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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신학자와 사생아(2)
2022년 09월 30일 (금) 08:15:08 김태복 목사 www.cry.or.kr
신학자와 성경
 
참 예언자를 구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가 얼마나 성경의 사실에 충실하냐를 살펴보는 것이다. 신학의 중심은 성경이다. 그런데도 신학자 중 적지 않은 자가 성경을 경시하기 일쑤이며 성경적 사실까지도 부정하거나 기묘한 용어와 논조로 재해석(再解釋)하므로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이다. 그런 자는 이미 예언자가 아니요, 무익한 변론가에 불과한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범하는 과오는 자기 전공 분야인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 등, 자기 전공이나 자기 신학설 위주로 성경을 이해하거나 자기 신학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집으로 성경을 취급한다는 점이다.
 
심한 경우에는 성경에 뚜렷이 나타난 사실(史實)도 부정, 혹은 왜곡(歪曲)해 버리고 있다. 예컨대 실존주의 입장에서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함으로 결국 성경의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제자들의 부활 신앙으로 전락시키는 따위의 과오를 범하기 일쑤인 것이다(칼 브라텐:「역사와 해석학」102페이지). 이는 성경을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고 이성의 눈으로 보려는 의도 탓이다.
 
<영의 세계를 깨닫는 기관은 믿음이다. 믿음이야말로 성서 세계의 문을 연다. 주석가는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미적(美的)으로 공감을 느끼는 것만으로 성서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여서 당신을 계시해 주실 일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고 볼 때에야 그 수수께끼는 풀린다.> (프록취:「신학사상」1집 147페이지)
 
이성의 눈으로 보는 성경은 우화(寓話)에 불과하다.
영적 체험 없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은 온통 신화(神話)로 채우고 있을 뿐이다.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외도(外道)하는 이유는 죄의 구속(救贖), 십자가 보혈, 중생, 부활, 재림이라는 중요한 영적 체험도 없이 강단에 서고, 또는 창작의 짜릿한 재치만 가지고 논문을 써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뛰어난 상상력과 독특한 사시안(斜視眼)만으로 성경의 사건을 이해하려 하고 혹은 삭제하고 가감하기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연애의 경험 없이 연애소설을 쓸 수 있다. 전쟁의 경험 없이도 전쟁을 겪은 사람보다 더 실감나게 전쟁의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과장기가 유난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의 편집상이나 사본(寫本)에 의한 과오, 집필자의 신학적인 견해에서 오는 편견이라든지, 혹은 수신자(受信者)들의 문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 문화 전통 속에 흐르는 주요 사상이나 신화를 가미하여 더 나은 복음 이해를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기록하는 중에 오류가 생길 수 있기에, 성경에는 어느 정도 부분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 속에 아주 확고하고도 줄기차게 굽이쳐 흐르는 중심사상마저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여 불합리하다고 해서 부정해 버리거나 혹은 우회적 해석을 시도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삭제해 버리는 것은 그 신학자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학의 문제점은 신학의 출발점을 합리주의적인 데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신학의 주축이 되는 성경은 신앙으로 기록되었음에도 신앙보다는 이성으로 보려는 데 신학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즉, 종교개혁의 전통보다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문예부흥 운동의 신념이 인간의 이성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필요성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신학이나 교회의 예전(禮典)같은 것도 그다지 흥미 있는 것이 못되었다. 결과적으로 종교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윤리를 위한 모퉁이 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관심이 그 당시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 그리스도 사상가들로 하여금 성서의 사본(寫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교회의 비난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윌리암 호오던:「프로테스탄트 신학개요」)
 
다시 말하면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앙의 눈으로 쓰인 성경을 이성의 눈으로 해석하려는 데 신학의 맹점과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신학은 성경의 가장 생명적인 부분까지도 이성의 메스로 잔인하게 메스를 가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의 중심 사상인 창조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 구원, 부활, 성령의 역사, 종말, 재림, 심판이라고 한다면, 이 모든 도그마 중 부활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요, 또한 확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그의 저서 「신약과 신화론」에서 강조하기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고 하는 부활을 포함한 그런 역사적 사실이란 전혀 생각할 수 없다.>고 하면서 부활 사건을 부정했다. 그리하여 양식 비평과 실증적 역사주의, 실존주의 눈을 가진 이들은 부활 사건을 신앙 사건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부활은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실존(實存)의 의미를 확고히 세워 준 신앙 사건이 바로 부활 사건이라는 것이다.
 
