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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과 삼각산, 어떤 이름이 좋으세요?
2024년 05월 11일 (토) 20:52:03 이승철 장로 www.cry.or.kr
 
 
 
 
"우리가 북한산을 너무 홀대한 것 아냐?"
"그러게 말이야. 100대 명산 중에서 맨 먼저 올랐어야 할 산을 이제야 오르다니…."

전국 100대 명산 중에서 북한산을 22번째로 찾은 것은 사실 너무 늦었다고 할만도 했다. 산의 명성으로 봐도 그렇고 지리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지리적 이점이 오히려 늦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음만 먹으며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산이라는 여유가 순서를 늦추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번에 찾은 것도 겨울철이어서 먼 곳의 험한 산을 오르기가 부담스러워서 북한산으로 정한 것이다.
 
산행은 강북구 우이동에서부터 시작했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 도선사 쪽으로 오르다가 왼편 진달래 능선으로 오르는 길로 방향을 잡았다. 능선의 첫머리는 가파른 길이었다. 그러나 잠깐 오르자 완만한 능선을 따라 대동문까지 가는 길은 시야도 넓고 평탄한 길이었다.
 
"히야! 저 봉우리 좀 봐, 세 봉우리가 모두 하얀 페인트칠을 한 것 같구먼."

능선길에서 오른편으로 바라보이는 백운대와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이 정말 새하얀 모습이다.
 
"하얀 페인트칠을 한 것이 아니라 하얗게 분을 바른 새색시 얼굴 같지 않아?"
"새색시? 세상에 저렇게 우람하고 거친 새색시가 어디 있담. 근육질의 잘 생긴 새신랑이라면 또 몰라도."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근육질의 우람한 모습 같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분명히 예쁜 새색시 같은 모습이야."
 
새색시 같다는 친구도 있고 새신랑의 모습으로도 보이는 북한산의 멋진 세 개의 봉우리는 대동문에 거의 이를 때까지 일행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새하얀 모습이 정말 세상의 어떤 산봉우리보다도 곱고 멋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북구에서는 이 북한산을 삼각산이라는 본래의 산 이름 찾기 운동을 벌이더구먼, 어떤 것이 진짜 이름이야?"
"둘 다 진짜 이름 아닌가. 고려시대까지는 삼각산으로 불렸는데 조선시대에 북한산으로 바뀌었다던데."

지금은 북한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산은 고려 시절까지 삼각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주봉인 백운대(836m)와 만경대(799m), 그리고 인수봉(810m)이 마치 세 개의 뿔처럼 불쑥 솟아 있는 모습에서 연유한 이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중에서 만경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올라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 하여 국망봉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 인수봉은 멀리서 바라보면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산 이름이 바뀐 것은 조선 숙종임금 때 현재 모습의 북한산성을 축조한 후부터라고 전한다.
 
한강 남쪽의 남한산성과 대칭되는 이름으로 북한산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때 산 이름까지 덩달아 북한산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래 북한산은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 등 각종 역사서와 지리서는 물론 옛 문인들의 글에서도 삼각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각산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자는 강북구의 주장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문집에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와 <유북한기>(遊北漢記)가 실려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북한은 산 이름이 아니라 한강 이북의 '한산 지역'이란 의미의 지역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일본 강점기 때 행정구역 지명개편을 계기로 삼각산과 혼용되다가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 지정과 함께 공식 명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럼 북한산도 나름대로 역사성이 있는 이름이네, 뭐."
"그렇긴 한데, 강북구에서는 고려 시절까지 1천년이 넘게 불렸었던 본래의 이름을 되찾자는 것이지."
"그런데 삼각산이 역사도 깊고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 세 개의 봉우리를 뜻하는 이름이라니까, 난 어쩐지 그 이름에 정이 더 가는걸."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이 산을 삼각산으로 부르기로 하지."

현재 공식적인 이름이 북한산이지만 어차피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산이다, 그 두 개의 이름 중에서 역사성이 더 깊은 이름이 삼각산이어서 모두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어느새 대동문 앞에 이르렀다. 두꺼운 판자문을 바깥쪽에 얇은 철판을 붙인 대동문은 상당히 견고한 모습이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30여명의 등산객들이 양지쪽에 모여 앉아 간식을 들고 있었다. 우리도 간식을 나누어 먹고 성벽을 따라 보국문 쪽으로 향했다.
 
잘 다듬은 돌로 복원한 성벽은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성벽 안쪽을 따라 오르는 산길은 응달이어서 얇은 눈이 덮여 있고, 바닥이 얼어 있어서 빙판길이다. 빙판길도 오르막길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봉우리 하나를 넘자 내리막길이다. 역시 오르막길보다는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워서 모두들 아이젠을 착용했다.
 
보국문을 지나 다시 봉우리에 오르자 성벽 너머로 칼바위 능선 봉우리가 날카롭게 솟아 있다. 뒤돌아보니 주봉인 백운대와 함께 뾰족뾰족 솟아 있는 세 개의 봉우리가 그 사이 눈이 녹아 본래의 빛깔을 되찾고 있었다.
 
