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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장 신학자와 사생아
2022년 09월 15일 (목) 10:42:29 김태복 목사 www.cry.or.kr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 1:3-4)
 
신학자는 예언자여야 한다.
 
교회의 목사는 목회자요, 교사라 할 수 있고, 부흥사는 능력자라고 할 수 있다면 신학자는 예언자(豫言者)이다. 신학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충분한 시간과 재료를 가지고 성경을 깊이, 넓게 이 시대의 역사와 문명과 연관해서 연구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성경 연구를 하는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그 시대 속에서 전하여진 말씀과 역사(役事)를 통해 하나님의 중심 원리를 찾아냄으로 그 중심 원리의 자막대기로 오늘 이 시대의 혼돈된 정황(情況) 속에서 방황하는 인류에게 생생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선포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C. T. 프리취는 예언자의 3중의 직책은 (1)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2)하나님에게서 메시지를 받으며 (3)그의 메시지를 그의 백성에게 말하라고 명령을 받은 자라고 했다(「예언자의 세계」21페이지). G. 케네디는 <예언자란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 이 빛 가운데서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석해 주는 자요, 하나님의 뜻에 알맞도록 조절하기 위하여 그 병을 진단하고, 이 병든 사회에 처방을 내리는 사명을 가진 자>라고 말했다(「설교의 이론과 실제」178페이지).
 
오늘 이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존. K. 갈브레이드의 지적대로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고 있다. 맘몬주의, 기술 문명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의 횡포로 인해 부정부패의 가속화, 빈부의 극심한 격차, 퇴폐적인 사회 풍조, 살인 무기의 증강이 현대를 심하게 비틀거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때 일수록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명상함으로 계시(啓示)를 받아 내야하며, 또한 이 시대의 문명을 예리하게 통찰하여서 ‘이 시대를 옳게 사는 참 진리가 무엇이며, 정도(正道)가 무엇인가’를 사회와 교회, 왕(王)들에게 직언(直言)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예언의 한 적은 부분을 책임진 목회자들이라도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질 때가 많다. 일주일에도 여러 번 강단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수편의 설교를 준비하기에 지치고, 심방, 직업 알선, 결혼 중매, 병자 방문, 지역사회와의 관계, 상회(上會)와의 관계 등 잡다한 일로 지치고, 새벽기도로 인한 수면 결핍으로 지치기 일 수이다. 그 외 인간관계에서 오는 마음의 상처들, 끝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들로 꾸겨진 휴지 꼴이 될 때가 허다하다.
 
그래서 모처럼 고요한 시간을 얻는다 해도 맑은 심정이 못되므로 겨우 성경 읽기나 신문과 잡지 등 가벼운 읽기로 끝내기가 일쑤이다. 이런 식으로 길고 긴 봄과 여름을 순식간에 날려 보내고 나서, 그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은 청명해지고 귀뚜리의 저미어 드는 소리가 뜰에 가득할 때, 자기가 얼마나 텅비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자기 서재에는 구입한 지 여러 달이 흘렀건만 여전히 펼치지 못한 채 꽂히어 있는 많은 책들을 발견하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기 일쑤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목회자는 무엇인가 심한 갈증을 느끼며 서재이든 강의실이든 경건히 나아가 신학자들의 예언적인 음성을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시각에 서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이 시대를 이리도 혼돈으로 밀어 넣고 있는가? 이러한 때에 교회는 이 시대를 향해 어떠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바른 모습인가? 미구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암운(暗雲)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안타까운 문제에 대해서 예언자들의 청명한 음성을 듣고 싶은 것이다.
 
신학자들이 수도승처럼 가난과 고독 속에서 인고(忍苦)하면서 암자 같은 서재나 연구실에서, 혹은 명상으로 지새운 골방에서, 혹은 기도의 눈물로 얼룩진 채플에서 하나님과 면대(面對)하는 중에 들었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목회자들은 갈급한 마음으로 그의 강의실을 찾거나 그의 저서(著書)를 펼치고 싶은 것이다.
 
