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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승만’은 없었다고? ‘건국전쟁’ 반박한다rll
2024년 03월 07일 (목) 10:44:02 김용민 목사 www.cry.or.kr

 

전쟁 첫날 피난을 결심한 이승만

1950년 6월 27일은 매우 중요한 날이다. 개전 3일째. 이날은 화요일이었다. 새벽 4시 열차 한 대가 서울역을 출발한다. 그 안에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부부가 타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정부도 국회도 군도 거의 몰랐으니까.

2대 국회의원인 이충환(무소속, 충북 진천) 의원은 2010년에 방송된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한국전쟁’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경무대에 갔더니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지키던 순경으로부터 ‘이 대통령이 수원으로 피난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전날(26일) 국회는 ‘서울 사수’를 결의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국회와 상의 없이 저 혼자 수도에서 탈출한 것이다. 이승만은 개전 당일 전세의 불리함을 감지하고는 무초 주한 미국대사에게 피난 계획을 통보했고, 이튿날 오후 즉 국회에서 ‘서울 사수 결의’를 논의할 시점에 탈출을 결정했다. (이뿐 아니다. KBS가 2015년 7월 공개한 일본 야마구치현의 문서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는 일본 정부에 6만 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을 세웠다.)

“북진 중” 거짓말했던 군

국가원수이자 전시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이 떠난 뒤 수도 서울의 27일의 긴급 방송 내용이다.

△오후 1시 국방부 “의정부 탈환” “수원천도 철회”

△오후 4시 국방부 “적이 서울 근처까지 왔지만, 미군 참전, 장교 군수물자 오고 있음”

△오후 9시 이승만의 대국민 담화

물론 이 모든 방송은 전혀 보존되지 않고 있다. 다만 국방부 방송과 관련해서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이들의 증언이 많다. 2010년 KBS 다큐멘터리에서 이형근 당시 준장(2사단장)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 (이선근) 정훈국장 등이 합동으로 방송하는데 전황과 반대되는 ‘국민은 북진 중이다’라는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수도 서울을 버리고 도망한 이승만에게 붙은 오명 ‘런승만’이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최근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오후 9시 대통령 담화 내용에 사실 왜곡이 있었다고 강변(强辯)한다. 70년 동안 통념이 됐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청취했다고 증언하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국민은 안심하라”로 기억되는 이승만 발언이 실은 없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CIA 예하부서 보고서 이용 ‘서울 사수’ 발언 부정

그 근거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수신했다는 미국 CIA 예하 해외방송 감청부서의 보고서이다. 그들이 기록한 이승만의 실제 발언은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맞서 싸울 수단이 없다시피 합니다”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물자를 보내는 중이고 이른 시일 내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이렇게 방송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난중임에도 ‘좋은 소식’이라고 했다. 혹시 발언하면서 국방부(정부)의 ‘북진 중’ 발표를 정정하고 본인의 피난 사실을 알렸을까? 그렇지 않았다. ‘서울 사수’ 언급은 없었다지만, 방송을 통해 공신력 있는 정부 발표를 기다린 국민에 진실을 말하지 않은 점은 불변이다.

그런데 이 방송이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송출될 무렵, 38선이 걸쳐진 연천에서 수유리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하한 인민군 선두 부대는 밤 10시를 기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창경궁 쪽으로 진입했고 때를 같이해 군은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럼에도 연희동에 자리한 방송국까지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은 탓에 서울 동부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이승만 발 ‘좋은 소식’은 계속 전파를 타고 있었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도, 이동하는 피난민의 행렬을 보고도 100만여 서울시민은 피난을 포기하고 제자리를 지키며 정부의 대책을 기다렸다. 이튿날(28일) 새벽 3시 KBS에서 인민군 군가가 들릴 때까지.

180도 다른 증언 “이승만 실제 거짓말했다”

미국 정보기관 보고는 정확성을 생명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CIA 예하부서의 보고서가 조작됐을 가능성은 작다. 그러나 이승만의 27일 오후 9시 대국민 담화를 코앞에서 듣고 녹음했던 제작자는 전혀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당시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이던 고 유병은 전 KBS 대전방송총국장은 생전인 1990년 6월 15일(13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당시 “친애하는 서울시민 여러분, 아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 서울시민은 안심하십시오”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유 과장은 경향신문에 “후일에 안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했던) 방송 내용은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아군은 계속 후퇴 중이었고 그 시각 서울이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죠”라고 회고했다. 전혀 다른 증언이 CIA 자료와 충돌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기억과 더불어.

