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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부흥사와 무당(1)
2022년 08월 12일 (금) 13:51:21 김태복 목사 www.cry.or.kr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교회 민중은 언제나 살아 있다.
 
한국교회는 1950년대 10년 동안 지도급의 인사들이 사분오열 분열의 악취를 풍기는 동안도 교회 민중은 영(靈)적인 갈급을 느끼며 탈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목사가 장로를, 장로가 목사의 멱살을 잡고 ‘이 새끼, 저 새끼’하면서 추악한 싸움을 하는 동안, 견디다 못한 민중은 스스로 영적인 샘을 파기 시작했다.
 
독일의 신학자 코흐 박사는 그의 저서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에서 한국교회가 갖가지 수난과 분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성장하고 있는 이유는 위대한 지도자나 신학이나 선교전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민중의 기도 탓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가 한국교회에 와서 크게 경이를 느낀 것은 새벽기도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 미명에 모든 교회마다 수많은 신도가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거나 때로는 철야(徹夜)하면서 조국과 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신도들과, 또 묵묵히 보이지 않는 속에서 희생하는 신도들 탓에 한국교회는 부흥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성경의 교훈을 잘 지키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도행전 2장 46절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날마다! 언제 서방의 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길 것인가? 나는 세 번째 기도 시간에 형제들에게 물어보았다. ‘여러분들의 모임은 일주일에 몇 번 모이지요?’ 그들은 대답하기를 ‘매일 모이지요.’라고 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기도회를 갖는다니, 놀랄 일이다.>
(코흐:「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31페이지)
 
우리가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실에 그는 심히 놀라고 있다. 그렇다. 한국교회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있는 이유는 지도자들보다도 이 거룩한 무리 탓이었다. 지도자들이 ‘네가 높으니 내가 높으니’ 고함을 지르면서 서로 높은 자리에서 앉기 위해 멱살잡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교회 마루를 눈물로 적시고 있었다. 지도자들이 교파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전하고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적 양식의 공급 없이 무작정 견디어 낸다는 것은 지치게 만드는 일이다.
 
교회 민중들은 독초(毒草)만 먹이는 강단에 대해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영적인 생수에 대해서 심한 갈급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때를 맞추어 뜻있는 이들이 기도원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교인들은 진정 물을 만난 고기처럼 몰리어 갔다. 산마다 골짜기마다 기도원이 세워지고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히 폭발적이었다.
 
참다 참다못해 터진 저 간절한 호소들이 하늘을 향해 사무치고 있었다. ‘주여,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여기에서 죽겠나이다.’라고 부르짖으면서 죽기로써 금식하고 매여 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도원만 세웠다 하면 만원이었다. 능력이 있다 하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능력을 받은 이들은 천막을 치고 집회를 인도하며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안수하여 병도 고치고 예언도 했다. 진정 병들고 병든 한국교회는 새롭게 거듭날 것인가?
 
기도원과 기성교회
 
아뿔싸.
그러나 기도원이 크게 부흥되고 재물이 축적되면서 그 위력이 강해지자 부작용과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직 교회 민중을 살려 보자던 순수한 영적 운동이 많은 무리가 몰려들고 헌금이 넘치어 나자, 기도원측은 엉뚱한 꿈에 취하게 되었다. 기도원을 증축하거나 장식하기 시작했고, 토지를 사들이고 신도(信徒)를 기도회원이라는 명목으로 모집하여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것은 기성교회였다.
 
자기 교회에 내는 헌금액보다 기도원에 더 많이 내고, 교회 출석도 약해지고, 또 기도원 짓는 일에 땀 흘려 봉사하는 것을 보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강단에서 기도원에 대해 비판의 설교가 시작하고 기도원에 가는 것에 대해 금지령을 내렸다. 기도원측은 기도원대로 기성교회의 비리를 향해 공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기도원 측은 신도를 놓치지 않으려 가정까지 심방하기도 했다.
 
교회는 교회대로 예방책으로 자기 교회 기도원이나 수양관을 짓기 시작하고 부흥회를 일 년에 두 번씩으로 개최했다. 그러자 뜻있는 교회 민중은 본교회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 스스로도 기도원 측의 최초의 순수함과 달리 검은 마음을 먹기 시작함에 눈치채고 실망하던 차였다. 큰 난관에 봉착한 것은 기도원이었다.
 
각 교회마다 기도원을 가지게 되고 교회 민중의 호응이 약해지자 재정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짜낸 생각이 자기 천년성(千年城)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묘한 교리를 펴기 시작하고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심한 경우 자기가 재림한 구세주인양 공언하고 다니기도 했다.
 
