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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현명한 임금을 만나야 억울한 죽음이 없다"
2022년 06월 09일 (목) 13:22:04 이승철 장로 www.cry.or.kr
 
 
"이 양반도 어리석은 임금을 만나 억울하게 죽은 분이로구먼, 선조임금이나 인조임금이나 모두 무능하고 편협한 인물들이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질고 좋은 임금을 만나야지, 그렇지 못하면 그저 힘없는 백성들과 좋은 사람들만 죽고 다친다니까, 요즘 돌아가는 정치 좀 보라고?"
 
정문부 장군을 모신 충덕사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을 읽고 돌아선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들 둘이 혀를 끌끌 차며 멀어져간다. 그들은 사당이나 묘역에는 큰 관심이 없는지 휘적휘적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나도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들른 곳이어서 정문부 장군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던지라 안내문 내용을 읽어보기로 했다.
 
지나는 길에 우연하게 들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사당과 묘역
 
안내문은 나지막한 구릉 아래 자락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충덕사와 관리인 주택이 있는 중간 부분 홍살문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임금을 거쳐 광해군과 인조임금 때의 인물이었다.
 
 
 
 
 
 
정문부는 해주정씨로 1565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1588년(선조 21)에 생원이 되었고 문과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 사헌부와 승정원 등에서 문관으로 봉직하다가, 선조 24년에 함경도 북평사라는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재직하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철저하게 준비하여 침략한 왜군에 비해 준비가 없었던 조선군은 지리멸렬하여 북쪽으로 밀리기만 했다. 드디어 함경도가 카토오 키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자, 일부 도민이 반역하여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고관들을 왜군에게 잡아 넘기는 일이 발생했다.
 
같은 시기 압록강 너머에서 살고 있던 여진족이 강을 건너 남침하는 등 함경도가 안팎 3면의 난리에 휩싸이고 말았다. 정문부는 경성에서 이붕수 등과 의병을 일으켜 내부에서 반역한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 등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밖으로 경성전투를 시작으로 창평, 쌍포, 단천, 길주에서 왜적을 크게 쳐 물리치고 여진족을 진무하는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그는 당쟁을 피하여 길주 목사 등 지방수령으로 돌다가 병조참판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왔다.
 
현명하지 못한 무능한 임금과 당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농포 정문부
 
그러나 그는 당쟁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의정부 송산에 살면서 농포집 5권을 저술하여 남겼다. 그러나 무능하고 분별력이 없었던 임금과 정치는 그를 평안히 살게 놔두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결국 박홍구 역모사건에 무고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났다.
 
그러나 그가 지방관인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지은 초희왕시가 인조를 빗댄 것이라 하여 다시 모진 고문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인조 2년인 1624년 그의 나이 60세였다.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켜 목숨 걸고 싸워 나라를 지킨 충신이 어이없는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정문부는 숙종임금 때 무죄로 복권되어 좌찬성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충의공 시호와 부조전이 내려졌다. 그리고 함경도 경성에 있는 창렬사 등 네 곳 사당에서 제사하였다. 남한에는 진주 충의사와 이곳 충덕사가 있다.
 
당시 함경도민들은 그의 공로를 기려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그러나 러일전쟁 당시 일제가 빼앗아가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북한의 요청으로 본래 소재지인 북한으로 인도되었다. 북관대첩비는 김책시 림명리에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남한에는 경복궁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이곳에 복제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금 전 두 사람이 안내문을 읽은 후 혀를 끌끌 차고 간 것은 무능하고 분별력 없는 임금 때문에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 사당 정문인 '복지문'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담 너머로 카메라를 들어 올려 사진을 찍고 돌아서자 관리인인 듯한 중년 남자가 힐끗 돌아보고 사라진다.
 
 
 
사당 관리인 주택으로 보이는 넓은 한옥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조금 전에 흘끗 바라보고 사라진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고 뒤꼍의 묘역으로 향했다. 묘역 입구는 따로 있었다.
 
묘역 안으로 들어서자 왼편에 신도비각이 세워져 있었지만 안이 어두컴컴하여 글씨를 읽기가 매우 어려웠다, 묘지로 오르는 계단 오른편에는 복제된 북관대첩비와 신도비에 대한 안내문이 새겨진 석비 두개가 그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정장군의 신도비는 1665년(현종 6)에 세웠던 것을 1861년(철종 12)에 정문부의 9대손인 정인원이 추록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신도비에는 임진왜란 때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왜적을 무찌른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안내 석비에 새겨져 있었다.
 
역사를 보는 시각은 나그네나 노인들이나 비슷했다
 
계단을 모두 올라가자 상당이 널따란 묘역이 나타난다. 묘역에 있는 그의 무덤은 부인 고령 신씨와 합장한 분묘였다. 무덤 앞에는 묘비 1개와 망주석이 서있고 묘제에 특별한 특징은 없었다.
 
묘역에서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사당과 관리인 주택이 아늑하고 고즈넉한 풍경이다. 조금 전에 올라온 계단 아래쪽으로는 조금 불룩한 둔덕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둔덕에는 붉고 우람한 한솔들이 자라고 있어 운치 있는 모습이었다.
 
 
 
그 소나무 밑에 몇 사람의 노인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노인들에게 다가가 정문부 장군이 어떤 분인지 아시느냐고 물으니 안내문을 읽어보아서 대충 알고 있다고 한다.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당파싸움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 같아요."
 
노인들도 조금 전에 안내문을 읽고 혀를 끌끌 차면서 지나간 두 사람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인들이 쉬고 있는 아래 쪽 담장 밖에는 마침 꽃을 활짝 피운 커다란 자귀나무 몇 그루가 그윽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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