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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2023년 08월 10일 (목) 09:17:42 김용민 목사 www.cry.or.kr

(마5:3-12)

마태복음 5~7장에 걸친 산상수훈

어떻게 마이크 없이 설교하셨을까?

오늘 우리는 산으로 갑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여덟가지 복을 가르쳐주시거든요.산 위에서 내리신 교훈의 발언, 이게 만만치가 않아요. 마태복음에서만 5장, 6장, 7장해서 장장 세 개 장에 걸쳐 하십니다.

저는 사실 산상수훈하면 이런 의문부터 듭니다. 아니, 모인 사람이 꽤 됐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마이크도 없는 시대에 어떻게 설교하셨을까? 인터넷엔 답이 다 있어요. 누군가 올린 글인데요. “해가진 저녁에는, 햇빛이 없어진 산의 공기가 차가워진다. 또 공기가 무거워진다. 이때 바다의 공기를 그에 비해 가벼워져 산에서 바다쪽으로 바람이 불게 된다. 그때에 예수님이 산에서 산 아래 있는 무리에게 설교하시면 큰 노력없이도 잘 들리게 된다.”

갈릴리호수 북서쪽 어떤 산

들은 사람은 출신 성 계급 직업 불문 다양

그 산은 보니까 갈릴리 호수 북서쪽 연안의 어떤 산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면 말이 되지요. 산 정상에서 바다같은 갈릴리 호수를 향해 말씀하시면 그게 여러 군중에게 들렸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군중은 누구였을까요? 여기는 특정도시 주민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아마 원근 각지에서 예수라는 사람의 명성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출신, 성별, 계급, 직업을 불문하고 모인 것 같아요. 교통편 등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신통한 말씀이었기에 예수 한 사람을 보려고 이렇게 많이 모였을까?

로마제국과 앞잡이 억압에 지쳤던

세례요한 좌절에 더 힘 빠졌던 민중

당시 유대사회를 지배했던 로마 황제는 누구였습니까? 가이사 아구스도, 즉, 옥타비아누스 황제시대였습니다. 아구스도는 힘이 있었던 것은 물론 존경까지 받았던 로마 황제였습니다. 제국을 지배하려면 가끔씩 본보기로 점령한 나라를 짓밟아 힘으로 다스릴 수 있었지만, 아구스도는 지방자치 권한도 부여했고 각자의 법률, 문화, 풍습, 종교까지 인정해줬어요. 대단한 자신감이었지요.

사실 네로나 티베리우스처럼 잔인하게 기독교를 짓밟은 왕도 있었지만 아구스도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지역의 본봉왕이라 할 수 있는 헤롯은 잔인했지요. ‘두 살 이하 남자 아기를 죽여라’ 이런 칙령을 내렸듯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알았던 자였어요.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짓밟혔어요. 세례 요한이 등장해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역시 잡혀가 목이 날아갔지요. 새로운 희망을 기대했던 민중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어요.

팔복① “심령 가난…천국 소유”

여기서 가난은 빈(貧)이 아닌 허(虛)

이때 예수가 떠올랐어요. 그 예수가 이제 마태복은 5장에 이르러 산에서 연설합니다. 이 연설의 첫마디가 팔복입니다. 여덟까지 복.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중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이건 무엇일까?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였잖아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이 쓴 언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는 아주 심오합니다. 그래서 번역이 참 곤란할 때가 많아요. 심령이 가난하다,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어떨까요? poor일 것 같지요? 맞습니다. poor입니다.

그런데 한문성경에는 어떻게 돼 있을까요? 가난하다 할 때 빈(貧)일 것 같아요. 아닙니다. 공허하다, 할 때 허(虛)입니다. 한문이 영어보다 더 정확해요. 신약성경 원문에서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영적인 파탄 상태를 말합니다. 절대자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심령 ‘가난한’(○) ‘가난했던’(×)

현재진행형일 때 하나님나라 보여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했던 사람’입니까? 현재진행형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만약 과거엔 가난했고, 지금은 가난하지 않은 경우, 즉 내 마음이 공허하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명심합시다. 천국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져라, 이 말이 아닙니다. 조건이 아니에요. 심령이 가난해질 때만이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해야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많은 교회도 물질의 복을 받는 것이 곧 성공한 신앙의 증거라고 말해요.