목회자들은 신학자들이 역사(歷史)의 높은 첨탑(尖塔)에 서서 문명(文明)을 조망하며, 그 문명의 긴 험로(險路)를 뚫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붉은 깃발로 위기를 경고하기도 하고 혹은 파란 깃발로 안전을 알려주는 귀한 직분을 받는 예언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실망을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귀를 막고야 만다.
우리의 눈은 이미 그들이 휘젓고 있는 깃발로 향하는 것을 피한다. 신학자들을 향해 경건히 나갔던 우리는 더 큰 허탈을 안고 돌아오고는 했기 때문이다. 왜냐고 물을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그들의 강의를 듣는 동안 우리가 그처럼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성경을 저들은 얼마나 경홀히 여기고 있음에 실망하며, 마침내 분노한다.
 
하나님의 사관(史觀)을 통해 오늘의 역사를 보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의 창작을 낭독하는 문학가의 모습을 보며 슬픔을 느낀다. 그들의 눈은 예언자의 것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눈을 가진 합리주의자의 것이며, 그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외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뜨거움에서가 아니고 작가들이 지니고 있는 창작자의 열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쑈니시안파들.
교회의 일원이 되기보다 종교적 명상이나 종교적 문화에 심취하기를 즐기는 학자들. 이들은 어떠한 문제점을 잘 포착하고 부조리를 잘 알며, 교회의 비합리적인 사고를 잘 포착해 내어 공격하나,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서 있는 입장이 성경의 입장이 아니라 합리주의(合理主義) 입장에 있다는 데에 우리의 불만이 큰 것이다. 즉,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손은 밤을 밝히며 논문을 쓰는 학자의 곱고 하얀 손은 될지언정 성경대로 살려는 성도의 긁힌 손은 아닌 것이다. 이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보다, 자기의 학설이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마구 찢어서 자기의 자료 카드 함에 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가 제조한 신상(神像)을 서재에 높이 걸어 두고 그 앞에 기도하고 그 계시를 받는 자들이며, 또한 그들은 서재 안에서만 애써 그린 인간상을 바라보면서 인간들의 처참한 비극을 연상하려고 애쓰는 자들이다. 때로는 자기들이 만든 주인공의 고독 때문에 같이 외로워하며 그 주인공의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자기가 만든 주인공이 당하는 탄압 때문에 분노의 글과 항거의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학자들의 창작 향연에 이제는 흥미를 잃는다. 자기들끼리 흥에 도취되어 시(詩)를 낭송하고 박수치는 그 선비 놀음이 우리를 지치게 한다.
 
사생아들의 자축회(自祝會).
사생아들은 흔히 민중의 합창에 역겨움을 느낀다. 비뚤게 보고 사고(思考)한다. 반항기가 순간순간 노출된다. 돌연, 화약총을 터트려서라도 민중의 흥취를 깨뜨리려는 악동의 장난기가 너무 심하다. 그래, 어쩌자고 성경을 녹슨 메스로 발기발기 찢어다가 제멋대로 조립(組立)하고 물감으로 부활의 기록을 지우고 팥을 콩이라는 가설을 정해 놓고 증명하려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독선과 아집으로 싸인 목회자들의 사고 구조를 깨뜨리므로 교회와 사회의 담을 헐어 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 무당과 점쟁이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교회 민중에게 참 길을 보임으로 구해 보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이 제조하여 만든 구충제(驅蟲劑)라는 것은 아무 효험이 없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려는 신학생들의 학문적인 호기심이나 논문 재료가 되거나 교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요나들의 변명 자료로만 효능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철학이지 신학이 아니다.
이제는 신학교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곳으로 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바른 선지자적 사명을 가진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힘을 써야 한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은 이 시대와 미래를 향해 바르게 인도할 신학자의 출현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 저가 골방에서 무릎으로 기도하는 동안 받은 계시를 들고 서서 외칠 때에 전혀 볼 수가 없던 미래의 시계(視界)가 확연히 열리고 거기에서 시대적 사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희열에 넘치랴.

