돼지울간 옆에서 배고파 고통받는 모습의 그림입니다. 또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중2년 때부터 맡게 된 것이 주보 제작이었습니다.
 
지금은 컴퓨터로 멋지게 제작할 수 있지만, 당시는 주보를 만들기 위해 줄판(가리방)에 기름 원지(原紙)를 놓고 철필로 글씨를 써서 등사기에서 잉크를 묻혀 밀면서 주보 300장에 만들어야 했었습니다. 돕는 친구가 있을 때는 다소 수월했지만, 맡은 친구가 다른 일로 빠질 때면 너무나 힘들어 울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나 너무 힘들었던 것은 노인 목사님 때문이었습니다. 주보를 만들려면 먼저 목사관에 가서 순서지 초안을 받아야 하는데, 어느 때는 누구와 장기를 뛰면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어느 때는 30분, 1시간을 기다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빨리 만들고 집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배고픔을 참고 무작정 기다리다 보면 속으로 분노가 치미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중고등학생들이 장년들과 함께 예배드렸는데 그러한 노인 목사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과연 준비 안 된 설교 탓인지, 지금도 귀에 남은 설교 내용은 삼국지와 항우 유방 이야기뿐입니다. 설교 시간에는 내내 딴 생각을 하거나 주보에 낙서하고는 했습니다. 신앙의 회의가 오고, 어머니의 강권적인 신앙에도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 학생회 활동을 함으로 어른들로부터 장래 ‘목사감’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책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야간부, 육사 불합격, 지방대학, 최전방 군 생활, 형의 돌연한 죽음 등을 겪으면서 진정한 신앙의 눈이 개안(開眼)되고 목회자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아버지 시대에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의미였습니까? 절망적 시대 환경에서 나를 구원해 줄 돌파구였나요?
 
(답) 해방의 혼란기와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서 모든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모든 교회의 설교자들은 대부분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에 불과하고 천국 가는 길만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해 죄를 회개하고 세상 욕심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한참 인기 있던 부흥사가 이성봉 목사님이었는데,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라고 부르는 그분의 허사가(虛事歌)가 큰 인기였습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은 위로받기 위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가 일어나면서 내세의 축복보다 현세의 축복을 더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 교회와 기도원은 차고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복과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당시에 강조되기 시작했던 현세의 축복은 기복주의에 기인되었다는 점입니다.
 
진정한 신앙 자세는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복주의(祈福主義)는 하나님을 통해서 복을 받으려고 할 뿐 하나님 중심이 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너나없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고 열광적으로 합창하며 너 나 없이 부자가 되기 위해 혈안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를 발맞추어 한국교회에 나타난 현상이 로버트 슐러와 조엘 오스틴의 번영신학 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그런 신학을 꽃피운 분은 조용기 목사인데, 그는 요3서 2절을 중심하여 삼중축복을 강조했습니다. 가난과 병고, 실패에서 탈피하기를 목말라 하던 서민들에게는 굉장한 복음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1970–1980년대 당시에는 교회마다, 기도원마다 인파로 넘치면서 금식하고 철야하며 복을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한국 사회는 1980년대 후반부터 엄청난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을 받으려는 욕망만 부축이고 나눔을 가르치지 않은 결과, 한국교회는 기복주의에 병드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성숙한 기독교인의 자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만큼 나눔의 크기도 커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기복주의로 병든 한국교회는 잎만 무성했습니다. 겉으로는 엄청나게 부흥성장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열매 없는 무화과 꼴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한국교회는 검은 수단으로 떼돈을 모았거나 불로소득으로 졸부가 된 사람들조차도 ‘축복받은 성도’라고 추켜세우고 반대로 가난하고 병든 교인들은 ‘축복받지 못한 성도’로 취급받는 기막힌 풍속도가 한국교회 안을 얼룩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로 엄청난 질책을 받는 한국교회가 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6. 춘천고등학교 야간을 다니시며 철도 길을 따라 멀리 돌아가신 것으로 압니다. 야간 다닐 때 할머니가 좌판 장사를 시킨 것으로 압니다. 결국 접게 되셨고요. 그 과정도 설명해주세요.
 
(답) 6남매의 둘째인 나보다 세 살 위의 형이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서 우리 가정의 큰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 년도 못 되어 난데없이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형의 고집은 대단해서 아버지나 어머니 누구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자연적으로 희생타가 된 나는 고등학교를 야간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야간부를 다니면서 가장 힘든 일은,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그들과 만나는 일이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그 당시는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이 야간부에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피해 남춘천역에서 춘천역으로 가는 철길을 따라 춘천고등학교까지 등교하고는 했습니다. 당시는 전기상태가 안 좋아 자주 정전이 발생함으로 공부 중간에 돌아온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생각에는 내가 앞으로 농업이나 상업 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신지, 인장업을 하시는 아버지 가게 앞에 좌판을 벌이고 낮에 장사 일을 시켰습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기르던 소의 꼴도 베어 오고 겨울이면 십리 길을 마다치 않고 나무도 해오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도 거두었기 때문에 그 집안의 경제를 책임질 아들로 제가 적격이라 생각하셨던 같습니다.
 
장사 일은 좌판에 양말이나 비누 등 일용품과 잡지 등을 놓고 파는 것이었지만 3개월 만에 손해만 보고 장사를 접고 말았습니다. 사실 부끄러움이 많은 사춘기 소년에게는 너무나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내가 장사에 수완이 나타나 나름대로 수입을 올렸다면 내 인생의 판도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결국 형이 대학을 포기함으로 나는 야간부를 1년 정도 다니다가 주간부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학이나 과학의 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지 나중에 육사 시험에 불합격했습니다. 여하튼 가난 때문에 생긴 청소년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목회하면서 청소년 시절에 고생한 경험들이 어려운 교인들의 형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7, 춘천농과대학(현 강원대)에 입학하셨고 도서관의 모든 책을 다 읽어보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나는 대학에 입학하는 때부터 가장 큰 목표는 그 대학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교양서적은 모두 독파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지방대학에 다닌다는 열등의식에 대한 어떤 시위행위와 같은 태도였다. 입학식을 마치고 나는 곧장 도서관으로 가서 열람 카드를 뒤적이며 독서계획을 수립했고 그다음 날부터 강행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두껍고 난해한 책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서도 오직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고 있다는 성취감만으로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어느 때는 진도가 너무 늦음에 성급한 나머지 껑충껑충 뛰어가면서 남독(濫讀)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내가 전공하고 있는 농학(農學)을 강의받는 동안에도 강의실 뒷좌석에 앉아서 다른 책들을 읽기 일쑤였습니다.
 
칸트나 헤겔의 책들을 붙들고 낑낑대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게는 꽤나 대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상당히 많은 책들을 남독하고 난 뒤에 얻은 것은 산만한 의식구조를 가진 아웃사이더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독서의 목적이 순전히 진리를 추구하려는 진지한 구도자의 자세가 아니고 지방대학을 다닌다는 열등의식을 탈피하려는 흑심 때문인지 지식의 혼란만 자초한 것같아 너무 아쉽다.
 
8. 학보병으로 군 입대하셨는데 학보병은 무엇이고 군 복무 중 기억에 남는 일을 말씀해주시면요.
 
(답) 학보병(學步兵)이란 당시 대학생들에게 주어졌던 특혜였습니다. 일반 청년들이 3년 복무하는 동안 1년 반만 근무하고 제대하는 제도였습니다. 대신 학보병은 최전방에서 복무해야 했습니다. 내가 제대한 무렵인 1963년에 학보병 제도는 폐지되고 대신 R.O.T.C 출신 장교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군대 가기 전까지는 집과 학교와 교회 외에는 거의 다른 곳으로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욕설과 음담패설과 강압이 난무하는 군대조직에서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복무 기간 동안 전쟁의 악취를 맡았고 극한 상황 속에서 노출되는 저 추악한 인간의 저열한 본능을 보면서 깊은 혐오감으로 치를 떨고는 했습니다. 병사들은 추잡한 섹스 이야기를 주로 화제로 삼았고, 부대가 주둔하는 마을의 여인들을 성적으로 범하는 것을 무슨 무용담이나 되듯이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대 주변의 밭들과 혹은 닭장을 뒤적이며 점령군처럼 곡물과 가축을 훔쳐 먹으며, 이를 드러내고 낄낄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 그대로의 모습을 닮고 있었습니다. 오직 경건한 신앙 속에서만 성장해 온 나의 순진함은 그들의 욕지거리와 음담패설, 기고만장한 난행(亂行) 속에서 짓밟히고 있었고, 철조망에 갇혀 고참들에 의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는 하면서 굉장한 분노가 누구인가를 향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군대에서 민족의 아픔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첫 번 배치 받은 곳이 북한 선전 스피커 소리가 쩌렁쩌렁 들리는 임진강을 마주한 최전선 부대였습니다. 붉은 노을이 지는 임진강물을 보면서 핏물처럼 느껴졌습니다. 미, 소, 중, 일 4대 강대국 틈에서 끝없이 고난받아온 민족, 전쟁의 참화에서 죽어간 민초들, 분단된 조국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분노를 느끼면서 산문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내게는 최초의 습작(習作)이 되었습니다.
 
