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3.12.4 월 22:07
 
 
전체기사  기사모아보기 후원방법
> 뉴스 > 신학
     
제 10 장 부자교회와 나사로교회
2022년 10월 20일 (목) 08:10:28 김태복 목사 www.cry.or.kr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눅 16:19-21)
 
오늘의 한국교회는 극도의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기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도시교회의 대부분은 비만증에 헐떡이고 있는 반면, 농촌교회의 대부분은 빈혈증에 시달리고 있다. 빈혈증은 고사하고 농촌교회는 대단히 전망이 어둡다는 문제가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전망이 어두운 쪽이 있다면 농어촌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농어촌에 대해 깊은 관련을 가진 분들의 고백을 통해서 더 절박하게 들리어진다.
 
<우리나라의 농업과 농민의 삶이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경호:기독교연합신문 92년 11월)
 
<오늘날 오천년 동안 우리 민족을 먹여 살려온 농어민들은 마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못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몽땅 털리고 두둘겨 맞은 사람과 같은 꼴이 되었다. 지금 우리 농어촌은 되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이고 그 밑 뿌리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농어촌부 선교 선언:통합측)
 
오늘의 도시와 농어촌교회는 마치 부자와 나사로의 모습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다. 거지 나사로는 제 혼자 살 능력이 없었다. 허구한 날 부잣집 대문 앞에 누워, 부자가 날마다 화려한 연회 끝에 버려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배불리려하는 비참한 모습과, 개들이 와서 상처를 핧는 아픔을 당해도 쫓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도시 부자 교회의 화려한 예산의 부스러기로 연명하고 있는 나사로의 교회들, 그것이 필자가 농촌목회 7-8년 동안에 절감했던 인상이었다.
 
필자의 농촌교회 목회담
 
필자가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장신대(長神大)에 입학했을 때, 어느 날 실천신학 교수가 호출하더니 ‘시골교회 교육전도사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다. 어느 목사가 도시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사정상 사임하고 지금 경기도 마석에서 10리쯤 들어간 가곡교회라는 곳에 부임하여 자비(自費)로 큰 양계장을 설치하고 많은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훈련시킨 후에 병아리를 주어 자립하는 마을, 선린촌(善隣村)처럼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데 농과대학 출신의 신학생을 찾고 있다는 것이요, 그 교회의 장로는 대학교수임에도 농촌운동을 위해 그곳에서 출퇴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막연하게나마 상록수(常綠樹)를 꿈꾸던 내게는 너무나 귀한 하늘의 부름과 같은 것이었다. 마석까지 열차를 타고 10리 길의 언덕을 도보로 걸어서 천마산(天磨山) 밑 농촌교회에 교육전도사로 부임한 것은 1967년 11월인 초겨울이었다. 버스도 하루에 두어 번 다니고 전기도 없는 산골이었다. 그럼에도 몇 년 동안은 가슴 뿌듯한 보람으로 헌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주일날에는 아동부 교회학교를 지도하고 저녁 설교를 하는 외에는 토요일이나 방학 동안에는 야학(夜學) 형태로 성경과 교양을 가르치는 등 청소년 교육에 전력했다. 또한 농번기에는 교인들 가정의 모도 심어 주고 누에가 부업인 가정들을 위해서는 뽕도 따주고 김도 매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헌신적인 모습이 청소년들에게나 교인들,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인상을 준 것 같았다. 마침내 신학교를 졸업하고 농촌 봉사에 뜻을 가진 여인과 결혼하고, 양계업에 실패한 후 그 마을을 떠난 목사의 후임으로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교회당도 새로 신축하고 재건학교(再建學校)도 설립하여 60-70명의 청소년을 교육시키는 등, 나름대로 농촌목회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 들어서면서 근대화(近代化)의 바람이 불어 닥치고 농촌과 교회의 미래의 재목감으로 양육되던 청소년들이 대거 서울로 취직차 떠나기 시작했다. 교회와 재건학교를 떠들썩하게 하던 청소년들의 활기가 보이지 않기 시작하고 성가대와 교사진까지 하루가 다르게 비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재건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추석이나 구정(舊正) 때 고향으로 찾아오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이미 옛날의 순수하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필자의 젊음을 다해 가르쳤던 모든 가치들을 그들은 대도시의 쓰레기통에 휴지처럼 집어 던진 채, 병든 문화를 상징하는 듯한 울긋불긋한 옷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입고 과시하기까지 했다. 담배를 꼬나물고 오다가 필자를 보고 슬그머니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욕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많은 청소년들이 서울로 떠나가고는 했다. 박봉(薄俸)의 사례금이었지만 보람 하나만으로 배불리고 살던 내게는 그 보람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참담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몇 년 후부터는 젊은 부부들도 속속 이삿짐을 싣고 대도시를 향해 마을의 고개를 넘어가며 희망의 찬 표정으로 떠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주일날 설교단에서 좌석을 보면 젊은 층은 점점 줄어들고 나이가 연로한 층만 버티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고목화 되는 현상처럼 보였다. 교회학교 교사가 없어서 마침내 중학생들을 보조교사로 세워야 했는데, 쓴웃음이 나오게 하는 것은 교사연하는 중학생과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초등학교 고학년과의 말다툼하는 모습이다.
 