과연 그럴까요? 세상 물질에게서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그걸 가르치는 목사가 있다면 더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은 물질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못하는 공허감, 그래서 세상 모든 좋다는 것들이 의미 없어지는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복 중의 복, 천국을 얻는다고 합니다. 뭐 하나 더 손에 넣으려고 발버둥치지 마세요. 천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입니다.

팔복② “애통한 자…위로 받을 것”

윤동주 “슬퍼하는 자…영원히 슬퍼할 것”

두 번째 복은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다, 슬퍼하다, 이런 뜻이지요. 윤동주의 시 ‘산상수훈’을 보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여덟번 반복되더니 맨 마지막에 ‘그가 영원히 슬퍼할 것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박명수 어록

· 고생 끝에~ · 세번 참으면~ · 즐길 수 없다면~ · 일찍 일어나는 새는~ ·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허무합니다. 박명수 어록을 보는 것 같아요.

고생 끝에 골병 온다 세번 참으면 호구된다 즐길 수 없다면 피해라 일찍 일어나는 새가 피곤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매우 늦은 거다

그러고보니 성경의 말씀은 꼰대같습니다. 슬퍼하면 위로받는다, 무슨 말일까요?

‘애통하는’=가장 크게 슬픈 상태

정의의 하나님 안 나타나 고통받는 상태

‘애통하는’이라는 말을 그리스 원어에서 찾아보니 가장 큰 슬픔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정의의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아서 고통받는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게 로마이든 헤롯이든 간에 힘이 지배하는 세상, 전쟁과 내란, 수탈과 폭력 앞에 희생되는 이들의 아픔 또한 이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정의란 있는가’ 묻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 무슨 복을 주신다 했습니까? 위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위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입니다. 깊은 슬픔에 절어산다고 그냥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그 자체로 정의인 하나님을 버리시면 안 됩니다. 즉, 어느 때인가 정의의 팔을 뻗어 세상을 바꾸실 그 분께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십시오.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위로하시고 재기하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은 없다, 얼마나 말하기 좋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슬퍼해도 위로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절망 중에 찾는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과 잡은 손을 놓지 맙시다.

팔복③ “온유한 자…땅 받는다”

온유한=억압 고난 오면 하나님께 맡기는

세 번째, 다음은 무엇입니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아닙니까? 온유하다, 그것은 막연히 겸손한, 착한, 이런 의미일까요? 다시 박명수 어록입니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

얕보이기 딱 좋은 상태를 온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겸손한 자세, 밖으로부터의 억압과 고난에 대해 자기 힘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서 해결해주세요’라고 하는 사람, 그래서 최고의 답을 찾는 사람을 말합니다.

온유하지 않은 상태가 무엇입니까? 저혼자 잘나서,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아무리 똑똑하고 강해도 실수하게 돼 있어요.

‘땅을 받는다’는 가나안 땅 분배

즉 세속적인 복을 주겠다는 뜻

하나님께 모든 결과를 내 맡겨서 마음이 지극히 평온해진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뭘 주신다고 했어요? 땅이라고 했습니다. 땅이라니? 하늘에서 갑자기 집문서 땅문서가 떨어진다는 말일까? 아니면 비슷한 것으로써 부동산? 청약 당첨? 가격 폭등? 그럴리가요.

지난주 설교가 뭐였습니까? “땅은 다 내 소유다”라고 하셨잖아요. ‘땅을 준다’는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땅 차지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땅을 분배하신 것, 이것을 말하는데, 17세기 18세기 성경해석가인 매튜 헨리 목사는 “하나님이 세속적인 축복을 주시겠다”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땅을 얻는 것을 포함해서, 이 땅에서 얻는 유익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아요.

