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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강 시편 6편 나를 고치소서
2021년 10월 06일 (수) 10:58:24 조무웅 강도사 www.cry.or.kr
사람이 살다 보면 죽음의 공포는 아니다고 해도 어쩌면 내가 이 순간에 인생이 끝날 지도 모르겠다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지요 이것이 인간이 어쩔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한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도 인간들 처럼 질투하거든요. 음모도 꾸밉니다. 인간 세상하고 신들의 세계가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딱 하나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신들은 안 죽어요. 그것 하나만 다릅니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조차도 운명에 메어 있습니다. 자기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 운명을 모이라라고 하는데 모이라를 넘어설 수 없어요. 신들 조차도 우리는 그런 신들을 믿는 것이 아니지요.
 
아무튼 인간이 죽음을 느끼고 공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이기도 합니다.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 했지요. 인간을 규정할 때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죽음에 이르는 존재 참 철학자의 말 치고는 너무 심심해 인간이 죽음을 모르는 존재가 누가 있습니까?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래요. 그런데 이 말은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죽음을 문제로 삼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만약에 죽음이 없다고 한다면 지금의 내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당신에게 사흘 밖에 주어지지 않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그런 경우라고 한다면 오늘 어떻게 살겠어요. 가장 의미있는 일들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에 사람들은 오늘을 의미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 당하는 것을 왜 몰라 이렇게 하면 안 되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이라고 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인생의 남은 때를 의미 있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입니다.
 
만약에 죽음이 없다고 한다면 행복할까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100살 200살 300살 살아 정규씨 300살 되어서 무엇할 것이어요. 300살 되어서 친구들 이름이 기억이 나면 참 잘 사는 것일 것 같아요. 벽에 무엇이나 안 바르고 있으면 다행이지요.
 
어뗐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싫어하지만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죽음과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의미있게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도 또 어려워어요. 그래서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이 때때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이게 인간 같아요.
 
오늘 우리가 죽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오늘 함께 공부하여야 할 그 시가 그런 죽음의 공포와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시편 6 ; 1- 10 개정개역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뻐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낭독되는 시편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감동이 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그러하리라고 생각을 하는 대요.
인간으로 산다고 하는 게 힘들지요. 어떼요. 힘들지요.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여러 가지 감정적 경험들을 희노애락애오욕 이렇게 7가지로 그 감정을 담아서 설명하기도 하지요.
 
어떤 시인은 더 단순하게 이런 도식도 이야기 합니다.
진흙 + 슬픔 = 인간이어요. 그렇지요.
그러면 여러분 인간 - 슬픔 = 진흙이어요.
수학을 깨들 하시네요.
 
그렇지요 결국 슬픔이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슬픔 고통 유한함 이것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슬픔은 때때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슬픔 없는 인생은 또 없어요. 그렇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나는 왜 이리 슬프지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슬픔조차도 내 삶으로 받아 드려야 해요. 슬픔아 같이 살자 때때로 그 슬픔이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보여 주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적절히 슬프면 참 좋겠는데 너무 너무 인생이 힘겨울 때가 있지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는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의 시인도 그런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요. 이 시는 죄와 또 참회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여러분 교회 전통에 오랫동안 시편에 등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참회시를 이야기 할 때 그 참회시 7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참회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시입니다.
시편 6편과 32편 38편 51편 그 다음에 102편 130편 143편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참회시로 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참회시 가운데 매일 처음 나오는 시가 이 6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이 시인의 삶의 자리가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구 속에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육체적인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개인이 겪는 고통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 고통이 공동체적인 고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제 그렇게 우리들이 보아야 해요. 그런데 이 시를 읽는 보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시가 나중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고 있어요. 그렇지요.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어떻게 이런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을까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요. 인생을 살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물리적 변화를 경험할 때도 있고 화학적 변화를 변화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포도를 으깨어 가지고 포도주로 만들면 이것은 물리적 변화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포도가 발효되어서 포도주가 되면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주를 성찬에 사용하면 그것은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와 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나지요.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물리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속에 있지요. 상훈씨 5년 전에 비해서 조금 더 힘들지요 많이 힘듭니다. 그것은 나는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를 진담으로 받아 드려요.
 