이제는 농촌목회를 고집할 명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도 활활 불타오르는 젊음을 불 태우기에는 농촌은 할 일도, 전망도 없었다. 차라리 나이가 연로한 목회자가 부임하여 서둘지 않고 목회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한 갈등의 시기에 도시교회에서 청빙이 들어왔다. 이곳 교회보다는 교세가 약한 편이었으나 이곳 200여 호가 있는 작은 농촌과는 달리 수천 호가 밀집된 황금어장이요, 무엇보다도 많은 청소년이 있는 지역이었다.
 
1975년 초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우리 부부는 어린 세 자녀들을 이삿짐 트럭에 태우고 그 언덕을 넘어 도망치듯 떠나오고야 말았다. 지금도, 울면서 떠나보냈던 그곳 교우들을 생각하면 요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고는 한다.
 
텅 비어 가는 둥우리, 농어촌 교회
 
필자가 경험했던 이러한 농촌교회 현상은 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급속한 속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청소년은 말할 것도 없고 젊은 목회자들과 젊은 교인들의 이사행렬이 대거 이루어지게 되었고, 농어촌 교회의 노령화는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는 그나마 버티고 있던 노령층도 자녀들을 따라 도시의 아파트로 떠나므로 빈집과 빈 농토가 잡초들 사이에 처연하게 서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60대 초반의 나이가 대부분 농촌의 가장 젊은 나이에 속한다고 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농촌의 현실이 된 것이다. 지금 농어촌교회의 대부분이 20-30명이 모이기 고작이고 헌금도 일주일에 몇 만원이 나오면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할 정도가 되고만 것이다. 교인이 없는 교회, 늙어 버린 교회, 자립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교회로 쇠락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교회의 화려한 연회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 불리려는 나사로 교회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대부분의 농어촌 교회들이이서 이제는 도시교회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운영이 안 되는 교회들이 된 것이다. 이제 농어촌의 유능한 목회자는 구걸을 잘하는 이, 도시의 큰 교회들을 쫓아다니어 보조금이나 건축비를 많이 받아오는 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더 나가서는 교육관이라도 현대식으로 지어 놓고 도시교회의 여름수련회를 많이 유치함으로 부수입을 많이 올릴 줄 아는 이, 농산물 직거래할 교회를 많이 만들어서 마을 사람까지 동참하게 할 줄 아는 이어야 인정받는 슬픈 풍토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교회는 보조금은 방대한 예산에 비해서는 쥐꼬리만 하게 주면서 보조받는 농어촌 목회자에 대해서는 자못 종놈 취급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니, 나사로의 헌데를 잔인하게 핥던 부잣집 개들이 연상되어 은근히 속을 상하게 한다.
 
도시교회는 헌금액이 엄청나다. 그리하여 잉여된 헌금으로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생색을 내는 정도로 끝내고 열심히 대지구입 하는 일과 교회당 건축 경쟁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농촌교회 목사나 장로들이 모처럼 노회 때 참석하여 신축한 도시교회의 내부시설을 돌아보며 그 크고 으리으리한 내부시설, 화려한 비품들과 장식품들, 호화로운 당회장실과 고급승용차, 비까번쩍한 식당들과 음식들에 입이 딱 벌어지고 더욱 더 초라한 농촌교회 실정에 기가 죽고 만다.
 
