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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2021년 02월 23일 (화) 15:29:14 양의섭 목사 www.cry.or.kr

(마태복음 5:38-48) 
 
1.
원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느 교회 성경공부 시간에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이 중에 원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자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듭니다. 깜짝 놀란 목사님이 여쭈었습니다. ‘할아버지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원수가 없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가 그러더랍니다. ‘내가 오래 살다보니 다들 죽었어.’
 
유머이지만 어쩌면 그럴 겁니다. 원수들 보다 더 오래 오래 살아 원수들이 먼저 다 떠나 없어지기 전에는 어느 누구에게나 원수는 다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원수가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원수, 어떤 이들인가요?
 
2.
39절,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누군가가 내 오른편 뺨을 칩니다. 이런 기분 나쁜 웬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뺨을 치려면 오른손을 사용할 것이고, 그러면 나의 왼쪽 뺨을 칠 것인데, 오른편 뺨을 친답니다. 왜?
 
그가 왼손잡이가 아니라면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른 손등으로 내 뺨을 친 경우입니다. 아프진 않지만 아주 모욕적인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다시 손바닥으로 계속 내 뺨을 칠 의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나를 무시하고, 모욕하여 치고는, 계속해서 나를 해하려는 악한 사람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내 뒤에서 내 오른편 뺨을 친 경우입니다.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을 때, 마음 놓고 있을 때 내 뒤에서 기습하여 오른 뺨을 친 경우입니다. 치사한 인간입니다.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으니까 뒤에서 급습한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첫 번째 원수는 나를 무시하고, 나를 계속 멸시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비겁하게 마음 놓고 있을 때 나를 치는, 세상 말로 뒤통수치고 음해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원수입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원수는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입니다. 부당하게 재판을 걸어 내 재물을 빼앗아 가지려는 사람을 말합니다. 물질적 손해를 끼치고, 부당하게 내 것을 착취하는 원수를 말합니다. 법 법 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소시민인 나를 협박하여 빼앗아 가는 이입니다. 못된 원수입니다.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당시 로마의 법에는 로마 군인은 필요시에 일반 백성들을 억지로 노역시킬 수 있었습니다. 군대가 어디론가 이동할 때 일반 백성의 노새나 인부를 억지로 징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밀리온’, 즉 한 마일(one mile), 약 2km를 짐을 지고 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 이런 경우가 아닌 가 싶습니다.
 
힘과 권세를 가지고 나를 억누르는 자를 말합니다. 배운 게 없다고, 가진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나를 무시하며, 힘으로 나를 억압하는 자를 말합니다. 원수입니다.
 
42절, “네게 구하는 자, 네게 꾸고자 하는 자” 맨날 나에게 와서 꾸어 달라는 자, 이것도 사실 고역입니다. 날마다 꾸어 달라고,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무조건 달라고 하는 자, 그 도가 지나치면 불쌍한 지경을 넘어선 웬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들을 종합하면, 나를 무시하는 자, 비겁하게 나를 넘어뜨리려는 자, 법 법 하면서 교묘하게 내 재산을 앗아가려는 자, 힘과 권세, 지위를 이용하여 내 인권을 무시하고, 내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 반면에 맨날 찾아와서 우는 소리로 꾸어달라고 하는 자, 나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들입니다. 이 원수들을 어떻게 할까요?

3.
분명합니다. 사회에서 가르치는 법은 아주 아주 분명합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라는 것입니다. 이를 동해보복법이라고 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당한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 사회 정의요, 공정한 법 정의의 실현입니다.
 