탁명환 소장이 저술한 「한국의 신흥종교」를 읽다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들의 교리도 교리려니와 그런 단체에 휩싸여서 재산을 바치고 몸을 바치는 무리를 보면 민중의 우매에 대해 절망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성경을 저렇게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교리의 기발함에는 경탄마저 나오게 된다.
 
<감람나무, 14만 4천, 666, 생명수, 생수가름, 생수의 종, 보혈, 도성, 촛대, 줄사다리, 주재자, 칠성판, 일곱 별, 음녀, 추숫종.> 등등 성경의 난해한 구절이나 용어는 모조리 찾아서 묘하게 배합하여 그럴듯한 교리를 만들어 놓고 결국 자기가 재림주인 양 부각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이 종파의 교리를 저 종파에서, 저 종파의 조직을 이 종파에서 모방하고 있었다.
 
그 교리를 읽노라면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이런 허무맹랑한 교리를 철석같이 믿고 자기의 재산과 순결을 다 바치는 등, 마치 포주에 매인 창기처럼 묶여 지내는 무리가 허다함에 개탄하게 된다. 영으로 계신 주님보다는 육으로 계신 교주가 저들에게는 더 필요했던가? 금송아지라도 주어져야 믿을 수 있도록 그들은 샤머니즘에 그리 젖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사이비 종파를 시작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박태선 장로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은 자들로 병도 고치었고 이적도 베풀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돈과 금가락지가 쌓이고 여인들이 언제나 가까이서 하나님처럼 모시듯 따르자 마음이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어느 날인가, 돈과 여인, 인기의 붉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주님이 능력을 주실 때는 주의 일을 위해 주셨는데 그들은 자기 사리(私利)를 위해 남용하고 만 것이다.
 
그 순간부터 성령은 떠나시고 만 것이다.
성령을 훼방한 큰 죄를 졌기 때문이다(마12:31,32). 주 앞에 다시 뒹굴며 기도해 보지만 무반응. 40일 금식기도를 했어도 무반응이거나 악령을 받기 일쑤이다. 인파는 여전히 그의 이름을 듣고 구름 떼처럼 밀려온다. 능력을 잃은 그는 하늘의 능력 대신으로 스스로 만든 거룩을 가장한 음성이나 의상, 혹은 분위기로 위엄을 높이 세우고 교주(敎主)로 등극한 후에 교도(敎徒)들 앞에 나서서 축복과 저주로 제압하는 것이다. 교회 민중은 곧 깨닫고 하나 둘씩 떠나고, 오직 무지한 이들이나 금송아지를 바라는 이들만 남아 그의 노예가 되고 그의 아성(牙城)의 주민이 되는 것이다.
 
부흥사의 성시(盛市)
 
이러한 혼란한 와중에서 기성교회가 깊이 인식한 것은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경건, 능력, 선교, 봉사 등을 주안에서 함유해야 한다. 유난히 경건이나 율법이나 교리만 강조하면 바리새적인 교회가 되기가 쉽고, 능력만 유난히 강조하면 무질서한 신비주의 교회, 사회참여만 너무 내세워도 사회주의 냄새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가 쉬운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루 갖출 때 교회는 건전하게 성장되어 가는 것이다. 만약 그 중의 하나라도 부족 되면 영양 결핍증에 걸린 자처럼 본능적으로 영양원(營養源)을 향해 손을 뻗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교리나 율법만 강조함으로 도덕주의와 경건주의에만 빠지면 교인들은 이 부흥회, 저 기도원을 찾아다니며 능력에 대한 고갈을 보충하려고 애쓰게 된다. 교회가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등한히 하면 지식인이나 청년들은 이상한 방향에서 교회 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게 마련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뒤늦게야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 부흥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자기들과 대치해서 서로 돌을 던지던 능력자들을 강사로 과감히 모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외되었던 능력자들이 활기를 띄기 시작하고 기성교회를 향해 불만과 비협조를 갖던 위치에서 적극 협조하는 위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목사는 목사 나름대로, 교인은 교인 나름대로 부흥사들이 치고 받으며 분열하므로 입었던 깊은 상처를 감싸주면서 능력으로 교회의 첫사랑을 회복해 주기를 염원했다. 마침내 분렬증으로 병들었던 교회들 위로 성령의 역사가 임하기 시작했다. 교회 속에서도 병자를 위해 안수하고 방언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60년대 70년대 들어서면서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감사한 마음에 부흥사의 대우를 극진히 했고, 그 위력도 급상승했다. 사정없이 책망하든지, 강대상에서 욕지거리를 하든지 ‘할렐루야, 아멘’으로 받아 들였다. 부흥사들이 가는 곳마다 회개의 눈물이 터지고 부흥사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성령의 큰 역사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부흥사들이 떠나는 역(驛) 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울면서 전송했고, 그들은 두둑한 사례금과 선물을 한아름 안고 돌아오곤 했다.
 
