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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부흥사와 무당(2)
2022년 08월 18일 (목) 17:10:28 김태복 목사 www.cry.or.kr
부흥사의 무기, 축복과 저주의 쌍칼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부흥사들의 수는 약 5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위에 인용한 탁명환 소장의 글에는 70년대 중반에 100명에 비해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가 없다. 그 중에 길선주나 김익두, 또는 이성봉 목사 같은 복음 열정과 교회를 진정 사랑하는 정신과 양떼를 위해 희생적으로 수고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숫자는 지극히 적은 수에 불구하고 상당수의 부흥사들이 제멋대로 행동함으로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선, 말씀의 빈곤이다. 신학의 결핍이다.
때로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에 참석해 보면 큰 은혜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느 때는 상당수의 부흥사들의 성경 해석이 너무 엉터리임에 놀란다. '과연 저 분이 신학을 제대로 한 분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깡무식한 소리를 낯 한 번 붉히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다. 기가 막힌다. 본문 한 절 읽어 놓고 온통 잔소리요, 자기 자랑이요, 자기 체험 위주로 말씀을 해석해 간다. 어느 분은 회개하기 전의 탕자 생활을 너무 부각시킴으로 죄된 생활에 대해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다. 그들은 양식 대신에 독을 먹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을 금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점은 기복주의(祈福主義)의 기수(旗手)라는 데 있다. 60년대, 7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하자, 많은 부흥사들이 덩달아 부추기기 시작한 것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기복주의로 오염 들게 만든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성경에 보면 복(福)에 대한 말씀이 많다. 우리가 먼저 복을 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사실이 성경 안에는 가득하다.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복이시며(시16:2, 딤전6:15), 복의 근원이 되신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복과 은혜 없이는 한시도 살 수가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 와 복을 구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요, 오히려 믿음의 자세요, 권장할 만한 사항이다.
 
문제는 기복주의에 있다.
기복주의란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함에도(고전 10:31),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복만 받으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어느 신이든지 자기에게 복만 준다면 그 신을 믿으려는 자세이다. 산신령이든, 조상신이든, 무당이 믿는 신이든지 복만 주면 족하다는 신앙 태도가 기복주의의 정신이다. 지금은 구하는 대상이 다만 하나님이요, 그를 통해서 자기의 탐욕을 채우려 하는 것뿐이다.
 
<기복종교란 복을 비는 종교라는 뜻이다. 복을 비는 것 자체는 잘못이 없으나 문제는 이런 대중적 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복 받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착한 사람이 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윤리적 관심이 희박한 기독교로 타락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박하규: 「한국교회 어떻게 살릴 것인가?」34페이지)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복주의는 신본주의(神本主義)가 아니라 철저히 인본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과연, 이러한 기복주의에 치중한 탓인가. 70년대, 80년대는 너나없이 아파트, 자가용, 별장, 넓은 땅, 일류대학, 호화결혼, 극에 달한 사치와 향락 등 탐욕에 기갈이 들린 시기였다.
많은 부흥사들은 그 탐욕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다 이룰 수 있는 것처럼 약속을 남발하면서 엄청난 헌금을 뜯어내어 또한 자기들의 탐욕을 채웠던 것이다.
 
그들의 설교 초점은 ‘복 받는 길’이었는데 그것은 엄청난 흡인력이 있어서 수많은 인파들을 모이게 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 엄청난 탐욕의 넝쿨들을 정화시키거나 절제시키기는커녕 더 부추기어 80년대 후반부터 엄청난 검은 위력으로 한국을 부도덕한 사회로 만들어 버리는데 공범자(共犯者) 역할을 톡톡히 해 냈던 것이다.
 
또한 부흥사들은 저주도 서슴지 않았다.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심판의 칼이 임할 것처럼 위협했다. 그리하여 한 손에는 축복의 칼을, 한 손에는 저주의 칼을 들고 사정없이 휘두르며 어느 때는 욕을 퍼붓기도 했다. 어느 부흥사는 강대 위에서 헌금 봉투를 들고 ‘이것을 헌금이라고 바치고 복을 받으려고 하느냐?’라고 야단을 치든지, 혹은 대접 타령, 사례비 타령으로 호통을 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떠들다가 가 버린 부흥사들로 인해 목회자들은 그 후유증을 앓으면서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때로 프로급에 속하는 부흥사를 모셨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어느 부흥사는 자기 딴에는 담임목사를 위해서 한다는 노릇이 큰 시험거리가 되기도 한다. ‘내가 보니 목사님 차가 너무 후졌어.’ 혹은 ‘목사관이 저것이 뭐야. 자기들은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저런 낡은 곳에 살라고 하니 그래 가지고 이 교회가 복을 받겠어?‘라고 호통을 치고는 자기 멋대로 승용차 헌금이나 목사관 건립헌금을 강행하기도 한다.
 
