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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강 16편 흔들리지 않는 삶
2021년 11월 25일 (목) 11:57:42 조무웅 강도사 www.cry.or.kr
오늘 시편 16편은 지금까지 읽어왔던 시편보다 약간 더 길어서 두 가지 번역본으로 읽겠습니다. 개정 개역판과 새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두 분이 낭독을 정말 잘해 주셔서 듣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되네요
 
낭독의 전통이 되 살아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고요 늘 들을 때마다 생각을 합니다.
오늘 시는 1절을 제외하고는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기원이 담겨 있는데 그 다음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깊은 신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신뢰의 시편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1절의 기원을 보면 하나님 나를 진켜주소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이 처해 있는 상황이 만만치 않게 어려운 상황임을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데 이후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어렵다는 이야기 나오지 않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대표적인 신뢰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님께로 어떻게 피할 수 있지요.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교회 안 가면 기도 안 되나
 
옛날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었지요 사실 여기에서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하는 이야기는 무고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보복을 당할까봐 도피성에 피하도록 되어 있어요.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은 함부로 죽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나의 도피성이 되어 주십시오 온 세상이 나를 적대하는 사람으로 외워쌓여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도피성이 되시면 내가 안심이 되겠습니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온 세상이 짠 물로 전부 뒤 덮여 있는 세상에서 어딘 가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난 곳이 있다고 한다면 뱃사람들은 그곳을 얼마나 사모할까요 마실 물이 없을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를 시인은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고백하는 것이
2절에 보니까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이렇게 말합니다. 주라고 하는 말이 겹쳐서 설명되고 있지요. 주님은 나의 주님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라고 하는 말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여러분 주는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지요. 주는 지배하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내 뜻과 내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주님이아고 이야기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내 뜻이 우선입니까? 그분의 뜻이 우선입니까? 그 분의 뜻이 더 우선이지요. 그러니까 철저히 그분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그런 의미가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을 겪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시련도 기꺼이 제가 받아 드리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전폭적인 맡김이어요.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지요 똑 같은 말에 나오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2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고 말했지요.
여러분 국어 실력을 한번 테스트 해 볼께요. 자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띄어 썼어요. 여기에 개역 성경에는 분명히 띄어 썼지요
 
그런데 주밖에는 이렇게 쓰면 어느 게 맞는 것이지요 띄어 써야 합니까? 붙여 써야 합니까? 성경에 나오니까 당연히 띄어 써야 하는 것 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국어 시간은 아니지만 띄어쓸 때 밖은 명사이지요 품사로 보면 주님 밖이니까 외야 이것은
 
이것은 붙여 쓰게 되면 이것 조사이지요 밖에는 다만 그것 뿐 하는 한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온리야 영어로 이야기 하면 주님 밖에는 우리 개역 성경은 주님 밖에는 띄어 쓰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두 의미는 서로 상통하고 있지요. 주님 떠난 자에게는 나에게 복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주님 밖에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같은 이야기인데 서로 다르지요.
 
성서에 원어에는 주 밖에는 언제나 조사로 떠 올리기 쉽지요. 그 의미가 상충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새 번역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주밖에는 보다는 주님을 떠나서는 이렇게 말하는 게 본래의 번역이 합당한가 생각이 들어요
 
주님을 떠나서는 나의 행복이 없습니다. 문법적인 이야기이지만 한 마디 우리들이 해 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복이라고 하는 개념이 나오고 있는 데 한국 기독교인들이 복 하면 떠 올리는 것들이 주로 어떤 것들이 있지요
 
돈 많이 버는 것 장수 큰 집 사는 것 건강 출세 명예 그런 것들이지요 그러니까 주님 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하고 이야기 하면 그것 다 없어도 되는 것이어요. 그렇지는 안해요 다 불필요한 것이 아니야 주님만 잘 믿으면 아닙니다. 단호하게들 이야기 하네요
 
여기서 우리가 복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지만 행복이라고 앞에 행자를 더 붙이면 주님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미가 달라지지요 원문에 번역을 하면 행복에 가깝게 번역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밖에는 주님을 떠나서는 나의 행복이 없습니다. 내가 가족들과 단란하게 사는 것 또 이야기 한 대로 집도 좀 가지고 차도 가지고 하는 이것조차도 내가 주님을 떠나서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여요
 
이것이 다 불필요해 그 이야기가 아니고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졌다 해도 내가 주님을 떠나 산다고 한다면 이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뜻이지요 그런 이야기로 우리들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참 느닷없이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라고 이야기를 하다가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하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조금 느닷없지 않아요. 많이 느닷 없지요.
 