살아있는 동안, 궁핍함 없이 살고자 하십니까? 자기가 해결해봐야 되지도 않을 거잖아요. 혼자 끙끙 앓고 있거나 아등바등하는 것 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맡기세요. 그럴 때 현세의 복을 주십니다.

팔복④ “의에 목마르면…배부를 것”

여기서 의(義)는 종교적인 의미

네 번째 이번은 무엇입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에 주린다, 정의에 목마르다, 이렇게 봐야겠지요. 세상 불의가 판을 치는 것에 낙담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도 불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불의는 종교적 불의예요. 여러분, 어디 신구약시대만 그랬습니까? 종교의 타락은 현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를 사유화해서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악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를 자기 가족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지각있는 신앙인이 질타했습니다. 여러분, 예언자는 신학했다고 안수받았다고 자격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파할 때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돌멩이라도 외칠 때 예언자입니다.

그 예언자는 외롭습니다. 고통이 일상이지요. 온갖 해코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폭력까지 당합니다. 왜냐? 기득권을 건드렸으니까요. 공고한 권력에 흠집을 내려고 했으니까요. 필설로 기록되지는 않아도 엄청난 모욕과 고통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며 언젠가 이뤄질 정의를 믿으며 나아가는 자, 바로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같은 예언자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 예언자가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고, 그들은 배부를 것입니다. 배부르다, 무엇일까요? 이것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시편 다윗의 고백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인간의 지혜와 헤아림으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의 복, 그 시대에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자녀와 후대가 대대로 은총과 구속 가운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막장으로 치달을 때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본인이 앞장서지 못할 거면 의인을 돕기라고 하세요. 그게 복있는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는 참 복음적입니다.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팔복⑤ “긍휼한 자…긍휼함 받아”

긍휼=남의 고통 짊어지는 것=자비

이제 다섯 번째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긍휼이 무슨 뜻입니까? 불쌍한 사람에게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 merciful mercy라고 돼 있어요. 이것은 그냥 동정하는 게 아닙니다. 구제하는 것, 남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간과 소통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우리 눈에 나타나 계시지 않은 시대,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살아갑니다. 성령님은 “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도우라”라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한 양심을 일깨우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누군가 주변에서 고통받으면 나대신 가서 도와라, 이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라고 하는 일이 내가 도와줘봐야 돌아올 게 없는, 일명 ‘영양가 없는 사람’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아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따를 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벙커1교회는 주님 다시오시는 그날까지 그 일을 계속 해야 합니다

남에게 도움주면 자기도 도음받아

“긍휼 행하지 않으면 긍휼없는 심판받아” 야고보서 2:13

긍휼히 여겨라, 이것을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 개역개정판에서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너는 무자비한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무섭지요. 그렇습니다. 명령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화를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복을 준다고 했습니다. 무슨 복입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누군가 어려울 때에 내가 도움을 줬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어려울 때에 누군가가 나를 돕는다는 겁니다.

이런 예화를 봤어요. 어떤 그리스도인이 지나다 누군가 타이어가 펑크 나 애먹는 걸 봤어요. 세워서 스페이타이어로 갈아줬어요. 그가 사례를 하려고 합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됐다고 하면서 나중에 누군가가 어려운 처지를 만나면 도와주시라 하고 현장을 떴어요.

그리고 두 주 뒤 아버지가 집에 오세요. 그러더니 오다가 배터리가 나갔는데 누가 와서 점프해주더라, 그런데 그 사람에게 사례를 하려고 하니까 “두 주 전 어떤 분이 타이어를 갈아준 적이 있다, 나도 받은 게 있어서 사례는 안 받는다”라며 사양하더라는 겁니다.

