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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바울
2024년 02월 16일 (금) 19:40:29 김용민 목사 www.cry.or.kr
2024.1.7 혁명가 바울
(에베소서 2:14~22)
 
유시민 노무현재단 전 이사장이 했던 말인데 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요. '사람들은 특권층을 파괴할 생각을 하지 않고 스스로 특권층이 되려고 한다. 예전에 진보 정당 당원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자주 섞인 채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노동 해방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루빨리 돈 벌어서 노동자 신분을 탈출하려고 한다.'
 
얼마 전 부산에서 윤석열이 재벌 회장들을 병풍처럼 두르면서 떡볶이 먹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다시 가보니까 윤석열이 왔다 간 것은 감추고 삼성 회장 이재용이 왔던 자리라면서 이렇게 홍보를 하다군요. 당시 실제 이재용을 환대하던 시민도 있었습니다. 그때 이재용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윤석열이 노여워 할까봐 쉿' 이랬었어요. '우리가 이재용씨를 혐오해서는 안됩니다. 혐오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러나 부자 중에 부자인 그를 환대해야 할지는 의문입니다. 이재용씨는 아버지로부터 부당하게 부를 세습했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 회사는 물론이고 국민의 노후자금이라 할 수 있는 국민연금마저 손실을 보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법과 공권력을 능멸했습니다. 그리고 프로포폴이 마약이죠. 마약도 했습니다. 마흔 한 번이나. 프로포폴 투약 논란 기억하실 겁니다. 노조 파괴됐습니다. 권력자에게 뇌물을 줬습니다. 이런 일까지 했다고요? 이거 억울한 누명 아닙니까?' 라고 하실 분들이 있을 텐데 그거 수사한 사람, 기소한 사람이 바로 윤석열입니다.
 
자,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하죠. 그보다 더 쓸데없는 걱정은 재벌 걱정입니다. 부당하게 경영권을 승계한 것과 관련해서 곧 법원에서 판결을 할 예정입니다. 이재용이 그래서 최고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고 윤석열이 오라고 하면 가고 마시라고 하면 마시고 그러다가 토했죠. 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업혀서 실려 나갔대요. 얼마나 퍼먹였으면 순한 출자니 비자금이니 분식회계니 이런 말 나올 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재용씨, 차라리 기업을 하지 말고 교회를 운영해보면 어떨까요? 지금이라도 신학교 나와서 웬만한 신학교들 요즘 등록금이 무상이라고 하던데 등록금을 다 장학금으로 돌렸다고 하는데 신학교 나와서 목사가 된 다음 삼성그룹 간판을 떼고 삼성교회를 만들면 어떨까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말이죠. 교회 헌금함에 돈이 들어가는 순간 이건 블랙홀에 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무슨 용도로 썼는지를 그다음부터는 알 수가 없어요. 헌금함에 들어가는 순간 어느 누구도 추적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과세 대상도 아니고요. 물론 어느 누구도 감시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정직하게 투명하게 관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교회의 자금을 추적하겠다 그러면 교회가 반발하겠죠. 