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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강 시3편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2021년 09월 15일 (수) 09:29:16 조무웅 대표 www.cry.or.kr
억울하면 옛날에는 정말 신문고를 울리기도 하고 왕에게 자기들의 목소리를 들리기 위해서 그러지 않아요. 조선시대에도 보면 예를 들어서 너무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기우제 하지 않아요.
 
이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왕이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어요. 나의 통치가 잘못되어서 혹시 하늘이 진노해서 비가 안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욕사자책이라는 것이 있는데 6가지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어요.
 
(1) 궁궐의 담이 너무 높지는 않았는가
궁궐의 담이 높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이지요. 백성들과 소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지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지 않아요.
(2) 나의 삶이 너무 화려하지 않았는가
백성들은 아주 핍절한 삶을 살고 있는 데 나는 너무 혼자 누리고 살지 않았는가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어요. 신 앞에서 그래야 비로서 신이 비를 내려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왕들의 모습입니다. 왕은 자꾸만 스스로 살피고 돌이킬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전에 텔레비전 다큐멘타리에 보는 것인데 왕들이 임금님 수라상에 올려진 참외가지고 그 지방에 형편을 살핀다고 하더라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남쪽에서 지금 폭풍이 몰아쳐서 배가 안 뜬다고 하더니 정말 남쪽에 갈치가 상에 안 올라왔구나 아직도 남쪽에 폭풍이 심한 것이구나 이렇게 왕들이 살핀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우리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들이 하소연할 수가 없을 때 사람들은 자기의 소리가 누군가에게 경청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히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사정이 들려지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이제 탄식시라고 불리우는 장면인데 시로 이야기 하면 오늘 우리가 보게 될 시가 시편 3편인데 시편 3편이 바로 탄식시의 장르에 속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공부를 하게 될 터인데요.
 
먼저 지난번과 마찬 가지로 시를 낭낭한 목소리로 한번 낭독하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여러 차레 말씀을 드립니다만 낭독을 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은 분명히 다르거든요. 여러분들도 귀로 들어 보는 경험을 하겠습니다.
개역개정판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요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빰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낭독을 들으니까 참 좋으네요 아까 보니까 여러분이 낭독하면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이구나 이렇게 느끼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바 이기도 하지요 이런 고통들이 그래서 시를 읽는다고 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의 이야기로 공명할 때 감동이 일어납니다.
 
시편도 시이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로 들을 때 감동이 일어납니다. 시편을 처음 시작할 때 시를 읽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시 앞에 나오는 표제를 살피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지요 표제는 여러 가지가 나와요. 시의 저자가 누구인지도 나오고 있고 시가 쓰여진 맥락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시편이라는 것이 본래 찬양집이라고 이야기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어떻게 연주해야 될런지에 대한 지시가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러나 이 표제에 등장하고 있는 저자가 반드시 그 저자라고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맥락이 이 시를 탄생시킨 배경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표제를 그렇게 정한 까닭은 역사속에 있던 어떤 일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 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많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을 3편을 보니까 표제가 무엇이라고 나왔느냐 하면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다윗이 압살롬을 피했던 상황을 알면 이 시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다윗은 이스라엘에 두 번째 임금이었습니다. 사울왕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지요. 그런데 다윗은 가문이 썩 훌륭한 가문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렇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이 가문이 훌륭하고 학벌도 좋고 그러면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야 이러지만 가문도 보잘 것 없고 학벌도 보잘 것 없고 그러면 왠지 낮추어 보고 싶은 마음들이 생기지요. 이것이 인간의 이상한 버릇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 때문에 지방에 있는 토족 세력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다윗은 그들과 가까이 지내야 나라가 튼튼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엇을 했느냐 하면 결혼 정책을 통해서 그들과 가까워 졌습니다.
 
다윗이 일부일처제를 안 지켜요. 아내가 꽤 여럿이어요. 그렇지요. 다윗은 여러 아내가 있었어요. 그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도 결혼했겠지만 그런 정략적인 태도도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것을 정략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토호 집단들이 다윗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렇지요. 이게 좋은 일어요. 나라가 튼튼해 졌으니까 문제는 여러 아내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은데 이게 쉽지가 않지요.
 
그게 참 쉽지가 않은 것이어요. 이 다윗 가문에 가장 큰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나타납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맏아들이 암놈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암놈이 보니까 어머니가 다른 자기의 누이 동생 다말이 너무 어여쁜 것이어요. 그래서 연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허락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지요. 허락을 안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암놈이 나쁜 짓을 해요.
 
