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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염려하십니다.”
2020년 11월 19일 (목) 10:19:24 양의섭 목사 www.cry.or.kr

(마태복음 6:11-15)
 
1.
우루과이의 한 작은 성당 벽에는 주기도문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 "우리"라고도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지 마라. 자기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 라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자신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뜨끔하지만 공감은 가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성도들은 꼭 그렇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2.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9-10절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문이고 11절부터는 사람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람을 위한 기도문, 첫 번째가 뭔가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이 뭔가요? 어떤 이들은 이걸 ‘말씀’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먹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처럼, 성도는 매일 영의 양식을 구하고 먹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옳습니다.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게 정말 그런 뜻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신이 살아야 할 진짜 양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도 담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제일 먼저 우리에게 와 닿는 문제는 양식 문제입니다.
 
며칠 전 뉴스를 보니 40대 실업율이 너무 높아서 걱정이라고 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고 그래서 한참 일해야 하는,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들에게 실업율이 높다고 걱정합니다. 잃어버린 코로나 세대도 있답니다. 올해 사회에 나가야 하는데 코로나로 인해 경기가 어려워 취업하지 못하는 90년대 생, 20대를 잃어버린 코로나 세대라고 한답니다.
 
아무리 점잖은 체 해도 양식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예쁘게 생겼어도 먹어야 예쁜 겁니다. 어릴 적에는 예쁜 친구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데이트 하다 자장면 한 번 사 줬더니 시커멓게 묻는 것도 모르고 잘 먹더라구요.
 
양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걸 주님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런데 젊은 시절에 이 주기도문을 드릴 때마다 솔직히 마음이 찔리곤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는데, 나는 이미 일용할 양식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냉장고에는 음식이 있고, 통장에도, 주머니에도 돈이 있어 얼마든지 필요하면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건 못 사는 저 아프리카나 남미의 제3세계의 사람들이 구할 기도문이 아닌가 했습니다.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힘든 저 북한 사람들이나 드려야 하는 기도문이 아닌 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 하루 세 끼 일용할 양식으로 근근이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주기도문과는 관계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묵상 중에 ‘일용할 양식’의 개념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월급 제도가 아니라 일당제(日當制)입니다.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의 수입은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 Daily bread, 일당입니다.
 
요즘에도 일당 제도는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건 월급이요, 연봉입니다. 내 삶에 필요한 수입입니다. 조금 무리한 해석인지 모르지만, 일용할 양식은 내 삶에 필요한 수입을 말합니다. 하루 세끼만 족하게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청렴하게 사는 이들은 하루 세끼로 족하다고 하지만, 그건 수도사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고,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은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이어갈 수 있는 수입원을 말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겨우 겨우 끼니나 이어갈 수 있도록 근근이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고 싶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월급에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통장에 복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연봉에, 사업에 넉넉한 풍성함을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욕망의 성취, 흥청만청의 삶이 아닌 흘러넘쳐 어려운 이들, 필요한 이들을 도와주고 나눠줄 수 있는 축복의 통로로 살 수 있도록, 여러분의 일용할 양식, 필요한 모든 수입원에 복에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 사람을 위한 기도문에서 두 번째 주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하나님께 사(赦)함 받고 사십시오. 하나님께 용서 받고 사십시오. 죄, 완전히 떼어버릴 수 없는 죄,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함 받는 것입니다. 은혜 받고 나면 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리라 하지만, 며칠 못 갑니다. 작심삼일이라고 합니다. 내 젊은 때는 작심삼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서기 께름칙해집니다. 가급적이면 기도하기를 피합니다. 슬슬 코로나 핑계 대며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곤 멀리 멀리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매 맞고 돌아옵니다.
 
죄, 지을 때는 다 그럴 듯 하고, 이해가 되지만, 짓는 순간 곧장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눌린 듯이 삽니다. 평생을 어둡게 삽니다.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며 사십시오. 좀 뻔뻔한 생각이 들더라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사십시오.
 
그런데 말이죠, 전제 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에 전제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내게 죄지은 자를 내가 용서하여 주지 않았으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해 주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 자존심과 내 논리, 내 철학으로 따지면 용서해 줄 수 있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왜 그러는지, ... 그래서 용서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의 마음으로 살기 시작하면 경우가 달라집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일곱 번까지의 용서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랑스럽게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랍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가 용서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이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다 가르쳐 주신 뒤에도 설명을 또 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용서하라고 아주 분명하고 확고하게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한 때 외도를 하여 마음에 큰 상처를 갖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잘못 했다고는 했지만 엄청 미웠습니다. 가만있다가도 생각만 하면 속에서 화가 솟구치는데 못 견딜 지경입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늘 몸이 아픕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별 탈 없는데 여기 저기 아픕니다. 그래서 남편만 보면 ‘내가 저 인간 때문에 건강도 해쳤다’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권면하였습니다. ‘용서하세요. 용서하지 못하면 그 분노는 내 안에서 칼이 되고, 분노에 몸부림을 칠 때마다 그 칼은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상처 낼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권면할 때마다 ‘그래야겠죠...’하시댔는데, 끝내 용서를 못하시더라구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60도 못되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기 몸 안에 그런 무서운 칼이 있는데, 독기가 있는데 그게 누구에게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누구 맘에, 누구 몸에 상처를 내겠습니까?
 