과연, 부흥사의 전성기였다. 이때에 부흥사들은 옳게 먹이고 옳게 지도해야 했다. 그 교회의 목회자보다 부흥사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곧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기에 부흥사의 위력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또한 부흥사들은 전국교회를 순방하며 가르칠 수 있기에 그들의 책임은 중차대했다.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것, 한국교회가 그 방향과 진로 등이 바로 되는 것은 그들의 손에 좌우될 수가 있었다.
 
부흥사의 횡포
 
그러나 기도원 측이 귀한 중책과 사명을 놓치고 말았듯이, 부흥사들에게 주어진 큰 책임도 결국 허사로 돌아가는가? 부흥사가 모든 교회에서 자기의 위치가 확고해지고 모든 신자들이 부흥사를 하늘 모시듯이 하자 이들은 자고(自高) 해지기 시작했다. 목회자들이 참으로 거룩히 여기는 교회 강대상은 이들에 의해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쇼 무대가 되었다.
무당이 굿하는 마당처럼 되고 말았다.
 
닥치는 대로 야단치고 위협하고 심한 경우에는 욕하고, 세상 쇼 무대에서 하는 말들로 회중을 웃기고 유행가를 부르다가 춤추다가 자기 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했다. 교육을 시킨다는 의미인가? 제직들 출석까지 불러가며 교인들 앞에 일으켜 세우고 망신을 주다가 욕을 퍼부어대기 다반사요, 교회 어른이라는 장로들을 호명하여 어린아이 나무라듯 마음대로 훈계질을 했다. 그 권세가 자못 등등했다.
 
부흥사의 횡포였다.
이 횡포가 부흥사의 숫자가 많아 가고 경쟁이 심해 가자 더 가중된다. 남이 받은 체험도 내가 받은 것처럼 하고 일시적인 효과를 위해 카리스마적인 성자(聖者)도 되었다가, 중요한 은사를 자기만 소유하고 있는 양 신(神)처럼 되었다가 하다 보니 순전히 과장이요, 위협이요, 제 자랑으로 가득 찼다. 또한 자기 인기관리를 위해 기독교 계통의 신문에 자주 광고를 낸다. ‘불의 종’, ‘능력의 사자’라는 큰 표제 밑에 첫째 주는 부산 무슨 교회, 둘째 주는 순천 무슨 교회, 셋째 주는 대전, 넷째 주는 목포 등등 매주 계속해서 부흥회를 한다는 예정표를 예고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광고는 왜 필요한가?
이런 정도니 모셔 가라는 것일까?
인기관리(人氣管理). 심지어는 어느 부흥사는 자기 부대를 이끌고 다닌다.
어느 인기 가수가 자기 팬(fan)들을 이끌고 쇼 흥행을 다니듯이 박수부대를 동원하여 앞자리에 앉히어서 쉴 사이 없이 ‘아멘, 할렐루야’ 소리로 베스를 넣게 함으로 인위적인 무드를 돋우게 한다. 그러자니 본 교회 교인들은 자연히 위축되고 소외된다.
제 혼자 흥겨워 입담을 늘어놓는다. 자기들끼리의 굿을 벌린다.
설교도 성경말씀인지, 자기 말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본문을 적당히 해석하고는 순전히 자기 체험, 자기 교회 자랑으로 두세 시간으로 채운다.
 
<필자가 신문광고 혹은 벽보를 통해서 조사한 부흥사의 천태만상은 가히 싸구려 약장수의 선전과 같다. 하나님이 인정도 하지 않는 자칭 불의 사자, 말씀의 종, 신유의 종, 능력의 종, 예언의 종,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종 등등 화려한 미사여구로 자기의 가장 잘된 사진과 함께 과장선전을 하고 있다. 우리 교계에는 자칭, 타칭 부흥사가 100여명이 있다.
물론 부흥사를 전문 직업으로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중 약 25명은 문제가 있는 사이비 흥행사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필자가 가지고 있다. 여신도와 추문, 신도들로부터 금전 착취, 최면술을 성령으로 가장하여 돈을 벌어들이어 축재를 하는 경우 등이 그 대표적인 비행이다. 또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하고 있으며 과장된 이야기를 하고 상스런 욕설 섞인 설교를 하고 안수와 안찰로 불미스러운 일을 유발한다. 우리 교계가 직면하고 있는 큰 암적인 문제이다.>
(탁명환: 「기성교회, 그 자화상의 고발」복된말씀誌 74년 6월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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