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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시는 분”
2021년 12월 04일 (토) 09:46:05 양의섭 목사 www.cry.or.kr

(누가복음 9:28-43a) 
 
1.
어느 교회 사랑방에서 교우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 하셨는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어느 것이 가이사의 것, 곧 자기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한 집사님이 그럽니다. “저는 바닥에 줄을 하나 긋고 돈을 공중에 던져 저쪽에 떨어지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것, 이쪽으로 떨어지는 것은 내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장로님은 그러십니다. “아, 그렇군요. 저는 바닥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작은 원을 하나 그려놓고, 돈을 공중에 던져서 원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다 드리고 있습니다.”
 
목사님께 시선이 쏠리자 목사님은 그러셨습니다.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돈을 하늘로 던지며 그럽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것은 받으시고, 제 것은 도로 돌려주세요.’”
 
유머입니다만 대부분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는 위에 있고, 우리는 아래에 있다고 여깁니다. 아마도 이 말의 뜻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늘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지극히 좋은 곳이란 뜻일 것입니다.
 
이토록 좋은 곳, 하나님 나라를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2.
이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산 위의 장면과 산 아래의 장면이 있습니다. 산 위에서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장면이 벌어지고 있고, 그 시간에 산 아래에서는 귀신들린 아이를 놓고 인간들이 씨름하는 곤고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눅9:20절에서 드디어 제자들은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예수님은 이들을 가르치느라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런 성숙한 고백이 나오자,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감지하셨습니다.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 지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막연히 생각만 해 오던 그 십자가, 이제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음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결단을 하기 위해 제자 셋만 데리고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늘 그러했듯이 피곤하여 잠이 들었고, 주님 혼자 열심히 기도하시다가 본래의 주님 모습인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셨습니다. 그리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더니 주님 곁에 서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예수님을 격려하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여기서 별세(別世)라는 단어가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밖으로 나간다는 뜻의 헬라어 엑소더스(exodus)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단어가 아닌가요? 모세가 애굽에서 바로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어 해방시킨 것을 엑소더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영어 성경에선 엑소더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엑소더스입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엑소더스 하실 것을 말할새”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 아래서 죄의 종으로 신음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끌어내는, 죄에서, 사망에서 탈출시키는, 하늘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엑소더스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믿는 이들은 사탄의 권세에서,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하늘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모세의 인도에 따라 출애굽한 것처럼 주님의 인도에 따라 세상을 벗어나 가나안, 하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우린 모두 예수님을 따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엑소더스한 성도임을 믿습니다.
 
이것을 영광중에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때의 자리는 영광스러운 하늘의 회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래 하늘의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토록 영광스러운 사건이 산 위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 바로 앞 절, 27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즉 이어지는 변화산상의 체험이 곧 하나님의 나라 체험이란 뜻입니다. 실로 산 위에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
그러면 산 밑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요? 한 사람이 외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눅9:1절에 보면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고칠 수 없었을까요? 이에 대해 서로 왈가왈부했을 것입니다. 사이비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설전을 벌이는 동안 아이의 아버지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외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 아들이 귀신 들려 제 몸을 마구 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서히 파멸되어 가는 아들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그 아버지의 심정,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문제의 원인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상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 지구촌의 문제들, 이 시끄러운 일들, 전쟁들, 싸움들, ... 원인을 몰라서 해결을 못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원인을 알면서도 해결을 못합니다. 고집과 교만과 자존심 때문에 문제는 더 꼬입니다. 어찌하면 좋은가요? 능력 있는 사람들이 각 층에서 노력하고 있음에도 이 미친 세상의 문제들은 갈수록 더해질 뿐입니다.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만 묘안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도덕, 종교, ... 어느 한구석 문제없는 곳이 없습니다. 인간성이 타락하고 더욱 악해졌기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원인을 알면서도 점점 세상은 더 미쳐 갈 뿐입니다. 폭력과 범죄, 죄악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인간은 스스로 제 몸을 상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떠들어도, 명상이니 참선이니 하며 인간적 노력은 다 하는데도 평화는 점점 멀어만 갑니다.
 
이때 하늘 영광의 은혜를 체험한 3제자들은 무엇하고 있는가요? 유일하게 이 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 놀라운 하늘 체험, 그 엄청난 에너지 하나님 나라 체험을 한 이들은 뭣하고 있는가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고 ...” 무슨 뜻인가요? ‘주님, 우리 골치 아픈 세상으로 내려가지 맙시다.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끼리 해결하도록 내버려두고, 우린 여기에 아예 눌러 삽시다. 저들이 치구받구 싸우든 상관말고 우리끼리 거룩하고, 정결하게 여기서 삽시다.’
 
그러자 예수님의 반응은? 거절하셨습니다! 속세를 떠난 그 변모된 영광의 상태에서 계속 계실 수 있었으나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곤 다시 초라한 인간의 몸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곤 다시금 산 밑으로, 그 허덕이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왜?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자 사탄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파멸로 달려가던 문제는 예수님 앞에서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내려오신 분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 어찌 산 위의 영화, 아무리 좋다고 한들 그곳에 머무르시겠는가요? 십자가의 고통이 현실로 눈앞에 다가오심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내려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이, 자기 사람들이 그곳에 있기에 예수님은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늘의 좋은 보좌를 버리고 이 낮고 천한 곳으로 주저 없이 내려오셨습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4.
오늘부터 전 세계 교회는 대림절로 지킵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기꺼이 이곳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기리며 또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요?
 
우리도 그 분의 사랑을 갖고 내려갑시다. 우리는 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하고 찬송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뜻과 소망은 궁극적으로 저 높은 곳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관심은, 이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오신 예수님처럼, 저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산 위에 올라가야 할 목적, 저 높은 곳을 향해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산 아래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저 낮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사모합니다. 큰 은혜를 받아서 뭘 하려고 그러는가요?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 위해서입니다. 전에는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하기 힘들었는데,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받고 보니 주저 없이 밑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내려가는 사랑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물질, 건강, 달란트, ... 그 좋은 것들로 예수님의 이름과 사랑으로 나보다 낮은 곳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찾아가 봅시다. 그리하여 대림절과 성탄절을 통해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이들을 향해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교회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강수를 이루어 나가도록 합시다.
 
우리들의 내려가는 사랑으로 우리들의 주위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주의 평화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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