왜 갑자기 이 시인이 이렇게 느닷없는 이야기를 할까 그렇게 이야기 해 볼 수 있겠는데 공동 번역 성서를 읽다보면 거기가 전혀 다르게 번역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 있는 거룩하다는 신들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굉장히 강하게 정 반대되는 개역성경에는 3절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존귀함이 그들에게 있도다 말하지요.
 
공동 번역은 이 땅에 있는 거룩하다는 신들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여기에는 성도들을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는 다른 신들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다른 것을 읽은 것 같아요 사실 왜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요.
 
그러나 정답은 무엇이냐 하면 두 번역본이 어떤 텍스트를 근거로 해서 번역을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 것입니다.
 
공동 번역은 마소라 본문이라고 하는 것을 번역한 것인데 거기에서는 땅에 있는 성도들 그 단어가 그렇게 나오지 않고 거짓 신들 마소라 본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텍스트 속에서는 그것을 번역에 원본으로 삼은 공동 번역 성경은 그렇게 번역을 했고 다른 번역들은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자들이 그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역본을 놓고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이 당황할까봐 거기에 대해서 잠시동안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 여하튼 개역 성경 번역을 가지고 공부하니까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하고 말하고 있지요
 
여러분 여기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시드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하시드가 거룩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 사람들이 본래 거룩한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였기 때문에 거룩할까요. 후자이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은 땅에 있는 자들이 거룩하다고 이야기 할 때 그의 있음 그 자체가 거룩하다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이 그들을 존귀하게 하셨기에 거룩하다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내가 대단한 존재야 그런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나같은 자에게 그런 사랑을 성도는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지요
 
그래서 오늘 시인은 이야기 합니다. 3절 그들은 존귀한 자들이고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을 가진 그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다른 신들을 숭상하는 자들과 사귀지 않겠다고 하는 단호하고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는데
 
4절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공부할 때에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마는 다른 신들 여러분 원래 우리 유일신론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지만 시편이 형성될 그 때나 구약성서가 형성될 때는 많은 민족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지요
 
그래서 다른 신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에서 보다싶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있게 말지니라 그 이야기 기억나지요 나는 야훼 하나님이셨지요. 야훼의 하나님 그러면 야훼와 다른 신들이 어떻게 달랐지요.
 
간단히 이야기 하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다른 신들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불평등한 세상 거기에서 다른 신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상층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어요
 
여기에는 누가 있었어요. 왕 귀족 사제 계층들 이들이고 다른 신들은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누구에게 깊은 관심이 있어요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상층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하층부의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을 닮아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 이야기 했지요 괴로움이 더할 것이다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시인이 읽고 있는 것이지요 야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힘이 있고 스스로 힘있고 위대하다고 사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된다고 전복된다고 내다 보는 것이지요
 
그는 시인은 4절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전제라고 하는 게 무엇일까요 전제라고 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전자를 쓰고 있는데 옛날 에는 옛날 개역 성경에서는 신약에서 그것을 관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면 나를 관제로 바칠지라도 여러분들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드리겠다. 관은 물댈 관자를 쓰고 있는 데 피 흘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정말 자기가 사랑하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여러분들을 위해서 내가 제물로 내 피를 다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들이 구원 받았으면 좋겠습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뜨거운 사랑의 고백인데 옛날에 다른 신들이야 말로 결국 무엇 하는 신들이냐 하면 바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고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야 어떻게 보면 그렇지요
 
여러분 금잔 미주는 천인혈이요 이런 것 어디서 들어 보았지요. 그렇지요 그것 누구여요 여러분 이몽룡이 변사또 생일날 가 가지고 지은 시에 나오는 것이어요. 금잔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그 마시는 술을 많은 백성의 피요 하고 이야기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피의 전제를 바쳤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이들을 희생 시킨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피의 전제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나는 삶이 아무리 곤고하고 힘들어도 절대로 그런 피의 전제를 거짓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그 삶을 나는 결코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단호한 의지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고백이지요. 내 입술로 그 이름조차 부르지 않겠다 그래서 거짓 신들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옛날 사람들은 신들에게 각각의 신들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신에게도 잘해야 되고 저 신에게도 잘해야 되고 그래서 신들의 이름을 많이 불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이름 절대로 부르지 않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종교 혼합주의 거절하는 것이어요.
 