나는 제대를 하면서 낙서하듯이 다음과 같은 글을 기념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길고 긴 산 계곡을 따라, 혹은 높고 높은 고지(高地)의 능선을 따라 행군하면서, 혹은 먼지가 가득한 군용트럭의 바닥에 총을 움켜쥔 채 주저앉아 병사는 전쟁을 배워가고 인생의 밑바닥을 느끼고 인간의 본능을 들여다보며 염세(厭世)를 구역질로 토한다. 전쟁 찌꺼기, 살인 연습, 고향, 개새끼. 그 속에서 나는 배낭을 메고 뛰었고, 비상에 긴장했고, 회식 시간에 병사들이 부르는 '오늘도 걷는다마는'라는 유행가 가락에 젖어들고 융통성 없이 들볶아대는 햇내기 소위 새끼들에게 증오를 보내곤 했다.
 
산과 숲과 강을 지나가는 행군. 그것은 기동훈련이었고 전쟁 연습이었다. 들을 가로 질러가고, 또 산을 돌아가는 끝없는 고독의 길, 비는 끝없이 쏟아 내리고 어깨에 멘 60M 박격포 포판(砲板)이 주는 아픔에서 십자가를 배운다. 전방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산짐승처럼 웅크리고 겨울을 지나노라면 삶과 죽음의 의미들, 전쟁의 아픔들, 고독의 찬 눈물이 가슴 깊은 곳에 고이는 것을 절감한다.
 
나는 거기에서 드디어 역사에 눈이 뜨임을 발견했다. 역사의 하수구에서 허우적거리던 군상들, 절규들, 그 통한들, 그 잔인한 미소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눈뜨고 있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시했다. 잘 가꾸던 정원도, 수천 년 보존해온 국보(國寶)도, 인류에 공헌했던 성자도, 죽음을 불사하고 파낸 진리도 전쟁의 캐터필러는 잔인하게 짓밟고 찬연한 문화의 의상을 벗기고 백인, 흑인, 황인들이 돌아가며 여인들을 윤간(輪姦)하고 기어이 목 졸라 살해한 그 붉은 의미를. 그것은 카인의 후예들이었다.
 
붉은 완장을 차고 죽창을 들고 저 양민을 수없이 찔러대고야 직성이 풀리는 저주로 뒤엉킨 검붉은 분노는 카인의 뿌리에서 연유된 원죄(原罪)라는 것을, 나는 몇 달간 임진강 변의 초소(哨所)에서, 초겨울의 기동훈련에서, 얼음을 깨고 이가 득실거리는 군복을 빨면서, 황토 위에서 끝없이 포복을 하면서, 사격장의 참호 속에서 타깃을 들고 앉아서, 어렴풋이나마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분단된 채 광대 짓 하는 초라한 조국의 모습을 나는 산하(山河)를 군용차에 짐짝처럼 실려 오가면서 눈이 뜨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9. 당시 대통령과 군인 출신들이 사회의 최고위 엘리트층인 점을 감안해 보면 한국사회의 군의 위상을 실감하셨겠어요. 그 시절 당시 청년 대학생에게 박정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답) 사실, 대학 1학년 때까지 나는 정치에 대해 거의 문맹 수준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인문학적인 책을 읽었지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는 교수나 선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마쳐 가는 때에 서점에서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을 구입하여 읽기 시작한 것이 한국의 현실과 정치, 4.19혁명과 5.16 쿠데타의 진실에 깨닫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책을 읽음과 동시에 「사상계」을 읽기 시작하면서 지면에서나마 민족의 스승들을 만나기 시작함으로 조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지면에서 함석헌을 비롯하여 김성식, 홍이섭, 유달영, 김형석, 백락준, 안병욱 교수 등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떠먹이는 대로 걸신들린 것처럼 사상의 음료들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해 눈이 떴고 조국에 대한 깊은 아픔을 배태(胚胎)했습니다. 스승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의 또 하나는, 조국의 역사 속에 거목처럼 버텨준 인물들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도산 안창호, 월남 이상재, 김교신 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조국, 이웃을 향해 사심 없이 헌신하는 의연한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의기, 그 관용, 그 담대, 그 희생 앞에 나는 울듯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 군에 입대함으로 몸으로 조국의 현실을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서부전선 최전방인 임진강을 바라보며 북한군의 확성기 소리를 매일같이 들으며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아픔을 앓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처음 젊은 군인들, 특히 미국 웨스트포인트에서 직수입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육사 출신들이 시도하는 국가개혁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스승들이 폭로하는 군사정권의 검은 정체를 알고 함께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마다 거대한 항거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춘천농과대학 학생들과 함께 데모에 동참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특별히 제대 후에 가장 영향을 받은 정치가가 김대중 의원이었습니다. 그의 연설을 들으면서 엄청난 군중과 함께 흥분의 함성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과 의식 있는 국민들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지만, 40만 표차로 낙선되었습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고 독재자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신정권의 폭압 정치는 극에 달해 사상계를 폐간하고 민족의 스승들과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했습니다. 그러므로 1979년 암살당하기까지 7년의 암흑기를 맞게 된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10. 원래는 육사 또는 농협을 지망하신 것으로 압니다. 아버지 대의 육사와 농협은 어떤 위상을 지녔습니까?
 
(답) 그 당시 대부분 가난한 학생들이 가난의 이유로 육사를 지망했던 것처럼 나도 똑같았습니다.
지방대학 진학보다 화려해 보이는 육사를 선호했습니다. 위의 언급한 대로 야간부 다니면서 자주 일어나는 정전(停電)과 너무나 무성하게 가르치던 교사들로 인해 기초가 엉망이었던 내가 수학과 과학을 중시했던 육사에 합격한다는 것은 너무 힘에 겨운 일이었습니다.
 
딴에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후에 춘천농과대학을 시험을 치렀는데 용케도 장학생으로 합격함으로 다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내내 전공은 학점을 따는 정도로 공부하고 문학을 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학보병 고참으로 김성일(당시 서울공대생)이라는 소설가를 만나서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제대하고 복학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어느 날은 여기저기 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 ‘새생명’이라는 크리스천 잡지와 경북대학교 학보지에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꿈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느 대학의 국문과나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제대로 문학 수업을 받았거나 어느 소설가에게 제대로 지도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졸업 후 농협에 들어가려는 것도 다만 생활 방편에서 나온 의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농과대학 졸업생들이 많이 갔던 곳 중의 가장 인기 있던 직종이 농협이었습니다. 아마 어렵게 그 직장에 들어갔을지라도 아마 소설을 쓰는 데 몰입함으로 그 직장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11. 형님(큰아버지 김태순)이 계셨는데 숨지셨습니다. 형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어떠하셨는지. 연탄가스는 필경 주인집의 과실인데 보상은 받으셨는지요.
 
(답) 대학 4년 때, 3년 연상이던 형이 서울 양평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하숙집에서 연탄가스로 숨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비보는 우리 가정의 큰 풍랑을 몰고 왔습니다. 형은 우리 가정의 기둥이었고 자랑이었습니다.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한 형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내내 반주자로 활약했고 춘천방송국에서는 어린이 합창의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또한 어린이 노래를 많이 작곡함으로 강원도에서는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교사로 전임하면서 곳에서도 음악 활동을 넓혀가기 시작하던 때였는데, 29살 나이에 그 꿈이 무산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날은 약혼자와 영락교회에서 만나 함께 예배드리기도 날이라 해서 더 가슴 아픕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와 나는 그 하숙집을 찾아가 시신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내 일생 그렇게 울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울었습니다.
 
12. 형님은 아버지가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핀잔을 주신 것으로 압니다. 왜 그랬습니까?
 
(답) 형은 자존심이 아무 강했습니다. 당시 목사라는 직업은 초라했습니다. 특별히 성결교회 출신들의 목회자들은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기에 동생이 그 길을 간다는 것이 왜인지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생이 화려한 소설가의 길을 가는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가 장신대 재학 중이어서 신학교에 입학하라고 권함으로 형에게 신학교 진학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가 핀잔만 받았던 것입니다.
 
아마 형이 살아 있었다면 신학교 진학은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신학교에 가기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후에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형이 막으려는 것을 아시고 먼저 데려가신 것이 아닐까 하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인간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 형님의 죽음이 집안을 크게 흔들었던 것으로 압니다. 약주 좋아하시던 할아버지가 술을 끊고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된 계기가 형성됐고요. 당시 집안 분위기를 말씀해 주세요.
 
(답)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기 전에 어머니를 많이 핍박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고지식하신 분이라 남의 것을 탐내거나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도장포에서 모은 돈으로 땅을 넓혀가는 것이 아버지의 인생 목표처럼 보였습니다. 도장포 근처에 있는 친구들도 술을 좋아해서 자주 함께 드시곤 했는데, 아버지는 술이 약해서 취하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하셨습니다.
 
철길을 넘어야 집에 오는데 500여m 떨어진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가 오시는 걸 알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도 남에게 전혀 피해를 주거나 시비를 거는 일은 없으셨습니다. 매사에 계산이 반듯하고 친척의 어려움도 잘 돌보시는 등,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기 전에도 농사일이 많을 때 어머니가 교회에 가시는 것을 무척이나 못 마땅해 하셨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성탄절에 기르던 돼지가 죽자 크게 화를 내기도 하셨고, 한 번은 성경책을 아궁이에 집어넣기도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남편을 전도하는 것이 어머니의 큰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형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집안의 큰 기둥이었던 형의 죽음으로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아버지는 형의 시신을 보는 순간, “이제 어떻게 사냐?”며 절망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당장 술 담배를 끊지는 못하셨어도 2년 후 세례를 받으시고 집사직을 받으신 후에는 술 담배는 물론이고 제사 시 절도 하지 않는 결단을 보이셨습니다. 새벽기도도 어머니는 빠지시는 날이 있어도 아버지는 참석하셨다고 합니다. 후에 장로직을 맡으신 후에는 목사님의 목회에 더욱 열심히 동역을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14. 목회의 길을 결정하게 되신 경과도 알려주세요.
 
