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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평신도시대가 시작되었다.
2022년 12월 15일 (목) 16:03:08 김태복 목사 www.cry.or.kr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0-34)
 
 
한국교회야, 너 무엇을 보느냐?
 
“너 무엇을 보느냐.”
하나님은 사명자들에게 역사의 현장(現場)에서 질문하셨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조국은 흥망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때, 절망에 차서 성전에 앉아 있던 이사야는 홀연히 여호와의 영광이 전(殿) 가득히 펄럭이며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의 연기가 충만한 것을 보았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두려움으로 심히 떨고 있는 이사야에게 질문하셨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위기 속에 선 조국, 절망이 폭우처럼 내리고 있는 조국을 보면서도 십자가를 지고 만다.
 
“너 무엇을 보느냐.”
이러한 질문에 접한 예레미야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기를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명한 바를 그들에게 고하라.”고 했다. 여호와는 소극적인 성품의 예레미야에게 쇠 멍에를 지우셨다.
 
그발 강가에 있던 에스겔은 이러한 질문을 듣고 자기 조국을 보았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부터 불이 번쩍번쩍하여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현상이 나타나는데……”라 했다.
오, 놀라운지고.
그 생물은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라는 하늘의 음성에 접하고 에스겔은 패망이 패망을 부르는 죽음의 골짜기, 마른 뼈다귀만 가득한 아골 골짜기 조국을 향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가서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눈을 뜨게 하자, 무엇을 보았던가? 화려한 건물과 거리에서 노니는 여인들의 사치스러운 장신구(裝身具)와 몸차림을 보지 않았다. 날마다 높은 누각(樓閣)에 앉아 연회를 여는 부한 자들의 느끼한 안일을 보지 않았다.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염불 외듯이 예언하는 종교인들의 태평가(太平歌)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국의 절망을 보았다.
저 골목과 거리와 골짜기에서 흐르는 눈물과 탄식과 억눌림을 들으며 가슴이 파열(破裂)하는 아픔을 느꼈다.
 
‘한국교회야, 너 무엇을 보느냐.’
화려한 서구 사회의 연극 세트처럼 치솟은 고층건물과 아파트군(群)을 보는가? 선진국을 눈앞에 둔 것을 과시라도 하는 듯이 한강 양 대로와 고속도로를 흘러넘치며 질주하는 차량들의 물결을 보는가? 네온사인 빛이 넘실거리는 명동과 압구정동의 거리에서 거의 벌거 벗다 싶이 한 채 부둥켜안고 가는 국적 없는 젊은 남녀들의 욕정 어린 몸짓들을 보는가? 그리고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할 것인가?
 
아니 된다.
그것은 이미 죽은 자의 눈이다.
무덤의 눈이다.
주여, 한국교회가 눈을 뜨게 하소서.
‘한국교회야, 너 무엇을 보느냐.’
그때 한국교회가 대답할 말은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나이다.’라는 것이어야 한다.
 