그러면 천하의 윤석열도 벌벌 떨 겁니다. 교회가 만약에 반발했을 경우 그래서 그걸 이용해서 실제 어떤 기업 회장이 교회를 개척하는 척 하면서 비자금 세탁 용도로 썼다는 그런 보도도 아마 여러분들이 보신 기억이 있을 겁니다. 헌금함에 들어온 돈 정말 목사가 제멋대로 써도 문제 삼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형교회 재정비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 근데 말이죠 이건 여담인데 1997년에 삼성이 돈이 된다고 판단했던지 복음성가 CCM 사업에도 손을 댔습니다.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은데 그때 그 삼성에서 만든 앨범 중에 어떤 밴드가 있는데 밴드 앨범에 수록된 찬양있습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이라는 곡을 아실 겁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욥기 말씀을 갖고 만든 찬양이잖아요. 삼성 자본이 들어간 찬양이라고 하면 좀 이상할까요? 예, 어쨌든 그 찬양은 너무나 좋습니다. 찬양을 부르신 분들은 제가 아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에요. 삼성도 이렇게 또 복음성가 앨범 출반에 기여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네 물론 삼성 보고 교회 만들라고 한 것은 농담입니다.
여러분 농담이긴 했지만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믿는 교회 상상만 해도 황당합니다. 그렇지요? 그런 교회에 은혜가 있을까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돈과 무관하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니지요? 자본주의 이전에도 고대 사회에서도 풍요의 신, 바흘과 야훼 하나님을 겸해서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건강한 교회라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돈을 지배할 수 있어야 됩니다. 돈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지배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을 쉽게 지배하려면 돈이 많아야 할까요? 적어야 할까요? 많을수록 돈에게 지배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어쨌든 돈이 우리의 신앙고백과 행동규범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매달 빠듯함에도 올해도 벙커원 교회는 헌금 수입의 10분의 1을 우리 사회 고난받는 이웃에게 기부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뭐 바리세인처럼 세상에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목적으로 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자본에게 지배받지 않는 교회가 되겠다. 돈을 지배하는 교회가 되겠다. 그런 신앙고백, 그런 행동규범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울이 세운 어떤 교회 이야기입니다. 에베소 교회. 에베소는 지금 과거에 터키로 불렸던 출키의 서해안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셀추크라는 도시인데요. 셀추크라는 도시의 옛날 이름이 에베소입니다. 에페소스.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인 로마, 고린도, 앙디옥과 함께 교통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바다가 있었습니다. 바다만 건너면 바로 그리스 아테네, 즉 유럽이었습니다. 자 그러다 보니까 온갖 철학과 종교와 자본이 모인 동네였습니다.
 