왠지 주작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사실이라면 얼마나 귀합니까? 자비없는 세상에, 우리 그리스도인만은 따뜻한 마음으로 무장해야겠습니다.

팔복⑥ “마음 청결해야…하나님 봐”

마음 청결=탐심, 사악함 사라진 상태

여섯 번째 복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가 마음이 청결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런데 바리새인을 탁 집어서 마음 속에 온갖 탐욕과 사악함이 가득하다며 비난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신앙을 앞세우고 율법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자 함이지 그 마음의 중심이나 동기, 근본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백날 바르고 옳은 이야기를 해봐야 겉도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울리는 꽹과리에 그칠 뿐입니다. 세상에는 정의를 외치는 사람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지요. 온갖 명분과 구호로 정의를 표방하지만, 그래서 불의를 질타하지만 실상은 내로남불, 자기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일깨워줘도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요. 괜히 자기들에게 쓴소리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보복하려고 합니다. 끝내 죽이려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요.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 본다

뒤집어 하나님 보려면 마음 청결해야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뒤집어서 이야기해도 됩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고요. 마음이 더럽고 혼탁하면 하나님이 안 보이고 결국 자기 욕망이 말하는대로 세상을 보게 돼 있습니다. 그러다가 패망의 길로 가게 되지요.

전에도 한 번 소개한 예화입니다만, 어떤 가난한 여관을 엄마와 딸이 운영했습니다. 아, 옛날의 남양주에 있던 뉴월드호텔, 최모 씨가 운영했던 러브호텔 아닙니다. 이 여관에 어떤 부자로 보이는 남자가 투숙했습니다. 엄마와 딸은 이 남자을 죽이고 비싼 장신구를 훔쳐보자고 작당했습니다.

그래서 마취에 들게 하고 다음 죽여요. 바다에 버려요. 이제 가방을 열어봅니다. 큰 돈이 있을 줄 알았는데. 봤더니 모녀의 젊었을 시절 사진이었어요. 봤더니 외지로 나가서 성공한 아들이었어요. 그 아들을 죽인 겁니다. 알베르 까뮈의 ‘오해’의 한 부분입니다.

사람이 돈으로 보이면, 그 사람을 범죄 대상으로 보게 되지요.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볼 마음입니까?

팔복⑦ “평화 위해 일하면 하나님 아들”

진정한 평화란 너도나도 만만한 상태

일곱 번째 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화평케 한다, 이 말은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평화란 무엇입니까? 안 싸우는 것, 조용한 것입니까? 그것은 마지막에 드러날 단면입니다. 아니지요.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진정한 평화란, 너도 나도 서로 만만해서 시끄럽고 복잡한 것입니다.

강력한 권력으로 짓누르는 자

평화의 적으로 반드시 멸망 당해

민주주의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저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당시 이명박 반대 시위가 뜨거울 때 즉 이명박 정권 때 한국에 왔는데 시위대를 보더니 “민주주의란 본래 저런 것”이라고 했어요. 촛불시위대를 잔인하게 짓밟은 MB정권 민망하게 말입니다.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평화가 단지 안 싸우는 것, 조용한 것이라면, 쟁의 행위하는 노동조합을 조폭으로 몰아 다 잡아가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반대편 목소리를 막기 위해 검찰력을 동원하고 언론장악하는 정권, 정권 뿐입니까? 가진 금력과 세력으로 정의 외치는 자를 입막는 교회, 이 평화를 거스르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한 대표적 주인공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평화는 하나님 이외에 어떤 계급이나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 어떠한 권세와 압력이라도 물리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파라오를 따돌리고,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리스를 격퇴하고, 복음으로 사랑으로 로마를 이겨낸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위해 일하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위한 복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처럼 대우받는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그러하잖아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모든 벽과 선을 허무셨잖아요.