<강사는 첫날밤부터 은사와 축복을 강조하여 헌금 많이 바치면 축복받고 헌금에 인색하면 암에 걸려 죽어 버린다는 공갈과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어느 강사는 하나님께서 강사인 자기에게 투시의 영을 주셨는데 어떤 부자가 헌금에 인색하기 때문에 예언하기를 '당신의 아들이 금년에 죽을 것이다.'했더니 그 해에 죽었고 그는 아들이 죽은 후에야 울면서 헌금했다는 등 참으로 소름끼치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방언, 입신, 진동, 투시 등 은사와 축복을 강조하면서 또 안수해 줄 터이니 별미 헌금을 바치라고 하면 강단에 넘치게 쌓인다. 그러나 순수한 설교만 하면 헌금이 나오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또 어떤 강사는 '이번 부흥회 기간에 무엇인가 표적을 남기고 가고 싶은데 이 교회는 교육관이 없으니 교육관 건축을 위하여 헌금하자.'라는 즉흥 제안을 하며 '장로는 얼마, 집사는 얼마를 헌금하시오.'라고 경매 부르듯 강요하면 수천 만 원의 헌금이 약속된다. 그러면 목회자는 수고했다고 거액의 사례금을 지급한다.>
(고영근:「한국교회 갱신과 선교적 과제」)
 
그런 식으로 부흥회가 끝나고 나면 골탕 먹는 것은 담임목사이다. 교회 지도급으로부터 '짜고 했다.'는 비판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프로급을 피하고 신실하게 목회 하는 분을 강사로 모신다. 그러면 교회의 지도급에 속한 분들은 환영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은혜파들은 이미 기도원에서 맛을 들인 터라, 프로급의 부흥사를 모셔서 북치고 박수치며 찬송을 부르고 과장된 체험담을 들으며 배꼽을 쥐고 웃거나 가슴을 치면서 울며 회개하는 영적 축제(祝祭)를 사모하다가 일반 목회자를 모시면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러나 저러나 목회자에게는 앙금을 남기게 되니 될수록 부흥회를 피하려는 것이 최근의 추세가 되고 있다.
 
새로운 부흥사
 
프로 부흥사들은 설교를 하거나 예화를 하거나 입만 열었다 하면 자기 이야기, 자기 체험 일색이다. 사도 바울은 받은 은혜 크지만 자고할까 두려워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장:1, 7절)
 
떨며 고백했다.
그렇다면 무당의 카리스마적인 행위처럼 욕질하고 반말하고, 축복과 저주를 마구 뿌리는 등, 자기만이 가장 큰 체험을 받은 양 무례하게 칼을 휘두르는 그들은 사도 바울보다 더 큰 능력자요, 더 큰 체험자란 말인가?
여하튼 이들로 인해 교회는 또 하나의 큰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 부흥사가 이런 주장을, 저 부흥사가 저런 주장을 하므로 귀만 크게 만들었거나 성경 해석의 혼란만 조장하였다. 또한 이 부흥사에게 크게 감동을 받으면 그의 파(派)가 되어 그 성경 해석법을 따르고, 저 부흥사가 방언을 강조하면 방언만 받으면 형통되는 양, 기를 쓰고서라도 방언을 받으려 했다.
 
그리하여 부흥회가 거듭될수록 교회는 갖가지 복선(伏線)이 깔리게 되었다. 그 결과 본교회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하든, 이제 자기가 은혜받은 부흥사의 사고방식을 따라 들을 것은 듣고 버릴 것은 버리게 되었다. 다른 내용이면 무시한다. 자기와 주장이 다르면 어떤 성경 내용이라도 은혜 없는 목사, 능력 없는 목사로 치부해 버린다. 그로 인해 교회 안에 갖가지 형태의 사고구조, 성경 해석, 구원관, 교회관이 엉키어 모래알이 모인 교회로 화해 간다.
 