아프다고 하고 몸이 아프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 장남이 아프다니까 오지요. 그래서 어떻게 아프냐 제가 몹시 아픕니다. 아버지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내 누이 동생인 다말이 나에게 와 가지고 음식을 지금 만들어가지고 대접해 주면 제가 먹고 거뜬하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지 다말을 보냅니다. 다말이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지요 그런데 암놈의 속셈은 딴데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몸된 짓을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다말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지요.
 
더 큰 문제는 암놈이 자기 욕망을 채우고 나니까 다말이 미워진 것이어요. 보기 싫어합니다. 내어 쫓습니다. 이래 가지고 다말은 너무나 큰 상처를 받지요. 그 때 그 다말의 오빠가 압살롬이어요.
 
압살롬이 이야기를 다 듣습니다. 그리고 나서 배다른 형인 암놈을 아주 마음속에 두고 있다가 죽여요. 그렇지요. 그것 때문에 압살롬은 도망을 갑니다. 죽이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져요.
 
오늘 이 이야기 다 할 수 없고요. 다윗은 그 압살롬 때문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아요. 자기 집 안에 일어난 이 부끄러운 일 때문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아요. 어쩻든 압살롬이 먼 유배지 스스로 유배했던 그곳으로부터 돌아오도록 허용 했는데 다윗은 차마 그 아들 얼굴 면대하여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버려두지요.
 
그 사이에 압살롬은 그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지요. 그리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그래서 다윗이 도망가지 않아요. 아들을 피해서 달아나는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시편의 표제는 그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여러분 그렇게 본다면 3편의 첫 대목이 “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 많으니이다” 하고 말하지요.
 
여러분 지금 머릿속에 들어오지요. 지금 자기를 반대해 가지고 많은 이들이 일어나서 쫓아옵니다.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으로 읽혀진다는 것이어요.
 
그런데요 이 시인은 전형적인 개인의 탄원시입니다. 하나님 앞에 억울함을 호소한 것입니다. 기억나세요 혹시 시편에는 크게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가 있고 또 하나는 탄식시가 있다고 이야기 했어요.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어떤 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내 삶 속에 현존해 계시다고 느낄 때 우리 입에서 찬양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요.
 
그런데 탄식하는 것은 어떨 때이지요. 하나님이 내 삶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느끼지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때때로 살다보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내 기도 들으시지 않은 것처럼 느끼고 그래서 아무리 하소연하고 외쳐도 하나님이 귀 기울여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 때가 있지요. 반드시 그런 때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부재 체험이지요.
 
하나님이 부재하신다는 말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안 계신다고 느끼지만 계십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의 부재를 체험할 뿐이지요. 부재하신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이런 경험이어요. 탄식시는 하나님의 부재 체험으로 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이 탄식시에는 전형적인 유형들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탄식시가 흘러가느냐 하면
 
(1)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릅니다.
하나님하고 불러요 하나님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 탄식시의 첫 번째이고요.
 
(2) 두 번째는 원수들이 참 많습니다.
혹은 원수들이 나를 괴롭힙니다 하는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원수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이름의 호명 두 번째는 원수에 대한 탄식이 나옵니다.
 
(3) 그런데 세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볼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리고 원수들 때문에 탄식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이 부재한 것처럼 생각이 되었는 대 하나님에 대해서 신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기억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망 속에 우리를 건지실 때 하시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에게 기억나게 해 주셔요. 성령이 하시는 일도 어떤 일일까요. 우리가 절망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도록 해 주셔요.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생의 곤경 속에서 어려워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탁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기억력이 좋아서 떠 오른 것이 아니어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어요.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에 대한 기억이 나타납니다.
 
(4) 그러면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기억이 하니까 그 다음에 하는 것은 기원입니다.
하나님 이제는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십시오. 기원이 나타납니다. 원수들로부터 구해 주십시오하는 기원이지요.
 
(5) 나중에는 어떤 말로 끝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시면 내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찬양에 대한 약속이 나옵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탄원시의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구조인데 중간 중간 어떤 부분이 빠져있는 시들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쩧던 시편에 등장하고 있는 탄원시는 저런 전형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하는 이야기이고 시편 3편은 그런 전형적인 구조의 완결편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시편 3편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고 말하지요.
 
물론 여기 기원에는 무엇이 들어가느냐 하면 응답의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응답의 확신이 있지요. 그리고 나서는 이제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하는 말로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시편 3편을 읽으면서 한가지 우리가 단어들을 하나 하나 뜯어 보다 보면 여러분 여기 대적 일어나 나를 치는 자 그리고 방패 다 전쟁에 관련된 용어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을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대신 싸워 주셨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대신 바로의 체제와 싸워 주셨지요. 그것을 그들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거룩한 전쟁 하나님이 그 백성을 대신하여 치루는 거룩한 전쟁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호칭 가운데 만군의 주 그런 표현이 나오지요. 야훼 사바우스 그러는데요 만군의 주 만 군대의 주여 천군 천사하고 이야기할 때 천군을 이야기하지요. 하나님은 싸우시는 분이셔요. 전사여요.
 