우리가 물리적으로 변화되지 않아요. 나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부정할래야 부정 할 수 없는 게 오늘 아침에도 전철타고 오는 데 자리가 나니까 어떤 젊은 학생이 앉으려고 하다가 나를 휠끗 보더니 나는 아직 젊은데 물리적 변화 모습도 변화되고 머리도 희어지고 빠지고 볼품 없어지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내면이 질적 변화를 이루어 가야 되지요. 나이를 먹어 질수록 세월이 갈수록 향기를 머금은 포도주처럼 그 사람의 인격이 더 향기로와 지고 그렇다면 늙음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나이 먹는다는 것이 좋아요. 진자 거짓말이 아니고 더 나이든 내 모습이 어떨런지 모르겠어요. 일전에도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 교회에서 가까운 공원을 걷다 보면 한 노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조용히 걸으세요 그런데 나는 그분하고 마주칠 때 마다 절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에서 절하지 않을 수 뭐가 있어요. 이게 무엇이어요. 그 분이 물리적인 변화를 화학적 변화 인격으로 만들어 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인격적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바뀌어 가야하지요.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어요. 아 저 사람을 보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현존하시구나 이렇게 느낄 때 거룩한 삶을 산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살다 보면 질병의 고통도 찾아오고 여러 가지 한계를 느껴서 슬프지만 그 슬픔을 떨쳐 버려야 할 불청객처럼 여길 때 인생은 고단해 지는 것이어요. 그것조차도 내 삶으로 수용하고 살게 될 때에 우리의 삶 속에 여유가 좀 생기게 되지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러나 문제는 늘 과도함에 있어요.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슬픔 견딜 수 없는 슬픔 이런 것들이 찾아오면 인간이기 때문에 넘어지지요. 내가 정신의 힘으로 이것을 넘어 서리라고 해도 안 될 때가 있어요.
 
맞지요. 여러분 겉잡을 수 없을 때가 있어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알아요. 그래서 아이구 불쌍한 것 여기에서 위로가 주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보니까 1절에 이야기 합니다.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주님의 진노와 그리고 주님의 분노를 여기에 이아기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인듯 느끼는 것입니다. 요즈음 여러분 우리가 병들면 의사 선생님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옛날에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귀신들려서 그렇다고 하지요 아니면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보면 옛 사람들은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인식의 틀들이 없었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참 인간적입니다.
 
질병의 고통도 힘든데 사회적 소외까지도 함께 가는 것이어요 내가 병들었어요 나는 위로 받고 싶어요.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힘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저 애는 벌 받았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죄가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육신의 질병 못지 않게 정신적 사회적 고통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지요.
 
이 시인도 똑 같은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습니다 하고 말합니니다. 수척은 무엇이지요 마르는 것이지요. 마르다 수자도 그렇고 척다도 그렇고 마르는 것이어요 척은 뼈와 관련이 되어 있어요 뼈가 마르는 것이어요.
 
수척한 것은 얼굴만 마른 것이 아니고 뼈의 진액이 마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어요 내가 수척하였으니 말하는 데 여기에서 수척하다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힘과 정력과 풍요로움과 희망이 사라진 상태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수척합니다 말하는 것은 얼굴이 이렇게 되었어요 그 이야기 만이 아니라 살아갈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나를 지탱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게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하는 이야기가 “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이오니 나를 고치소서” 뼈가 떨리다고 하는 말은 떨리다는 단어는 히브리 성서에서 수척하다는 말과 짝을 이룰 때 흔히 인생의 종말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 됩니다.
 
그러니까 내 뻐가 지금 떨립니다 하는 이야기는 살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음에 임박했습니다 그 이야기여요. 여기에서 얼마나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아까 내가 늙는 것 좋아요. 슬픔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드립시다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비교적 견딜말 할 때 이야기인데 견디기 어려울 때 이 말 조차 사치스러운 것이어요 우리의 적나나한 고백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몸만 그렇게 떨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니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영혼이 떨린다는 말은 왜 영혼이 덜릴까요. 영혼이 떨린다는 말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영혼이 이렇게 떨려요 영혼이 떨린다고 하는 것은 어떤 표현이냐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낌 것이어요.
 
