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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似而非)”
2020년 09월 25일 (금) 13:17:38 양의섭 목사 www.cry.or.kr

(이사야 5:1-7) 
 
1.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맞나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맞나요? 모든 백성들, 다양한 삶의 환경을 갖고 있는 모든 국민들이 함께 부르는 애국가로서는 일반적인 의미, ‘하느님이 보우하사’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느님이 보우하사’라고 하지만, 나에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그게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지키십니다. 여호와의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를 마하나임, 둘러 진 치시고 지키십니다. 보호하십니다. 믿습니까?
 
2.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역사야 별도이겠지만,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와 곳곳에 교회가 세워진 이후, 즉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만 보아도 그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비극, 우리나라의 아픔, 그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그 때 일제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방,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쟁취했습니까? 물론 독립 운동가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같은 우리가 존경하고 추모해야 하는 헌신적인 독립 운동가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하나 분명히 합시다. 우리나라의 자주권, 우리의 독립은 우리가 싸워서 얻은 것인가요? 일본의 압제로부터 얻은 해방, 자유는 우리가 쟁취한 것인가 말입니다.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패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 운동을 했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해방을 가져다 줄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암울한 일본 강점기 시절에 독립군들이 몸부림치던 시절에 똑같이 몸부림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당시 교회 다닌다는 것은 독립운동, 나라 사랑한다는 것과 거의 같았습니다.
 
당시 교회는 모일 때마다 기도를 했을 텐데 뭘 기도했을까요? 계속해서 일본이 강해지고, 그 통치 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천만에! 나라의 독립을 달라고, 자유를 달라고 모일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 모든 성도들과 교회의 간곡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리곤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요, 자유요, 나라의 독립입니다.
 
6.25 전쟁, 그 전쟁에서 승리를 우리가 스스로 쟁취했습니까? 우리는 밀리고 밀려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신세,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그 후 3개월도 못 되어 대구, 부산 지역만 남기고 코너에 몰려 숨을 깔딱거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미국으로 달려가 간청하고 설득하여 유엔이 참전하게 되어 겨우 살아났습니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실은 이것도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후 폐허가 된 이 땅, 외국의 원조로 살아가던 이 땅, 내가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는 허연 우유덩어리를 주었습니다. 나는 무식하게도 우유가 덩어리 고체인 줄 알았습니다. 그걸로 물에 타서 녹여 마시는 건 줄 알았습니다. 원조 받아 주는 것들입니다. 그 먼 곳에서 오려니 우유를 굳혀서 고체화하여 보내온 것일 것입니다. 그 어린 시절을 빼고 오늘까지 나는 어릴 적에 받았던 허연 우유 덩어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옷이나 생필품들은 구제품이 최고였습니다. 구제품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이거 구제품이야’하면 디게 좋은 걸로 알았습니다.
 
구제품이 뭔가요? 미국 사람들이 못 사는 나라를 구제하기 위해 자기들이 쓰던 것, 유행 지난 것들을 보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재활용 옷을 모아 외국에 보내는 것, 그게 구제품입니다. 그런데 그게 제일 좋은 것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미군 지프차가 지나가면 어린 우리들은 그 뒤를 따라 뛰어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헬로 헬로 기브미 어 초코렛, 헬로 헬로 씹던 것도 좋아요.’ 참 지긋지긋하게 못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에서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뀐 성공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 보고 잘 사는 나라, 부자나라라고 할 때 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부자나라인가요? 세계가 그렇게 보고 있나 봅니다.
 
비결이 뭘까요? 우리가 허리 띠 졸라매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먹을 것 참아가며, 쓸 것 꾸욱 참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자식들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일까요?
 
그 시절, 교회당마다 밤마다 불이 훤했습니다. 교회치고 철야기도 안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산마다 기도원들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온통 기도하는 성도들, 교회들, 기도원들이 가득하였다. 뭘 기도했을까요? 계속 외국 원조 받으며 못 살게 하옵소서? 천만에! .....
 
그 결과,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만 이루었을까요? 우리의 노력으로만 이룬 것일까요? 나는 분명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3.
오늘 성경 본문은 포도원의 노래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기름진 산에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얼마나 좋은가요? 바탕도 기름진 산이니 그야말로 옥토입니다. 백배의 결실이 가능한 땅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본래 부터 좋은 땅이었으나 농부는 좋은 씨의 포도나무가 자라는데 행여나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땅을 파서 돌들까지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거치적거릴 것들을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리곤 그곳에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곤 그 포도원에 망대를 세웠습니다. 왜? 주인이 기대하기에 장차 좋은 포도 열매, 극상품의 포도 열매가 맺힐 것이 거의 100%였습니다. 땅도 좋고, 방해되는 것도 없고, 씨 자체가 극상품이니 뻔한 것입니다.
 