그러니까 이 시편 3편의 그 맥락은 무엇이냐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사적인 용어가 여기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적 방패 천만인 외워 싸 진치다. 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7절에 보면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 앞으로 더 자세히 보겠지만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야기 하고 있지요.
일어나소서 이것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떤 때 사용되는 단어이냐 하면 이스라엘 전쟁을 하다가 전황이 불리어 지면 무엇을 모시고 나가느냐 하면 법궤를 모시고 나갔을 때가 있습니다. 왕국 시대 전쟁에 나갈 때 법궤가 무엇이지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으면 유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법궤이지요 우리에게 언약 해 주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이어요.
 
그래서 법궤를 모시고 전쟁터에 나가면 하나님이 이 전쟁에 승리자가 되어 줄 것을 확신이 있는 것이지요. 그 때 백성들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법궤를 모시고 가 가지고 일어나소서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 7절에 나오는 이야기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것도 거룩한 전쟁을 염두에 두고 볼 때에 이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다 하는 이야기이지요.
 
8절에 “ 구원은 여호와께서 있사오니”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전쟁 중에 그들이 외치는 함성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와 그리고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는 짝을 이루는 것이지요.
 
일어나소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요. 그러니까 두 가지를 우리들이 보았어요. 전형적인 개인 탄식시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표현되고 있는 것들이 거룩한 전쟁을 염두에 두고 그 전쟁에 속한 용어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자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서 1절에 보니까 “여호와여” 그렇게 말하지요.
여호와여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이야기 했는데 간결합니다. 그렇지요. 간결합니다. 이 간결한 호격속에는 간결하기가 성의가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어떻습니까? 간결하기에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여러분 심정이 곡진해 지고 간절해지면 언어가 짧아 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여기에 잔득 붙여요 예를 들면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 하시며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러면 왠지 간절함이 없어 보여요
 
보면 우리 기도하는 이들 사람들 대표해서 기도하는 분들 보면 참 앞에 많이 붙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붙이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것들이 상훈씨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상투어가 되는 순간 하나님에게 모독적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상투어가 되면 안 되거든요. 자기의 온 존재가 다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호와여 하는 아무런 수식어구가 없는 이 단순한 호격이야 말로 이 시인의 간절함을 가장 깊이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지요. 여러분 이게 시를 읽어가는 재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사제들이 신에게 기도를 드릴 때에는 바벨론 신들에 대해서 장엄한 수사어구들을 갖다 부칩니다. 다른 신들은 그런 미사여구를 부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아요. 깔끔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지요. 나의 대적 나를 치는 자가 어찌 그리 많은 지요 하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나를 치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기를 괴롭히는 지에 대한 이야기도 안 나오고 있지요.
 
탄식시를 보면 놀라운 것은 그것입니다. 고통스럽기는 한데 누구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구체적으로 특정이 안 되어요. 어떤 상황인지도 잘 몰라 그냥 괴롭다고 합니다.
 
시편 보다 보면 137편만을 제외하고는 특정되지를 않아요. 누가 나를 괴롭히는지 결국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 해 줄까요. 그런 탄식시들이 만약에 특정한 상황과 또 특정한 인물들을 거기에 두고 이야기 했다면 나의 시가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특정한 인물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이것이 내 괴로움과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재미있습니다.
 
원수들에 대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1) 하나는 많다 하는 것입니다.
(2)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2절 그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또 하는 하나님을 조롱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많다 그런데 시인은 홀로입니다. 많음과 홀로 있음이어요. 참 이게 재미있어요. 많음 원수들은 많아요. 홀로 있고 자 고독하지요. 고독합니다.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외로움은 홀로 있음에 쓸쓸함입니다.
 
그런데 고독이라고 하는 것은 홀로 있음의 영광입니다. 이 고독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깊이 사귈 수 있어요. 사람들은 외로움을 찾아 들어가지 않지만 고독을 찾기는 합니다.
 
홀로 있음을 통해서 더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홀로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홀로 있는 이 순간이야 말로 무엇이 될까요. 홀로 있음이 마치 거울 뒤에 발라 놓은 것처럼 나를 보도록 해요 이 고독 속에서만 나를 보게 되는 대 나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고 홀로 있기에 자기 존재의 뿌리인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어요.
 