그러니까 육신의 고통도 힘겨운데 신실한 사람이었던 그는 하나님이 내게 등돌린 것 같아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단절에 대한 두려움 이런 상황속에 그가 있습니다.
 
3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내게 등을 돌리시렵니까 그렇게 말하지요.
여기에서 재미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4절 “ 여호와여 돌아와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지요.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나를 구원하소서 그런데 잘 읽으시네요.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요.
 
자 보면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나를 구원하소서 한 달음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도 메시지가 있어요. 원래 이것은 시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십시오. 건져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 원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건져 주십시오.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훨씬 메시지가 강렬해 지지요. 그것을 운문체로 읽었을 때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라고 이야기 했지요 주님의 사랑은 인자함이라고도 성경은 번역하고 있는데 이 때에 사랑은 그냥 러브가 아닙니다. 이때에 인자함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계약을 맺었지요.
 
시내산에서 그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계약을 맺었지요. 이것은 계약에 바탕을 둔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계약에 바탕을 둔 사랑이어요. 그러니까 계약 했다는 것은 무엇이어요. 저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함부로 버릴 수 없다는 말이어요.
 
시인이 지금 상기 시켜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당신과 나는 계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사랑의 언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그러니 내 영혼도 떨리고 뼈까지 수척해 졌고 내 몸에 온통 떨리는 바로 이때에 하나님과 맺은 이 계약적 사랑 언약적 사랑을 기억해 주시고 나를 건져 주십시오.
 
그냥 단순히 러브가 아니야 그렇지요. 하나님의 감정으로 사랑하는 감정으로 그게 아니고 하나님 저와 맺으셨던 언약 잊지 않으셨지요. 그 사랑으로 이 고통스러운 순간에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 하는 이야기여요.
 
그러니까 여기 이것을 짤막하게 끊어 읽는 게 좋습니다. 돌아오십시오 그 다음에 건져 주십시오 구해주십시오 그렇지요. 강렬하게 가고 있지 않아요. 지금 이 시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의 깊이고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조금씩 표현은 달리하고 있지마는 사실은 하나의 내용이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반복함으로서 그의 마음에 절실함이 여기드러나고 있지요.
그러면서 그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셔야 할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5절 사람이 죽어 스올로 가면 거기서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감사합니다 날마다 이래야만 행복하실 분이다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어요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 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존재로 살고 싶은 것이지요.
 
내가 죽으면 더 이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어 굉장히 깊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우리들이 알 수 있어요.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여러분 무엇이 생기나요. 고단한 세상을 이길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뜻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지요 갓 우위스 아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든든합니다.
 
여러분 가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옛날이지요 산길을 걸어갈 때 무섭지요. 혼자 산길을 걸어갈 때 이만한 아이라도 아이 손을 붙 잡고 가면 덜 무섭지요. 그렇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 그러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서 여러분 김구라고 하는 분을 혹시 아셔요 잘 아세요 그 분의 호가 무엇이지요.
 
백범 김구 선생님이 쓰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탁 쓰셨는데 무엇이라고 쓰셨는가 하면
롬 8: 31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장 31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백범 선생님이 그 말씀을 붙들고 산 것이지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렇지요 이 말씀 한 마디가 어떤 사람을 든든히 세운 것이어요.
 
죽음의 위기 속에서 어떤 삶의 위기속에서 그것이지요 하나님이 마음 속 깊이 명심하게 되는 것은 비옥한데 우리 속에 기둥 하나가 탁 서는 것이어요. 그렇지요. 기둥 하나가 탁 서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그렇지요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때때로 우리를 든든히 세우는 기둥 혹은 뿌리와 같습니다.
시인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흔들린 것이지요 그 기둥이 사라지고 흔들리는 것 같기 때문에
 
