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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장로와 맘몬주의 자들
2022년 07월 22일 (금) 10:00:06 김태복 목사 www.cry.or.kr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딤전 3:2-3)
 
목사와 장로의 불신
 
한국교회의 큰 병중에 하나는 가장 가까워야 할 목사와 장로 사이에 불신(不信)이다. 목사들의 모임에 가보면 대부분의 불만이 장로들에 대해서이다. ‘장로들은 너무 황금만능주의자들이다. 신앙도 없고 신학에도 무지한 자들이 교회 교육까지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고 주장질 한다.’
 
장로들의 모임에 가보면 교회에서는 목사를 높이 받드는 듯 하던 장로들도 목사에 대한 불편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 ‘목사들은 너무나 독단적이다. 완고하다. 대접만 받으려 든다. 경제에 대해서 지식도 없으면서 재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장로를 무시한다.’
 
대부분의 지교회 자체의 분열은 당회(堂會)에서 생기어진다. 목사나 장로의 서로의 비난은 불신을 가져다주고 그것은 마침내 암투(暗鬪)를 일으킨다. 교인들이 의식할 정도로 암투의 강도가 깊어 간다. 목사는 강단에서 설교를 빙자하여 장로를 내리친다. 장로는 재정권을 쥐고 괴롭힌다.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를 갈아치울 궁리에 골몰하고 목사는 고집 속에 버틴다. 교회의 혼란은 막바지에 이른다. 파벌이 생기고 조직 점검이 시작되고 순수한 신앙의 무리를 향해 더러운 포섭의 손길들을 멈추지 않는다.
 
교회가 혼탁 속에 빠지기 시작하면 평소에 교회 참석과 봉사에 사뭇 태만하고 비평적이던 자들이 왜 그리 날뛰기 시작하는지 기가 막힐 정도가 된다. 회의 석상에서 고함을 질러 대고 성경을 들추어 말하며 공격의 근거로 삼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서명 날인을 받아 가며 교회 분열을 휘저어 논다. 마치 자기의 신앙이 그동안 게을렀던 것이 모두 목사 탓이었던 듯이 말이다.
목사나 장로나 공연히 날뛰는 이러한 자들이나 독주(毒酒) 마신 행인 꼴이 되어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하고 서로의 허물과 과거, 심지어는 서로의 사생활(私生活)까지 들춰 교회 앞에 폭로하기도 하고 저속한 내용으로 가득한 유인물을 돌리는 등, 소요를 일으킴이 화원(花園)을 어지럽히는 고삐 놓인 황소 같다.
 
마침내 목사와 장로는 서로가 서로를 찔러 댄 결과 허물의 만신창이가 되어 당회는 지도력을 상실하게 된다. 설교를 해도 대부분이 졸기 일쑤이다. 목사가 열을 올리면서 설교를 하면 졸면서 ‘또 장로를 욕한다.’고 생각한다. 장로는 ‘얼마 드릴 테니, 교회의 덕을 위해서 물러서십시오.‘라면서 퇴직금이나 위로금을 가지고 흥정한다. 궁지에 몰린 목사는 더 많이 내어놓으라고 버티다가 듬뿍 받은 후에야 물러난다.
 
격렬한 싸움이 끝난 교회는 엉킨 감정들의 많은 쓰레기가 널려 있으나 일단은 안정을 찾게 된다. 허물의 때로 가득 찼던 목욕통에 더러움이 가라앉고, 일시 맑은 교회로 변화된 듯 보인다. 다른 목사를 청빙함으로 교회는 몇 년간은 새 열심에 불타기 시작한다. 회개의 눈물이 상처를 어루만지듯, 찬송의 사무침이 소원(疏遠)했던 주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듯, 열심 있는 봉사가 교회의 무너진 벽을 쌓아 가듯 교회는 활기가 넘치어 난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회칠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어느 날엔가 다시 교회는 또다시 혼란의 기운이 새어들기 시작한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인들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설교를 잘하면 심방에 게으를 수도 있고, 인정이 많으면 매사의 일처리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므로 무질서한 행정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매사에 예의가 있고 정직한 면이 있는 분은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오랫동안 불만 병을 앓아 온 교회의 지도부는 새로 노출되는 목회자의 그 허물을 참아 내지 못하고 불만병이 재발되기 마련인 것이다. 다시 목사와 장로가 암투가 시작되고 가라앉았던 오물들이 더 크게 악취를 풍기며 소요를 일으킨다. 이러한 악순환은 멈추지 않고 반복됨으로 교회의 병은 깊어 가는 것이다.
 