뻔뻔한 이승만 “나는 사과 못 한다”

‘서울 사수’ 발언의 사실 여부와는 별론으로, 대전 피난 사실을 숨기고 국민에게 희망 고문을 한 이승만의 과오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당연히 대국민 사과가 있어야 했다. 실제 뒤따라 대전에 피난 온 신익희, 장택상, 조봉암 등 국회의장단은 충남지사 관사에 있던 이승만에게 대국민 사과를 권유했다. (이 대목에서 ‘서울 사수’ 발언이 없었고 ‘런승만’은 오해라는 이들은 국회의장단이 왜 이승만에게 대국민 참회를 요구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팔 벌리는 제스처를 써가며 “내가 (반란 진압 과정에서 고통을 겪은 백성에게 사과한) 당나라 덕종이야?”라며 거부했다. “나는 사과 못 한다, 하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해라”라는 말했다는 설도 있다.

‘책임 전가’의 원조 이승만

이승만의 마음도 편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과 선사인 청해진해운에, 이태원 참사 당시 경찰·소방청에 책임 전가한 기술의 원조는 이승만이었다. 그는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쯤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것뿐인데 육군 공병감 대령 최창식을 사형에 처했다. 9월 19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날, 임시수도 부산에서 말이다. 당연히 당사자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부산 교외에서 형이 집행됐다.

인도교 폭파를 지시한 총참모장 채병덕은 6월 30일 초기 패전의 책임을 지고 총참모장에서 해임돼 경남지구편성군사령관으로 밀려났는데, 미국 작가 T. R. 페렌바크가 쓴 ‘이런 전쟁’(This kinds of war)에 따르면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만난 미군복을 입은 남자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파 실행자 최창식과 그의 윗선 채병덕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국방장관 신성모와 이승만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물을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셈이 됐다.

서울이 적에 장악되던 때에 북한에 부역한 사람을 색출한다며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해 서울에 남았던 시민은 안전했을까? 이승만은 “정실과 관용과 누락”을 두지 않고 처벌하려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인천 상륙에서 서울 탈환까지 거의 2주가 걸렸는데 엄중 처벌을 받아야 할 부역자들이 여전히 서울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한국경찰사’ 2권에 따르면, 인민군 치하 3개월간 부역자 중 검거 15만3825명, 자수 39만7090명으로, 총 55만915명의 부역자를 처리했다. 그들 중 800명은 사형당했다. 내무부 통계국이 발행한 ‘1955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을 보니 한국 전쟁 때 남한 전사자는 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178,631명이다. 그런데 국가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할 민간인은 사망자 24만여 명, 이 중 양민 학살 사망자 12만 8,000여 명이었다.

이승만, 당당했다면 왜 그랬을까?

요컨대 이승만이 ‘런승만’이 아니었다면 이런 무도하고 무리한 학살을 감행할 이유는 사라진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것은 각자가 누릴 자유이다. 그러나 자료의 부재를 이유로 그 틈새를 파고들어 본질을 바꾸려는 태도는 역사 왜곡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이승만을 쫓아낸 4.19를 두고 “불의에 항거한 민주 이념”이라고 규정했다. 역사적 정의(定義)가 끝났다는 말이다. 이승만을 추앙해서 그가 옹호했던 친일파의 시대를 재건하려 하는가? 일본도 자국민을 내팽개치고 학살한 지도자를 정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글을 맺으며 그들이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CIA의 이승만에 대한 인물평을 소개한다.

“이승만은 또 그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단체가 나타나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밀쳐버리려고(thrust aside) 했으며, 그런 시도를 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이승만은 결국 이 자만심(vanity) 때문에 그가 미국에서 활동할 때든 한국에 돌아갔을 때든 자신이 추구하는 사적인 이득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말을 바꾸곤 했다. 그의 지력(지력, intellect)이라는 것은 피상적인 것(shallow)이며, 그의 행동은 종종 비합리적이고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군다(childish).” (1948년 10월 28일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의 생존에 대한 전망(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 보고서)

/벙커1교회 담임목사, 평화나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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