<신약성서 안에 있는 부활의 이야기와 부활에 관한 모든 기사는 단적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표현하려는 의도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R.불트만:「성서 실존적인 이해」85페이지)
 
맹랑한 변론이다. 마침내 가장 중요한 부활, 수백 명의 증인(證人)이 목격한 부활, 성경 기자는 너무나 확실한 것이라 별 염두도 두지 않고 기록했던 부활 사건이 이러한 식의 언어유희에 의해 농락당하기 시작하자, 성경의 모든 사실들은 주님처럼 찢기고 매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역사의 골고다에 매장당할 뻔했던 것이다. 그 흉악범들이 곧 사생아들로, 그들은 ‘비기독교화, 세속화, 정치신학, 사신주의(死神主義), 악마숭배’ 등등 나오는 대로 명명해서 지껄여댔다.
 
변론의 범람(氾濫)
 
필자가 신학을 공부하던 때는 1960년 후반기였다. 그 때 한국 교계는 교파 싸움이 진정되자 새로운 신학적인 논쟁들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우리 신학생들은 기숙사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밤을 밝혀 가며 그 신학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중에 우리를 매혹시키었던 책은 하이비․콕스(Harvey Cox)의 「세속도시」였다. 우리는 그 책을 읽으면서 역사와 시대적 정황을 꿰뚫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번뜩이는 언어적 묘사에 완전히 넋을 잃은 채 매료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바보제」라고 번역되어진 그의 책에 큰 기대를 걸고 읽어 나가다 급기야 범람하는 그의 언어의 장난에 식상(食傷)하고 만다. 도대체 독주에 취한 변설가처럼 이렇게 제멋대로 황성수설해도 되는 것인가?
 
<광대 그리스도는 기도의 복판에 들어 있는 익살이다. 아니, 광대 그리스도는 이는 익살로써의 기도, 혹은 기도로써의 익살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광대 그리스도는 계산과 공리주의가 판을 피는 팍팍 하는 세계에 존재하는 놀이의 정신이다. 기도는 말로 되어진 것이거나 총으로 되어진 것이나 놀이로 된 것이거나 막론하고, 인간적 환상의 실현의 한 형식이다. 기도의 행위를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의 과거와 사실과 운명의 노예가 아님을 보여준다. 제의(祭儀)의 주제나 역사의 이미지에 의하여 기도의 구조가 마련될 때, 기도는 미래에의 교량(橋梁)이 된다.> (「바보제」231페이지)
 
이 시대의, 이 사회의 문명(文明)의 언어, 문명의 색조, 문명의 분위기를 통해서 성경을 재해석한다는 노릇이 이쯤 되어 간다면 차라리 성경을 있는 그대로 낭독해 주는 것이 훨씬 선교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저 단순하고도 명쾌한 표현을 그들은 왜 그렇게 복잡하고 난이하게 만드는 그 저의가 무엇인가? 자기의 과시인가? 언어의 장난인가? 그것이 바로 사생아의 비뚤어진 심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신학은 사적인 자료, 문학적인 연구, 문화적인 배경, 저자의 의도, 편집상의 문제 등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함으로 많은 공로를 남겼다. 그 결과, 일부 완고하고 편협한 자들의 독선(獨善)을 무너뜨리게 해주었고,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켜 완전히 마귀 시 하던 교회의 고립주의와 결벽증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향해 사명을 갖고 나아가도록 한 것과 세상의 문화와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교회 민중은 세속화(世俗化)라는 신학자들의 플래카드를 따라 교회의 담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향해 사명자로써 참여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은 앞장서서 열심히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어 댔다. 교회 민중은 그 기세가 등등한 것처럼 보였고, 교회는 심한 고립주의자들만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교회 속에서 소외되었던 신학자들은 쾌재를 부르며 더욱 열변을 토했고, 그들의 인기는 60년대에서는 피크를 이루고 있었다. 60년대에 그들이 쓴 논문은 어느 년대에 비해 굉장한 다작(多作)을 이루고 있었다.
 