그런 호화교회, 고급 비품이라면 막대한 돈을 들여 장식하는 교회라도 농촌교회 보조에는 왜 그리 신경을 곤두세우고 인색을 떠는지 모르겠다. 온 교우들이 모든 것을 다 바쳐가며 땀 흘려 짓다 못해 미쳐 깔지 못한 마루나 달지 못한 창문을 보다 못해 목회자는 도시교회를 찾아가 애소(哀訴)하면, 선교부장이나 재정부장을 맡은 장로란 분이 흥부 만난 놀부처럼 땅땅거리기 일쑤이고, 콩이니 팥이니 따져서 주는 보조금은 기가 막히게 적은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어느 독실한 장로나 권사나 집사를 찾아가 말씀드리면 눈물을 글썽이며 귀한 물질을 쥐어 주며 그것도 안 되어서 점심까지 사주는 저 뜨거운 모습에 비해 소위 교회 이름으로 주는 금액은 너무하다.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농어촌교회는 비상이 걸린다. 보조문제 때문이다.
지금까지 거의 예산의 대부분을 부담하다 싶이 한 부자교회가 그만 보조하겠다는 통고를 했기 때문이다.
 
큰 문제에 봉착한 농촌교회의 목사나 전도사는, 없는 돈 추려서 선물 꾸러미를 들고 부자교회의 사택을 노크한다. 놀부에게 찾아간 흥부처럼 애걸하다 싶이 한다. 그곳 당회장은 냉담하다. ‘나는 계속 도와주고 싶은데 우리 장로들이 워낙 반대를 하니 어디 나인들 당하겠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니 모두가 신물을 내고 있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노회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피해간다.
 
마침내 시골 교역자는 속이 터질 것 같다. 밥줄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형편없는 생활비로 허덕이는 살림. 자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릴 처와 어린 자식들, 또한 교인들, 무기력해서 보조금을 다른 교회에 뺏기고 말다니, 속이 터질 노릇이다. 이번에는 담당 장로를 찾아간다. 장로를 만나니 반말지거리 조로 일장의 훈계를 퍼 붇는다.
 
‘여보, 전도사, 일 년이 가도 열댓 명, 이 년이 가도, 삼 년이 가도 열댓 명이 뭐요? 돈이나 타 먹고 있자는 심사요? 하다못해 소나 돼지를 길러서라도 자립은 왜 못하오? 도시교회는 그 돈이 남아서 주는 줄 아오? 이제 우리 교회는 농촌교회에 손을 들었오. 효과 없는 농촌교회 보조보다 효과 있는 해외선교비에 보탤 예정이니,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물 한 잔도 없다. 부자교회의 횡포다. 어디 그 보조금을 자기의 것을 주는 것인가? 성도들이 긁힌 손으로 일하여 낸 헌금인 하나님의 것으로 주는 것이 아닌가. 자기의 돈을 주는 것처럼 왜 그렇게 죄인 나무라듯 호령인가? 나사로를 천시 여기던 부자의 심보가 아닌가? 그 뿐인가. 고작 일 년 내내 보잘 것 없는 보조금을 주어 놓고 종놈처럼 부릴 때도 적지 않다.
 
여름만 되면 마치 별장이나 되듯이 수십 명의 중등부원이나 고등부원들을 데리고 와서 기타를 뚱땅거리며 춤추며 돌아가고, 하물며 시골 교역자가 거룩히 여기는 강대상까지 수영 팬티 차림으로 올라가서 낮잠을 자거나 포커를 하는 횡포는 눈 뜨고 볼 수 없다. 그래도 시골 목회자는 아무 소리를 못하고 사찰 꼴이 되어서 반찬거리나 땔감을 구하러 다니고 쓰레기나 태우고 주고 가는 먹다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감지덕지 먹어야 하는 모습은 분노보다도 슬프다.
 
부자와 나사로
 
조금만 불손(不遜)하면 보조가 끊어진다. 밥줄, 아부, 비굴, 무기력한 모습은 너무나 나사로를 닮았다.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수십, 수백의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음식을 마련하고 기생들을 초청하여 호화로이 잔치를 벌이던 부자의 대문 귀퉁이에서 잔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나마 연명해야 하고, 때때로 살찐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으므로 고통이 더 심한 나사로지만 감히 항의조차 못하던 모습이 바로 오늘의 농어촌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만약 나사로가 개들에게 화가 난 나머지 막대기나 돌을 던지며 때렸다면 아마 그날로 종들에 의해 가마니에 둘둘 말리어 어느 외진 들판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은근히 진땀이 난다. 농촌교회에서 목회할 때 30대 초반에 쓴 글을 바탕으로 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예전에 공박하던 그 대상자 중에 필자가 어느새 끼어 있다는 자괴감(自愧感)이 필자를 아프게 하고 있다.
 