도덕적인 불감증에 걸린 한국
 
7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오직 욕망이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던 사회였다. 한 마디로 도덕적인 불감증 시대였다. 그리하여 그 시대는 세계 앞에 추악한 기록들을 이룩해 놓고 있었다. 교통사고 1위국, 40대 사망률 1위국, 일 년에 술을 1조 원 어치나 마셔 버리는 나라, 1980년부터 1988년까지 10만 5천여 명의 기아(棄兒)가 발생함으로 그중 59%인 6만 2천명의 아기를 해외로 팔아먹은 나라, 동남아 등지로 해외관광으로 몰려가 섹스 관광에 열을 올림으로 추악한 한국인의 오명(汚名)을 더 높이고 있었다.
도덕적인 불감증에 극에 달하고 있었다.
얼마나 깊이 병들었든지 중학교 또래의 소녀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원조교제라는 명목하에 몸을 팔기도 하고 아버지 벌 되는 어른과 동거 비슷한 삶을 살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 사회가 이런 모양, 이런 꼬락서니가 되었는가.
(1) 군사정권의 횡포가 그 뿌리이다.
1950년대는 사상계(思想界)를 중심으로 하여 국민들의 스승군(群)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사회였으나 도덕은 화로의 군불처럼 훈훈하게 살아 있었다. 그러나 1960년 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軍部)는 강렬하게 반발하는 민족의 스승들에게 총칼을 들여대고 고문하거나 투옥시킴으로 그들의 입을 봉하고 붓을 꺾어 버렸다. 결국 스승들은 민주주의를 살리려는 방편으로 야당 정치가들의 편에 서게 되었고, 일부는 한국 근대화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유신정권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하튼 대부분 스승들은 여당이나 야당 편에 서게 됨으로 정치에 오염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 뿌리가 점점 깊어짐으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반민주적인 정치판으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2) 새로운 가치관, 경제 제일주의
민족의 스승들을 추방한 군부 출신의 젊은 대통령은 자기의 철학을 국민들에게 역설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 ‘경제력이 곧 국력(國力)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치관을 새벽부터 새마을 노래와 함께 국민들에게 세뇌(洗腦)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 재벌들과 언론들에게 특혜를 주므로 그들을 중심하여 경제정책을 폈다. 그 결과, 70년대부터 경제근대화의 시동이 시작되었고, 똑같은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다른 두 군부 출신 대통령에 의해서 80년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이룩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룩한 한국 사회의 오염은 너무나 심했다. 권력과 재력을 양손에 움켜쥔 기득권자들의 맑지 못함이 온 나라를 도덕적으로 오염을 시킨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찬탈한 자들이 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수십 년간을 움켜쥐고 있었고, 또 부를 획득한 자들은 그 부를 분배하기는커녕, 더 많이 가지려는 과욕에서 많은 불법을 자행하였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열상 21장)을 간악한 방법으로 탈취하던 방법으로 없는 자들의 한 마리의 양까지 뺏어 가기를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간 이하로 대우하므로 간접 착취를 하였고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을 갖은 수단으로 목을 졸라 자기 것으로 흡수하는 비열한 수단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므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는 엄청났다.
1990년 초의 통계에 의하면 서울시 토지를 단 한 평도 갖고 있지 않은 가구가 71.9%임에 비해 상위권 5%가 57.7%를 과점(寡占)하고 있다는 것이요, 심지어는 우리나라 50대 재벌들이 국민 총생산의 73%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서 50대 재벌이 그렇게 부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더 없을 것이다.
 
이런 가진 자들이 신진(新進) 상류사회를 화려하게 형성하고 정경유착으로 견고한 울타리를 두르고는 그 속에서 로마 상류사회처럼 최고의 사치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도덕의 오염원(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과 그 아류(亞流)들, 정권과 유착하여 신흥 재벌로 데뷔한 자들이 일으키는 검은 욕망의 구정물들이 온 국민들의 도덕성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승들이 사라진 사회에서 그들이 만들어 낸 신종 가치관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나 재력을 획득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것이었다. 혹독한 표현을 한다면 하룻밤 사이에 탱크를 몰고 와서 장악한 권력, 그러한 정권과 야합하여 큰 노력 없이 순식간에 이룩한 재력, 그것은 바로 불로소득의 정상이었다.
 
그리하여 오염된 부도덕의 공기를 마시고 살았던 시민들은 너나없이 덩달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류층에 끼어들려고 안달하게 되었다. 부동산 투기를 하든지, 사기를 치든지 간에 떼돈을 벌면 귀족 대우를 받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자가 공무원과 짜고서 강남에 사 놓은 땅이 천정부지로 오르므로 떼 부자가 되어 상류층에 데뷔하게 되면, 그때부터 소위 졸부(猝富) 행각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선 고급 주택이나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고 운전기사로 하여금 타고 내릴 때는 90도 각도로 절하게 만드는 것이 시작이요, 그 다음에는 고향 선산에 초라하게 묻힌 부모를 위해 호화묘지를 조성하고 호화별장을 사들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상류층 대열에 끼어들기 위해서 또 하나의 필요한 절차는 막대한 투자를 하여 상류층 자녀와 정략결혼을 해야 하고, 경영대학원에 출석하여 부족한 학벌을 가림하고, 무슨 사업자 클럽에 회원이 되어 고급 요정과 골프장을 들락거리고 상류층과 교분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떼돈을 여기저기 재투자하거나 큰 빌딩을 구입하는 등, 땀 한 방울을 흘리지 않고도 막대한 자금이 들어오도록 루트를 만들어 지하자금 사회의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다음 남아도는 시간을 향락으로 채우면 되는 것이다. 나이에 비해 늙어 버린 마누라 대신 젊고 몸매가 잘 빠졌지만 머리는 빈 계집에게 고급 아파트를 사주고 이중생활을 시작하며 그것도 부족하여 동남아까지 들락거리며 섹스 관광에 열을 올린다. 이에 질 새라, 그 부인도 붉은 욕망의 바람을 타고 추태의 춤을 추어 댄다. 일본에 건너가서 성형수술을 하고 온갖 고급보석과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다.
 
