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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을 누리려면”
2020년 07월 01일 (수) 08:27:01 양의섭 목사 www.cry.or.kr

(삼하7:18-29)
 

    1.
    어느 목사님 글을 보니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 버튼을 누르랍니다. 자신의 생각 주파수를 감사에 맞춰놓으랍니다. 불행 버튼을 계속 누르면서 행복해지기를 원하지 말랍니다.
 
    자판기에서 달콤한 것을 원하면 프림 커피 버튼을 눌러야지 쓰디쓴 블랙커피 버튼을 누르면서 달콤한 것이 안 나온다고 불평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쏟아 놓으면서 기쁨의 세월을 기대한다는 것도 애당초 잘못된 생각입니다. 원하는 버튼을 누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원하는 게 뭔가요?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면전(面前)에서의 삶이라면 나를 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이 원하는 말, 자신이 누리고 싶은 몸짓을 하나님께 보여드리십시오.
 
    ‘아하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구나!’ 하시게끔 그리 살고 그리 말하십시오. 설마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죠? 그렇다면 자신 스스로 감사와 감격, 주님 앞에서 생활화 하십시오.
 
    2.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법궤는 회막에, 즉 텐트 안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기는 편안한 왕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법궤는 텐트 안에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반응은? 후일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왕상8:18) 다윗의 갸륵한 뜻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모든 것을 다 허락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왕상8:19)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감동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장차 메시아 가문의 축복을 주시겠다며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2,16)
 
    그러자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성막 안에 들어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 유명한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그러면서 그는 용기 내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7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하며 이런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29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어떤가요? 우리도 주님 앞에서 이런 기도 한 번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3.
    그런데 누구나 다 이런 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돈 몇 푼 올려놓고, 돼지 머리 올려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정도의 하찮은 간구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 그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이런 간구드릴 수 있는 이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께 이런 기도, 이런 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이런 기도를 드린 다윗에게 주목해 봅시다.
 
    다윗은 주님 앞에 앉아서 입을 열어 이렇게 감사합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이 말투는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지, 자기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지키시고 세워주심이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큰 감사와 감격이 그에게 있습니다.
 
    다윗은 누구였습니까? 그는 베들레헴의 목동이었습니다. 들에서 양이나 치며, 비파를 켜며 노래나 부르던 그런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아무런 야심도 없이, 정치, 외교에 전혀 관심도 없었던 그런 더벅머리 총각이었습니다.
 
    아무도, 심지어 그의 아버지조차도 그를 왕이 될 재목으로 생각지 않았던 그런 내성적 소년이었습니다. 출세하고파서, 왕이 되고파서, 권력을 쥐고파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고파서 안달이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잘 한 일이라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것, 가라 하시는 곳, 그런 감동과 감격에 순종하며 산 것 뿐입니다.
 
    시144편은 다윗의 시인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시144:1)
 
    다윗은 군사학교를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군인 출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 많은 싸움에서 승리를 한 것은 하나님께서 싸우게 하시고, 지략과 용기를 주셨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심지어 이런 고백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시;144:2) 때로는 그의 백성도 그를 별로 탐탁찮게 여겼습니다. 그의 아버지조차 그를 지도자감으로 기대하지 않은 형편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뻔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가장 위대한 왕,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때마다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다윗이 잘한 거라곤 하나님께 순종 잘 하였고, 늘 힘들고 괴로울 때 하나님께 기도로 피한 것.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우습게보고 복종하지 않던 백성들까지도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것들을 다 생각해 보니 다윗은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4:3)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누군지, 자기 집안이 어떤 집안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지켜 오시고 끌어오셨는지를. 그러기에 다윗은 늘 자기를 돌아보며, 그런 자기를 세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4.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는 어떤 이였을까요? 우리가 보기에 어떤 이였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3,12)
 