(답) 중고등학교까지는 집과 학교와 교회 뿐이 모를 정도이고 교회에서도 ‘목사감’이라고 부를 정도의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경건한 신앙 속에서만 성장해 온 나의 신앙이, 군입대 후 욕지거리와 음담패설, 기고만장한 난행(亂行) 속에서 짓밟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 나는 교사였던 형의 소개로 나는 어느 극장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3일마다 새로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폭력과 음란, 술수와 배신 등의 장면들이 나의 신앙 세계에 무단으로 들어와 더욱 어둡고 붉게 더럽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서는 모범적인 신자였고, 교회 밖에서는 끝없는 추잡한 생각으로 어지러운 밤을 헤매는 위선자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형의 죽음을 맞으면서 깊고 깊은 회의(懷疑)의 절벽에서 저 어둑한 골짜기를 응시하며 죽음의 망령들과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나는 신학교에 입학한 후 그러한 회의적인 생각과 싸워야 했습니다.
 
나는 신학교 채플과 침침한 기숙사 방과 도서관, 혹은 신학교 뒤편 숲을 헤매며 어두운 사색을 했고 때로 항변이 담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메섹 도상에서 깨어졌고 나를 부르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떨면서 나를 부르신 분께 나의 생(生)을 드리기로 약속했습니다. 그것은 문학에서 주던 창조적인 기쁨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기쁨이었습니다.
 
15. 왜 모교단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아니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신학교에 입학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답) 내가 자란 성결교회 담임목사도 성결교회 신학교로 가라고 권했지만, 먼저 장신대에 입학한 친구가 “성결교회 교단보다 큰 교단인 통합측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좋다.”라면서 원서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이왕지사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하려면 큰물에서 활동해야지 않겠냐는 충고였습니다. 그 말대로 장신대에 입학한 후 동기생들을 살펴보니 성결교회 신학교 대학부를 졸업하고 온 사람들이 세 명이 된 것을 보고 친구의 충고가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그나마 건강하다고 생각되는 교단인 통합측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장기 목회한 것을 너무나 잘했다는 생각을 은퇴 후에도 하고 있습니다.
 
16. 합동과 통합의 갈등과정, 원로목사가 되신 상황에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답) 처음에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알게 된 것은 1959년에 장로교단이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반분(半分)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합동은 무엇이고 통합은 무엇인가? 똑같은 이름이 아닌가?”라면서 교단 이름을 장난조로 지은 사실에 조소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단을 두 쪽으로 분열되게 만들었던 교계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가 점점 차오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912년 장로교회 총회는 단일 교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952년 제 1차 분열로 '고신' 교단이 생성되었고, 1953년 제 2차 분열로 '기독교장로회'가 파생되었으며, 1959년 제 3차 분열을 통해 합동과 통합'교단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 요인은 겉으로는 WCC 가입에 대한 찬성(한경직 목사 중심. 통합)과 반대(박형룡 목사 중심. 합동) 등, 신학적인 차이에 따른 문제로 보입니다.
 
우선, 합동 교단의 경우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신앙고백서로 사용하며, 성경 무오성과 성경이 가진 하나의 진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통합교단의 경우 웨스터민스터 신조를 인정하는 동시, 자체 신앙고백서를 사용하면서, 성서 해석의 다양성과 현실성을 인정합니다. 합동측은 성경을 성도의 신앙에 보수적으로 해석 적용하는 반면, 통합측은 성경을 사회적으로 적용하는 사회주의 중심의 신앙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분열의 근본 내막은 당시 장로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목사는 신학교 부지를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한 교인에게 부지 불하를 위한 교섭비 명분으로 이사회의 재가도 받지 않고 3천만 환의 거금을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부지는 불하받지 못했습니다. 그 돈은 오늘날의 시세로 약 3억 원에 달합니다. 이러한 거액을 이사회와의 논의 없이 지불한 것이다.
 
결국 박형룡 목사는 이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자들 간에 갈등이 점점 커지면서 결국 WCC의 문제로 비화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경직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은 통합측으로, 박형룡 목사를 지지하는 세력은 합동측으로 갈라선 것입니다.
 
잘못된 뿌리에서 시작한 합동측은 후에 온 한국교회를 분열의 악취로 진동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주관하다 싶이 하는 한기총은 온 사회에 비난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시골교회에서 30대 초반 나이에 피를 토하듯이 썼던 책 「회칠한 무덤 한국교회여」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두 번의 혁명이 발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정치, 경제, 사회의 큰 위기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독재의 횡포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고 실업자가 늘어가고 깡패와 사기꾼이 판을 치는 사회 속에서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제 구호물자 대신에 선교비라는 명의로 바꾸어서 이국(異國) 땅에서 막대한 금액이 송금되어 오고 있을 때, 그것을 서로 갈라 먹으려고 눈이 벌게져 있지 않았던가.
 
먹은 자와 못 먹은 자가 아옹다옹 다투다가 결국 분열이 되지 않았는가. 명목이야 WCC 가맹 문제라고 했지만 그 분열의 밑바닥에는 감투싸움과 이권 다툼이라는 것이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닌가. 1959년 예수교 장로회는 제 44회 총회에서 통합(統合)측과 합동(合同)측으로 두 쪽이 났다. 교단 이름마저 장난기가 깃들인 분열이었다.
 
이들에게는 민족의 통렬한 아픔을 감지할 촉각이 마비되었다는 것인가. 못 살겠다고 외치는 저 백성의 굶주린 소리, 저 청계천 하류민(下流民)의 한숨 소리, 깡패들의 주정 소리, 인권을 유리 하는 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것인가. 베데스다 못가의 모습이로구나. 오만가지 각색 병자가 모여서 냄새피우고 욕설을 퍼붓고 아귀다툼 하는 곳.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귀머거리, 중풍 병자, 정신병자, 혈루증 등등, 지지리도 못난 병신들만 모여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물이 동하면 먼저 뛰어 들어 보겠다는 일루의 소망을 가진 채, 그 뜨거운 태양, 그 추운 냉기, 쏟아지는 폭우, 뇌성벽력 속에서 지치도록 기다리며 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이 조금만 바람에 흔들려도 너나없이 먼저 뛰어들어 밀고 찢고 욕하고 소란을 피우는 곳, 그곳이 베데스다 못가였다. 한국교회가 바로 그 모양, 그 꼴이었다.
 
백성들이야 유리하는 양떼처럼 고난의 길을 가고 있건 말건, 장로교는 네 쪽으로 갈라져서 헐뜯고 욕하고 멱살잡이하고 심한 경우에는 그 거룩한 성전에 오물을 던지는 저주받을 일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교단이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열이 되자, 이에 대한 여파가 전국 교회로 번지면서 교회들마다 수라장으로 변했고 교인들은 오만가지 병신처럼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정통(正統)이라고 우기며 서로 자기들만 구원이 있는 양 주장질했다.
 
어찌 그뿐이랴. 그들이 그처럼 거룩 거룩하게 여기던 성전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해대고, 설교하는 이에게 똥, 오줌이 뿌려지고, 담벼락 사이를 두고 교회당을 세워 놓고 한쪽이 설교하면 한쪽은 찬송으로 방해하고, 한쪽이 기도하면 한쪽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고 악을 쓰면서 찬송을 부르는 아귀다툼을 나타내고 있었다.
 
베데스다 못가의 재판(再版)이었다. 그러한 한국교회에 대한 채찍이 두 번에 걸친 혁명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편견일까. 아니다. 그러한 생각은 오히려 성경적이다.
 
<예수쟁이를 때려죽이라는 4·19의 함성은 한국 기독교회에 내린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예수쟁이를 때려죽이라는 소리는 기독교를 질시하여 온 타종교나 비종교적인 학생들이 부르짖는 구호가 아니었다. 4·19를 주도하다 시피 한 기독 학생들의 부르짖음이었다.>
(최종고:「영락교회의 부흥」135페이지)
 
교회가 사회정의를 구현 못하고 있으니 엉뚱하게 학생들과 군인들이 이 사회를 바로 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60년대 70년대의 길고 어두운 유신시대(維新時代)를 몰고 온 것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한없이 떼 밀려갔고 불교를 크게 흥기시키었고, 기독교는 그 정권 하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자초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17. 담임목회를 시작한 1971년 가곡교회 상황을 말씀해주세요.
 
(답) 가곡교회는 경기도 마석에서 수동으로 10여 리를 들어가면 천마산 아래에 가곡리에 위치한 교회로, 사계절이 너무나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신학대학 실천학 교수의 추천으로 그 마을에 처음 교육전도사로 부임했을 때 그곳은 전기나 전화도 없는 문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농촌교회에 1968년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부임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그 교회에서 7년이나 사역하게 된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신학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계속 목회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강도사에 이어 목사 안수를 받았고, 결혼하여 자녀 셋을 낳았습니다. 교회당을 신축하던 때에는 부족한 건축비에 다소나마 보태려고 결혼할 때 받았던 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으며 온 교우들과 힘을 합쳤습니다. 그런 노력 끝에 완공한 교회당에서 드린 헌당 예배는 감격으로 넘쳤습니다.
 
당시는 중학교에 가지 못한 청소년들이 많아서 재건학교를 2년 동안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산골의 외진 빈 들판을 헤매거나 가까운 천마산에 올라 유신독재 정권하에서 억압받는 민족 스승들과 애국지사들과 한국교회의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너무나 가슴 아파하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불타는 마음으로 「회칠한 무덤 한국교회여」라는 책을 발간한 일입니다.
 