나는 한분만으로 만족해 야훼 한분만으로 만족해 다른 신들 이름조차 부르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어 봤어요 주일무적이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유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주일무적이라는 말 내 인생의 하나의 핵심 주를 정하면 무적 적자는 울직일 적자인데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신앙이란 무엇이냐 주일 무적하는 것이야 야훼 하나님을 내 인생의 핵심으로 탁 잡았으면 흔들리지 않고 다른 것들이 내게 유익을 준다고 유혹한다 할지라도 그 이름조차 멀리하는 것 바로 그렇게 될 때 때때로 힘겹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러분 내가 잘 쓰는 언어로 무엇이 생기는 지 아십니까? 영혼에 근육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은 주일무적하는 것이어요 그렇지요 야훼 하나님 이 분을 믿기 때문에 손해 볼 수도 있어요 세상에서 정직하게 바르게 살려고 하니까 어려운 일 겪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내가 쉽게 돌아서지 않는 것이지요.
 
그 때 그 어려움을 견디어 냈을 때 내 속에 무엇이지요 영혼의 근육지요 그러니까 시련을 믿음 때문에 시련을 견디어 낼수록 우리 속에 인내가 생기고 영혼의 근육이 생겨요 그래서 어지간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충만함을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자 5절에 시인이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에 소득이시지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나의 산업 나의 잔의 소득 나의 분깃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똑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을 든든하게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산업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잔의 소득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은 나의 모든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대요. 그리고 나서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6절에 이렇게 이야기 해요 “ 내게 줄로 제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요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고 말하는 데
 
여러분 줄로 제어졌다고 하니까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여러분 어떤 이야기냐 하면 여호수아를 통해서 요단강 동편에서 서편으로 출애굽 공동체가 들어가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여호수아가 정복 전쟁을 마친 다음에 땅을 배분할 때 지파별로 지파대로 땅을 나누어준 그 사건을 연상시킨 대목입니다. 줄로 제어준 구역 그런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하고 연결 시켜 보면 금방 우리들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 구역이 아름다운 곳에 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름다운 곳 하면 어떤 곳이 떠 올라요. 꽃들이 피어나고 포도원이 아름답게 가꾸어 져 있고 풍요로운 곳 여러분 이스라엘에 가 보니까 비옥한 땅 별로 없고 대게 척박한 땅입니다.
 
갈릴리나 지중해 해안은 빼 놓고는 그러니까 그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살았나 할 정도로 힘겨운 일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아름다운 곳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때에 아름다움이라는 곳은 유형적인 아름다움이 아니어요.
 
무엇임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그곳이 주께서 내게 살라하신 자리이기에 아름다운 것이어요. 척박할 수도 있어요 그곳이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아름다움은 이런 곳입니다 정해놓고 행복의 조건 이것 갖추어져야 하고 행복해 생각하니까 늘 내 행복이 내게 유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어서 언제나 충족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행복은 언제나 미래형이지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해요 그런데 이 시인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살라하신 그 자리 그 자리는 바로 아름다운 삶의 자리입니다. 왜 그곳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이지요.
 
이런 신앙 고백이 내게 있을까요 내게 주어져 있는 정말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있는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혹시 이런 말 들어 봤어요 대안 동경 대안 동경 대안동경이라는 것이 저 건너편을 동경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이런 것이지요 도시에서 살다가 너무 힘들어 도시에 살기에 모처럼 여행을 떠났습니다. 창밖으로 가만히 보니까 저기 시골 사람들이 유유자적하면서 일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아이휴 나도 다 때려 치고 농사나 지을까
 
그러니까 그런데 또 이 농촌에 있는 분들이 관광버스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팔자가 좋아서 놀러만 다닐까 그럴 수 있지요 그러니까 건너편 세계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어요. 언제나 이게 대안 동경이어요.
 