필자나 우리 교회가 여기저기 보조한다는 것이 부스러기 정도에 불과하며 생색이나 내고 있지 않은가? 혹은 우리 교회가 보조하고 있는 농촌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필자의 모습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자의 거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진다.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지금의 상태로는 농촌은 회생(回生)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더욱더 악화일로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통계청이 17일 발표한 ‘통계로 본 농업의 구조 변화’를 보면 농촌 인구가 반세기 만에 90% 가까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농촌 인구의 절반은 65세 이상 고령자였다. 2019년 농가 인구는 224만5000명으로 1970년 1442만2000명보다 84.4% 감소했다.

늙은 고목나무가 되어가는 농어촌에서 무슨 꽃, 무슨 열매를 맺기를 바라겠는가? 또한 농어촌에 계속 남아서 땅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희망적인 입장이 결코 아니다. 통계에 의하면 매년 농가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농가 호당 부채액이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어느 곳 하나 희망적인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거지 나사로에게는 전혀 자립할 전망이 없었다. 개들이 와서 시달리게 해도 쫓을 힘조차 없을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왜 나사로를 내쫓지 않았을까? 들어가고 나가는 대문 옆에 누웠으니 어찌 기분이 나쁘지 않으랴. 자기들의 개가 상처를 핥으니 어찌 구역질이 동하지 않으랴. 그런데도 부자는 거지를 멀리 쫓아 보내지 않았을까? 아마 부자는 나사로를 구제하는 셈치고 방치해 두었는지 모른다. 조그마한 긍휼심이라도 베푼다는 어떤 긍지가 있었을 것이다.
 
날마다 큰 잔치를 벌이는 부자의 마음 한 귀퉁이에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자기가 거지 나사로를 대문 앞에 살도록 놓아둠으로 다른 부자들에게나 자기 집의 하인배들에게 관대한 사람으로 비침으로 호화사치 한다는 비난을 면하려는 얄팍한 계산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부자가 이왕 생색을 내려거든 좀 더 지혜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번 호화로이 연락(宴樂)하는 잔치 비용이 수백만 원이 든다면 한두 번 잔치를 중단하고 그 비용으로 외진 곳에 오막살이라도 지어주든가, 아니면 어느 의사라도 한 번쯤 청해서 치료를 했더라면 좋을 뻔했다. 그 헌데가 무슨 병에서인지 몰라도 치료 못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러한 긍휼심을 베풀었다면 나중에 죽은 후에라도 하늘로부터 긍휼을 받았을지 어찌 아는가?
 
왜 도시교회는 붓고 부어도 밑 빠진 독과 같은 농촌교회를 향해 보조를 끊지 않을까? 부자와 같은 심정에서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교만이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보조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 2:13)
 
대책은 전혀 없는 것인가?
 
늙은 고목나무가 된 농촌에 과연 대책은 없는 것인가? 왜 없겠는가? 어떠한 난국이라도 온 국민과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 준다면 능히 살길은 있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수난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교훈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1)농어촌은 지키려는 국민과 교회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간단한 계산으로는 ‘외국 농산물이 저렇게 싼값으로 수입되는데 막대한 부채를 져가면서 농사지을 필요가 무엇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눈앞에 이득만 알 뿐, 먼 훗날을 대비한 자세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농산물에 비해 엄청나게 싼 가격의 외국 농산물이나 축산물에 맛들인 채, 우리의 농토를 묵어 자빠지게 놓아둠으로써 잡초로 우거지게 만들고 마침내 폐허가 되도록 방치한다면 어느 날인가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날을 만날 것이다.
 
농토가 폐허가 되는 것도 문제이나 농어촌을 이어갈 후계자들이 다 사라지므로 농어촌 개발은 중단의 비극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미래학자들이 예견(豫見)한 대로 앞으로의 전쟁은 에너지 전쟁이 아니라 식량 전쟁이 닥쳐올 때에 농축산물 대국(大國)들은 그것으로 무기를 삼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는 부르는 것이 가격이 될 것이요, 외교의 주 업무가 식량 구입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농축산물 대국들이 파는 싼 농산물들은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들이 던지는 미끼에 맛 들이는 우매함을 버리고 비록 많은 적자가 있더라도 우리 농업을 장려하고 후계자를 육성함으로써 우리의 농토를 지켜나가야 한다. 정 힘에 벅차다면 영농기계를 중심한 대농(大農)위주의 경영으로 대전환을 해서라도 먼 훗날 식량 전쟁의 날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농촌, 우리의 농토의 생명력을 지켜가야 한다.
 