그러나 농촌교회에서 열심을 다하여 양육하던 청소년들이 산업화 바람을 타고 새떼처럼 도시로 떠나버린 후부터는 미래가 밝아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설교단에서 보면, 교회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청소년들이 사라지고 나이 많은 어른들만 자주 하품하며 앉아 있는 모습이 목회 의욕을 잃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 농촌교회를 위해 30대의 열정을 희생한다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활로를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왔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30대 후반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하는 임지는 서울이지만, 화려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한양대학교 뒤 청계천 하구에 위치한 작은 교회로, 그 지역은 경제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하층민들이 판자촌을 이뤄 살면서 서울 밑바닥의 온갖 궂은일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도시개발과 함께 판자촌이 헐리고 주민들이 성남 쪽으로 강제 이주하는 때였기에 결코 안정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18. 어머니는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에 저항했던 동아리에서 활동하셨는데 아버지와 생각이 다르신 점은 없으셨는지요.
 
(답) 아내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거멀못회’라는 이념단체에 제3기로 가입했습니다. 거멀못은 건물에 터지거나 벌어질 곳을 연결시켜 벌어지지 않게 걸쳐서 박는 못입니다. 1965년 춘천에서 창립된 학생 서클인데 군사정권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종종 반정부 활동을 나타내고는 함으로 경찰 입장에서 요주의 단체였습니다.
 
그러나 자주 농촌 봉사 등에 앞장서고 있어서 아내와 가까운 여대생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건 때는 아내도 연관되어 형사의 눈을 홍천 지역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면서 차츰 그 단체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제대 후에 ‘광염회(光鹽會)’라는 기독교 단체에 가입했는데 앞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인재를 양육하는 단체였습니다.
 
그래서 우수한 고등학생들을 모집하고 춘천중앙감리교회에서 매주 광염학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함석헌 씨나 김형석 교수 등과 같은 귀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춘천 시내에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광염회원 중에 유명인사가 MBC 전 사장이었던 엄기영 씨입니다. 나와 아내는 상록수 같은 인물이 되고자 다짐했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위해 활동하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우리 결혼식에 광염회와 거멀못회가 모두 참석함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신독재 하에서 거멀못회 대표였던 정성헌(현재: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라는 분이 수배자 신세가 되어 가곡교회 사택으로 피신 차 왔다가 하룻밤 자고 가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우리 세대는 흑암의 세월을 보내던 때였습니다.
 
19. 상록수의 주인공을 꿈꾸셨습니다. 소설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신 바가 있으셨다면.
 
(답) 우리 부부가 의기투합이 된 것 중의 하나가 나는 막연히 상록수에 대한 꿈이 있었다면, 아내는 덴마크의 달가스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1864년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대패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국내 경제는 파멸 직전에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냅니다. 여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몸을 팝니다.
 
덴마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민족의 어두움을 빛의 전제로 보았던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룬트비 목사와 달가스 대령입니다. 그룬트비 목사는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 자연사랑 삼의 운동을 부르짖으면서 민족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덴마크를 만드는 기본 정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두 사람의 꿈이 농촌교회를 마다하지 않고 사역하게 된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60년대 후반이라 아무런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았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에는 토요일 오후에 청소년회(일명:상록회)를 조직하여 열심히 가르쳤고, 담임목사 시절에는 재건학교를 만들어 50여 명의 학생들을 2년 동안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아름다운 농촌을 하나님의 낙원(樂園)을 만들어 보겠다는 이상에 불타고 있었다. 청소년을 신앙과 지성적으로 양육하여 장래 이 마을에 지도자로 세울 것이며, 덴마크의 농촌처럼 기름진 곳으로 만들고 말리라는 의지로 부부는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록수에 대한 불타는 꿈은 너무나 힘에 겨운 일이었습니다. 많은 동지와 자금이 필요한데 두 가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현실의 벽은 너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다가 모처럼 열심히 양육하던 청소년들마저 70년대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서울로 공장 직공이나 버스 차장, 가정부로 떠나간 후에 텅빈 교회당과 교실을 보면서 느끼던 허탈감을 메울 길이 없었습니다. 더욱이나 그 청소년들이 명절 때 고향을 찾은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야한 옷과 진한 화장, 술에 취한 채 담배를 꼬나문 모습들은 3-4년 동안 열심히 가르친 보람의 흔적을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초롱초롱 빛나던 순수한 눈동자는 사라지고 도시의 뒷골목에서 물들여진 세속의 불순함이 역력하게 보여지고 있음에 실망했습니다. 그때 무슨 사회운동이든지, 무슨 선한 사업이든지 용기만 갖고 뛰어드는 것은 실패하기 쉽다는 점을, 함께할 많은 동지들과 자금,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20. 1975년 홍익교회로 옮기셨습니다. 가곡교회 교인들의 마음은 어떠했던가요.
 
(답) 1975년 10월, 우리 식구들은 농촌 목회를 청산하고 대도시 목회를 위해 그 마을 고개를 넘어 이삿짐 차에 실려 떠나왔습니다. 시골교회를 떠나올 때 교우들의 눈물이 가득 찼고, 우리 부부도 애써 웃으며 힘차게 인사했으나 차오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목회의 첫 사랑을 부었던 곳이요, 거기에서 신학교 졸업과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고 기르던 곳이기에 그 이별은 너무나 아팠습니다.
 
선임 장로님이 교인들에게 ‘젊은 목회자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권고함으로 정들었던 목회자 가족을 떠나 보냈지만 교인들은 너무나 아쉬워 했습니다. 심지어 몇몇 교인들은 홍익교회까지 따라와서 이삿짐을 정리해 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떠나온 후에 10년 동안 여러 번 목회자가 바뀌는 속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자주 찾아오고는 했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21. 홍익교회가 도시에 있다고 특별히 나은 형편은 아닌 줄로 압니다. 청계천 하류 당시 홍익교회 상황을 설명해주신다면요.
 
(답) 새로 부임하는 임지는 화려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한양대학교 뒤 지역인 청계천 하구(河口)에 위치한 빈촌 교회였습니다. 그 지역은 몇 년 전만 해도 청계천 양변에 판자촌이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경제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하류민들이 판자촌을 짓고 살면서 서울 밑바닥의 궂은일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는 판자촌을 철거하기 시작하고, 우리가 부임할 당시는 거의 파괴된 상태라 마치 전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황폐해 있었습니다. 그 부근에서 교회 출석하는 상당수의 교인들은 판자촌에서 쫓겨나 월세방이나 전세방 생활을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30평 정도의 슬레이트를 입힌 낡은 교회당과 낡은 한옥 사택이 전부인 교회였습니다.
 
주일이면 장년이 50여 명 출석하고 있는 무기력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벅찬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 엄청난 청소년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농촌에서 열심히 키워낸 청소년들이 고개를 넘어 도시로 날아가 버렸을 때, 얼마나 공허한 가슴앓이를 했었습니까? 대신 여기에 우리가 새롭게 양육할 청소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2. 1970년대는 산업선교에서 출발한 진보적 개신교 단체들이 박정희 정부와 각을 세우던 때였습니다. 당시 진보 목사들의 행동과 실천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하셨습니까?
 
(답)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진보 목사들의 반정부 활동에도 크게 동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 시골교회에서 내내 조선일보만 읽고 TV도 KBS만 시청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김진홍 목사나 인명진 목사는 장신대 2년 후배로서 신학교 때부터 목회자라기보다 사회운동가처럼 보였던 첫인상이 어떤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에 유경재 목사님과 더불어 원로목사들을 중심한 ‘팟캐스트’를 통해서 유명 목사님들을 만나면서 내 생각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유경재 목사님도 독재정권 하에서 경신고교 교목과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형사들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될 정도로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목사이기에 그런 분들과 많은 교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려 6번이나 옥고를 치루면서 민주화운동과 빈민선교에 힘썼던 박형규 목사, 군사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을 벌이어 해직되었던 서광선 목사, 기장교단 총무로 평생 민주화운동을 한 김상근 목사, 일생 사형폐지운동을 한 문장식 목사, 동일방직사건을 통해 노동운동에 불을 지피고 빈민들의 생존권 찾기를 주도했던 조화순 목사 등이 바로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민주화와 정의를 부르짖고 노동자들을 위해 위장 취업하면서 활동하면서 도망자로 살다가 체포되어 고문과 투옥 등 엄청난 박해와 희생을 해야 했던 후일담을 인터뷰를 통해 들으면서 나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목회하면서 한국교회 개혁만 글로 썼을 뿐 민주화운동이나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와 빈민을 위해서는 아무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23. 전태일의 죽음, 그리고 냉담한 교회는 묘한 대조를 이루던 때였습니다. 아버지 서재에 하비콕스 등 진보적 종교학자의 책이 꽂혀있던 것을 봤습니다. 아버지는 사회현실을 외면하는 보수신앙에 대해 어떤 감정이 있으셨습니까?
 
