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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기다리세요.
2019년 12월 04일 (수) 18:51:02 양의섭 목사 www.cry.or.kr

(계1:1-8)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
    시 한 수를 읊어드립니다.
 
    ‘ 그리움’,
    “그리움은 / 보이지 않기에 / 그리운 것이 아니다. // 그리움은 / 그리고 또 그리고 / 마음의 화폭에서 발생하는 것. // 그리움은 / 그리고 또 지우고 / 이 악물 때 피어나는 것. // 그럼에도 / 그리움은 여전히 / 내 안을 채우고 있다. // 눈을 질근 감아도 / 눈앞에 펼쳐지는데 / 그건 바로 내가 그리고 있기에.”
 
    누구의 시인지 아십니까? 그 유명한 왕십리중앙교회 목사의 시입니다. 그냥 웃으시면 됩니다.
 
    ‘그리움’, 그 낱말 자체에 어떤 아름다움, 향수, 애틋함이 묻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서로를 향해 이런 그리움을 갖고 산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런 그리움이 있어야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멀리 떠난 이, 그리움이 없다면 기다림도 없습니다. 때가 되면 오겠지, 시간 되면 오겠지 하는 것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군대 간 아들, 공부하러 외국에 나간 딸, 돈 벌러 먼 타지로 떠난 남편, ... 사랑하는 이들이 먼 곳에 있다고 무작정 기다려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움과 기다림, 우리를 참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남 보듯이 보는 게 아니라 그리움으로 기다림을 만들고, 마침내 상대방을 꽃 본 듯이 바라볼 때, 그 행복함은 엄청나게 커질 것입니다.
 
    2.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사도 요한이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록, 마지막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확실한 이야기란 뜻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런 확신 속에 사도요한의 증언이 시작되는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면서 뚜렷하게 반복,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4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절,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반복되는 내용이 있죠? 장차 오실 이!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장차 올 자!
 
    책은 언제나 처음과 끝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그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건지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책의 서론과 결론만 읽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책의 첫 내용은 뭔가요?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렇다면 성경의 마지막은 뭔가요? 잘 모르겠지요? 바로 이겁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0-21)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러니까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약속하고 있는 건가요? 주님의 재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재림은 신약성경 총 260장 안에 318번, 절 수로는 매 25절마다 한 번씩 언급되고 있는 셈입니다. 왜 이렇게 많이 언급되었을까요?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마라나타(μαρανατα),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3.
    그러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러셨습니다, 기다리라고. 오시지도 않을 거면서 기다리라고 할리 만무합니다.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기에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그것도 어떻게 오시는가 하면 도적같이, 즉 아무도 모를 때, 예상치 못할 때 오신다고 하였다.(계3:3) 그러면서도 주님은 깨어 기다리라고 하셨다.(계16:15)
 
    그런데 좀 이상하죠? 아니 도적같이 오신다며, 아무도 모를 때 오신다며 어떻게 깨어 기다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말씀은 자지 말고 맨날 철야하라는 게 아닙니다. 주님에 대하여 그리움을 갖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도, 그리스도인의 힘은 어디서 올까요? 아니 사람들의 힘은 어디서 올까요? 그리움에서 옵니다. 기다림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 사랑에서 옵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습니다. 아깝습니다. 싫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몰려온다면 별의 별 일을 다 합니다. 힘이 어디서 났는지 기운이 납니다.
 
    ‘주님고대가’란 찬양이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무식한 아낙네가 지은 노랫말이 아닙니다. 배울 거 다 배우고, 나이 먹을 거 다 먹고, 점잔티 점잖은 중년 남자, 목사님이 지은 노랫말, 찬송가사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님의 작품입니다. 신파조 같은 것을, 쑥스럽고도 멋쩍은 것을 이 분은 이렇게 태연히 노래를 합니다. 왜?
 