율법도 분명 그렇게 가르쳐 줍니다. 레 24:20절, “상처에는 상처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신 19:21절,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출 21:23절 이하,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게 사회 정의입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 그 이상도 말고 그 이하도 말고 당한 그대로 되갚아주는 것이 정의 구현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학교에서도 그랬습니다. 얻어맞고 선생님께 이르면 선생님은 때린 녀석이나 맞은 녀석 둘 다 데리고 가셔서 ‘몇 대 맞았어? 5대? 그럼 너도 얘 5대 때려.’ 이렇게 하고나서 둘에게 다 묻습니다. ‘서운한 거 없지?’ 왜? 가해한 대로, 피해본 대로 갚아주고 당했기에 억울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가 내 오른 뺨을 때리면 죽어라 달려들어 시원하게 상대방 오른뺨을 때려야 정의 입니다. 누군가가 고발하여 내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악착같이 나도 변호사를 사서라도 재판에서 승소하여 상대방의 것을 다 빼앗아 와야 합니다.
 
억지로 오리, 2km나 물건 지고 가라고 부당 노동을 시키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싸워서 그 부당함을 드러내고 까발려야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힘을 키우고 백을 써서 그대로 갚아 줘야 합니다. 맨날 돈 꾸러 오고 도와달라고 하는 놈 때문에 시달려? 그럼 이제는 네가 대신 우는 소리를 해! 그래서 다시는 못 오게 해! 그게 사회 정의입니다. 세상에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이 방법이야말로 사회 정의를 지켜주고, 원한을 풀어주는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사회에선 누구에게 가서 상담을 해도 다 그렇게 하랍니다. 바보같이 당하며 살지 말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선 변호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기가 막히게 좋은 말씀이란 뜻보다도 기가 막혀 한숨이 나오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가요?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참 괴로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괴로운 말씀을 하심에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신 것이 있습니다. “... 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율법에서 가르친 것, 세상의 현인(賢人)들,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너희가 분명히 들었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는 형식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5장 21절 부터 49절까지 6번이나 이 형식을 사용하십니다.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렇게 너희는 배웠고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 예수님! 내가 온 생명을 걸고 닮기 위해 애쓰는, 나의 생에 절대권을 갖고 계신 분, 내가 매일 기도드리는 그 분, 참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어 따르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너희”는 누구인가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불신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버리는 사람을 칭하는 게 아닙니다. 뭔가 조금 더 인간답게, 고귀하게, 가치 있게, 진실 되게 살려는 이, 아니 그 보다 자신이 단순히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존재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이, 하늘의 시민으로 하늘의 법도대로 살려고 힘들어도 애쓰는 이! 바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감동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그런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스타 강사들도 있고, 존경해 마지않는 멘토들도 있습니다. 수양을 오래 한 넘볼 수 없는 수도자들도 수두룩합니다. 심지어 존경받는 고승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다 나름대로 귀한 가르침들을 인류에게 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요? 교수님이 그러셨데, 전문가가 그러더래, 박사님이 그러더라 도 좋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성도는 누구에게 들어야 하는가요?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맘을 기울여야 하는가요?
 
전에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거실 소파에 개 한 마리가 턱하니 누워있습니다. 내가 ‘이 놈아 저리 가!’ 했는데도 쓰윽 한 번 쳐다보더니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집 주인 집사님이 ‘저리 가’ 하는데도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방에다 대고 초등학교 아이 이름을 부르며 ‘얘, 이 개 좀 불러가라’합니다. 잠시 후 아이가 나오더니 개 이름을 부르자 그 꿈쩍도 하지 않던 녀석이, 누가 와서 말해도 못 들은 체 하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꼬리를 치며 냅다 달려갑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어른이고, 많이 배우고, 잘 생기고, 풍채가 있는 사람이 와서 어쩌고저쩌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녀석이 말이여 그 조그만 아이의 한 마디에 좋아라 달려갑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놈인데, 아이의 말 한 마디엔 잽싸게 반응을 보입니다. 자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더라구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에 저렇게 재빠른 반응을 보이는가요? 이 세상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좋은 말, 멋진 말, 감동적인 말, ... 엄청나게 많이 들려오는데 과연 나는 그 많은 세상의 말들 중에 누구의 말에 저렇게 즐겁게 반응을 보이는가요? 나는 과연 누구의 말을 듣고 사는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십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전통적인 율법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너희가 들었지만 나는 이제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십니다.
 