(답)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을 비롯한 삼동회 회원들이 피켓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게 되자 전태일은 휘발유로 자신의 몸을 적시고 불을 붙여 분신 항거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언론은 노동문제를 특집 기사로 다루고, 종교계,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추모집회, 철야농성이 이어졌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당시 노동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북한의 끄나풀들이 암약하는 양 선전하는 정부의 발표만 듣고 막연히 경계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사실, 6.25 전쟁 참사를 목격한 우리 노인 세대, 특별히 재산을 다 뺏기고 월남한 분들은 공산당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전해오는 공포와 분노를 느끼고는 합니다. 그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서는 분들을 마치 빨갱인 양 몰아세우는 군사독재정권과 보수언론의 농간에 번번이 속으면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살은 범죄와 같다는 전통 교리에 따라 크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장측 교단 목회자들 중 일부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 선 목회자들이나 야당 인사들만이 분노하며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사실, 장신대 시절 학보 ‘신학춘추(神學春秋)’의 편집장이었던 나는 그 지면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정부를 향하여 적지 않은 글을 발표함으로 교수들의 만류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 학보는 거의 두 달마다 2,000부를 발간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었습니다. 때로는 예례미야서를 현대 상황에 맞게 변조하여 글을 씀으로 신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신학교 재학 중인 1960년대 후반에는 본회퍼의 ‘옥중서간’ ‘나를 따르라’라는 책들은 물론이고, 당시 암살을 당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자유에의 투쟁‘,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존 로빈스 목사의 ’신에게 솔직히‘,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등 많은 신학적인 책들이 출간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상황윤리‘ ’해방신학‘ ’죽음의 신학‘ 등 새로운 신학들이 쏟아져 나옴으로 신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도서관 앞에서 열변을 토하며 논쟁하게 만들고는 했습니다. 학보지의 편집장 입장에서는 그런 책들을 열심히 읽으면서 일면에 특집으로 편집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보수 교단의 신학생이었지만 앞선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연세대 신학과나 감신대, 한신대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한 선후배 학생들과 많은 논쟁을 벌이면서 그들로부터 내가 너무 보수적이라는 고리타분하다는 평가를 받고는 했습니다. 그만큼 나는 어릴 때부터 굳어진 보수적 신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 인권을 위해 분신자살하면서 투쟁하는 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청계천 변 평화시장 열악한 피복공장에는 내가 양육했던 시골 청소년들 같은 아이들이 병들어 가고 있을지 모름에도 굳어진 보수신앙의 벽을 깨기가 어려웠습니다.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음에도 말입니다. 차라리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킹의 비폭력 무저항주의가 훨씬 수용하기가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에 내 보수적인 시각에서 진보적인 시각으로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은퇴하고 위의 언급했던 분들, 다시 말하면 독재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을 4년 동안 ’팟캐스트‘를 통해서 만나는 동안, 그리고 나꼼수의 일원이었던 아들 김용민 pd가 운영하는 벙커원교회에 3년 동안 참석하여 진보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던 보수의 틀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시각에서 사회적인 약자들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40년 목회하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성경에 나타난 ’약자 보호법‘을 깨닫게 된 것은 너무나 귀한 변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나타난 ‘약자 보호법’은 사회, 경제, 육체적으로 나약하고 소외된 계층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을 확증하는 법입니다.
 
출애굽기 22:21-26에 언급한 율례에 의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①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않고, ②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지 않으며, ③가난한 자에게 이자 없이 꾸어주고, ④이웃의 옷을 저장 잡더라도 해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명령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바라본 세월호 참사, 촛불집회에서나 사회운동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보여 지기 시작한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24. 어머니는 현신애 권사에게 신유 은사를 영향 받아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치유하는 사역을 전개했습니다. 정통 장로교단에서는 불온시하는 병 고침의 은사, 어떻게 보셨나요?
 
(답) 시골중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던 아내는 홍익교회에 부임한 후에 가장 어려운 일은 몸이 아프지만 가난하여 병원에 갈 수 없는 교인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아내는 그 환자들을 데리고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변계단 권사, 현신애 권사의 제단이 있는 용산에까지 찾아가서 기도를 받게 한 후, 데리고 오고는 했습니다.
 
당시는 두 권사가 한참 절정기에 있어서인지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어 한 번 기도를 받으려면 줄에 서서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가 잠깐 안수받고는 했습니다. 안수라고는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잠깐 사이에 끝내버리는 안수였습니다. 아내는 오전 내내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어 잠깐 기도 받고 돌아오고는 하는 일에 마침내 짜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도 어려운 교인들에게 음식을 사주어야 했으니 더하지 않았겠습니까? 과연 언제까지 이러한 노릇을 반복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답답해하다가 어느 순간 ‘아니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왜 그런 은사를 받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매달려 보자는 결심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40일 철야기도를 교회당에서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몇몇의 교인들도 그 기도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때는 봄이긴 하지만 때로 눈서리가 내리기도 하는, 밤이면 추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집사람은 늘어가기만 하는 환자들, 병원에 갈 수 없는, 너무나 가난한 교우들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불붙는 마음으로 기도하기에 추위 따위는 큰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40일을 마치는 새벽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함께 기도하던 집사 중의 한 분이 갑자기 명치끝이 아프다고 신음하면서 못 견디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집사람은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그 집사의 환부(患部)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씻은 듯이 나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신기하고 감격적인 일인지, 그때부터 환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서 전도의 문이 더 강하게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환자기도회를 개최하게 되고 여기저기서 많은 환자가 몰려왔습니다. 한양대에서 폐암이라고 진단받은 집사가 기도를 받고 다시 진단해 보니 정상이 되었다고 간증함으로 온 교회의 기쁨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통 장로교단에서 병 고치는 은사를 강하게 나타냈던 분은 김익두 목사입니다. 그분은 총회장까지 지낸 분이시기에 마음으로는 못마땅한 분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무엇이라고 하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아내는 그렇게 홍익교회에서 30년 동안 환자들을 담당하다가 은퇴했습니다. 그렇게 약한 사람들을 위해 수고한 사실을 많은 교인들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25. 청계천 건너 김진홍 목사가 빈민 선교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김진홍 목사 사역을 어떻게 보셨나요?
 
(답) 김진홍 목사는 1941년생으로 나와 동갑이지만 신학교는 2년 후배입니다. 깊이 사귀어 본 적은 없지만 머리가 비상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화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내가 목회하던 홍익교회는 청계천 이쪽(한양대 쪽)이고 김목사가 목회하던 활빈교회는 청계천 저쪽(용답동 쪽)입니다. 1968년 신학교 2학년 때 교회 이름 그대로 빈민선교를 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내가 1975년 11월에 부임하고 활빈교회는 1976년 남양만 쪽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운동을 벌이다 보니 문제도 많고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약자들을 위해 목회한다는 기본 생각은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김진홍 목사는 1970년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베스트셀러를 내며 빈민운동의 대부 소리, 성자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협동조합 방식으로 조성된 ‘두레자연마을’에서 펼치는 등 많은 사업을 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초심과 달리 많은 비판을 받게 되고 구리 쪽으로 교회를 이전하고 은퇴한 후 후임자와의 갈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부 때 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으로 활동함으로 진보 측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있어 너무나 안타까운 말년의 모습입니다.
 
26. 새 임지 홍익교회에서 사역하시는 과정도 여쭐게요. 부임하실 때 교회가 심한 내홍을 겪은 후였던 것으로 압니다. 어떤 일들이 있었지요?
 
(답) 1968년 30평 교회당을 신축하고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던 교회가 1972년도에 들어서부터 이상하게 시험의 기운으로 가득 차고 있었습니다. 불구인 동생과 함께 부산에서 올라온 박성자 자매가 교회의 방에서 임시 유숙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관계된 분들이 불구 소녀를 치료해 주겠다는 무분별한 약속들이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마치 교회가 거짓말을 한 것처럼 되어 버림으로 그 짐이 김관호 목사에게 지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 사이 사탄이 역사한 탓인지, 그 파문이 김 목사의 가정에도 미쳤고 「소리」지에도 미침으로 김 목사님은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 목사는 졸도하여 입원함으로 돈 10만 원이 자부의 빚으로 달아났을 정도였습니다. 박 양도 내친걸음으로 막 나갔고 김 목사는 아내와 별거하기도 하고, 「소리」지는 폐간되었습니다. 1973년은 악몽 같은 한 해였습니다. 그때 김관호 목사는 나를 찾아와 홍익교회로 부임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가곡교회에서 위임목사가 된 지 2년뿐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존경받으시던 목사께서 이런 모습으로 은퇴하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면서 앞으로 2년 동안 명예를 회복하시고 은퇴하셨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결과 김 목사 가정도 교회로 이사 오시면서 교회가 2년 동안 안정이 되었고 내가 1975년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김관호 목사가 당회의 결의를 마치고 쓴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싹들이 많이 돋아났다. 난 이젠 이들 앞에 설 아무 것도 없다. 주께서도 그의 가진 바를 통해서 역사하심을 나는 믿는다. 이제는 젊은이들을 이끌 젊은 일꾼이 이 교회에 필요한 것이다. 강단에 설 때마다 자꾸만 울려 나는 내 마음속의 소리다. 설교도 계속 인생무상이며 죽음의 대비에 대한 것이 나와서, 힘차게 살아가야 할 이들 앞에 간간 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나이 탓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부터 목사의 정년(停年)을 65세로 주장해 왔다. 예외도 물론 있겠으나 대체로 보아 65세 이후의 목회란 교회의 마이너스가 더 많은 것이다. 여기 찾아봐야 할 외로운 이들이 많은데 이제 난 힘이 나질 않는다. 교회에서도 나의 뜻 이해해 주고 내 생각 받아주며 더욱이 날 신임하고 내가 추천하는 후임 교역자를 받아주니 기쁘다. 주께 감사드릴 뿐이다.
 
젊은 일꾼 받은 홍익교회는 복 있는 교회다. 모르는 교회, 생각이란 걸 모르는 마이동풍들, 이 가난, 저 고달픔들. 여기 와서 십자가 져야 할 그의 노고를 생각할 때, 지금 나의 숨김없는 마음 한구석에는 김태복 목사가 측은한 정이 든다. 그러나 그만치 주의 위로가 계실 줄 믿는다. 온 교회가 사랑과 기도로 크게 도웁고 귀가 열려 복음이 받아들여지기만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27. 청소년, 청년에게 꿈을 주는 교회, 어떻게 실천하셨습니까?
 