    그만큼 확신하고 있었고, 그만큼 기다리고 있었고, 그만큼 그리움이 컸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힘이 컸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그 힘은 ‘사랑의 원자탄’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슬픈 단조의 노래이지만, 이 찬양을 부르며 성도들은 그 어렵던 시절, 그 핍박받던 시절을 다 이겨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그 때의 시련과 박해, 어려움에 비하면 천국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리 약해졌습니까? 왜 이리 성도의 권세가 없습니까? 왜 이리 쉽게 무너지십니까? 왜 이리 쉽게 변절하십니까? 그리움이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뭐든지 즉각즉각입니다. 기다림? 3-4초일뿐입니다. 우리의 믿음 선배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다림 속에, 그리움 속에 주님을 그리고 또 그리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그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이겨냈습니다. 왜? 주님을 사랑하기에!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면 기다리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믿습니까? 상대의 말도 믿지 못하면서 그 사람과 무슨 사랑을 논하는가요?
 
    4.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인격체의 종교입니다. 어떤 기(氣)나, 도리(道理), 원리(原理)에 의한 종교가 아닙니다. 인격적 만남과 그 인격체와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종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알고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이 세상 끝날 까지 나를 지키시고 동행하시는 교제 속에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관계가 끊어져 버렸다구요? 끝난 겁니다. 그러면 관계가 끊어진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가요?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생각하지만 실제로 교류, 교제, 사귐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옛 연인, 아무리 머릿속에 남아 있어도 실제 교류, 교제가 끊어졌기에 이젠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마치 연애하는 관계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는 감정의 교류가 흐르는 관계입니다. 하루에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성도는 기적적인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요, 위태위태하게 신앙의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예수님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심정일까 물어보지도 않으며 제 멋대로, 제 고집대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매우 놀라운 삶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 신랑 신부의 관계로까지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만큼 친밀감과 교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 종교를 보십시오. 매일 새벽마다 성전 찾아가는 종교가 별로 없습니다. 매일이 뭔가요? 일주일에 한 번 찾아가는 종교도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생각날 때만 찾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매일 찾아갑니다. 매일 새벽, 수요일, 금요일, 게다가 성경공부, 기도회, 특별모임, ... 수시로 찾아갑니다. 어떨 때는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교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고,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왜? 관계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교류요, 정성이요, 사랑입니다.
 
    자,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들, 예수님과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기도로 영성으로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이는 마치 먼 외국에 나간 사랑하는 식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영상 통화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의 사랑과 그리움을 나누던 차에 먼 곳에 간 사랑하는 이가 언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지가 알아서 오겠지 한다고 올 이가 안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관심 속에 빠져있는 나를 보고 오겠다고 한 그이는 얼마나 서운하고 허전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오시는데 아무도 아무도 나와 보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게 예수님 처음 오실 때, 초림(初臨) 때의 이스라엘 상황이었습니다. 태어나실 장소, 베들레헴까지 예고되어 있었음에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의 나라 운운하면서도 실은 메시아 탄생에 대해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은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그래서 그랬는지 그런 서운함조차를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어린 아기로 보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시는데 아기 예수로 오시는 게 아닙니다. 재림주, 심판주, 왕으로 오십니다. 모든 것을 다 느끼시는 이로, 모든 것을 다 보시고 표현하시는 분으로, 특별히 이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종식시키는 절대 권세자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승리의 군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채찍을 휘두르시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공의의 심판주가 오십니다!
 
    5.
    그러기에 어떤 자세로 기다릴까요? 회개합시다. 주님을 맞이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회개하며 기다립시다.
 
    예수님의 초림 때, 사람들은 사는 게 얼마나 바빴던지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도 기다림도 없었습니다. 말은 메시아를 기다린다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회개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어디에서 태어나셨다구요? 말구유! 무슨 뜻인가요?
 
    비어 있는 곳은 말구유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집들은 탐욕과 이기심, 쾌락과 거짓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회개한 인간의 집이 없기에, 회개한 이들이 없기에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이 짐승만도 못했기에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집이 멀쩡하고 겉보기 화려하면 뭐하는가요? 청소가 안 되어 있는데...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음흉하고, 여전히 패역한데...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소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올 것이라 기다리면서 어찌 청소도 안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오늘부터 전 세계 교회는 대림절을 지킵니다. 대림절, 우리는 초림의 예수님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반드시 다시 오마 하신 주님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 예쁘게 정돈된 마음의 방, 삶의 방 하나를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대림절, 성탄절이 되기를 !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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