그래서 여러분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들어갔을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왜 광야에서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요. 오로지 무엇만 보입니까? 하나님만 떠 오른 것이지요.
 
소설가인 이승훈 선생이 그랬어요. 유대 광야에 가니까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더래요 우리가 광야에 나가야 할 까닭이 그런 데 있는 것이어요. 홀로 있는 것이지요 바로 홀로였기에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너무나 괴로웠어요. 그런데 이 홀로 있음 때문에 3절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여” 그렇게 말하지요.
여기 주는 나의 방패시요 하고 말하는 데 사실은 3절 앞에 무엇이 나와야 하느냐 하면 그러나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나와야 합니다. 반전이 되는 것이어요. 하나님에 대한 흘들림 없는 확신이 여기 등장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주는 나의 방패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방패는 무엇하는 것이어요 막아 주는 것이지요. 완전한 보호를 상징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시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안 되실 때도 많아요.
 
예수님도 죽임 당하셨지 않아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죽임 당하기도 하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방패가 아니신가요.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라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 없도록 해 준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통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든든히 지키셔서 그 영혼이 심연으로 빠져 들도록 해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방패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육신은 죽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소망했던 사람들의 그 정신은 살아서 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지 않아요. 하나님은 방패십니다. 이것을 안 것이어요. 여러분 여호와 주는 나의 방패시오.
 
여러분 우리 우리기가 죽으면 고개를 푹 숙이시지요 아 그렇지요. 그런데 무엇이어요 많은 원수들이 없어졌어요 지금 아니지요. 원수들 그대로 있습니다. 고통 사라졌어요. 고통 그대로입니다.
 
이전에는 고통 때문에 하 그랬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자 어떻게 되었어요 고개를 드는 것이어요. 그래서 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속에 기둥 하나가 선 것이야 탁 기둥이 들어선 것이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신뢰를 하니까 기둥이 생긴 것이어요 고개를 탁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개를 들고 빳빳하라는 것이 아니고 든든히 서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신앙인은 독립의 사람이다 홀로 서는 것이 독립이어요. 의존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중심이 탁 생겨서 서는 것이어요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얼마나 든든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위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없는 것도 아니어요. 고통이 우리에게 올 수 있어요. 그러나 그 고통 때문에 고개가 숙여지지는 안 해요. 든든히 섰다 그렇게 하지요.
 
정말 하나님께서 나의 영광이고 방패이고 나의 머리를 드는 분이시다 나의 존엄성을 회복하게 해 주시는 분이다 시인이 그렇게 고백하고 있지요.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은 성산에서 응답해 주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신뢰가 회복되자 그 다음에 시인이 할 수 일이 무엇입니까?
5절에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전에는 너무 괴로워하고 전전 긍긍하고 잠도 못 이루었어요. 이제는 평안해 진 것이어요. 그렇지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그림 가운데 하나가 풍랑이 있는 바다에서 잠들어 계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또 보면 풍랑 가운데 잠들어 계신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도 관원들에게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어요. 내일 어떻게 될런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깊이 잠들어요. 너무 잠을 잘 자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 맡긴 자들의 든든함이어요
 
나는 죽어도 괜찮아 그런 것이지요. 여기도 보니까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나니까 든든해지니까 시인이 하는 이야기가 천만인이 나를 외워싸 진친다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고린도 후서 4 : 8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쌍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이게 내면의 기둥을 가진 사람들의 당당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이야기 합니다.
3장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미 여호와는 일어나셨어요. 그러나 거룩한 전쟁으로 일어나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일어나신 다는 것은 기도자의 승리를 이야기 합니다. 일어나신 여호와께서 그 많은 원수들의 빰을 치실 것이고 악인들의 이를 꺾으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아주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그렇지요. 말로 조롱을 했지요.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한데요. 그 이를 꺾으셨나이다 그렇지요. 이것이 2절과 대치되는 것이어요. 하나님을 조롱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에 세우심을 입은 사람들을 조롱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처벌 받는 이런 대조가 여기 드러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 “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빰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악인의 이를 꺾으실 것입니까 입니까 꺾으셨나이까입니까 완료시제입니다.
 
완료시제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될 수 있습니다가 아니고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21:22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믿고 구한 것을 이룬 줄로 믿으라 그래서 제의적 종결문이 나옵니다.
 
이 시인은 절망적 고독 속에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자 평안히 누워자기도 하고 깨어나기도 했습니다. 깨어나자 그 승리의 경험을 했고 그 승리의 경험이 위대한 구원을 찬양하는 자리로 들어 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탄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지요. 이게 이 시가 보여 주는 아름다운 점입니다.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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