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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기억하시는 것”
2020년 10월 14일 (수) 16:43:59 양의섭 목사 www.cry.or.kr

(스가랴 3:1-5) 
 
1.
다들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에 길을 가며 상대방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냥 내 갈 길만 가면 됩니다. 그래서 그 날도 마스크를 쓰고 눈길도 주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데, 어떤 이가 다가와 인사합니다. 누군가 싶어 하자 그 분이 마스크를 잠간 벗으면서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도 순간적으로 누군지 감이 안 잡힙니다. 그러자 그 분이 ‘목사님, 누구예요.’라고 하는데, 그때서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좀 어색하고 이상했습니다. 저 분이 본래 저렇게 생겼었나 싶었습니다. 오랜 만에 만나서 낯이 설어서 그런 가 했지만 헤어지고 길을 계속 가면서도 뭔가 좀 변했다는 느낌입니다. 그 분의 평소 이미지와 맞지 않는 얼굴이란 느낌이 계속 들면서 퍼뜩 떠오릅니다. ‘아, 그동안 얼굴에 손을 댔구나!’
 
우리는 다 이미지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머리 뇌 속에는 메모리, 저장 기능이 있어서 누구 하면 그 이에 대한 많은 정보와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어, 기억의 버튼만 누르면 줄줄이 다 나아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기억 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저장된 메모리들은 에러도 별로 나지 않습니다.
 
2.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가요? 사탄도 우리를 기억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탄에게도 나에 대한 많은 메모리가 저장되어 있는데, 그 많은 것 중에 사탄은 나의 무엇을 주로 기억할까요?
 
유감스럽게도 성경에 나타난 사탄의 역사를 보면, 사탄은 언제나 우리 성도들의 부끄러움, 추함, 나약함, 죄악, ... 이런 것들을 기억해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모두들 괜찮은 인생이라고 칭찬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조차 사탄은 성도의 숨은 죄악들을 쫘악 까발리며 ‘아이고, 하나님, 이런 인간을 하나님 자녀라고 여긴단 말입니까?’하고 비웃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아니 모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들, 부끄러운 것들, 감추고 싶은 것들만을 골라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게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이 그걸 여실히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성전을 건축할 때 있었던 3대 지도자 중 한 사람입니다. 총독 스룹바벨, 선지자 학개,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런데 학개와 거의 동시대 예언 활동을 한 사람이 오늘 본문의 기록자 스가랴입니다. 학개, 스가랴 모두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같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선지 활동을 하였는데, 학개가 1개월 빨리 선지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학개는 불과 4개월간의 선지 활동을 한 반면에 스가랴는 40년 이상 활동을 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성전 건축에 대해 백성들을 독려하며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성전 건축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 곧 메시아의 강림과 역사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특별히 스가랴는 8가지 환상을 보여주며 웅장하고도 신비로우며 조직적인 예언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스가랴가 본 8가지 환상 중의 하나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주님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런데 그의 오른쪽에 사탄이 서 있습니다. 뭐하고 있었을까요? 구체적으로 하는 말은 기록이 없지만, 본문 내용의 흐름으로 보아 주님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비난, 고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딱도 하십니다. 뭐 이런 자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단 말입니까? 어쩌자고 이런 위선자를, 이런 범죄자를, 이런 추악한 자를 거룩한 제사장, 그것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단 말입니까?’ 하며 여호수아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고발하였습니다.
 
사탄, 그 이름의 뜻이 뭔지 아십니까? ‘귀신, 나쁜 놈’이 아닙니다. ‘참소자’, ‘대적자’! 끊임없이 고발해 댑니다. 끊임없이 은밀한 것들을 들추어내고, 약점을 찾아내어 떠벌립니다.
 
여러분, 이것 하나는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이렇게 사탄은 나를 고발할 것입니다. 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이구만 하고 모두들 나를 바라보는데, 사탄이 내 옆에 가까이 서더니 나를 고발해 댑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비난합니다. 주머니 털어 먼지 안 나는 이 없다고 하는데, 그 정도가 아닙니다. 현미경으로 샅샅이 내 인생을 살피며 잊혀진 추한 것들을 들추어냅니다.
 
더 기막힌 것은 사탄이 기억해내는 그 모든 부정적인 나의 추억들은 모두 사실이란 것입니다. 가짜 뉴스가 아닙니다. 팩트(fact)란 사실입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가장 거룩하다는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한다니 우리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정말 창피해 죽고 싶을 정도입니다.
 
3.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의 태도를 주목합시다. 2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불에 홀랑 타다 남은 나무 같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려고 살려고 애를 쓰다 온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입니다.
 