(2)농어촌의 교역자를 귀히 여겨야 한다.
지금, 많은 농어촌의 교역자(敎役者)들은 그 교회의 미래교회였던 청소년들이 먼저 떠나고 이어서 기둥처럼 여기던 제직들의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고개 너머로 하나둘씩 떠나보내고 주일날 텅 빈 좌석들을 보며 얼마나 속이 상한 채 설교하고 있을 것인가? 이제 폐가(廢家)가 되어 가는 많은 집들을 돌아보면서, 혹 사람이 산다 해도 노인들만 우두커니 버티고 있는 집들을 돌아보며 얼마나 절망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것인가? 사례비를 받지 못해서 도시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이 학자금과 생활비를 재촉하는 전화나 편지를 받을 때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을 것인가?
 
도시에서 호화판의 대접을 받으며 승용차의 경쟁이나 벌리고 있는 우리 도시 목회자들이 상상이나 해보았는가. 때로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무능한 자로 하대(下待)하기 일쑤였던가? 풍족한 예산 중에서 몇 만원의 부스러기를 선심 쓰듯이 보내 주고는 얼마나 종놈 취급하면서 ‘왜 선교 보고를 하지 않는가?’ 혹은 농사 수확기에 어느 농촌 목회자는 꿀 병이라도 들고 와 인사하는 데 비해, 어느 목회자는 아무 내색이 없자 인사성이 너무 없다고 보조금을 끊겠다 하며 지주인 양 횡포 부리지는 않았는가?
 
30대 초반에 그렇게 열을 올리면서 도시 목회자들의 방자함을 열을 올리면서 공박하던 필자가 지금에 와서는 바로 그런 장본인으로 자리 잡고 있으니 누구를 감히 탓하랴. 알고도 행하는 죄는 더 중하지 않는가. 너무나 부끄럽다. 아니 된다. 지금은 비록 나사로처럼 어쩔 수 없이 보조금을 받는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부자의 대문가에서 누워 있을 때에는 부자의 눈에는 쓰레기처럼 보였으나 죽은 후에 보니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지, 내 것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들은 보람 하나로 그 아골 골짜기, 빈들에서 고독과 궁핍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더 존귀한 자일지 모른다. 우리 도시 목회자들은 이미 상을 다 받고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들은 존귀한 자리에 앉아 있고 우리는 그들을 섬기는 자리에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때에 불공평하다고 억울해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라고 말씀하실 지 누가 알겠는가?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자. 그때에 그들은 아골 골짜기 빈들을 지키는 보람만으로 고독과 궁핍을 이기게 될 것이다.
 
(3)농어촌교회 보조의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도시교회들이 여기 저기 매월 부스러기조의 보조금을 찢어 발리는 식으로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생색내기에 불과하지, 큰 도움이 못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제는 보조방식이 생색내기에서 자립화 도와주기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도시의 교회들이 각 농어촌교회와 자매결연을 맺는 형태가 되어 집중적으로 보조할 뿐 아니라, 농산물도 직거래하고 여름성경학교와 농촌활동, 그리고 전도 활동 등도 도와주어야 한다.
 
1980년대 후반 장로교 통합측 교단의 통계에 의하면 총 5,000여 교회 가운데 농어촌교회가 반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중에 약 1,700여 교회가 미자립교회로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비율은 다른 교단들도 거의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시교회가 하나 이상씩을 자매결연을 맺어 집중적으로 도와준다면 교회 뿐 아니라 지역 마을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4)농어촌교회는 재편(再編)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방법대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농어촌교회 목회자들에게는 싫은 소리이겠지만 할 말은 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농어촌교회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시기에 이른 것이다. 농어촌교회의 장래는 너무나 암담하다. 사람이 없는 데야, 교회의 존재근거는 물론이고 운영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농어촌교회는 이를 단단히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 대처 방안은 한 목회자가 몇 교회를 담임하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마을에 단 한 가족의 교인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교회당을 폐쇄해서는 안 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시교회는 교회 차량을 구입하도록 도와주므로 이 마을, 저 마을의 교인들을 중심지역으로 수송하여 함께 예배드리므로 신앙생활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5)농어촌 목회자들의 새로운 자세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농촌교회의 사는 길은 나사로 자신에 있다. 나사로는 스스로 체념했거나, 자포자기 한 탓에 구질구질하게 상(床)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불리려 했는지 모르며, 개가 와서 핥아도 비굴하게 당하기만 했는지 모른다. 오늘도 농촌교회 목회자 중에 철저한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적으면 적은 대로 소신껏 일하는 분이 적지 않다.
 