신학자의 공헌과 실패
 
사실, 신학자는 지금까지 많은 공헌을 해 왔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안내자의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해괴한 소리를 발하기 시작했다. ‘타자(他者)로서 신(神)은 죽었다.’ ‘참된 신앙은 진실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회악이 극에 달했으므로 혁명자로서 교회도 비폭력주의에서 벗어나서 폭력을 사용하여야 한다.’ ‘간통 수단이 전쟁 촉발의 위기를 모면하고, 긴장된 국교 관계를 완화하는 것이라면 애국 애족을 발휘한 것이 된다.’
 
호소력이 있던 그들의 소리가 취한(醉漢)의 목소리처럼 거칠어 가기 시작하자, 그들을 따라 시장(市場)까지 왔던 교회 민중들은 그곳을 떠나 하나 둘씩 교회의 담 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반대로 신비주의를 향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신학자들의 강의실은 고작해야 사회주의로 세상을 지상낙원을 만들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만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올 뿐 빈자리가 많아 가게 되었다. 신학자들이 한동안 큰 호응을 받던 그 때에 조금만 신중을 기했더라면 지금 세계 모든 곳에서 일고 있는 윤리(倫理)의 부재를 조금이나마 방지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사생아들의 논리가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은 기독교 대학이다.
 
곰팡냄새가 나는 기성 교회에 대한 염증을 느낀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 문화적인 색조가 물씬 풍기는 사생아들의 강연에 빨려들고 그들이 달콤한 신학적인 언어로 만든 노래에 매료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교회의 많은 젊은이들을 인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변신하도록 도와주므로 교회마다 청년들의 수는 점점 격감(激減)하는 역할을 서슴지 않고 있었고, 기독교 대학들은 많은 사생아의 후예들을 배출하는 온상(溫床)이 되었다.
 
사생아의 비겁
 
우리는 이러한 신학자들을 보며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왜 이들은 아직도 기독교의 범주에 살며 교회나 기독교 학교나 기관에서 주는 봉급으로 연명하고 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차라리 ‘성경은 망상가들의 설화(說話)의 불과하다.’고 양심 선언 하고 기독교 사회를 떠나는 것이 학자로서의 진정한 용기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이성의 안경을 벗고 겸손히 신앙의 자세로 돌아오거나 해야 옳을 것이다.
 
기독교의 뛰어난 윤리 탓인가. 어느 종교보다 자기 이성에 호소력을 느끼고 있는 탓인가. 이제 이성을 가지고 떠나든지, 신앙으로 거하든지 양단간에 결단하라. 그것을 회피하는 자는 추방해야 한다. 우리는 예언자 역할을 다할 신학자를 원한다. 자기 양떼, 자기 제자를 위해 자기 전부를 희생하며 서재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며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신학자를 원한다.
 
수도승처럼 고독의 암자 속에서 받은 계시로 바르게 외치는 예언자를 저 역사의 첨탑 위에 세우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예언가가 아직도 이 땅에 여기저기서 자기 사명의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보면서 우리의 기대는 크다. 지금도 선지 동산에는 때로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아픈 심정으로 기도의 자리에 엎드리고 그의 연구실은 밤늦도록 불이 밝히고 있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음에 마음이 든든하다.
 
어찌 그 뿐인가? 학비 없는 제자를 몰래 도와주면서 엘리사처럼 많은 제자를 양육하고 계신 훌륭한 교수 분들이 여기저기 계심에 이 글을 쓰는 동안 줄곧 그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가득 차 있다. 때때로 저들의 외침이 사생아들의 취한 합창 소리로 막히고는 하지만, 우리는 첨탑(尖塔) 위에 선 저 위대한 모습을 뵙기만 해도 그냥 가슴이 경건해진다. 조망대 위에 높이 서서 문명의 긴 계곡을 응시하는 저 빛나는 눈만 뵈어도 감동이 솟구쳐 오름을 느낀다.
 
이제 입을 열고 외치어 주십시오.
예언자님이여. 흔들리는 우리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쳐 주옵소서.
우리는 심히 곤고하나이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 도다.” (겔 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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