(답) 나는 제대하던 해인 1963년에 광염회(光鹽會)라는 기독교 청년단체에 가입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자는 운동단체였습니다. 우리 스스로부터 빛과 소금의 사명으로 살뿐 아니라 그런 기독교 인재를 많이 양육하자면서 춘천에서 시작한 단체입니다. 홍익교회 부임하면서 그런 정신 하에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부모들에게 설교 시간에 자주 강조했습니다.
 
그런 인재를 양육하는 방법은 성경적인 방법, 더 구체적으로 유대인 식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강원도 만한 땅임에도 노벨수상자가 2016년까지 151명이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어떴습니까?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유대인보다 머리가 좋고 부지런함과 교육에 대한 열심이 대단한 민족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이 잘못된 관계로 큰 인물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좋은 대학만 보내면 교육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이 사회에 만연하고 그 가운데서 우리 자녀들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대개 자기 자녀들이 일류 대학에 가서 법관이나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녀를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고액 과외를 시킵니다. 특히 한국의 교육은 점수를 높이기 위한 주입식과 암기식 교육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점수기계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성적이 사람됨을 판단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적에 따라 훌륭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대우하는 풍토가 굳어지고 있습니다.
 
2011년 통계에 의하면 수능 지원자 수가 71만인데 그중에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수는 대략 18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약 20만은 훌륭한 사람, 약 50만은 쓸모없는 자 취급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모두 다르게 창조하시면서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좋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좋게 하여 뛰어난 기술자가 되게 하셨고, 어떤 사람은 말을, 어떤 사람은 예술을, 어떤 사람은 요리를, 어떤 사람은 체력을, 어떤 사람은 사업적 수완을, 어떤 사람은 리더십이 뛰어나게 만드셨습니다.
 
꽃의 모양을 다 다르게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들도 다양하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모든 재능을 100%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찾아내어 교육 시킴으로 세계적인 인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가정 자녀들에게나 교회의 청소년들에게 빛과 소금의 사명의 강조와 아울러 달란트 교육을 시키려고 힘썼습니다.
 
청소년 교육을 위해서 7월 둘째 주를 교사 주일로 정하고 그런 정신과 교육의 방법을 매년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학교나 수양관을 빌려서 개최하는 중고등부 여름수련회에 동참해서 특강을 통해서 교사나 청소년들에게 강조하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시와 문학의 밤’을 매년 개최하고 청소년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8. 박정희가 시해되고 문 걸어 잠근 채 만세를 부르신 일화를 들었습니다. 정말 그러하셨는지요. 박정희의 죽음이 개혁적 청년 목사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지요.
 
(답) 함석헌, 장준하 등과 같은 민족의 스승들과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김영삼을 통해서 큰 영향을 받은 입장에서 유신독재자들에 대해, 30대 나이에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던 때에 신하의 총에 암살당한 독재자 소식을 듣는 순간 하늘을 날듯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이제는 김영삼, 김대중 두 정치가를 앞세우고 민주화의 봄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전두환이라는 또 하나의 군인에 의해 그 모든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한국교회 이대로 안 된다’라는 책자에서 이 모든 사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한국교회 탓이라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분열증 환자였던가. 1979년 다시 큰 분열이 있었다. 당시 군소 교단들을 흡수함으로 합동측은 가장 큰 교단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단 신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신복음주의(新福音主義)에 대해 보수주의 입장에서 우려의 소리가 높고 점점 거센 반발이 점증(漸增)되더니, 마침내 1979년 9월 제 64회 총회가 대구 동부교회에서 양분되고 말았다.
 
총회를 앞두고 주류측과 비주류측끼리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서로를 방해하는 등, 추잡한 암투(暗鬪)를 계속하다가 결국 갈라서고 만 것이다. 이름하여 합동측과 합동 보수측의 양분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도 여전히 거룩한 성전에서는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운 추잡한 욕설과 멱살잡이와 폭력들이 자행했던 것이다.
 
이처럼 최대 교단이 교권 싸움, 명분 싸움에 골몰하고 있는 때는 유신 독재에 항거하는 데모가 온 나라를 가득 메우고 있던 위기의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검은 구름이 다시 한국 사회 위에 덮이고 있었다. 1979년 10월 16일에 부마(釜馬)사태가 터지었다. 그리고 그 압력에 의해서 10월 26일 저녁 7시 30분 궁정동 한 밀실에서 20년을 독재해 온 대통령이 부하의 손에 저격되는 큰 국난(國難)을 당하게 됐던 것이다.
 
불행은 이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어서 12·12 사태, 그다음 해에 5월에는 광주 사태라는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국민의 군대가 수도 없는 많은 국민을 향해 잔인하게 총격을 가해 살해한 참담한 사태를 남긴 것이다. 그 피 위에서 또 하나의 군사 독재 공화국인 제5공화국이 탄생되었고, 가지가지 얼룩진 실책(失策)들만 빚으로 남긴 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면 누구를 탓할 것인가? 무능한 문민 정치가들 탓인가. 처음에는 의기(義氣)로 밀어붙여서 정권을 쟁탈했으나 후에는 더 부패했던 군사 독재자들 탓인가.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 책임 전가해서는 옳지 않다. 바로, 너 한국교회 탓이다. 너의 연고로 백성들이 역사적 풍랑을 만났고, 체포와 구금, 고문과 살해를 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슴 아픈 것은 그처럼 암울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합동측은 끝도 없이 사분오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아, 지도자들의 저 끈질긴 종교적 아집(我執)들이여. 화인(火印) 맞은 양심들이여. 그래도 이 민족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되는 것은 지도자들 탓이 아니라, 오늘도 새벽을 열고 나아와 교회 바닥을 눈물을 적시며 민족과 사회를 위해 기도하는 저 교회 민중들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빛과 소금으로 희생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거룩한 이들 때문이리라. 그들에 의해서 저 베데스다 못가처럼 온통 악취가 진동하고 그 추잡한 욕망이 얼룩진 속에서도 맑은 물이 솟구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29. 광주 참상을 아시게 된 계기가 있었다면.
 
(답) 처음에는 언론 통제된 환경에서 조선일보와 TV를 통해서 광주 참사의 뉴스를 접했기에 사실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이 경찰서의 무기고를 탈취하여 군인들과 내전을 벌렸고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탈옥하여 큰 폭동으로 번졌다는 뉴스를 접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광주에서 목회하던 동기들을 통해서, 혹은 돌아다니던 비디오테이프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광주 참사의 실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되면서 큰 분노의 물결을 이루게 되고 그것이 87년에 거대한 민주화물결을 이룬 줄 압니다.
 
30. 한경직 목사 등이 전두환을 축복하는 기도회를 주재했습니다. 교단 선배 목사인 한 목사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나요?
 
(답) 한경직 목사님은 일세기에 한 번 나올까 싶은 성자와 같은 목회자입니다. 그는 은퇴한 후 영락교회에서 좋은 사택을 지어드린다는 제언도 거절하고 남한산성에 있는 영락여자신학교 교수 사택(20평)으로 가셨습니다. 나도 한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너무나 초라한 사택이었습니다. 요즈음 은퇴하고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김삼환 목사님과 너무나 비교가 됩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해 많은 사역을 했기에 한 때는 ‘제2의 한경직’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목사님은 아들이 목회자임에도 세습은커녕 미국에서 목회하도록 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작은 사택에서 사셨으니 김삼환 목사님은 한 목사님의 발등상에 앉기에도 못 미칩니다.
 
그러한 한 목사님이라도 일생 중 가장 크게 비판받는 것은, 한국 개신교의 대표자격인 입장에서 제1공화국에서 제6공화국까지 수많은 정치적인 격변기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예언자의 사명을 등한히 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군사독재정권의 잘못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셨다면 후배 목회자들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1991-92년 「월간목회」의 요청으로 원로목사 13분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첫 번째를 찾아간 분이 한 목사님이다. 인터뷰 중 후배 목회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군사독재자들을 협조했던 이유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 한경직 목사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 나는 평소에 종교와 정치는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은 아직도 정치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6에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회복함이 이때니이까”라고 묻자 주께서 대답하시기룹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라”했습니다.
 
또 로마서 13:1에 보아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 나지 아니함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는 바울의 말씀을 나도 믿습니다. 사실 이 박사 때는 바른 소리를 많이 해서 외국도 제대로 못 나갔습니다. 그 독재가 대단히 못마땅했습니다. 오히려 윤보선 씨를 많이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4·19 후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대혼란이 왔고 학생들이 공산당에게 대화하자고 너나없이 나서는데 놀랬습니다. 그때 나는 우리 민족은 아직도 훈련이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혼란을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공산당뿐입니다. 5·16 후 장도영 씨는 주례해준 적도 있어 잘 알고 있었고 김홍일 씨는 오산학교 출신이기에 잘 알고 있어 그가 외무장관이 되어 협조해 달라고 할 때 협조 하겠다 했습니다.
 