그 동네에서 믿는 신만 5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중에 하나님이 1/n이었어요. 바울은 이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 조건이라고 봤습니다. 이 동네도 그렇지만 이 동네를 통해서 복음이 널리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라고 믿었던 것이죠. 사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눈물과 땀이 적셔진 곳입니다. 무려 이곳에서 3년을 수구했습니다. 환대도 받았지만 살해의 위협도 당했습니다. 그렇게 수구한 다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자마자 붙잡혔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유는 이거였습니다. “너 이방인들하고 그렇게 잘 어울려 다니더라.”, “너 이방인들하고 굉장히 친하더라.” 이런 죄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로마에 압송됩니다.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고 하죠. 그런데 이제 로마에 가서 우리는 감옥에 간 걸로 알고 있는데 감옥이라기보다는 가택연금. 전두환이가 집권할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도 가택연금 당하지 않았습니까? 집에서 못 나왔어요. 바울은 그렇게 로마에서 가택연금된 상황에서 편지를 썼다고 하죠. 그 편지를 에베소서라고들 부릅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보는 에베소서가 진짜 바울이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이게 신학자들의 중평입니다.
 
자, 누차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진짜 쓴 거. 확실히 바울이 쓴 거. 뭡니까? ‘데갈빌빌고로’. 그렇습니다. 데살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그리고 로마서. 이거 말고 나머지 바울서신이라고 불리는 서신서들은 바울이 쓴 게 아니라 바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썼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냥 자기 이름으로 무난하고 그렇게 해서 내가 썼다라고 인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왜 폼 안나게 남의 이름을 갖다 쓰는 건가요? 사연이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사연이 없는 게 없죠. 바울은 살아있는 동안은 곧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 날이 도적같이 올 줄 너희는 아느냐?” 복음성과 가사인데 이게 데살로니가전서에 있어요. 그런데 재림은 없었고 바울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기대대로 되지 않았고 심지어 권위있는 사도가 더 이상 메시지를 내지 못하게 되니까 굉장히 당황하고 또 허탈했습니다. 이 때 교회와 그리스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가르침을 누군가는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복음서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나왔고 바울이 안 쓴 바울서신, 제2바울서신이 나왔던 것입니다. ‘데갈빌빌고로’가 아닌 다른 말씀이 나왔던 것이죠.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이니까 우리가 마음을 다잡고 흔들리지 말고 교회 공동체를 잘 지켜라.이 제2바울서신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데갈빌빌고로’에 포함되지 않은 오늘 본문은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데갈빌빌고로’ 정말 외우기 쉽죠? 옥중서신도 외우기 쉽습니다. 에빌골빌 - 에베소서, 빌립보서 , 골로세서, 빌레몬서. 그래서 사실 제2바울서신을 두고 카렌 암스트롱 같은 비교 종교학자는 제2바울서신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대단히 급진적인데, ‘데갈빌빌고로’를 보면 굉장히 급진적이에요. 그래서
“제2바울서신들을 보면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좀 더 받아들이기 달달한 걸로 변질시켰다. 바울의 가르침에 설탕을 부었고 감미료를 부었다.”
이게 바로 카렌 암스트롱의 비판입니다. 자, 바울의 진정서신은 대단히 급진적이었다고 평가했는데 어떻게 급진적이었느냐. 카렌 암스트롱의 말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구조적인 부정에 반대했고, 인종, 계급, 성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싸웠다.”
모든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서 싸웠던 주인공이 바로 바울이었다는 것이죠. ‘데갈빌빌고로’ 외에 제2바울서신을 보면 골로세서와 에베소서가 대표적인데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과연 바울의 뜻인가요? 바울은 복음 앞에 남녀가 없다고 분명히 선언했는데, ‘데갈빌빌고로’ 아닌 말씀에서 왜곡시켰고, 바울의 성차별에 대한 거부를 엉뚱하게 변질시켰는지, 엉뚱한 말이 나왔어요. 근데 고린도전서는 진정한 서신이 아닌가요? 여기도 바울이 오해하게 쓴 것입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근데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여성 신도에 한정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성 교인들이 많았을테고, 고린도는 항구도시라서 여성들이 돈을 많이 벌었고 목소리도 굉장히 크게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여성들이 평화를 위해 잠잠하라고 말한 거예요. 이런 맥락을 읽지 못한 사람들은 바울을 여혐주의자로 오해하는데,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다른 구절에서 여자와 남자가 서로 필요한 관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진심은 남녀 가르지 말자 이겁니다. 정리하자면 바울은 대단히 급진적인 사람이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해놓고 200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2000년 전부터 진보적이었어요.
 
바울은 잘 아시는 대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 6개 정도 세웠는데 이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정치적 맥락이 전혀 없이 정치적 맥락이 완전히 거세된 채로 오로지 예수교의 교세를 넓히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일까. 교회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개념이 지금과 같지 않았어요. 지금이야 사실 교회를 세운다 그러면 “아이고 뭐 교회 많은데 고개만 돌리면 다 저기 상가마다 교회가 있고 십자가탑이 있는데 뭘 또 이렇게 개척하려고 그래” 이런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죠. 당시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는 전혀 다른 맥락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끄나풀이나 다름없던 귀족들의 통치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귀족들의 통치 시스템 바로 민회. 백성 민(民)자의 모일 회(會)자에서 민회. 그런데 바울은 이 민회에 맞설 민중의 조직체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였어요. 민회의 라이벌 교회. 그 교회는 무엇을 하려고 모이느냐. 계급과 차별을 파파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는 모두가 평등하고요.
 