6절 눈물로 내 침상을 띠우고 요를 적십니다. 하두 울었더니
7 내 눈이 다 쇠하여 졌고 어두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까지가 고통이어요.
그런데 시가 8절에 와 가지고 분위기가 바뀝니다.
8절 “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악을 행하는 너희여 다 나를 떠나라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지 못하도록 하나님 앞을 막아 셨던 너희들 내가 어떤 문제가 내 앞에 다가올 때 그 문제는 항상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눈 앞이 캄캄하다 맞지요 눈 앞이 캄캄한 것이어요 이것을 떨어져서 바라보면 이 문제 만이 아니라 삶은 저기에도 있거든요. 상대화 되거든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지요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어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문제가 있어가지고 있었는데 눈물로 침상을 띄울 정도로 울었더니 결국은 그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보여요
 
그래서 8절에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 악을 행하는 너희여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하나님은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지요.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의 하나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 이삭이 태어나자 하갈과 이스라엘이 사라에게 쫓겨납니다. 상속권 다툼을 우려한 사라가 쫓아내지요 그저 먹을 것 조금 또 물 한 가죽 부대 지어 주어서 광야로 내어 보냅니다.
 
그러자 광야를 이리 저리 헤멥니다. 모자가 그런데 물도 떨어지고 그리고 음식도 떨어집니다. 하갈은 기가 막혔어요. 저 아들 저 불쌍한 아들을 위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요.
 
아이를 넝쿨에 놓고 자기는 저만치 떨어져 가 가지고 통곡하여 웁니다. 그런데 아이도 우는 엄마를 보고 웁니다. 광야에서 이 비통한 울음소리를 들어보세요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지요 왜 우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주십니다. 네 아들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자 하갈이 눈이 밝아져요. 그래 보니까 물이 있는 곳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물을 마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가득차 있는 울음에 대해서 모른 체 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기를 원하는데 우리를 통해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세상에서 너무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아요. 의지가 없는 신세가 되어 가지고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 당장 끼니를 이을 것이 없어가지고 어쩔 수 없어서 죽음을 생각하는 그 사람들 그들의 신음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대 있습니다.
 
그 고통 받는 이를 외면한 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잘 믿는 것처럼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쓰고 있는 저들에 대해 외면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숙한 믿음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다 이 시인의 확신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시고 내 기도를 받으셨다고 하고 말합니다.
 
9절 그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되자 삶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눈을 열기고 나니까 나를 사로잡고 내 삶을 규정하고 있었던 그 삶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툭툭 털 수 있는 힘이 내 속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시를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는
6편 2절에 어떤 말이 나왔지요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렸사오니 말했지요 이것이 시인이 겪고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10절 “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하고 말합니다.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하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누구의 고통이고 떨림 입니까? 시인의 떨립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자 상황이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시인으로 하여금 떨게 한 그들이 떨게 됩니다. 그리고 황급히 도망치게 된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든든함입니다.
그렇지요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마음 하나 이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고통이라고 하는 심연을 거쳐 오는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에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요.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고통을 통과하도록 만드시기도 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실패를 경험하고 고통을 경험 하였기에 조금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그 실패와 눈물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똑 같이 실패와 고통과 눈물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나의 삶에 실패와 고통은 복된 순간임을 알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우리의 삶이 그것 때문에 커졌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깊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시련없는 인생을 살기를 우리는 바라지만 시간 속을 사는한 인간은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시련을 우리의 삶을 더 성숙한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겠지요. 이 시인은 그런 절묘한 전환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혹시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까? 멀리 보는 시각이 어려운 것 같아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리가 멀어진 것은 문제와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것이 고요함입니다. 내 마음이 고요해야 거리가 멀어집니다.
 
호흡을 하고 하나님 앞에 현존 앞에 서는 순간 점점 멀어지지요.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일이 많지만 자꾸만 거리를 두고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눈물 흘리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기를 원하십니다.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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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 반복되는 한국교회 부끄러운 흑
한국의 야생화(3)
인생의 매사에 끝마무리가 중요하다
돌아보니 감사뿐
시편 13강 16편 흔들리지 않는 삶
11월 선교편지
이젠 나오십시오.
내 귀에 들린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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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강 18편 여화와는 살아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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