그 자식들은 강남 일대를 누비며 향락 문화의 주도자가 된다. 그들의 향락을 위한 무대장치가 도처에 유곽(遊廓)처럼 세워진 러브호텔이 아닌가? 돈이면 통하는 사회였다. 돈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장성도 되고 미스 코리아도 되고 대학도 입학하고 의사와 검사 사위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돈으로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재벌도 등장하게 되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3)한국교회의 기복주의(祈福主義) 탓이었다.
교회는 도덕의 마지막 보루, 마지막 도덕의 샘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가치관을 세우고 있는 사회를 향해서 ‘회개하라.’고 외쳐야 옳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오히려 세속을 향해 문을 열고 부도덕을 부추겼는데 그것이 바로 기복주의였다. 근대화과정에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라는 노래가 새벽마다 울려 퍼지자 이에 발을 맞추어 성경에 나타난 땅의 복을 받는 길을 발췌하여 축복론을 만들어 대부분 시간들을 설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철야하며 금식하며 그들이 간구한 것은 건강과 물질의 축복을 중심한 ‘땅의 복’이었다. 마침내 교회가 하나님을 맘몬신으로 둔갑시키는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교회마다 물질이나 건강의 축복을 받기 위해 모이는 인파로 넘쳐나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검은 수단으로 떼돈을 모았거나 관계하지 않고 불로소득으로 돈을 벌어 졸부로 데뷔하는 자들이나 불의한 방법으로 높은 자리를 취득한 자를 향해 축복의 성수(聖水)를 뿌려 가며 ‘축복받은 성도’라고 찬사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바친 헌금봉투에서 검은 뇌물의 악취가 나고 있음에도 그들의 믿음 좋음을 온 교회 앞에 공개적으로 격찬하고 그들을 교회 중직으로 세우기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그런 교회 지도자들이 비리에 연루되어 온 사회 앞에 한국교회 위신을 추락시키는 장본인이 되지 않았는가?
 
<한때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던 대형사고와 권력형 부정 축재는 그것이 지도층의 권력남용과 비양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지도자가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국민의 분노를 사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근 국회의원 L씨의 선거비 과다 사용과 전 국방장관 L씨의 금품수수사건 등은 주인공들이 외형적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가 하면 교회의 시무장로란 점에서 색다른 충격과 실망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中略)
성경의 교훈에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의 항존직자들이, 그것도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는 마당에서 부정과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그들 자신은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이끌고 가야 할 지도층 모두가 가슴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먼저 교회의 설교자는 무엇을 그동안 부르짖었으며, 항존직제는 무엇 때문에 두는 것인지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세 확장과 양적 증가에 치우친 나머지 맘모스 교회, 맘모스 집회를 교회의 최대 이슈로 삼은 것은 사실이며, 영속적 성장 추세를 몰고 가기 위해서 토속신앙에 바탕을 둔 기복사상과 현세적, 물질적 욕구 충족에 치중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中略)
이처럼 교회의 성장 경쟁과 현세주의적 신앙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건전한 생활 철학을 가지도록 하지 못했으며, 동시에 항존직의 대향생산과 남발은 교세확보를 위한 수단 방법이었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직 수행을 위한 직제가 되지 못했다.>
(「한국기독공보」96년 11월 2일 사설)
그러므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로 스스로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을 가지게 만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것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당시 필자도 덩달아 그런 식으로 설교하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같은 공범자인 필자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입이 열 개라도 정말 할 말 없지.
그러나 누구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살기 위해서 이런 고백을 해야 한다. 우리 목회자들은 이 도덕적으로 황폐한 거리에 넙죽이 엎드려 ‘나의 연고라. 한국교회 연고라.’라 외치면서 자복하여야 한다. 우리 목회자들부터 가슴을 치며 회개를 할 때만이 한국교회 안에 회개의 샘이 터지며 그것이 저 부도덕한 사막이 되어 버린 사회로 흘러들어 도덕의 싹을 발아(發芽)할 것이 아니겠는가?.
 