왜인가?
내면에 은폐한 오물을 토하여 버리지 않고 회칠만으로 위장하기 때문이다. 중심으로 토하여 내는 회개 없이는 그 교회의 병을 결코 치유할 수 없다. 넋두리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제 혼자 서러워서 지껄이는 푸념에 불과할 뿐이다.
가슴을 찢어야 한다.
내 교만, 내 토색한 것을 하나님 앞에 토하여 자복(自服)하여야 하며, 또한 괴롭힌 형제 앞에서 사배의 갚음이 있어야 진정한 회개로 인정되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 교인과 교인 간에 서로 참담한 말을 퍼부어 대던 저 추악한 입, 저 추악한 손을 서로 붙잡고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울면서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5)
 
'누가 높으냐?'의 끝없는 갈등
 
교회의 어려움은 당회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주인이니’ ‘내가 높으니’라는 데서 목사와 장로 사이에 틈이 생기어지고 그 틈바구니를 통해서 사탄의 세력이 침투하는 것이다. ‘나는 주(主)의 종인데 감히 나를 무시해.’라면서 목사는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자기에게 쩔쩔매기를 바란다. ‘내가 이 교회를 설립한 장로인데, 내가 이 교회의 재정의 반을 담당하는 데 나를 따돌리고 제멋대로 운영해.’ ‘내가 저 목사가 무명(無名) 시절 시골에서 데려다가 저만큼 크게 만들었더니 이제는 나를 무시해.’라면서 장로는 목사가 자기 손에 쥐어 있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누가 높으냐.
주님 외에는 높일 자 없다.
우리는 오직 섬기는 자여야 한다.
‘내노라.’고 스스로 높이는 자는 고라의 무리일 뿐이다.
도대체 높다 낮다 싸울 이유가 어디 있는가?
목사와 장로의 일은 확연히 구분되어 있지 않는가?
 
목사는 항상 주님 앞에 엎드리어 그 음성을 들으며 자기 양들의 영(靈)을 주 앞에 안고 나가 중보(仲保)의 기도를 드리는 자이며, 양떼에게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 힘쓰는 직분이라면, 장로는 세상 속에서 정치도 하고 교육도 하고 사업도 하여 돈을 벌면서 평신도(平信徒)의 대표로서 이 땅에서 사회정의(社會正義)를 구현하는 것이 주된 임무가 아닌가? 으뜸이라면 주의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주도자(主導者)라 함이지, 섬김을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목사가 교회 밖인 사회에 나가서까지 평신도들의 분야까지 좌지우지하려거나 상좌(上座)에 앉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소치이며, 장로가 사회의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교회 속에서 목회 일에 마져 주도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성격으로 말하면, 목사는 학자(學者)적인 곧음이 있는 정적(靜的)이고 명상적인 자로 골방과 서재에서 인간의 영적인 고뇌와 생(生)의 의미, 하나님과 역사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애쓰는 자여야 한다.
 
반면, 장로는 사회갱신(社會更新)을 위해 정치도 하고 기업도 일으키고 사회운동도 하는 자로, 때로는 논쟁을 쉬지 않으면서 혹은 타협도 하면서 동적으로 부단히 움직이는 큰 그릇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세가 있다면 아론이 있고,
사울이 있다면 사무엘이 있었다.
다윗이 있다면 나단이 있고,
조만식이 있다면 주기철이 있었다.
이들은 분명히 그 분야가 달랐다.
 
전자(前者)는 인간을 조직하며 법을 세우며 인간과 함께 울고 인간을 위해 매 맞는 자였다. 때로는 분연히 일어서서 지팡이를 높이 들고 앞장서서 광야의 열사(熱沙)를 향해 나가던 자였다. 그에 비해 후자(後者)는 언제나 주의 전(殿)에 살며 주와 대면하고 그의 음성을 듣고 인간들에게 대신 전하며 격려하거나 경고하는 자요, 저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눈물로 중보기도를 드리는 자들이었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목사는 강단에 서며, 장로는 인간 속에서 인간을 이끌고 회중 가운데 설 때, 이 만남의 장소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뜨겁고 거룩한 장소로 화해지는 것이다.
 
학교로 말하면 이사장(理事長)이 장로요, 교장(校長)이 목사라고 할 수 있다. 학교의 재정과 행정은 이사장이 책임자가 된다면, 교육의 대부분 책임은 교장에게 있다. 교장은 이사회에서 초빙된 자로, 그 학교의 기본정신과 장기계획을 중시하면서 그 범위 내에서 최대한 교육의 권한이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장이 이사회의 허락 없이 학교의 전통과 이념, 사업계획과 재정을 수정이나 가감(加減)하는 것은 월권이라 할 수 있다. 장로들은 목사를 초빙해서 교회의 교육을 의뢰했다면 성경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 사사건건 간섭해서도 결코 안 된다. 또한 재정적인 도움을 적극적으로 하도록 할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때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전통이 있는데 교인들이 흔히 하는 소리가 ‘목사님은 오직 목회하는 일에만 전력하시고 재정 문제는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우리에게 맡기십시오.’라고 한다. 그러한 말을 하는 분들의 생각에는 교회의 성장은 설교만 잘하고 열심히 심방만 잘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교회 성장에는 반드시 재정의 뒷받침이 없이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므로 목회자로 하여금 재정적인 일에는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는 목회자가 추진하려는 목회업무를 위해서 재정으로 적극 뒷받침할 수 있을 때 만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많은 목회자들은 장로들의 상당수가 재정권을 틀어쥐고 목사를 견제하고 있음으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목사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교회의 장기계획을 제멋대로 수정하려 들거나 재정도 너무 깊이 간섭하고 교회정치마저 독점하려고 하는 것은 월권에 속한다. 그런 목사들로 인해서 교회는 목회자가 바뀔 때마다 장기계획이 수정되고 조직과 재정이 흔들려 방향과 목적을 잃은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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