질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군사정권을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김활란, 최두선 씨와 함께 대표단이 되어 미 국무성에 가서 덜레스 장관을 만나기도 하는 등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어 박정희 씨가 실권을 잡았을 때 처음에는 그가 공산주의자인 줄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협조하지 않다가 그가 하는 일을 보고 동정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마을운동(정신운동), 경제부흥(현대화)을 하는 것을 보고 ‘바로 저것이 한국의 살길이다. 질서를 위해서는 당분간 군인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질서가 한국복음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대립하지 말고 교회를 위해서 함께 일하겠다 생각하여 군대 선교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신헌법 만들 때 영락교회 청년들도 데모하려 해서 막았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한다고 말해라. 진정서를 보내든지, 온전한 방법으로 하라. 사회불안을 조성하여 공산당에게 기회를 주는 일은 절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00만 서명운동 할 때도 그것은 해봐야 소용도 없고 오히려 사회불안만 조성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제일 원하는 것은 민족복음화였습니다. 그때 나는 군인 전도에 열심이었을 때인데 서명운동에 내가 이름을 써 놓으면 어느 사단장이 날 오라 하겠습니까? 그러니 전도해야 할 목사가 제일 되는 사명을 버리면서까지 정치 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신앙 양심 탓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오해도 받고 미국집회에서도 반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신념은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답이 현실 정치를 대하는 한국교회의 자세로 굳어졌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중심에는 반공주의가 강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김수환 추기경처럼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예언자의 사명을 다했다면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를 선도(先導)하는 데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큽니다.
 
31. 영락교회 수습위원장도 지내셨는데 영락교회가 숱한 갈등에 휘말린 이유, 한경직 목사 리더십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박조준 목사 축출 건도 그러한 맥락 아니었습니까?
 
(답) 목회자들 상당수가 평가하기를, 한경직 목사님과 달리 박조준 목사님은 정부에 대해 바른 소리를 많이 하다가 미화 반출 사건을 계기로 영락교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뉴스앤조이’에서 최근 박조준 목사님과 인터뷰한 기사가 나옵니다. 그 기사를 보면 군사정권에 대해 결코 협조적이 아니었기에 위의 평가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영락교회 2대 담임목사였던 박조준 목사(갈보리교회 원로·79)는 군사정권 시절 권력과 불화했다. 쿠데타로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박 목사에게 국가조찬기도회 설교를 요청했지만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동행할 것을 암암리에 강요하기도 했지만 박 목사는 거절했다.
 
그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 정권을 못 마땅해했다. 자연스럽게 설교에서는 대사회적 비판이 이어졌다. "남산에서 죽이네, 살리네 하는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른 말을 해야 하지 않느냐"며 당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회고하는 박조준 목사. 40여 년 목회 인생을 돌아보기 위해 7월 4일 CBS '크리스천 NOW'에 출연한 박 목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전두환 씨는 머리가 좀 나빠. 조금이라도 자기 칭찬하면 달갑게 듣는데…독재하는 사람이 강한 것 같지요. 천만에요, 약해요. 조금만 바른 소리 하면 부들부들 떨면서 나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해요.", "미안한데 전두환 씨를 대통령으로 보지도 않아요. 인간으로도 보지 않아요. 역적이야, 재산이 29만 원? 벼락 맞을 이야기지."
 
박 목사는 약 30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외화 밀반출 사건 이야기도 꺼냈다. 1984년 6월 21일 자 <경향신문>를 보면 "거액이 예금된 미국 은행의 예금통장과 현금·증권 등 25만 달러(약 2억 원)를 외국으로 빼돌리려던 목사 부부가 세관에 의해 적발됐다"고 나와 있다. 목사 부부는 박 목사 부부였다. 박 목사는 이 사건으로 구속 기소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김종희 <뉴스앤조이> 대표가 "(적발된 돈이) 목사님의 돈이 아니었느냐"고 묻자, 박 목사는 "내가 그 돈이 왜 필요해요"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박 목사는 당시 휠체어를 이용해 비행기에 탑승할 만큼 몸이 좋지 않았다면서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에 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수술비는 교회에서 지급했기 때문에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했다.
 
박 목사는 이 사건의 배후는 당국이라고 지목했다. "요즘 정보부(국정원) 때문에 말이 있는데, (당시) 정보부에서 다 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국정원 사태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내뱉었다. 미국의 CIA처럼 국정원은 간첩을 잡는 데 필요하지만, 정치에 관여해 여론몰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박 목사는 "국정원을 폐지하는 게 상책이다. 잘못된 것은 국민에게 지탄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한경직 목사님이 자기 후임자가 이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해 듣기로는 박조준 목사님이 후임자가 된 후 10년 동안 영락교회가 배로 성장하면서 원로목사에 대해 등한히 하기 시작하면서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간에 점점 갈등이 깊어졌고 외화밀반출 사건 때 한 목사님이 거의 외면했다고 합니다.
 
32. 1984년을 한국개신교는 전래 100주년 기념일로 삼았지만 미국 선교사의 방한 시점일 뿐입니다. 100년 이전에도 개신교 복음을 한국인 스스로 받아들인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미국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커 보입니다. 미국과 한국교회의 관계는 어떻게 보시나요?
 
(답) 우리 세대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존했기에 낙동강 이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산화될 위기에서 미국의 맥아더 장군과 유엔군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민주적인 나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에 늘 고마워하며 성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배고프고 헐벗었을 때에 양식과 구제품으로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 하면 산타클로스 같은 나라, 세계의 불침번이 되어 주는 평화의 사도로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대학과 군대와 신학교를 통해서 미국의 실상을 보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자국 이기주의, 6.25 전쟁도 미국과 소련의 책임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들이 산타클로스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한국교회 초기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악취가 나는 토속적인 음식을 마다하지 않으며, 오막살이에서 새우잠을 자던 그 선교사들의 희생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반면, 한국교회 기초를 초기 선교사들이 잘못 세웠다는 사실은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근본주의 계열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속(聖俗)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신앙, 문자적인 성경해석 등, 근본주의 색채가 강한 신앙들을 가르침으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대부분 편협한 신앙관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초기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했던 미국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학교와 병원, 사회사업 기관들을 많이 세웠던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또한 1907년 전의 4-5년 연간에 평안도, 평양, 함경도 지역은 그전의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전쟁터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나 기관에서 전쟁으로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목숨과 재산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는 일종의 미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간주 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의 백성들에게 기독교란 해방 공간이고, 보호 공간이고, 재산과 인명의 피난처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애국지사들이나 지식층들이 교회에 찾음으로 1907년 대부흥운동이나 삼일운동 같은 거사(巨事)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일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박해가 더 거세지자 선교 정책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정치 활동이나 정치적 발언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교회와 정치는 구분해야 한다는 근본주의 신앙의 이원론을 강하게 내세움으로 의기 있는 일부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대해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및 교회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서 도탄에 빠지고 어려움에 빠진 한국민들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재산 불려서 미국으로 가는 선교사들이 많았습니다. 탄광, 금광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업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해방 후 미국은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 준 나라, 헐벗고 굶주린 우리나라에 원조물자를 제공해 준 은인(恩人)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양민학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선봉에 선 미국은 자국 패권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미사일방어체제(MD)를 강요하고 있는 점 등이 진보적 진영만이 아니라 일반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미국에 대한 의구심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33. 한국개신교 부흥 과정에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교회의 번영신학이 끼친 영향은 지대해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조 목사의 부흥 성장이 한국교회의 성숙에도 기여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답) 한국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앞장섰던 목사 그룹 중에 가장 선두주자는 조용기 목사입니다. 이는 그를 비판해 왔던 분들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용기 목사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교회를 이룩했고 세계 모든 나라를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할 정도로 영적인 능력이나 어학 실력이 뛰어난 분입니다. 그를 통해서 1970-1980년대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 큰 영적 사역을 이룩했던 분이 길선주 목사에 이어 김익두 목사이고 해방이후는 1950-1960년대 한경직 목사가 그 바통을 이었다면 1970대-1990년대는 조용기 목사가 그 뒤를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그 당시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력이 가히 놀라울 정도입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부터 한국사회는 산업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모든 시민들이 황금주의에 깊이 매료되면서 소비성 사회의 짜릿한 쾌락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 민중들도 삶의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삶의 쾌락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는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의 시대에서 적극적인 삶으로 전환되던 시대였습니다. 이와 때를 맞추어 성경을 보는 시각도 적극적인 관점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맞추어 경제성장기에 사는 교회 민중의 구미에 맞는 설교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조용기 목사였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방법을 들으려고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긍정적인 각도에서 재해석해 줌으로 영적인 구원뿐 아니라 사업의 형통과 건강의 축복을 설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1950년대-1960년대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강조했던 ‘엄위하신 하나님’보다는 ‘삼박자 구원론’이라는 도식을 이용하여 ‘좋으신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많은 기성교인들이 여의도로 몰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한국교회 모든 강단들도 그의 설교를 인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공헌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성경을 적극적인 각도에서 보게 함으로 한국교회로 하여금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이룩하게 한 것입니다.
 
반면,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큰 오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성장제일주의로만 치닫게 만들므로,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심지어 다른 교회 교인들을 흡수해서라도 자기 교회 교세를 불리면 유능한 목회자로 인정받는 풍토로 만든 데 있습니다. 더 나가서 기복주의에 깊이 물들게 함으로 탐욕에 물든 교인들을 만든 것이요, 도처에 지성전(支聖殿)을 만들어 닥치는 대로 교인들을 끌어들임으로 맘모스교회를 이룩하여 구경꾼 신자들을 양산하게 만든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만들므로 한국사회가 점점 도덕적으로 병들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가 세운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여의도에 있는 본 교회 말고 전국에 31개의 지 교회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교인이 자그마치 78만 명. 안양에 본당을 둔 동생 조용목 목사는 21개의 지 교회에 30만 명, 형제가 연합하여 인구 100만의 종교왕국을 건설한 셈입니다.
 
슈퍼마켓이 하나 들어오면 500여 개의 구멍가게가 문을 닫습니다. 대형교회가 한 개 생길 적마다 300여 개의 소형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대형교회는 소형교회를 잡아먹는 공룡이기 때문입니다. 조 목사는 앞장서서 성장제일주의로 치닫게 함으로 세계 교회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성장한 한국교회를 이룩한 공을 크지만, 반면 성장제일주의가 만든 폐해도 엄청납니다.
 