세속의 불에 타면서도 ‘아니야 이대로 홀랑 타버릴 순 없어’ 하며 저항 하다 하다 시커멓게 그슬리고 남은 장작더미. 즉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래도 제대로 살려고 애를 쓰다 온 사람인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추함, 죄악, 은밀한 더러움, 위선, ... 이런 것을 족집게같이 기억해 내고 까발릴 때, 하나님은 그 죄악 속에서도 그나마 버팅 기려했던 우리의 무력한 양심을 긍휼히 보십니다. 그나마 버팅기려고 노력했던 것을 기억해 주십니다. 무서운 불에 잿더미가 된 집터에서 그나마 무엇이라도 건질 게 남았을까 잿더미를 뒤적이는 사람의 마음같이 그렇게 우리에게서 그 무슨 선한 것이 남았을까, 아니, 있었는가 그것을 찾아내십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사탄을 책망하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사랑의 역사로, 비록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 속에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그를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려는데,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드디어 서 있는데, 사탄이 마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그 무한한 은총을 방해하듯이, 조롱하듯이 계속 고발해대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사탄을 도리어 책망하십니다. “시끄럽다!”
 
그리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3절 이하,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실수하여 죄 하나를 지으면 사람들조차도 대제사장의 거룩한 옷을 벗겨내고, 추하고 더러운 옷을 입혀 내쫓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제사장의 진심을 알아, 그를 용서, 용납하시고, 그 추한 옷을 벗겨내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우리 하나님, 내가 이 땅에서 그런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던 것을 기억하십니다. 사탄은 살기 위해 지은 나의 모든 숨은 죄들까지 다 까발리는데, 우리 하나님은 살기 위해 힘들었던 그런 나를 이해하시고, 그러면서도 마음 깊이 하나님을 향해 몸부림치던 것을 기억해 주십니다.
 
에스겔 16:6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하나님은 지금 나의 추한 모습보다 나의 순수했던 시절, 어렸을 때를 기억하시고, 동시에 그 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며 오늘의 부끄러운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예레미아 2:2절,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내 순수하던 시절, 내 순박하던 시절, 살기 힘들었지만, 가난했지만, 고난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때의 순박함, 한 때 주님을 향해 감격하고, 헌신했던 그 시절에 내가 주님께 고백했던 일들을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것을 붙들고 나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잘못한 것 수두룩한데, 그 중에 단 하나라도 잘 한 게 있으면, 아니 옛날에 순전했던 것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부터 기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나를 붙드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시려고!
 
더군다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내가 죄인 됨을 알고, 고백하고, 회개하여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 하나님은 내 죄악을 기억도 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것, 나의 어린 시절, 해 맑던 시절,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나름대로 양심껏 살려고 애쓰던 모습, ... 나를 사랑하시기에 긍정적인 시각으로 나의 모든 것을 살피시고 이해하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대체 무슨 잘난 말을 하겠습니까? “Thanks, God!” 감사합니다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를 기억하시는 것, 나의 선(善)함입니다. 왜 나에게 추(醜)함이 없겠습니까? 왜 나에게 죄악이 없겠습니까? 왜 나에게 위선이 없겠습니까? 왜 나에게 음흉함이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주 앞에 서있는 나를 보시며, 하나님은 한 때 가졌던 나의 선함을 기억하시고, 나를 붙들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할렐루야!
 
4.
그러기에 병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히스기야 왕은 이렇게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3)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셔서 히스기야를 살려주신 것, 우리는 익히 다 알고 있습니다.
 
다윗도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시 25:7) 무궁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을 찾으시려면 끝도 없을 텐데, 그것들 보다 무궁하신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기에 무명의 시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시 106:4) 주님의 백성들에게 베푸셨던 은혜로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어떻게 기도드리시는가요? 물론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지만, 어떤 자세로 기도드리시는가요?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무엇으로 부르짖는가요?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할 때 무엇으로 기억해 달라고 하는가요?
 
그나마 남아 있는 나의 선함, 내가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던 것을 기억해 주옵소서. 아니, 한 때 제가 주님 앞에 순박하게 고백했던 것들을 기억하시고 나를 돌아보옵소서. 아니, 차라리 성경에 기록된 대로 추한 주님의 백성들에게 노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무한히 베푸셨던 그 은혜로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없습니다. 완벽한 자가 없습니다. 우린 모두 죄인입니다. 우린 모두 부족한 이들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실 때, 그나마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선함을 기억해 주시고, 더 나아가 한 때 가졌던 순전함을 기억해 주시고, 은혜로 나를 기억해 주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우린 모두 예수 그리스도, 그 무한한 은총의 세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5.
이렇게 나에게 있던 선함, 기억조차 의미한 그 가녀린 선함을 찾아 기억하시며, 나를 붙드시고 복 주시기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 앞에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도 서로에게 선함을 찾읍시다. 추한 것만을 골라 가며 찾아내지 맙시다. 이웃의 험담 함부로 하지 맙시다. 다 잊고 지내는 데 자기 혼자 기억한다고, 자기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듯이 친구와 가족들의 부끄러움, 그 과거를 들먹이지 맙시다. 정치판은 추한 것들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추세이지만,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조사하면 다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덮어주시더라구요.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나를 기억하실 때 허물은 덮어주시고, 그나마 흔적만 남은 나의 선함을 찾아 기억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형제자매에게 그렇게 합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정죄함에 짓눌려 살지 맙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나도 내 형제와 자매들에게 그리합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변론하시며 보호하시고, 추한 옷을 벗겨내어 아름답고 성결한 옷을 입히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이 왕십리중앙 교회 안에 충만하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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