서로 구제를 했습니다. 서로 구제를 했어요. 지난 주곡 성가대 때도 예화를 들었습니다만 이 땅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양반과 천민의 구분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그런데 양반이 천민에게 형제님 이러는 거예요. 또 남자가 여자한테 자매님 이러는 거예요. 이런 정말 혁명적인 일이었죠. 그래서 조선이 이유교 질서를 흔드는 사교다 해서 천주교를 단속했던 거 아니겠습니까. 초대교회의 모형이 이렇습니다. 모두가 평등했고 서로를 구제하고 또는 섬겼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받은 초대교회의 모습 그대로 즉 약자의 공동체를 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혁명적입니까. 이 자체로 혁명이에요.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혁명과 바울이라고 되어 있죠. 혁명과 바울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지중해권을 제패했고 그 뒤로 더 이상 정복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우리가 확장할 만큼 확장했으니까 이 때부터는 이 제국을 관리하자 시스템으로 관리하자” 이랬던 겁니다. 그래서 지배했던 나라에 대해서 장악했던 나라에 대해서 일종의 문화정책을 펼쳤습니다. 관용하고 포용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조공을 바쳐라. 황제에게 복종하라. 이런 취지였습니다. 조건부로 자율권을 준 것입니다. 일종의 기만술이었던 것이죠. 황제에 대한 복종 아니 복종을 넘어서서 아예 신으로 모셔라. 이런 압박이었습니다. 아, 로마의 힘이 너무 크다 보니까 여기에 저항했다간 큰일 나겠어요. 그래서 다들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합니다. 너무 조용해요. 여러분, 이게 팍스 로마나(Pax Romana) 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진정한 평화입니까? 가짜 평화죠. 가짜 평화. 이건 가짜 평화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이 제국의 가짜 평화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교회를 세움으로써. 전도를 함으로써.
 
사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오늘날에는 말씀드린 대로 교회 설립이 흔하다 못해 식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교회는 황제의 숭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황제가 아닌 예수를 선택하는 집단. 저항입니다. 이건 반역입니다.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 자,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에요. 더 큰 혁명의 DNA가 여기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장벽을 모두 허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인종적 정체성, 종교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자라고 지금 선동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가 찬과 칼로써 세계를 제패했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계를 제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발상입니까? 바울은 유대교는 끝났다라고 말하잖아요.
 
왜냐?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유대교를 믿으려는 사람들한테 "야, 우리 가난의 사이로 들어와라." 이러한 것이죠. 율법을 지켜라. 할렐루야. 너 그러지 않으면 우리하고 한 가족이 될 수가 없어.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거예요. 평등이란 없다. 이런 거죠. 이런 유대교의 그릇으로는 혁명을 완성할 수 없다라고 바울은 봤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로마의 가짜 평화를 이길 수 없다. 이렇게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혁명을 하기 위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디 있느냐. 원수된 사람들끼리도 밤을 허물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자. 이게 아닌 것입니다. 이게 아닌 거예요.
 