    한마디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버린 시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사랑, 축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를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온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받을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의 마음이 심쿵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떤 초신자가 예배당에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한 집사님이 다가가서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울먹이며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다니요,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신다니요 ... 감사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자 그 집사님이 그런 표정입니다. “에이 뭘 그런 걸 갖고 ... 괜히 걱정했네....”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가장 중요한 감격, 소중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신앙심이 깊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는 게 아닐까요? 믿음 생활 오래 했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바로 이 구원의 감격, 주님 앞에서 할 말을 잃고 그저 감사하다고 눈물만 뿌리는 그게 아닐까요? 하고픈 말 가득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만 뚝뚝 흘리는 그게 진정 신심(信心)이 깊은 이가 아닐까요? 교회 오래 다녔고, 중직자이고, ... 어쩌고저쩌고 하는 게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갈수록 깊이깊이 느끼고 감사하며 겸손하게 사는 이가 믿음의 사람이 아닐까요?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자신이 누구 인줄 아는 사람은 감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의 어린 시절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여러분의 영혼은 어떠하였습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님의 희생이,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넘치고 있음을 믿습니다!
 
    5.
    그러기에 다윗은 현재에 만족할 줄 알았습니다. 18절 하반절, “ ...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는 감격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현재에 만족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시고, 주신 복들에 감격하여 감사하였습니다.
 
    어디 다윗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과거의 죄에서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병들고 가난하던 처지에서 오늘날 굶지 않고 헐벗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매일의 묵상에서 고백한 적이 있지만, 한 번은 토마토 한 알을 통째로 먹는데 문득 어릴 때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내 어릴 때 소원은 사과 한 알, 복숭아 한 알, 참외 한 알을 통째로 먹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1/4쪽, 심하면 1/8쪽을 먹었습니다. 한 알을 혼자 다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겐 정말 지겹게 못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박 정희 대통령 시절에 가장 유행하던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늘 인기 차트 1위였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얼마나 못 살았기에, 얼마나 배곯았기에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고 전 국민이 노래를 불렀겠습니까? 그 덕에 지금은 여유롭게 쓰고 있지만, 당시에는 잘 살아보자고 허리 띠를 졸라매던 시절이었습니다.
 
    내 어린 시절에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보리 추수하기 전에 양식이 떨어져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누런 옥수수 빵 급식을 하여 그것이라도 하나 받으면 의기양양했고,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라도 하나 덮어서 갖고 오면 노른자가 터져서 새어나와 도시락 싸 온 신문지가 누렇게 더러워져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떤 아이는 그것도 아깝다고 누런 신문지를 혀로 핥았습니다.
 
    양말은 보통 꿰매어 신었고, 구멍 난 고무신을 땜질해서 신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고무신 앞에 구멍이 나면 일부러 뒤축에도 구멍을 내었습니다. 앞 구멍으로 들어온 물, 뒷구멍으로 빠져 나가라고 그랬습니다. 불과 40-50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떠한가요?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배곯아 죽는 이가 없습니다. 양말 꿰매어 신는 이도 별로 없습니다. 고무신 신는 이도 그러하고, 신발 바닥이 닳아 헤어질 때까지 신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무릎과 팔꿈치가 헤어진다고 가죽대고 바느질하여 입는 이도 없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떤 글을 보니 코로나가 나름대로 유익한 것은 ‘당연시 하던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손을 잡아주고 당연히 누리던 것들을 못하게 되니 그동안 당연시 하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었는지를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렸습니까?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며, 우리의 삶을 감사함 속에 유지해 가고 있습니다. 비대면이지만 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하며 삽시다. 현실에 쏟아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 감사(感謝)의 금맥(金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곧 그 금맥을 캘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6.
    감사의 조건은 누구에게나 있고 불평의 조건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감사부터 찾으십시오. 닫힌 것부터 찾지 말고 열린 것부터 찾으십시오. 그것을 찾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부족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살기에도 우리의 삶은 짧습니다.
 
    오늘로 2020년 절반, 상반기가 지나갑니다. 다음주일은 맥추감사주일, 상반기를 마무리하며 하반기를 준비합니다. 무엇으로 마무리 하고 무엇으로 준비하려는가요?
 
    감사로 마무리 하고, 감사로 준비합시다. 비록 코로나 사태로 인해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왕중가족, 믿음의 식구들을 주님께서 생명싸개로 꼬옥 싸주시고 지켜주심을 감사합시다. 그러면서 앞을 바라봅시다.
 
    감사의 버튼을 누를 때, 그에 걸맞은 은혜와 축복들이 쏟아질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대로 그리 될 것입니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7:28b-29) 아멘!
 
    감사로 예배하는 여러분에게 꼭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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