예수님이 들으라고 하시는 ‘너희’는 누구인가요? 즉 우리 자신을 말하는 건데, 우리는 누구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전에 세상에서 살던 나는 죽었습니다.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세상은 나에 대해 죽었고, 나 역시 세상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님을 내 인생으로 삼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 박고 조롱하는 이를 바라보며,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기도하신 용서와 희생, 그리고 사랑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 말씀이 절대 진리라고 믿고 사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서 뭐라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르침을 따라가야 합니다. 바보 소리 듣고, 모자르다는 소리를 들어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5.
그런데 요즘엔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세상의 말에, 세상의 가치관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를 좇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게 옳다 그르다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작 우리가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아닌가요? ‘너희가 그렇게 세상에서 배웠고,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 성령의 감동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이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밭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마음 밭이 형성되기도 하고 늘 무엇을 듣느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마음 밭이 조성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협지를 많이 읽은 사람은 소림사 말만 들어도 솔깃해집니다. 3류 연애 소설을 탐닉하는 사람은 애정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조국 소리만 들어도 혈압이 오른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어떤 말에,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반응을 보이는가요? 내 의식 세계를 구축하고, 내 인격과 영성, 마음을 형성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요? 내가 주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 내 마음을 움직이는 그것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분명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렇게 세상에서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반응은 어떤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아는가요?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의 차이를 아는가요? 성도와 세속인의 차이를 아는가요? 하늘 백성과 땅의 백성의 차이를 아는가요? 하루살이 인생과 영원을 사는 이의 차이를 아는가요?
 
누구 말을 듣고 사는 가 입니다. ‘너희가 이미 많은 말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이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요 하늘 백성이요 영원을 사는 인생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거 쉽게 할 수 있는가요? 난 솔직히 어렵습니다. 원수, 마음에 못이 박혀 있는 원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원수인데,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내가 당한 대로 갚아줘도 시원치 않을 원수인데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못해, 나는 절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도 그걸 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가 어찌 하늘 아버지,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무슨 의도일까요? 흉내라도 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용서와 사랑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아버지를 닮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말씀, 용서와 사랑입니다. 축복과 건강, 출세와 복권이 아닙니다. 용서와 사랑, 이것 때문에 주님의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 세상에선 말도 안 된다고, 원수는 철저히 갚아줘야 정의라고 용서와 사랑은 꿈같은 소리라고 그럴 줄 알았는데, 실상은 세상 속에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비록 자기들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못살고 있어도,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렇게 살기를 갈구하는 백성들이 있었기에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6.
그 예수님께서 용서하며 살랍니다. 사랑하며 살랍니다. 베풀며 살랍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는데, 마음 한 번 모질게 먹고 흉내라도 내 봅시다. 그리스도인답게 하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나도 한 번 그렇게 살아봅시다.
 
내가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사회 정의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한 대로 그리 갚아주고 싶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게 하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주님께서 그러십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라는 것을 네가 들었으나 나는 너에게 이른다. 용서해라....’ 그래서 고민입니다.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니 고민이고, 결국 나는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세상이 하라는 대로가 아닌 예수님이 이르신 대로 따라갈 것입니다. 왜? 나는 그리스도인 아닌가요!
 
사순절이라니까 뭐 하지 말고, 뭐 하지 말고 하는 금욕적인에만 만족하지 말고, 전에 용기가 부족하여 실천하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최고 가치, 용서와 사랑, 베풂과 나눔에 더욱 힘을 내어 그리 삽시다.
 
사순절 기간, 경건의 훈련으로 예수님이 내 마음에서, 내 행동에서, 내 나눔에서, 내 삶 속에서 활짝 살아나시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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