여러분, 미움과 분노를 품고 있어봐야 상대방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잠만 잘 잡니다. 부부 싸움한 분들은 경험상 잘 알 겁니다. 싸움을 하고 나는 씩씩대며 잠이 안 오는데, 옆에 있는 분은 쿨쿨 잠만 잘 잡니다. 누구 손해인가요? 분노는, 미움은 자기를 다칩니다. 자신을 상하게 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하나님의 사함을 얻고 싶으면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서라도 내게 빚진 자를, 내게 아픔을 준 자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평강이 밀려올 것입니다.
 
4.
세 번째 사람을 위한 주님의 기도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시험에 빠져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붙잡아 달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둘의 제사 중에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습니다. 아담의 집안에서 장남으로 자부심과 자존감이 컸던 가인이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씩씩 댑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b-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답니다. 무슨 뜻인가요? 우리네 삶이 출입하는 그 모든 것에, 그 모든 문에 죄가 엎드려 있답니다. 잠재되어 있고,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의 죄가 나를 원한답니다. 즉 나에게 충동질한답니다. 죄를 짓도록 유혹한답니다. 미끼를 슬슬 던진답니다.
 
미끼도 가만있으면 무는 법이 없습니다. 인조 미끼라도 물결에 흔들려야 고기가 뭅니다. 이놈의 죄가 슬슬 나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세파가 나에게 유혹을 합니다. 덥석 물고픈 충동이 일게 합니다. ‘저거 한 번만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유혹은 더욱 더 커져만 갑니다. 그래서 결국 덥석 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엎드려 있는 죄를 우리 보고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한 때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약하게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펴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게 다 하나님 책임이라고, 죄에 약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뭘 그러시느냐고 괴변을 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체질로 만드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충동이 일어날 때, 유혹이 올 때 ‘NO!'라고, ’아니오!‘라고, ’싫어!‘라고 외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그리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이란 단어는 헬라어 ‘alla, 알라’로 ‘도리어’란 뜻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도리어 악에서 구하옵소서 입니다. 시험에,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해 주시되 어쩔 수 없이 시험에 넘어지게 되면 그 악에서부터 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5.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생각없이 즉석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곱씹고 또 곱씹어 만들어 가르쳐 주신 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한 가운데 있는 것을 엑기스화해서 주신 기도문이라고, 그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중한 것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여,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우리의 사명을 지난주일 설교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거라고, 그래서 가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두 번째 파트, 인간을 위한 기도문은 세 가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들 일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시오며 등 거창하게 시작했던 주기도문, 이제 그런 과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라는 것들이 왜 이것들일까요?
 
이 역시 거창하게 정의롭게 살게 하시옵고, 진리 앞에 용기 내게 하시옵고, 불의에 눈감지 않게 하시옵고, 진실하게 하시오며, 공평한 분배에 적극적이게 하시옵고, ... 이런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며 마음에 있는 것은 뭔가요? 오늘 제목을 예수님이 염려하신다고 좀 불경스럽게 표현했는데, 나는 그게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성경도 우리 보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나는 왠지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며, 우리를 생각하시며 이런 것들을 염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 늘 그렇게 도와달라고,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염려하신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용할 양식 때문에 죄짓지 말랍니다. 그것 때문에 싸우지 말랍니다. 그것으로 인해 미워하지 말랍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다 용서하랍니다. 늘 겸허하게 그것들을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랍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분이기에 내 구체적인 통장 상태를 모르시는 게 아니랍니다. 위태위태한 내 가계부를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잘 알고 계신답니다. 코로나 때문에 장사 안 되는 것도 다 아신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랍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남에게 베풀 수 있도록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랍니다. 그날그날 근근이 살아가는 정도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그러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을 다 아십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좀 염치가 없다고 느껴져도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랍니다.
 
그러면서 용서하며 살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용서 받는다고, 죄지은 상태로 찜찜하게 살지 말랍니다. 맑고 밝게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며 살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개역본) 어둡게 살지 말고 사죄 받음의 기쁨을 누리며 살랍니다.
 
유혹 받지 않으면 돌부처지,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유혹을 받고, 시험을 받는데,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하랍니다. 그러다 실수하였을 때에는 다만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랍니다.
 
6.
이게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어 다시 깊이 주기도문을 묵상하다 보니 거기엔 예수님의 마음, 나를 염려하시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양식 문제로 평생 힘들어 하는 나를 염려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죄짓는 것을 염려하십니다. 그것때문에 늘 유혹을 받고 휘청거리는 나를 염려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염려하십니다. 나의 삶을 염려하시며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 평생 이렇게 기도하며 살랍니다. 그러면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살피시고 이끌어주신답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가서 그렇게 살고, 그러면 하늘 아버지 하나님은 가서 그렇게 사는 우리네 삶을 지키시고 먹이시고 채워주십니다!
 
염려하지 말라면서도 우리를 염려하시는 예수님의 그 진한 사랑과 자상함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이런 주님께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보답합시다. 은혜의 손길이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뚜렷하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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