아니, 에베소서는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에베소서는 바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에베소서의 말씀. 오늘 본문 말씀. 진정서신이라 할 수 있는 바울이 진짜 쓴 거라고 할 수 있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말하잖아요. 3장 28절,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슴에는 가짜 평화의 상징 로마가 전복됐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이래야 합니다. 모든 익숙한 기성 질서를 허물어야 합니다. 모든 기득권 논리를 깨부숴야 합니다. 모든 힘자랑 돈자랑을 짓밟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혁명성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은 맛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힘으로 돈으로 누르려는 상대방을 누르려는 사악한 힘에 맞설 뜨거운 의지가 불타있습니까? 이게 식어지는 순간 교회도 식어지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축창을 들어야 되느냐? 아닙니다. 그 반대여야 합니다. 우리의 혁명의 도구는 그 반대여야 하는 것입니다. 힘의 반대, 돈의 반대여야 합니다. 힘의 반대, 돈의 반대여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진 창벽이 허물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권력의 횡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이 가한 보복의 최정점이 바로 십자가형입니다. 얼마나 잔인한 형벌입니까? 몇 날 며칠 저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그냥 둬버리는 거 아니에요? 짐승이 날아와서 나는 짐승이 날아와서 쪼아먹는 비참하게 죽어가는 그런 형벌이 바로 십자가형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이 모든 폭력을 무력화 하셨습니다. 로마 권력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우리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신 역사로 봅니다. 십자가의 은총을. 그런데 정치적 의미로 보자면 모든 세상의 힘을 비웃은 이겨낸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를 믿는데 어떻게 세상의 힘 앞에서 짓눌리고 신음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주간 1940년대와 1950년대에서나 볼 수 있었을 한 유력 정치인에 대한 백색 테러가 있었습니다. 오늘 주고 오면의 악마화 이야기를 실었는데요. 이 범죄는 아산에 사는 67살 먹은 테러범 김모라는 사람이 저질렀지만 개인적 일탈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슨 배후가 있거나 하는 음모론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이번에 테러를 당한 그 정치인, 그 정치인을 “야, 걔 제거해도 돼. 걔는 악마야.” 이렇게 끊임없이 주입시킨 자들. 그들이 공범? 아니죠. 주범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그 정치인 목을 찌른 흉기가 만약 1mm라도 더 들어갔더라면 피해자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 수 있다.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아, 1mm만 더 들어갔더라면 그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여러분,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 정치인을 잃은 현실도 참담하겠지만, 악마화의 주술이 끝내 승리하는 사회. 이 사회에 우리가 절망하면서 우리는 깊은 정치 혐오의 늪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래서 1mm 앞에 멈추게 하신 것은, 그 정치인은 물론이고 폭력을 반대하고 참평화를 추구하는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울이 십자가 사건의 감화 감동을 받아서 로마 권력을 비폭력으로써 이겨낸 그 예수를 자기 생명을 걸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힘과 돈을 이기는 존재가 바로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힘과 돈을 빌리지도 않고 식여내는 참평화였기 때문입니다. 참평화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일상에서 누구나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누리는 것. 저는 이것이 참평화라고 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런 표현을 참 잘했습니다. 그걸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안 입고 온 꼴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 힘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게 바로 참평화인 것입니다. 바울이 꿈꿨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문을 열었던 그런 참평화.
 
그러나 힘껏 쓰는 자들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야, 그런 세상은 없어. 착각하지마. 이 개돼지들아, 우리는 말이야.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무죄야. 그러니까 뭐, 악법이고 정치 공세에 불과한 특검 절대 못 받아 까불지마. 그리고 너희는 죄가 없어도 유죄야. 우리한테 각을 세우는 한. 376번 압수수색에 60명이 넘는 검사가 털털 털어, 그렇게 해서 구속영장을 청구했는데, 기각됐다고. 야, 너희들 죄가 없는 줄 아니? 그게 끝난 줄 알아? 죄 있어. 죄가 어디 있냐고? 아니 계속 털고 또 털면 언젠가 어디선가 나오겠지” 이러는 자들이 지금 굳건히 권력을 틀어지고 있습니다.
 
그 권력 앞에서 배웠다는 자들, 가진 자들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마음껏 이야기해도 전혀 뒷감당 안 해도 될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는 그냥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입 열어서 저주의 말을 퍼붓던 그 자들이 지금 조용해요. 여러분, 이걸 평화라고 한다면 이게 참평화입니까? 가짜 평화입니까? 가짜 평화입니다.
 