뒤늦게 이를 안 교회마다 부흥회에 대해서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분열할 당시에 지은 죄로 인해 초창기 부흥회 가졌던 뜨거운 자복의 열기(熱氣)가 가시고 이제 와서는 연례(年例) 행사가 되어 버리고, 또 신학적 바탕이 없는 부흥사들의 설교 내용이 바닥이 드러나서 무엇인가 식상(食傷)에 걸린 듯 권태로워지고 또한 모호한 방향으로 굳어 가 문제를 만들기 시작하자 차츰 부흥회 숫자를 줄이거나 부흥회 강사를 참신한 목회자로 모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교회 밖으로 흩어지던 교인이 교회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고, 특히 성경 교육에 중점을 둠으로 목회자를 중심해서 교회의 안정을 기하려는 방향 때문에 상당수의 교회 민중의 방황을 멈추게 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목회자인 부흥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맹점(盲點)을 지니고 있었다.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물론,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 뿐 아니라, 결정적인 흠은 교회를 회(灰)칠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목사가 무슨 문제가 생기어 교회의 분란이 있는 경우나 무리하게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교회의 시험이 있는 경우에는 부흥사를 통해서 문제를 무마하려거나 어떤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기 일쑤이고, 또 부흥사 자신도 목회자를 변호한다는 인상이 너무 짙게 풍기게 되므로 교회의 문제를 적당히 해결하려 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한 점이다.
 
반면에 목회자 부흥사들의 공격 대상은 기도를 많이 하거나 은혜를 많이 사모하는 자들, 소위 은혜파들 이었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를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이 가난했고 교회 안에서는 아무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회 안에서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 때에 가장 중심을 이루는 그룹이므로 교회의 영성(靈性) 운동에 큰 이바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목회자나 교회 지도급의 영적 빈곤에 대해서 언제나 강한 압박감을 주거나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하는 쪽이어서 교회의 짐스러운 존재들이기도 했다.
 
목회자 부흥사들은 이러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은사는 부인치 않으나 탐탁치 못하다는 듯이 설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도원을 중심한 부흥사들은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아울러 이러한 신자들을 두호(斗護)하는 데 비해, 목회자인 부흥사들은 그 반대였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은사보다는 교회봉사에 대해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들을 중심한 은혜파들이 소외되기 시작했고, 경계의 눈을 피해 새로운 모임을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은사 집회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일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왜냐하면 성령이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게 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하고 싶은 이들에게 목회자가 일터를 주지 않는 데 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가정을 중심해서 은사 집회라는 형식으로 능력을 행했다. 성경공부도 하고 병도 고쳤다.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았다. 이러한 은사 집회에는 큰 은혜가 임하는 곳도 많아 많은 부녀 신자들이 쉬쉬하며 모여든다. 교회에서는 이를 알고 강단에서 호통을 친다. 더 쉬쉬하며 장소를 옮기어 가며 몰래 모인다.
 
그러한 모임이 70년대, 80년대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러한 은사집회는 부흥회보다도 더 영향력이 있게 마련이고 비밀결사적인 면이 있어서 그 조직이 결속력이 대단했다. 한국교회사(史)에 또 하나의 영적운동 형태였다. 그러나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은사집회가 '오직 주님'을 중심한 집회가 되었다면 얼마나 큰 역사가 가정에서부터 일어났겠는가? 초대교회가 가정이나 다락방에서 시작했듯이 싸움박질이나 일삼던 한국교회의 어두운 영성 세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크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은사를 받아 열심과 의욕은 있으나 대부분 성경의 기초나 신학적인 기반이 없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이가 병만 고치면 좋겠는데 말씀도 가르치고 예언도 한다며 북 치고 장구 쳤다. 그러다 보니, 무지한 아녀자들이 몰려와서 ‘우리 집의 사업이 잘 되겠느냐, 자식이 월남(越南)에 갔는데 무사하겠느냐, 이사를 가도 좋으냐?’는 등, 점쟁이에게 묻듯이 하자, 은사 받았다는 이들은 권위 탓인지 용케도 대답을 하면서 축복도 하고 저주도 했다. 또 성경 구절까지 일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에 의해서 요술통도 되고 토정비결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 점쟁이, 기독교 무당이 거기에서 태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부흥회, 새로워져야 한다
 
부흥회가 이대로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부흥사들의 과감한 갱신(更新)이 이루어져야 한다.
길선주-김익두-이성봉으로 이어지는 본래의 순수한 부흥사들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에게서 적어도 세 가지 면을 오늘의 부흥사들은 이어받아야 한다.
 
(1)철저한 말씀 중심의 집회가 되어야 한다.
길선주 목사는 성경에 통달했다. 그는 구약 성경을 3백독 하였고, 신약 성경은 1천 독이 넘었으며, 특히 요한계시록은 만 독을 했다고 하지 않은가? 김광수 목사가 저술한 「한국기독교 인물사」에서 보면 길선주 목사에 대해서 쓰기를 “그는 성경학자요,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들보다 앞선 전도자요, 부흥사였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와 성경 강해는 한국교회에서 크게 환영되었고, 또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은 한국교회의 표준과 같이 되었음이 사실이다.”라고 했다.
 