대안(代案)은 기독교 문화
 
30년 장기군사정부에 이어서 온갖 정권이 들어서서 30년 이상 나름대로 열심히 국가를 바로 세우려 하지만 부도덕의 뿌리가 너무나 깊은 탓인지 좀체 개선의 싹이 보이지 않는다.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심하게 오염된 한국 사회를 정화할 새로운 가치관이나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굳어진 사고(思考), 관행의 터를 하루아침에 허물고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있으나, 그러나 부정부패를 다 몰아낸다고 해서 저절로 살기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텅 빈 집에 불과하다. 그 새로운 건물에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관행, 새로운 목적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길 외는 다른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정신, 기독교 문화로 장식된 사회가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외형(外形)은 이미 기독교이다.
짧은 해외여행의 경험을 통해서 미국이나 일본, 서구 사회를 가 보아도 지금 우리나라와 별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서구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외형은 서구적인 데 비해 내면 정신은 샤머니즘이 틀어쥐고 있다. 무슨 개업식이나 승용차를 구입하고도 서구적인 의상인 양복을 버젓이 입은 채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낸다. 심지어는 재벌 회사의 야구팀을 창단할 때나 거대한 빌딩을 짓고서 지내는 제의(祭儀)는 대부분 고사 형식이다. 정부 각 부처의 행사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는 출생서부터 결혼식, 이사, 장례식 등 모든 애경사(哀慶事)가 거의 샤머니즘의 형식이 짙게 깔려 있다. 때로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을 거행하면서도 번번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 미신이나 유교적인 의식(儀式)을 기독교적으로 적당히 변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국 사회에서는 불신자거나 신자거나 막론하고 모든 의식에는 샤머니즘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서구에서는 신자거나 불신자거나 모든 가정의례를 기독교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들은 이미 기독교 문화 속에 오래 정착되면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기독교인이 4분지 1을 차지하고 있고, 외면적인 의상이나 주거 형태는 서구적이지만 내면 정신은 샤머니즘에 깊이 젖어 있다. 양복을 입고 무당춤을 추고 있는 꼴이다.
 
지금 한국과 한국교회가 강하게 선망하고 있는 것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시급히 세계화시키려는 데 있다. 그러면 어떻게 세계화를 이룩할 수 있는가? 항상 햄버거를 먹는다고 우리가 한국인을 벗어날 수 있는가? 해외에서 태어난 교포 2세, 3세들도 비록 한국어에는 서툴러도 자기가 한국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피는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태여 무슨 의상이나 음악이나 의식을 한국식으로 하지 않더라도 한국인의 얼은 그들 속에 살아 있기 마련이다. 만주에서나 사할린에서 수십 년 매여 산 분들이라도 중국화나 러시아화가 되지 않고 한국의 혼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내 진보적인 교단에 속한 분들이 기독교 문화 창달에 앞장 선 분들인데 그들이 방향 설정을 토착화(土着化)에만 집착하여 우리 고유문화와 기독교 문화와의 조화를 이룩하려는 데만 열중했지, 세계화시키는 데 실패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50년대와 60년대의 국시(國是)나 가치관은 반공(反共)이었다.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살아남는 일이 가장 큰 과제였다. 70년대와 80년대의 가치관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였다. 경제성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과제는 세계화이다. 세계인들과 함께 어깨를 겨루어야 하느냐, 아니면 탈락되느냐 할 정도로 세계는 좁아진 것이다. 북한식으로 자기 주체만 고집하는 것은 고립화를 자초할 뿐이다.
세계화로 가는 길은 기독교 문화의 창달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기독교 문화권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민들이 신자거나 불신자거나 샤머니즘의 틀에서 벗어나 기독교 문화적인 시각으로 보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그것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진입시키는 통로이다.
 
평신도가 주도하여야 한다
 
“한국교회야, 너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시고 계신다.
이제 한국교회는 떨리는 마음으로 대답하여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오, 주여, 내가 보오니 여리고에서 강도 만나서 매 맞고 죽어 가는 사람을 보나이다.”라고.
지금 한국 사회는 또 하나의 여리고 고개에서 탐욕의 칼을 맞아 도덕이 난도질을 당한 채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신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물질만능주의가 새로운 가치관으로 군림함으로 어른들은 사치와 향락의 늪에 빠져들고 청소년들은 폭력과 음란, 마약으로 목 졸림을 당하고 있는 형국(形局)이다.
 