존재 자체로 폭력인 이런 자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불리해도 손해보더라도 맞서 싸우는 것. 이것이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참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악마화에 시달리는 이들의 벗이 되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나누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빈곤한 나라에서 온 난민들, 여러 형태의 소수자들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특권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앞서 얘기했죠. 사람들은 특권을 타파하려고 하지 않고 본인이 특권 세력이 되려고 한다고요. 지금 혹시 남 머리 위에 올라 서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그런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까? 우리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를 위한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기대를 꺾어서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가짜 평화의 수혜자가 되려 합니까? 내가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로, 경험으로, 재산으로, 학벌으로, 신분으로 자랑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있습니다. 약자 코스프레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것도 평등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스스로 약자 코스프레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지를 가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자기를 약자로 포지셔닝하고 상대를 그 이마에다가 “너는 강자야” 하면서 이렇게 낙인을 박으려고 해도 안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지키는 것은 내 모든 계급장을 빼는 것입니다. 내가 계급장을 달아서도 안 되겠지만, 상대가 계급장을 달았다? 거기에 기죽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짜 평화를 실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로마라는 이름의 폭력을 맞서려고 생을 걸었던 바울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철저히 힘의 논리에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 폭력은 흉내 내서도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풀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헌금 수입의 10분의 1을 사회에 내놓겠다는 것은 돈에 지배받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말씀드렸죠. 우리 교회가 물리적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 폭력도 금하겠다고 한 것은 힘에 지배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왜 새해를 맞을 때 비폭력 대화 훈련을 요구합니까? 비폭력 대화는 단지 우리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기 위한 어떤 운영 원리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의 정체성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공동체 구성원에게 폭력적 언사를 쓴다면, 또 갈라치기를 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공동체 위기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화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외치면서도 공동체성을 지켜온 우리 교회 주님이 주신 이 교회의 가치를 우리는 사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교회’라는 찬양에, 주님이 무엇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피로 사신 교회라고 우리는 찬양했습니다. 또 뒤에 가서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상 아시죠? 남미 가면 있는 예수상. 이렇게 되어 있는 예수상 그 동상 바로 뒤에 칠레가 있습니다. 칠레하고 아르헨티나 국경 부근에 있는데 동상이 다 만들어진 무렵에 그 칠레에서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동상을 보니까 예수님이 브라질을 향해서 이러시고 칠레에는 등을 보이셨다.” “우리 칠레에는 등을 보이셨다. 등 돌리고 계셨다.” 그러면 칠레 사람들이 마음이 상했어요. 거기도 그리스도교 문화권인데 이게 양국 갈등으로 이어지고 전쟁까지 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만약 유튜브가 있었다면 칠레의 극우 유튜버들이 아르헨티나를 혐오하는 이런 방송을 냈을 겁니다.
 
그런데 칠레의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예수님이 저 나라를 향해서 이러고 있는 것은 저 나라가 우리보다 예수님의 보살핌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 뒤로 양국 갈등 전쟁까지도 갈 수 있었는데 양국 갈등이 잦아들었다고 합니다. 말 한 마디에 천냥빛을 감는다는 말이 있죠. 그렇습니다. 말 한 마디에 우리는 평화를 이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벙커1교회 교우 여러분, 새벽부터 평화를 깨는 테러에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정치도 이러한데 안보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북이 연평도 앞에 포를 쏟아부었는데 징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여러분, 평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 있어야 지켜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정세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조하게 됩니다.
 
게다가 지금은 정의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세상, 완전히 뮤트(mute)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가만히 있을 겁니까? 폭력을 배격하고 할 수 있는 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작지만, 아주 작지만 주님의 간섭과 개입을 강구하면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변방 식민지 백성에 불과했던 바울이 그 수하에 군대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가진 돈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는 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제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따로 없다. 우리 뜸모아서 참 평화의 공동체를 세우자”면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희생으로 세상의 모든 폭력을 굴복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으로 세상을 결속시키려고 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그렇다고 주지 않습니까? 뜻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에 한 모씨가 언급해서 굉장히 김이 센데,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 루쉰(魯迅)이 한 말입니다.
희망이란 길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은 곧 길이 된다.
그 비슷한 말을 노무현 전 대통령도 했습니다. 10.4 정상회담 앞두고 걸어서 도보로 북을 건너갔잖아요..
이 휴전선을 내가 먼저 넘어갔는데, 그 다음에 또 누가 넘어가고 또 그 다음에 누가 넘어가면 결국 이 길은 지워지지 않겠느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길을 만들기 위해 나를 불렀을 때 순종합시다. 거친 가시밭길을 걸을 때도 회피하지 맙시다. 계속 가다 보면 내 뒤에 누군가가 계속 가다 보면 그 가시밭길이 지름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을 사는 자에게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 복이 충만할 것이고, 그 일상이 만사가 형평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2024년 값진 갑진년이 되도록 함께 뜻을 모읍시다.
 
/벙커1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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