너무 좋은 포도가 열릴 것이기에 행여나 훔쳐가는 이들이 있을까봐 철저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지키는 자가 없으면 언제든지 좋은 것들은 도둑맞을 수 있고,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지킵니다. 그야말로 마하나님, 두 팔로 안아 지켰습니다.
 
그리곤 주인은 술틀까지 팠습니다. 술틀을 팠다는 것은 좋은 포도 열매가 맺히는 것은 확실하기에 이제 그 좋은 포도 열매로 즙을 내기 위해, 좋은 포도주를 얻기 위해 새 술틀까지 판 것입니다. 주인의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포도를 얻었습니까? 들포도! 흔해 빠진 들포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콩이 나긴 나는데 제대로 된 콩이 아닙니다. 팥은 팥인데 온전하지 못한 찌그러진 팥입니다. 이게 웬일인가요? 정성을 들여 환경을 조성해 줬고, 씨도 분명히 좋은 콩, 좋은 팥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것이 맺히는가요?
 
주인은 이제 실망감을 넘어서 분노를 표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됨인고”
 
큰 실망감입니다. 그래서 그 당사자인 유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답하라고 물으십니다. 너희들 같으면 이런 경우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징계를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곤 분노를 표하십니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을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며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그 자상함,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망대를 세우고, ... 정성으로 살피던 모습은 사라지고, 분노의 역사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고,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고, 황폐하게 할 것이며,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며, 가지치기나 북을 돋을 일이 없을 것이라 저주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가요? 왜 이렇게까지 실망하시는가요? 이유가 있습니다.
 
4.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정의를 바라셨는데 포학이고, 공의를 바라셨는데 부르짖음이었답니다. 기대에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과 정성을 쏟을 때에는 뭔가 기대하는 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정의를 기대했는데 포학이고, 공의를 원했는데 부르짖는 원통함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좀 이상한 것을 봅니다. 정의를 바랐는데 기대에 어긋났다면 정의의 반대편인 ‘부정’, 공의를 원했는데 실망했다면 ‘불의’라고 해야 할 텐데 정의를 바랐으나 포학이요, 공의를 원했으나 부르짖음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나라, 속성으로 급하게 성장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급성장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고 엄청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그렇게 급성장하다 보니 자연스레 따라오는 부작용들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그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축복하심 속에 성장에 성장을 해 왔지만, 그 내부적으로는 불의, 부정, 독식, 부패, 억압, 등등이 제3공화국, 제5공화국, 제6공화국, 쭈욱 있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부흥시킨, 일으킨 주 리더들의 세계에는 이런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살만해졌으니 우리들의 관심이 잘 살아보자고 허리 띠 졸라매던 것에서 정의, 공의, 인권, 분배, 복지, ... 이런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온 국민이 정의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포학이랍니다. 왜 그럴까요? 왜 정의를 원했는데 포학이 되었을까요?
 
옛 일이 생각나는데 우리나라에서 ‘정의사회 구현’이란 말이 제일 많이 유행하던 때가 있습니다. 언제인지 아는가요? 적폐 청산을 최대의 주제로 삼은 오늘이 아닙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입니다. 그래서 그 때 그 분이 만든 당이 ‘민정당’, ‘민주정의당’이었습니다. 당명까지 정의사회, 즉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게 목표라고 그리 했는데, 내 기억으로 그 때가 가장 폭력적인 사회였습니다. 다 잡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의를 구현한다며 포학이었습니다. 정의를 구현한다는 자기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다 잡아 갔습니다. 두려움의 공포가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정의는 포학이 될 수 있다. 자기만 옳다고, 자기네만 정의롭다고 해서 상대방을 모두 적으로, 악으로 규정하여 모든 주제를 다 이 논리에 빗대어 일방적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이고 말도 못하게 하고, 두려움 속에 신변 보호를 요청해야 할 정도로 포학이 될 수 있는 게 정의를 구현한다는 이들의 힘이요 그릇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원했는데 포학이라고 한탄하십니다. 일견, 정의와 포학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가만 보면 그게 다 이어집니다. 정의는 철저하게 법과 원칙에 의해 집행되고 이루어져야 정의이지, 법과 원칙보다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와 가치에 의해 진행되면 포학으로 끝납니다. 툭하면 자기 하고픈 대로 법을 뜯어고치며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이루겠다고 정의로운 체 하면 이 사회는 포학으로 가득 차고 맙니다.
 
보라, 공의를 원하셨답니다. 그런데 부르짖음뿐이랍니다. 공의와 부르짖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공의가 집행되고, 공의가 이루어지면 기쁨과 환호가 있어야지 어째서 부르짖음입니까?
 