우리가 성벽 안길을 따라 걷고 있는 북한산성은 사적 제162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산성은 본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했을 때 북방의 성으로 개루왕 5년에 쌓은 성이었다.
 
백제는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는데 근초고왕 때는 북벌군의 중심요새로 쓰이기도 했었다. 고려 고종 때는 몽골의 침략을 받아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었고 태조의 재궁을 이 성안에 옮기기도 했었다.
 
조선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숙종 37년인 1711년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였는데 그때 지금과 같은 모양의 석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의 규모를 살펴보면 대서문과 동북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이 있었고, 자단봉 위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와 중성문, 서북쪽에 북장대가 있었다.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사용 창고가 있었으며, 성내에 승병을 배치한 136칸의 중흥사라는 대찰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규모가 작은 12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성문으로 가는 길에서 뒤돌아본 성벽은 높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어서 잡목과 푸른 소나무 사이로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봉우리들 좀 봐! 정말 대단한데, 저 봉우리는 무슨 봉우리야?"

대남문으로 가는 성벽 길에서였다. 일행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 그리고 그 앞의 노적봉이다. 바위봉우리 표면에 덮여 있던 눈이 녹아 빛깔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전혀 다른 봉우리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저 봉우리 진달래 능선을 오를 때부터 보았던 바로 그 봉우리들이야."

다른 일행이 알아차리고 가르쳐 주자 그가 무릎을 탁 친다.

"이쪽에서 보니까 아주 다른 모습인 걸, 그런데 저 봉우리들 정말 대단한 봉우리들이다, 정말!"

이번에는 세 개의 봉우리들과 함께 노적봉까지 합하여 더욱 장엄한 모습으로 바라보였던 것이다.
 
"역시 이 산은 북한산보다는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리는 산이야!"

북한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제격이라고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우리 앞으로 이 산을 삼각산으로 부르기로 했잖아?"

우리 몇 명이 다른 이름으로 불러준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들은 북한산을 삼각산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기로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이날 등산로를 따라 오르내리며 바라본 삼각산은 여느 때의 모습과 달리 유별난 느낌으로 다가왔다. 능선과 봉우리를 따라 이어진 성곽과 함께 줄기줄기 이어진 능선이며 봉우리들이 정말 멋있고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삼각산을 조선 오악(五岳) 중 국토 중앙을 대표하는 명산이라 하여 중악이라고 불렀다. 조선 오악을 살펴보면 중악인 삼각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을 남악이라고 하였고, 황해도의 구월산을 서악, 강원도의 금강산을 동악, 그리고 백두산을 북악이라고 했던 것이다.
 
날씨가 포근하여 향로봉을 거쳐 불광동 쪽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힘들어하는 일행들 때문에 대남문에서 구기동 쪽 골짜기로 하산하기로 했다. 대남문을 통과하자 골짜기 쪽으로 긴 나무계단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골짜기 왼편은 눈 덮인 바위봉우리가 날카롭게 솟아 있고, 오른편 산 능선에는 슬픈 전설이 깃든 사모바위가 차가운 북풍 속에 외로운 모습이다.
 
"역시 이 산은 정말 명산 중의 명산이야, 내가 그동안 수십 번을 올랐는데도 오늘은 오늘대로 새로운 느낌이거든."

산을 좋아하여 이 산을 자주 찾았다는 일행이 새삼스럽게 산을 칭찬한다. 그러나 삼각산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이 어디 이 친구뿐이겠는가.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하산길에서도 삼각산의 모습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정답게 다가오고 있었다. 골짜기를 내려오자 갑자기 뱃속이 쪼르륵 거리며 시장기가 몰려온다. 변변한 간식도 먹지 않았는데 벌써 오후 2시가 지나고 있었다. 근처를 살펴보니 길가에 색다른 문구의 펼침막 하나가 눈길을 끈다. '해장국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 저 집에서 해장국으로 점심을 먹기로 하지. 해장국에 목숨을 걸었다는데 한 번 먹어 볼 만하지 않을까?"

역시 무언가 특별하게 튀는 간판이나 문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 법이었다.
 
 
"이 집 해장국이 그렇게 유명합니까?"

안으로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물으니 역시 그렇다고 한다. 한 번 맛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접 먹어본 해장국은 맛이나 음식의 질이 대단할 것은 없었다. 그냥 먹을 만한 수준이었다.
 
"난 아주 맛이 좋은데. 저 목숨을 걸었다는 펼침막 문구의 값을 하는 것 같아."

일행 두 사람은 아주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같은 음식이라도 입맛이나 취향에 따라 다른 맛을 내는 모양이었다. 소주 한잔을 곁들인 해장국으로 일행들은 겨울 삼각산 등산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내고 있었다.
 
/홍익교회 장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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