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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와 내려놓는 삶
2021년 10월 16일 (토) 10:23:46 김태복 목사 www.cry.or.kr
필자에게는 작년과 금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해이다. 8순이 되는 작년에는 결혼한 지 50년, 신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되는 해요, 금년은 목사안수를 받은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 깊은 해에는 보통 자녀나 교회가 나서서 나름대로 축하잔지라도 벌렸을 텐데 극성을 부리는 코로나로 인해 모두 무산(霧散)되고 말았다. 다소간에 아쉬움은 남았으나 여전히 우리 부부가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자위(自慰)했다. 80세를 넘으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노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든다는 점이다.
 
70대까지는 주변에서 노인 취급을 하면 은근히 기분이 언짢을 정도로 활동에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않았다. 여전히 승용차를 몰고 전국 어디든지 여행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에 8자가 붙은 때부터는 장거리 운전에 점점 부담이 될 정도이니 말이다. 한 달 전인가, 먼지가 쌓인 가방에서 무더기로 담아놓은 사진뭉치를 펼쳐 놓고 필요한 사진을 찾기 시작한 적이 있었다. 1990년대까지는 앨범에 사진을 정리해서 보관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그냥 가방에 방치하다 보니 수백 장이 무질서하게 담겨 있었다.
 
대부분이 시무하던 홍익교회와 서울노회, 성지순례와 십 수개 나라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과거 시절로 돌아가 오랜만에 감회에 젖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쓸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사진들 속에서 고인(故人)이 된 친지들과 교인들, 친구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면서 살아 있는 자들조차도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필자가 이제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없었다.
 
그렇다. 이제는 인생의 겨울에 접어든 것이다. 소년기인 그 봄날의 화려한 꽃들의 눈짓들, 새들의 즐거운 지저귐, 청소년기인 그 여름날의 무성한 잎사귀의 풍염(豐艶), 젊음의 정열을 불태우던 바닷가의 모랫벌, 여름밤의 찬란한 은하수의 밀어(密語)들, 장년기인 그 가을 들판의 색깔들의 합창들, 온갖 단풍색의 의상으로 단장하고 탐스러운 열매들로 보석처럼 걸친 모습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제 겨울의 텅 빈 들판에 서있는 앙상한 나목(裸木)들, 회색 하늘, 사나운 눈보라만 보일 뿐이다.
 
겨울의 노년기는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이 스멀스멀 가슴으로 스며드는 시기이다. 노년기는 모든 것을 하나씩 잃어가는 간다는 고독의 병을 앓게 한다. 왕성하던 혈기도 수그러들고, 재물과 명예도 잃어가고 우애를 나누던 벗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심지어는 어느 날 동고동락하던 남편이나 아내마저 떨어진 낙엽처럼 주검으로 누워있는 것을 목격할 때의 그 절망감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그 이후 죽음의 검은 계곡을 향해 점점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노년기에 접어드니 노래에 대한 취향도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찬송가도 힘차고 뜨겁게 부르던 곡보다, 시무할 때 교우들 장례식에서 건성으로 부르던 곡들이 가슴에 눈물처럼 젖어든다. “잠시 세상에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하시면 영광중에 나아가리” “내 본향 가는 길 보이도다.” 유행가도 애정에 관한 곡보다 인생행로에 대한 곡들이 더 입에 붙는다. “오늘도 걷는다 만은”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음’, ‘황성옛터’ 등등. 가곡이나 동요도 고향에 대한 애조(哀調)가 담긴 곡들이 더 정감이 간다.
 
이러한 노인기에서 가장 명심할 것은 노욕(老慾)을 내려놓는 것이다. 루이스 J. 세릴(Lewis J. Sherrill)이 쓴 「만남의 종교심리」에서 노년기의 특징은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노년기에 세상에 대한 미련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욕심을 붙들고 있는 모습은 추하다고 했다. 잎사귀가 한껏 풍요하던 나무가 겨울을 맞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잎들을 포기하고 내려놓듯이 우리 인생도 노년기를 맞아 움켜쥐고 있던 욕망들을 하나씩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 했다.
 
노년에 이르면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과거와 다르게 기능이 급격히 저하된다. 이것을 깨닫고 순응하는 것이 아름답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참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과거 사진 속의 나와 최근에 찍은 사진 속의 나는 분명히 늙음이 덧칠해 있다. 그것이 순리이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미래를 대비한답시고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은, 마치 노년의 나이에 보톡스나 주름개선 시술로 자신의 늙음을 가장(假裝)하려는 추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죄악 중에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이 없고 재앙 중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고 허물 중에는 욕망을 채우려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공자는 「군자삼계(君子三戒)」에서 ‘군자는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한다’며, ‘청소년기 때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으니 여색(女色)을 조심하고, 장년기에는 혈기가 강하므로 싸움을 조심하고, 노년기에는 혈기가 이미 쇠약한지라 탐욕을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 사도는 고후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 했다. 내가 낡아지고 있는 겉사람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것은 성숙한 크리스천의 자세가 아니다. 노년기에 이른 우리 크리스천들은 겉사람의 탐욕은 과감히 내려놓은 줄 알아야 한다. 대신 우리의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다듬어가야 한다. 겨울은 절망의 계절만이 아니다. 어느 날, 봄의 훈풍이 지나갈 때, 얼었던 대지 위로 파란 싹은 돋아나고 다시금 온 산야는 색채들의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노년기의 검은 계곡 앞에서의 고독은 다만 잠시일 뿐, 다시 영적인 봄을 맞는 날이 오면 썩지 않을 몸,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을 입고(고전 15:42-49) 저 영원한 세계를 거닐게 된다는 것을 우리 크리스천들은 믿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미 낡아진 겉사람에 집착하는 대신 새로운 봄날을 위해 속사람의 싹을 키워가야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장뒤블리노는 "체념하지 않고 포기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렇다. 힘들지만 포기하고 내려놓는 경건의 연습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노년이 요구하는 모든 포기는 몸과 관련된 것이지 마음과 정신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행동'과 관련된 것이지 '존재'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겉사람은 쇠약해 가나, 속사람인 영혼은 날로 강해가는 성숙한 삶이다. 맥아더 장군은 1945년의 저 유명한 연설에서 "사람은 일정한 햇수를 살았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버리기 때문에 늙습니다. 해가 가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지만 이상을 버리면 영혼이 늙습니다. 걱정과 의심, 두려움과 절망은 우리가 죽음을 맞기 전에 우리에게서 천천히 기운을 빼앗아가며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적입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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