어찌 청소년들뿐이랴. 이제는 성인들까지 모두 도덕경화증에 걸렸는지 온 나라가 음란의 기운으로 만연된 느낌이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퇴폐 업소의 음란 문화가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일반 사회와 가정까지 그 음란의 기운이 번져 나와 짐승 이하의 음행들을 저지르고 있다. 이제는 목회자들도 그 음란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지 목회자들의 성범죄 소식도 심심치 않게 뉴스거리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니 참으로 참담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누가 이들을 구할 것인가? 제사장들이 나설 것인가? 아니다. 그들이 나서 본댔자, 그 거룩한 성의(聖衣)가 거추장스러운 것이요, 또 실제로 피를 닦아 내고 약을 바르고 나귀에 태워서 주막으로 옮기는 일 등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하다. 종교 지도자인 레위인들이 나설 것인가? 그들도 아니다. 그들도 교리와 율례에는 능할지 모르나 강도 만난 자들은 친히 돌보는 일에는 부적합하다.
 
이러한 일에 앞장을 세워야 할 자들은 착한 사마리아인들이어야 한다. 그들만이 피투성이가 된 이들의 상처를 씻고 약을 바르고 나귀에 싣고 주막에 가서 부탁함으로 치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착한 사마리아인들은 평신도들이다. 그들은 매일같이 그들이 사는 골목과 직장, 공장에서 이웃들의 즐거운 일과 슬픈 일에 동참하면서 같이 울고 같이 웃는 삶에 익숙 되어 있다. 교회 안에서도 묵묵히 손을 걷어붙이고 봉사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한 착한 사마리인들을 많이 양육하여야 할 시점에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대전환을 이루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다시금 더 성장할 수 있는 길이다. 그 대전환은 <대교회주의 위주에서 중소교회주의 위주로> 그리고 <목회자 위주로부터 평신도 위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 민중인 평신도가 사는 길이 곧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요, 평신도가 성장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길이 아닌가? 또한 평신도들이 살아서 착한 사마리아인들로 사회에 나가서 활동할 때에 여리고에서 강도 만난 이웃들이 치유함으로 받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성전에서 제사장은 제사를 주도하는 일을 하고 대신 사회적인 일은 착한 사마리아인을 많이 양육하여 파송하여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그러한 원리를 무시한 것이 문제였다. 해방 이 후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모든 활동을 독식(獨食)하여 왔다. 목사들이 정치한다, 사회사업 한다, 학교 한다, 병원 한다고 앞장을 서 왔다. 그만큼 평신도들은 어리기만 했다.
그러나 사실은 목회자들이 평신도들을 인재로 키우지 않은 탓이다. 인재란 연단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인데 목회자들이 평신도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무조건 자기들이 하는 일에 순종의 협력만 강요했던 것이다.
 
안 된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목사이다. 교회 밖의 일은, 항상 교회의 밖에서 사는 교회 민중에게 일임하여야 마땅하다. 목사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사는 동안 ‘세상을 이해한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하나 단편적이거나 관념적이기 일쑤이다. 매일 매일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호흡하며 혹은 흥정하며 그리스도인들로 성별되게 살고 있는 교회 민중처럼 피부적으로 느끼지는 결코 못하는 것이다.
 
교회 민중은 누구인가? 평신도(laity)이다. 평신도란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이티(laity)는 본래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라오스(laos)에 속한다는 뜻을 가진 라이코스(laikos)에서 온 말이다(H.크레머:「교회 혁신의 신학」172 페이지).
 
<오늘의 그리스도 교직자들은 신교의 개혁원리 중의 하나인 만인제사직이라는 기본원리도 오래 전에 망각한 채 교회와 그 예배 및 활동 전부를 그들의 독무대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늘의 교회는 그 무진장의 자원인 평신도들의 존재와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 안의 평신도들을 그리스도 교회의 전위부대와 주력부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눈부신 활동과 승리적인 신앙을 통해서만 교회는 다시 산 신앙과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현설:「세상 속의 크리스천」53페이지)
 
목회자들이 이러한 신교의 개혁원리를 무시하고 교회 안팎의 모든 활동을 독점한 결과 어떻게 되었나? 나쁜 냄새만 풍겼다. 교회 안에서는 지나친 감투욕과 독선 때문에 끝도 없이 교단들을 갈라먹는 데 앞장을 섰고, 교회 밖에서는 정치를 한다면서 나서서는 독재자들을 이용물 노릇만 했다. 사회사업 한다고 앞장서다가 브로커들에 의해 부작용만 양산했다. 안 된다. 과거에는 평신도들이 한없이 어려 보이기만 했으므로 목회자들이 교회 안팎을 우지좌지 하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평신도들이 엄청나게 성숙하여 마치 거인처럼 서 있음을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는 엄청난 평신도 자원이 저장되어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는 많은 평신도 인재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유명한 학자, 과학자, 정치가들, 경영인들, 연예인들, 스포츠 스타들 등등 헤아릴 수 없는 평신도들의 거목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음에 놀라움을 자아내게 된다. 소식통에 의하면 국무의원이나 국회의원 등 고위 공직자의 3분지 1 이상이 기독교 신자라고 전해지고 있다. 국회의원만도 100명 이상이 기독교인들이다. 언제 저들이 이처럼 각 분야에서 저렇게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는가? 이런 엄청난 인재 군단(軍團)을 가지고 있음에도 한국교회는 왜 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
 