전 총신대 총장 정성구 박사는 황폐해가고 있는 농촌교회를 피력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나름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어느 목회자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는 신대원 졸업 후 5명밖에 모이지 않는 작은 시골교회로 부임했다. 좌우를 돌아보아도 전도의 소망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교회당에 출석하는 교인만을 위한 목회가 아니고, 반경 20km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목회를 했었다. 현대 목회는 양우리 안에 있는 자들만이 내 양이 아니고, 우리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 양으로 본다. 이 목사님은 몇몇 가정을 향해서 6년을 기도하며 묵묵히 섬기며 돌보았다. 그랬더니 드디어 사람들은 목사님을 그냥 교회당을 지키는 목사가 아니고, 자기들의 목사로 알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점차 교인이 불어나서 20명 이상의 세례교인이 생겨 그 가운데 장로를 세우게 되었고, 조직 교회가 되니 그 목사님도 당회장이 되었다.”

참으로 귀한 목회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반면, 상당수의 농촌 목회자들은 궁기(窮氣)가 너무 배어 있음에 가슴이 아프다. 만나기 바쁘게 우는소리요, 돈타령이다. 얼마나 돈에 목이 말랐으면 농촌 교역자들끼리 만나서 한다는 첫 인사가 ‘얼마 받소?’이다. 그것이 일종의 명함이다. 그러다가 기대 이상의 금액을 받으면 몹시 부러워한다. 그러나 기대 이하이면 농어촌 목회자끼리도 하대(下待)하려고 든다.

어느 목회자는 허세(虛勢)를 유지하기 위해서 도시교회의 목회자나 장로를 찾아서 애걸하고, 정치를 하여 가까스로 금(金)쪽 같은 저녁 설교 한 시간을 얻어내고서는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신세타령하며 우는 꼴,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도시교회의 사찰까지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런 식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자가 많은 부스러기를 모으게 되고 제법 그럴싸한 차량이라도 굴리게 되니 그러한 잘못된 풍조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코 아니 된다. 박봉의 사례비를 주면 그 금액을 가지고 생활하겠다는 각오를 가지는 자가 주(主)의 사역자다운 태도가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자들을 결코 굶긴 채 잠자리에 들게 하지 않으신다.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 엘리야를 보라. 저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기적의 떡과 한 끼뿐이 없는 과부의 초막에서 삼 년을 기적 가운데 살았지 않은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분과 다른가?
 
이제는 슬픈 표정으로 애걸복걸하며 부스러기를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땅만 바라보던 자세에서 이제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라.
“오 주여, 이 못난 죄인을 포함한 도시교회의 목회자들이 부자처럼 호화판 잔치에만 맛들이지 말게 하옵시고, 오늘의 나사로가 되어 도시교회만 바라보고 있는 농어촌교회를 향해 부스러기가 아닌 진정한 사랑의 손길로 그 상처를 어루만지게 하옵소서. 오늘도 아골 골짜기에서 고독과 궁핍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귀한 종들의 아픔을 씻겨 주시고 저들에게, 엘리야처럼 심한 가뭄 중에도 담대한 믿음과 기적의 떡, 그리고 능력을 주옵소서.”
 
ⓒ 소리(http://www.cry.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가장 많이 읽은 뉴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
감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윤석열 정권은 퇴진하라” 기독교시국
시편91강 142편 그들은 나보다 강
11월 선교편지
선을 행하라
주간 뉴스
“일어난 모든 일에”
11월 선교편지
11월 선교편지
최근 올라온 기사
가...
일...
시편 92강 143편 메마른 땅 같이...
겨울맞이 앞둔 끝자락 남도의 가을
필리핀 선교사 대회
관심병(關心病)
묵은 닭 교인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
“날마다 죽는 예수 신앙”
“추수감사절 이면에 숨겨진 기독교의 ...
편집자가 추천하는 기사
[NCCK 공동선언문 파문] 기독자교수협은?
이만희 "나는 구원자 아니다"
옥한흠 목사 장남 "오정현 목사는..."
변방 목회 40년
지금은 절망 아닌 기다림의 시기
회사소개 | 후원안내 | 저작권보호 | 광고안내 | 제휴문의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제호 크리스천웹진 소리 | 등록번호 경기도아00217 | 등록연월일 2009. 7. 3 | 발행인 김태복 | 편집인 김태복
발행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986-1 두산위브아파트 101동 506호 | 전화 및 FAX 031-577-9411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태복
Copyright 2007 소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cr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