김익두 목사도 세례받을 때까지 성경을 1백 독을 하였다 했으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의 설교로 주기철 목사도 은혜를 받았으며, 이성봉 목사도 그에게서 은혜받고 부흥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 혹은 가난한 대학생 시절, 이성봉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어느 때는 십자가의 설교를 하시면서 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에 비해, 오늘의 부흥사 중 상당수가 말씀의 깊이가 너무 얕다. 10년 전에 들었던 설교를 재탕, 삼탕을 하고 있다. 입담만 더 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는 부흥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기록할 것은 예화거리 뿐이다.
각성하여야 한다.
평신도들의 성경 수준은 엄청나게 격상되었는데 여전히 60년대식. 70년대식의 북치고 장구 치는 약장수 식의 집회 방법을 고집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철저한 말씀 중심의 부흥사경회가 되어야 한다. 부흥사들이 열심히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지 않고는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기독교 부흥연수원을 만들어 함께 배우고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바람직한 시도라고 보인다.
 
(2)부흥사경회는 강한 능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길선주, 김익두, 이성봉의 집회에서는 강한 능력이 나타났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도하는 부흥회에서 회개가 터지고 귀신이 소리치며 떠나가고 난치병이 치유되는 역사와 베드로가 주도하는 초대교회의 부흥회처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회개의 대역사가 터지고 귀신이 물러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큰 능력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흥회의 원형(原形)이다.
다시 말하면 부흥회는 철저한 말씀 중심 위에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어느 부흥사경회는 오직 성경 공부에만 치우친다. 반면, 어느 부흥회는 말씀은 어디 가고 능력과 체험 위주로만 진행된다. 둘 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집회에 불과해서 전자는 지적 위주의 부흥회로 끝나기 쉽고, 후자는 감정위주의 부흥회로 끝마칠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철저한 말씀중심과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않은 부흥강사는 제발 자중해 주었으면 바라고 싶은 심정이다.
 
「기독교선교신문」에서 정낙유 목사는 저질 부흥사들을 혹독하게 비판하기를 “목회 사역에 별 재미없는 교역자들 가운데는 ‘부흥사나 되어서 부흥회나 다녀 볼까’하는 심정으로 부흥사연구원, 아니면 각계 부흥사회에 얼굴을 기웃거리는 것이다. 아니, 무슨 연구원에 다녔다고 해서 부흥사가 되는 것일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교파 난립에 선교회 난립을 더하더니, 이제는 부흥사회 마저 난립하는 꼴불견을 목도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그리하여 너무나 많은 자칭 부흥사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와서 축복과 저주의 쌍칼을 휘두르며 제멋대로 가르치고 제멋대로 욕하고 제멋대로 안수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영계(靈界)는 심히 혼탁해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능력이 없는 자는 나서는 일에 삼가야 한다. 각 부흥사회도 자성하고 자체 정화에 나서야 한다.
 
(3)예언자적 부흥회로 승격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부흥사들이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다면, 또 한 번의 성장을 위해서 부흥회의 방식이 변혁되어야 한다. 저 50년대, 60년대의 배고픈 시절과 70년대, 80년대의 저 욕망의 시절에서 행하던 축복 중심의 부흥회식을 과감히 벗고 이제는 새로운 부흥회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예언자적인 부흥회로 승격되어야 하는 것이다. 축복위주의 부흥회가 지나쳐서 기복주의를 장려하므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황금만능주의로 병들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이제는 가서 전하는 곳마다 신앙의 생활화(生活化)를 강조하여야 한다.
 
백성들의 지나친 탐욕을 예언자적인 자세로 사정없이 지적하므로 받기만 하려는 자세에서 주는 삶으로 전환되도록 촉구하여야 한다. 그런 말을 담대히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흥사들 스스로 탐욕을 버려야 한다. 동시에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의 마지막 대 사명은 세계선교임을 강력히 촉구함으로써 세계선교운동의 붐을 일으켜야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것이다. 부흥사로서 한국교회의 크게 기여했던 신현균 목사의 말을 소개하므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한국교회가 이 시대에 지향해야 할 부흥운동의 방향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단순한 부흥집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웨슬리의 사회 각성은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촬스 피니는 그 당시 사회에 굉장한 도덕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 개인에게만 적용하는 부흥 집회를 넘어서서 사회에까지 그 영향력이 행사하는 부흥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시급한 것이 도덕적 부패인데 이것을 교회에서 갱신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부흥회는 새로운 각광과 주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계 선교의 사명을 분명히 자각하는 집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흥회의 결과로서 선교의 사명자를 부르고 그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향이 또한 역설되어야 합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의 주역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부흥사들의 메시지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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