공의도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과 같은 맥락으로 밀어붙이기에 그 아픔을, 그 일방적임에 하루아침에 한이 맺히는 이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공의의 반대 개념은 불공정, 불의이다. 공의를 주장하지만 불공정하여 한이 맺혀 부르짖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돌봐주고, 그만큼 살펴주고 그야말로 보호하고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되게 해 주었으면, 이젠 정말이지 정의와 공의의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건 어찌된 셈인지 정의와 공의를 이룬다면서 포학과 그로인한 부르짖음이 더 늘어만 갑니다.
 
아닙니다, 진짜 정의와 진짜 공의, 진짜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포학과 부르짖음이 가득한 사회를 이루어선 안 됩니다. 그걸 주장하고 따르는 이들은 만족하겠지만 이 사회의 전반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진정 정의와 공의로운 사회 구현에 겸허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와 공의, 뭘 기준으로, 어떤 상황을 정의롭다, 공의롭다 하는가요? 소신대로 한다고요? 자기 이념대로 철저하다고? 멋지게 말한다고? 천만에! 누가 말하고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철저하게 법과 원칙에 의해서 말하고 행할 때 정의와 공의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는 어느 특정 그룹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정의와 공의는 철저한 법과 원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의 보편적 절대 가치입니다. 높은 대통령으로부터 평범하다 못해 하찮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까지 동일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 편법과 불법이 아닌 누구에게나 공정한 법과 원칙으로 정의와 공의는 이루어집니다.
 
설명해야 이해되는 정의는 정의가 아닙니다. 구구절절 이유와 상황을 해명해야 하는 공의는 공의가 아닙니다. 그건 거의 모두 편법이요 불공정입니다. 정의와 공의는 설명도, 해명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삼척동자까지 다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이런 정의와 공의 구현은 국가의 지도자들, 사회의 리더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참으로 묘한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오늘 본문에 묘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정의’라는 단어로 ‘미쉬파트’를 썼습니다. 그에 대응되는 ‘포학’이란 단어로는 ‘미쓰파흐’란 단어를 썼습니다. ‘공의’라는 히브리어는 ‘쩨다카’이고, ‘부르짖음’은 ‘짜아카’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정의, 미쉬파트 인데 그들은 포학, 미쓰파흐를 내놓았고, 공의, 쩨다카를 원하셨는데 부르짖음, 짜아카를 이룬 것입니다.
 
미쉬파트-미쓰파흐, 쩨다카-짜아카! 서로 비슷합니다.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 사이비(似而非)입니다. 발음이 비슷해서 같은 건가 보다 했는데, 아닙니다, 완전 다른 것입니다. 끝이 다릅니다. 이단(異端)입니다.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며 발음은 비슷한데 완전히 다른 뜻의 단어들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말하기에 선택해 주었더니 무늬만 공정, 정의입니다. 사이비입니다!
 
죄가 뭔가요? 하나님께서 그토록 실망하시고 분노하시는 죄는 뭔가요? 아주 다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다르다. 흉내는 그럴 듯하게 내는데, 들여다보면 아주 다릅니다. 겉모습부터 아예 다르다면 아무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은 비슷한데 들여다보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실망하시고 분노하시는 죄는 이런 것입니다. 사이비입니다! 진짜 같은데, 진실한 것 같은데 들여다보니 아닙니다. 예전에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 ‘조용필’인 줄 알았는데 ‘조용팔’이요 ‘패티김’인 줄 알았는데 ‘배튀김’입니다. 짝퉁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 아닌가요?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닙니다. 그토록 정성을 다해 살펴줬고, 돌봐줬고, 지켜줬고, 이끌어 주어, 이제는 정말 좋은 열매, 멋진 그리스도의 삶을 살 것이다 하여 기대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아닙니다. 들포도입니다! 아, 멀리서 볼 때는 그럴 듯 해 보였는데 한 걸음 더 다가가 보니 아닙니다. 사이비입니다!
 
옳은 길을 따릅시다, 진실의 길을 따릅시다. 화려한 대의명분 내세우기보다, 그야말로 세치 혀로 멋진 말만 뽑아내려 하지 말고, 묵직하게, 우직하게 성도의 길,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삽시다.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살면서 흉내만 내는, 진실성이 없는 사이비로 살지 맙시다.
 
종교에만 사이비가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도 사이비가 있습니다. 정의도 사이비가 있습니다. 정치도 사이비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왕중 가족 여러분, 진짜로,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가서 그렇게 삽시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긍휼히 여기시사 포학과 부르짖음이 가득한 나라가 아닌 법과 원칙에 근거한 정의와 공의가 충만한 나라를 이루시도록 우리 성도들은 진실된 삶을 삽시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이 가서 그리 살기를 다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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