사람은 대안동경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어떤 이야기냐 하면 지금의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저쪽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지지요
 
우리도 대안 동경에 시달릴 사람들이지요 년봉이 1억이 넘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지요 아파트 50평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니까 여러분 제가 목회를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저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여 그런 사람도 만나서 내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괴로움 없는 사람 없고 인간은 괴로움을 타고 난 것 같아
 
그래서 여러분 나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수생은 수난이다 목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어려움을 받는 것이야 이미 그래서 여러분 어려워 어려워하지 말고 본디 인생이 어렵지 받아 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 때때로 대안동경이 있어서 우리의 삶을 활기차게 만들기도 하지만 대안동경이 오늘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도록 할 때가 더 많지요
 
그래서 이 고백이 필요해요 주께서 줄로 제어주신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으며 그렇지요.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아름답다 이 속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 뒤에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나를 교훈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훈계를 받으며 산다고 것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의 멘토로 산다고 하는 것 이것 얼마나 든든한 삶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밤마다 지금 무엇이라고 하지요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한다 하고 말합니다. 여기 양심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신장입니다. 신장 심장이 아니라 신장이어요. 그러니까 신장은 무엇이지요 마음속에 깊은 자기의 정감이나 정서가 깃드는 자리이지요
 
내 마음속에 깊은 곳이 나를 교훈한다 하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밤은 왜 하필이면 밤일까요. 낮이 아니고 밤일까요 밤에 감정지수가 올라가지 않아요. 밤에는 어둡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하나님이 밤을 주신 까닭은 쉼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상훈씨가 이야기 한 것 처럼 어두움을 거울삼아서 나 자신을 비추어 보라 그런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밤은 성찰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성찰이라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밤을 잊은 그대들은 성찰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늘 무엇인가 함께 있지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나 에스 엔 에스나 밤을 잊고 있기 때문에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고 바같에서 주어지는 획득하는 것으로 밤을 마감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깊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밤이 어떠해야 되느냐 불을 꺼야 돼 그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해요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어떻게 해요. 교훈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8절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내 오른 쪽에 계신데 앞에 계신다고 해 놓고 오른 쪽에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주님을 내 앞에 모신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앞지르지 않겠습니다는 뜻이어요.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칭찬했습니다. 참 잘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칭찬하신 후에 주님이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죽임을 받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했던 일은 무엇이지요 스승의 앞에 선 것이지요 자기가 주체가 되고 스승을 종으로 삼으려고 그런 것이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심이여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나는 그 뒤를 따르는 것이어요.
 
그것이 주님이 내 오른 편에 모신다는 것은 그 길을 걷는 동안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지켜 주시는 자입니다. 이중적 표현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앞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니까 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흔들리지 않음은 아까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 했던 그런 흔들림과 다릅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바람이 불면 바람이 촛불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잠잠해 지는 순간 수직을 잡는 것처럼 세상에서 우리는 흔들리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중심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전혀 흔들지지 않음이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중심을 찾는 흔들림이지요.,
 
나침반을 보세요 여러분 나침반이 어떻게 되지요 북쪽을 가르키지요.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흔들립니까? 북쪽을 흔들립니까? 흔들리지만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에서 흔들림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어요.
 
나침반이 딱 북쪽만 가리키고 있을 때가 언제이냐 하면 고장 났을 때 뿐입니다. 안 움직이는 것이어요. 여러분 흔들리지 않은 믿음 없어요. 내 중심을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게 되면 그런 사람에게 다가오는 생이 무엇이지요
 
9절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내 영도 즐거워하고 내 육체도 완전히 산다
여러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은 사람들은 세상이 주지 않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산다 그 이야기지요 세상이 주지 못한 것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10절 주님이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임이니다 이것을 내가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야기 하지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을 있나이다
 
11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기쁨이어야 함을 보여 주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떠해야 하면 표정이 달라져야 돼 그런데 늘 사나운 표정 짓고 살면 안 됩니다. 내면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도록 되어있어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순교를 당할 때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내면속의 빛이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보고 알 수 있어야 해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맞아 왜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의 조건이 없어 보이는 대도 늘 당당하고 든든하고 기쁨이 있어 생기가 있어 여러분 오늘 이것이 이 시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피난처 없는 세상 우리를 속절없이 흔드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나님 주님을 나의 주님 아까 이야기 했던 피라밑에 위엣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랫단에 고통을 받고 있는 자를 사랑하는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신 사람은 세상의 생의 조건에 개의치 않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이 시인의 노래네요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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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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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보세요.”
공익을 위한 정책으로 승부
“설교를 정치선동의 도구로 남용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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