자,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하나님 호적에 올라갈까요? 아닙니다. ‘칼빈의 팔복 강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평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세상은 더욱더 우리를 욕할 것입니다. 모든 식탁과 마을의 모든 거리마다 우리 이름이 퍼질 것이고, 우리에 관해 온갖 상스러운 이야기가 퍼져 나갈 것입니다.” 정의를 외쳤던 이들이 모두 이러했습니다. 아,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그러하셨네요.

그러니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 어찌 간단할까요?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쓰는 것이 어찌 단순할까요? 그러나 그 열매는 달콤합니다.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이 그러하듯이오.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공로를 인정받는 보람에 올인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꼭 이땅에서 보상받으셔야겠어요?

팔복⑧ “의를 위해 박해받으면 천국 소유”

초대교회 성도 마음가짐 이러해

이제 마지막 여덟 번째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말씀 붙들고는 핍박을 받고 죽어야 천국 간다는 믿음 속에 모두가 로마로부터 불이익당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윤석열 한동훈에 의해 감옥 갔으면 한다고 하는데, 감옥 가면 불편하지요. 또 정의로운 사람의 이미지로 들어가겠습니까?

그럼에도 감옥 가겠다고 하는 것은, 돌아온 독재정권 시대에 감옥 한 번 갔다오는 건 훈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건 가보가 될 겁니다. 만약 제가 감옥에 간다면 목회자계의 뉴진스 민지, 심민지 목사님이 제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대신 교회를 이끄시겠습니다만, 너도 나도 민주당 의원부터 민주시민까지 다 ‘나 좀 감옥에 넣어다오’한다면 얘네들 얼마나 당혹스러울까요? 이걸로 사람들 기죽이고 자기들 뜻대로 조종했는데.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게 즐거운 성도 앞에서 로마권력은 흔들렸고, 마침내 그들을 이기고 말았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편에 서

“하나님만 믿고 해야 할 일 하라”

어떻습니까? 팔복을 쫙 훑어보니, 예수님의 의도가 읽히지 않습니까? 일단 예수님이 누구 편에서 서서 말씀하십니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편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하나님만 믿고 바라고 의지하면서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이것이 복 받는 첩경임을 이야기합니다.

복 받기 원합니까?

지금 하는 이야기 잘 들으세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골방에 앉아 주여 주여 기도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안에 나를 소시민으로 살게 만드는 모든 연약함을 떨쳐내고 하나님의 손과 발, 심장이 되어 세상을 바꿔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과 하늘의 경계를 지우는 진정하고 영원한 복이 있습니다.

돈 많이 벌고 싶습니까? 자녀가 잘 되기 바랍니까? 건강하고 싶고요. 구원받고 싶겠지요. 너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서 남을 위해 일하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제,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러면 너의 일생 모든 것을 책임져 주겠다, 죽은 이후의 미래까지. 이 팔복이 여전히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현실로써 납득되지 못합니까?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헛된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히고 놀라운 선포 앞에 심드렁할 수 있습니까?

부모님에게서 믿음의 유산 받은 분들,

굴러들어온 복 차지 마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믿읍시다. 우리를 향한 간절한 부르심, 선한 계획, 강력한 실행의지를 믿고 나갑시다. 하다못해 부동산, 주식은 날마다 들여다보면서 오를 것을 간절히 믿는 여러분 아니셨나요? 여러분에게 복 주시겠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외면하실 것입니까?

이 모든 복은 하나님을 믿을 때 유효한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으로부터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은 자녀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이미 보장된 축복의 가계를 포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복 주시려 당신 초청합니다

그의 손과 발, 심장되어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벙커1교회 교우 여러분, 세상이 혼탁하다 못해 난장판이 돼 가고 있습니다. 여기엔 팔복의 약속을 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 욕망을 뒤 따르며 사는 이들처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큽니다. 팔복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손과 발을 세우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그 초청에 응하는 삶을 삽시다. 주의 손과 발 되어, 주의 심장 가지고 이제 일어나 세상을 향해 나갑시다. 복의 근원인 여러분, 복받은 자의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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