평신도 훈련원의 필요성
 
평신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평신도들은 엄청나게 성숙하여 마치 거인처럼 서 있음을 우리 목회자들은 느낀다. 한국교회가 한 번 더 강한 성장을 가져오려면 이제는 이 엄청난 인재 군단(軍團)을 활용하여야 한다. 이제는 교회 안의 활동은 목회자들이 전담하고 사회를 향한 교회의 활동분야는 전적으로 평신도들에게 맡기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을 신앙과 신학으로 훈련시키어 빛과 소금의 사역자,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파송하여야 한다.
 
<우리는 교회와 세계와의 관계로 돌아가지 않으며 아니 된다. 평신도는 이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이 관계에 있어서 목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크레머:「교회 혁신의 신학」)
 
이제는 목회자들이 ‘모이는 교회’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도 강조하여야 할 때이다. ‘모이는 교회’는 ‘주일 교회’라면 ‘흩어지는 교회’는 ‘6일 교회’이다. 주일에 모여든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사역자의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 빛과 소금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
 
미래학자인 최윤식, 최현식 형제가 공동 저술한 “한국교회 미래지도(2920-2040)”에 보면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원인이 사회를 향해 사랑의 수고를 한 탓이라고 했다.
<역사학자들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가장 적극적이고 강력한 사회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구한말 교회는 개혁주의적 윤리관을 이어받아 시대 요청에 적절하고도 선도적인 사회 변화 운동을 펼쳤다. 나라와 민족이 필요로 하는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박영효 같은 구한말의 지식인들은 기독교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 백성을 평안하게 해 훗날 미국과 같은 선진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3.1 운동 이후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은 농촌 운동,민족 산업 육성 운동을 중심으로 삼으며 농업시대라는 상황에 걸맞게 개인의 삶과 경제,그리고 국가의 부국에 직접 개입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대적 상황인 다문화,고령화,저성장,기술 사회에 걸맞은 사회운동을 진행하는 데 근거를 제공해준다.(중략) 수많은 사람이 기독교인과 한국교회가 보여 준 사랑의 수고라는 다리를 건너 복음을 접했다. 한국교회는 2천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빠른 부흥을 이루었고, 세계 최고의 교회들을 탄생시켰다.>
 
그렇다. 침체에 빠진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은 사회를 향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그런 사랑의 수고를 위해 착한 사마리아인을 많이 양성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발, 정말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더 이상 설립하는 것을 중지하기를 바란다. 무자격자 목회자를 너무 양산(量産)하여 결국 한국교회를 이처럼 혼란과 무질서 가운데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비해서 평신도를 위한 훈련원은, 수도 없이 많은 신학교에 비해서 손가락을 헤아릴 정도로 수가 적다. 이제는 평신도를 위한 신학교가 절대로 필요할 때다. 평신도 훈련원의 교육 목적은 교회에서의 생활교육보다 사회 속에서의 신앙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저들을 그런 면에 철저히 훈련한 후에 각 분야에 파송하여 공의의 소금 맛과 사랑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평신도들도 인식의 대전환을 할 때인 것이다.
너무 교회 안에서만 안주(安住)하므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적지 않은 분들 중에 사회에서는 제 구실을 못하면서도 교회에 와서만 열심히 충성하므로 중직(重職)이 되어 교회 지도자연 하는 분들이 있다.
장로 직분 가진 이들이여,
공연히 교회 안에 맴돌면서 콩이니 팥이니 잔소리하는 시어머니가 되지 말라. 교회의 사소한 일들은 목회자에게 맡기고 담대히 사역자로 세상을 향해 나가라. 공의의 소금 맛을 내라. 사랑의 빛을 발하라.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섬김의 나귀를 끌고 또 하나의 강도 만난 이웃을 찾아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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