<예언자들 틈에서 사생아라는 가라지들을 가려 내라. 무수한 사생아들의 무리 속에서 예언자들을 구하여 그들을 이 시대의 첨탑 위에 세워 외치게 하라.>

 
예언자와 사생아의 구별
 
참 예언자와 사생아는 어찌 구별할 수 있는가.
그들의 강의 내용인가? 아니다. 말을 가지고 구별한다는 것은 그 가능도가 희박하다. 때때로 우리는 신학자들의 강연을 들으며 번뜩이는 진리의 빛남과 시(詩)적인 감동과 명료한 논조(論調)에 매료된다. 그러나 후에 오직 그의 말재주에 현혹되었던 것을 알고 나서는 입맛이 쓴 경험을 얼마나 자주 했던가?
 
말 재주꾼.
영력을 뿜어내는 듯한 제스처에 현혹되지 말라. 사생아일수록 민중을 휘어잡는 강연의 수법을 터득하고 있다. 그 열매를 보고 구별하여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5-16)
 
열매를 보고 참과 거짓을 알아내야 한다.
신학자에게도 양 떼가 있어야 한다.
그가 목양자(牧羊者)일 때 그는 참다운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학을 아는 목회자가 건전한 목회를 하듯이, 목회를 아는 신학자가 건전한 신학의 자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나 성 어거스틴, 존 칼빈이나 다 신학자였으나 교회를 위하여 전생을 바쳤을 때, 그는 위대한 신학자로 역사 속에서 우뚝 설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Karl Barth)도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신학자로 천국(天國)이 사회주의 건설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목사로서 매 주일마다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 일에 직면하자, 그의 성경관이 뒤바뀌게 되었고, 그 결과 유명한 「로마서 주석」을 저술케 된 것이다.
 
니이버(Reinhold Niebuhr)가 건전한 신학자로서 수많은 사람의 목회자나 신학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나타내게 된 것은 서재에서 깊이 명상하는 속에서 이룩된 논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디트로이트에 있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교회에서 목회 하는 중에 얻은 경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버림받은 서민(庶民)들의 저 처절한 비참상과 부조리한 사회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는 참으로 진지하고 절박하게 생(生)과 신(神)의 문제를 질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버려진 골목에서 그의 위대한 신학은 기록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본 회퍼(Dietrich Bonhoffer)가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그의 우수한 머리에서 이루어진 이론 탓이 아니라, 그의 목회 경험을 통해서 우러난 신학 탓이었다. 그는 얼마나 교회와 양떼를 사랑했는지, 그가 저술한 「옥중서신」을 읽노라면 잘 발견되어 진다.
 
<1943년 7월 3일.
제가 일하고 있던 여러 교회와 그리고 또 여러 즐거운 가정의 잔치, 결혼식, 세례식, 입교식 ― 제가 세례를 베푼 어린이가 내일 입교할 것입니다.― 등등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하나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우 평화스럽고 감사하고 신뢰를 굳게 하는 회상들뿐입니다. 다만 아무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목회자가 눈물로 읽게 되는 구절들이 그의 서신에 가득하다. 신학이 없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거나 설교하는 목회자도 문제이나 교회와 양떼를 향해 뜨거운 손길 한번 내밀지 못하거나 혹은 죽어 가는 이의 저 차가운 손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 한번 해보지 못한 자가 낙서하는 듯한 쾌감으로 조립해 놓은 이론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빈곤과 병고와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의 저 신음 소리를 들으며 그들과 함께 울어 보지 못한 채, 오직 서재에서만 던져진 신학의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인 것이다.
 
<어떤 신학교에서는 전 교수에게 가능한 대로 교회를 담임하든지 부목사격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여러 교수들의 강의 내용이 더욱 실제적이 되어서 무책임한 강의나 이론상의 빈 강의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한기원:「복된 말씀」지 74년 6월호)
 
양 떼가 없다면 제자라도 있어야 한다.
자기 강의에 참석하는 자가 곧 자기 제자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스승과 제자는 인격과 인격의 깊은 관계에 접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 스승은 자기 제자에게 모든 것을 심어 주기 위해 가르치고 함께 숙식하며 발을 씻겨 주어야 하며 마침내 십자가의 희생의 각오도 있어야 한다. 제자 하나 없는 신학자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말 광대일 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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