한국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기복주의에 빠지게 함으로 복을 받으려는 데만 열심일 뿐, 나눔과 섬김의 손을 내밀지 않는 영적 불구자가 되게 함으로,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 앞에 큰 수치를 당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조 목사는 교회 세습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이미 막대한 부를 세습했습니다.
 
장남인 조희준 씨는 「국민일보」 사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차남 조민제 씨는 현 「국민일보」 사장입니다. 삼남 조승제씨는 교회 관련 회사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용기 목사의 아내는 한세대 총장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경제를 크게 일으킨 공도 크지만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큰 저해를 남긴 것처럼, 조 목사는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일으킨 공과 한국교회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34. 홍익교회도 부흥 성장했지요? 소상히 소개해주시면.
 
(답) 1975년 11월 15년 동안 시무하시던 김관호 목사가 은퇴한 후, 후임자로 경기도 마석 부근 가곡에서 목회하던 35세의 내가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부임 당시 교세는 너무나 약한 상태여서 서울노회 속한 서울 안에 42교회들 가운데 끝에서 3번째로 작은 교회(아래표 참조)였으나 내가 은퇴할 때쯤은 시무장로 15인, 은퇴장로 4인, 전임부교역자 4인, 교육전도사 5인, 제직 527명, 세례교인 1,010명가 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975년도 노회 각교회 세례교인수◇
광장189 구의158 동부중앙37 동서울120 마장중앙68 상원137 성수동102 성중30 송정150 왕십리중앙185 자양191 중곡동150 홍익44 화양중앙55 금성122 금호302 금호중앙280 무학704 문화474 숭덕63 신당중앙330 신암125 약수493 동숭379 명륜중앙180 묘동210 새문안1213 수송105 승동146 안동301 연동678 원일230 남대문530 신광315 영락6111 을지로223 충무266 필동63 한성97 한양271
 
부임하자, 나는 정상적인 교회 만들기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몇 분이 자유롭게 기도하던 새벽예배를 본격적으로 드리고 1977년 1월부터 금요기도회, 2월부터는 구역예배(6구역)도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1977년도부터 본격적 성장의 불길이 일기 시작함으로 교세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장년 집회수가 250명으로 증가함으로 교회당을 신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1년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건축을 시작하여 1982년 9월에 헌당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91년 11월 전기누전으로 본당 내부가 전소함으로 엄청난 재정적인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온 교인들이 자신 봉사에 힘씀으로 한 달 만에 복구공사를 마쳤고 다음 해인 1992년에는 증축공사를 단행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당이 배나 더 크게 되어 본당 뿐 아니라 교육관 시설까지 어느 정도 구비하게 되었던 것이고 집회수도 600명이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화위복의 역사였습니다. 특이나 교육 공간이 배나 커짐으로 교회학교 학생들이 많아지고 주일날 4부로 드리는 청년예배에 150여 명이 참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특기할 사실은 1993년-2005년까지 하나님이 사명의 길을 열어주셔서 교회 밖을 활발하게 사역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5년 단위로 세 개의 개척교회(고양홍익교회, 복된홍익교회, 아세아홍익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고, 2004년에는 두 가정을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이웃사랑회가 조직되어 지역사회 노인들을 위한 식사를 제공하는 데 힘썼고 교회 부근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교육관 안에 숙소를 제공하고 청년들이 한글반을 만들어 가르치는 등 나누는 교회가 되도록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만 66세가 되는 2007년 말을 기점으로 좋은 후임자에게 목회권을 넘기고 덕소로 이사했습니다.
 
지금은 전임자 김관호 목사가 운영하시던 ‘소리’지를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거의 10년째 인터넷으로 크리스천웹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년 목회(춘천본교회 1년, 가곡교회 7년, 홍익교회 32년)와 16년 크리스천웹진 소리 발간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 고전15:10 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분명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만큼 목회자로서는 너무나 부적합한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35. 청소년 청년층이 대거 유입된 홍익교회, 이유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답) 많은 교회들의 교회학교가 점점 쇠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미래지도」라는 책에서 보면 우리 교단만도 지난 10년 동안 교회학교 어린이 부서가 38만 명에서 28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성결교회는 30%가 감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울노회 어느 교회 담임목사는 교인들 대부분이 나이 많은 분들이고 청년들과 교회학교 학생수가 너무 적어 교회 미래가 어둡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홍익교회는 젊은 층이 두꺼울 뿐 아니라 교회학교 학생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2000년도에 들어 청년부의 부흥을 위해 주일 4부 예배를 신설하고 담당 교육전도사로 연세대 IVF 간사 출신인 최영걸 전도사님(현재 담임목사)을 청빙한 결과, 청년들의 수가 날로 증가 하여 매주 평균 150명 이상 모이는 큰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2014년 현재 교회학교에 매주 출석하고 있는 학생수가 총 376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영아부는 매주 부모님과 더불어 100명 이상이 참석함으로 교회학교의 수원지(水源池)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많은 젊은 부모들을 교회에 출석하게 함으로 전도의 창구가 되고 있습니다. 최 목사님의 부인인 김보영 사모님이 영아부와 아기학교를 주관함으로 홍익교회의 미래가 밝다고 볼 수 있습니다.
 
36. 목회하면서 틈틈이 많은 글을 쓰셨고, 책으로도 많이 발간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지요.
 
(답) 대학생 때는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신학교 입학하고 학보의 편집장을 맡은 뒤부터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향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글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소설가의 꿈은 슬그머니 접었습니다. 신학교 때는 아직도 유신정권 때가 아니기에 정부를 향해서도 소신껏 글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2년부터는 각 신문이나 잡지마다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한번은 「소리」지에 쓴 글이 문제가 됨으로 글 일부가 삭제되었다는 김관호 목사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정부를 향해 쓰던 글을 바꾸어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졸업 후 시골교회 목회하면서 김관호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소리’지에 글을 연재한 것이 나중에는 ‘회칠한 무덤 한국교회여’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가, 여기저기 원고를 청탁하는 곳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그중의 한 곳이 「월간목회」입니다. 그 잡지에 거의 매년 글을 게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 번에 걸친 연재물도 수록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글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때로 다른 교단 목회자를 만날 때 내 이름을 밝히면 ‘너무나 글을 잘 읽고 있다.’고 인사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느 때는 해외여행을 갔다가 만난 교포교회 목사도 내 글을 읽었다고 인사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사실, 많은 설교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너무 힘에 겨운 일입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글을 작성하면 좋았겠지만, 그 당시는 200자 원고지에 글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책 한 권 분량을 쓰고 나면 완전히 탈진되고는 했습니다. 여하튼 틈틈이 청탁받은 원고를 쓰다 보니 많은 책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회칠한 무덤 한국교회여(1975년)’ ‘교회 창으로 본 1980년(1978년)’ ‘젊은 크리스천에게 보내는 엽서(1979)’ ‘내가 바라는 목회자 부인(1980년)’ ‘한국의 시대가 오고 있다(1988년)’ ‘크리스천에게 고함(1988년)’ ‘나의 목회 나의 삶(1993년)’ ‘또 다시 불붙게 하라(1995년)’ ‘한국교회 이대로 안 된다(1997년)’ ‘당신은 멋있는 제직이 될 수 있다(1997년)’ ‘새신자가 알고 싶은 기독교(1998년)’ ‘마라톤 목회론(2008년)’ ‘달란트 교육(2012년)’
 
37. 교회 내 운동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부담되지는 않으셨습니까?
 
(답) 우리 교회는 아주 민주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홍익교회의 장점은 전국 각지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고, 많이 배운 분이나 적게 배운 분, 부유한 분이나 가난한 분 누구나 모두 대우받는 교회입니다. 재정 운영도 투명합니다. 주보에 매주 헌금 수입이 자세히 수록되고 한 달에 한 번씩 제직회를 통해서 재정지출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당회장이라고 함부로 재정지출하지 않고 사전에 의론합니다. 담임목사나 부교역자의 사례금도 호봉제를 두어 단번에 올리지 못하도록 제도화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교인들의 불만은 권력자나 부유한 자들이 장로로 피선되는 등, 공정하지 못한 인재 등용에 있습니다. 그러나 홍익교회는 그런 사례는 없습니다. 거의 2년 단위로 중직(重職)선거를 합니다.
 
한 번에 많은 수를 선출하지 않고 보통 장로 3인, 안수집사 5인, 권사 10인 정도를 합니다. 목회의 경험에 의하면 많은 수의 장로를 한 번에 선출하는 경우에 그들이 동기의식으로 뭉침으로 당회나 교회에 여러 가지로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직 선거 시 1차에는 무기명투표를 하여 배수공천하여 일주일 동안 공고하고 2차 투표를 합니다.
 
그런 공정한 과정을 통해서 선출했기 때문에 초등학교뿐이 나오지 않은 분도, 단칸 월세 방에서 사는 가난한 분도 장로로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피택자들에게 임직 기념품대를 위해 많은 금액을 부담함으로 교회들이 시험 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기념품대로 100만원을 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수천만 원을 부과하게 하는 일부 교회들과 비교하면서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일반교회를 비판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담임목사의 권위적인 태도입니다. 나도 젊은 목회자 시절부터 그런 목사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당회장실을 따로 만들지 않고 당회실에서 장로님들과 함께 사용하고 승용차도 중형으로 사용하고 식당에서도 교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는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권 학생들이나 기자들에게 크게 위축당할 일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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