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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마음으로
2019년 11월 28일 (목) 07:51:08 양의섭 목사 www.cry.or.kr

마태복음 21:23-32
[마]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마]21: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마]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마]21: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마]21: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21: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21: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1.
    몇 해 전, 영국의 주간 신문 ‘The British Weekly’에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투고하였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설교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나는 거의 빠짐없이 30년 이상을 교회에 다닌 사람으로 2천 번 가량의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개의 설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목회자들이 설교 말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른바 설교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 글이 실린 후 몇 주간에 걸쳐 별별 반응과 응답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신문에 실렸고, 그 주간 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토론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보낸 다음의 글이 신문에 실리면서, 그 모든 소리들이 잠잠해 졌다고 합니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이 된 사람으로 그 동안 32,850번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아내가 요리해서 차려준 음식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많은 음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먹은 음식의 식단을 단 한 가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나에게 그 음식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나는 주일 설교에 번호를 붙이는데, 오늘 설교가 1289번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왕십리 중앙교회에 부임하여 주일 설교를 1,289번 했고, 수요 예배 설교까지 친다면 약 2,578번의 설교를 여러분은 그 동안 공(公) 예배 때마다 내게서 들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 새벽설교를 일주일에 4번씩 했으니 25년 동안 5,200번을 들었습니다. 수련회, 세미나 등등에서 한 것은 빼고 충실하게 예배를 드린 분들은 그동안 내게서 들은 설교는 총 7,778회 그 이상입니다. 그런데 제 설교 중에 정확히 기억하는 게 있습니까?
 
    많은 이들이 못할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 때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버립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우연히 겉장이 떨어져 나간 어떤 설교지를 발견하였습니다. 무슨 설교인가 싶어 읽어보았더니 너무 은혜가 되는 설교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은혜스러운 설교를 했을까 해서 떨어져 나간 겉장을 찾았더니, 누구 설교? ... 내가 설교를 해 놓고는 나도 기억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억 못 한다고 설교가 과연 무가치한 일인가요?
 
    오래 전에 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교회를 옮겨야겠는데 좋은 교회 한 곳 소개해 줘.” “아니, 지금 출석하는 교회가 있잖아?” “있기야 하지. 그런데 목사님 설교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아. 좋은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 없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짜식, 그러면 왕십리중앙교회로 올 것이지.”라고 속으로 그랬습니다.
 
    설교에 좋은 설교 나쁜 설교는 없습니다. 다 자기 스타일로 인한 느낌이요 평일뿐입니다. 그 교회, 그 믿음 공동체의 스타일과 영성에 맞는 설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는 올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 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설교를 준비해서 선포했다고 해서 다 성도들의 마음에 남는가요? 거의 대부분 잊힙니다. 그러면 그렇게 선포한 설교들이 다 잊혔기에 헛것인가요? 아닙니다. 그 어떤 이가 고백했듯이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설교를 통한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 영혼은 이미 고사(枯死)되었을 것입니다.
 
    양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양 목사를 통한 주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 목사를 통한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여러분의 삶 속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순간순간 주일마다 주신 그 말씀들이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축복하셔서 주신 하늘 양식으로 여러분의 영을 강건케 했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한 나 자신도 기억 못하는 것은 그것은 내 설교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이기에 그러한 줄로 믿습니다. 주일마다 주시는 하늘 양식이 여러분의 순례 길에 하늘의 만나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리곤 묻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의 출처를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 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따질 것이요, 단순히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그들의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 모두가 세례 요한은 하늘로부터 온 참 선지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난처한 질문에 그들은 대답을 하는데, 매우 정치적인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왜 모르겠습니까? 소신이 없는 것뿐입니다. 대답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백성들의 시선이 무서워 모른다고 거짓 대답을 한 것뿐입니다. 우린 이런 유의 대답을,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엔 소신도, 철학도 없이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는 비겁한 정치인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러한 태도에 예수님은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어떠한 질문이라도 자상하게 대답해 주시던 주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곤 연관이 없는 듯한 질문을 하나 던지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더니 이 아들은 “예”하고는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어요’하더니 후에 뉘우치고 갔는데,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습니까? 면전에서 ‘예’하고 가지 않은 아들인가, 아니면 ‘싫어요’하고는 후에 뉘우치고 간 아들인가요?
 
    예수님의 결론이 이렇습니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4.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뭘 말해 주고 싶은 걸까? 뚜렷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나아갈 때는 순진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의도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지만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에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한 질문이요 비판입니다. 참된 길을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해답은 이미 갖고 있으며 다만 시비 붙기 위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의도가 나쁩니다.
 
    정말 몰라서, 정말 바른 길을 찾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시빗거리를 찾기 위해, 자기 생각을 굳히기 위해, 자기만족을 위해 묻고 또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지 않으십니다.
 
    가끔, 기도하는데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이들을 만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데 시원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는 이들을 만납니다. 왜 그럴까요?
 
    자세가 틀렸습니다. 트집이나 잡으려 하고 시비나 걸려고 하지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에 응답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왜, 왜, 왜?’하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며 성경을 뒤적이는 데,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 그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기도하는 의도, 성경을 뒤적이는 자세를 점검하십시오. 순종치 않으려는 자세엔 응답이 없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엔 컴컴한 공허함만이 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순종하는 마음과 구도적인 자세가 없이, 나쁜 의도로 주님께 나와 질문했기에 주님께서 대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순수하고도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가 보십시오. 주님께서 덥석 안아주시고, 내 모든 궁금증을 성령의 감동 속에 확 다 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제대로 안기기만 한다면, 그 평안함 속에 모든 것이 다 풀릴 것입니다. 그만한 순진함이 여러분의 영성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5.
    그 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땐 회개와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회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어떻든 간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이 옳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기분이 나빠서 ‘싫어요’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후에 회개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이 옳습니다. 면전에서는 순종하는 체 하고는 뒤에 가서 배신하고 불순종하는 아들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세리와 창녀들이 의롭다 자처하며 사는 대제사장과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여기서 ‘들어가리라’는 원문에 보면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그들이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말씀을 전파할 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는 세례 요한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어떤 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중입니다. 자칭 의롭게 산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아직도 천국이 요원하기만 한데, 추잡하다, 더럽다 여기던 세리와 창녀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삶에서 천국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이를 두 눈으로 보면서도, 세리와 창녀들이 눈물 뿌리며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도 끝내 자신들은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회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쿵저러쿵해도 그 목적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 변화는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회개는 초신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목사건 장로건 집사, 권사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겐 회개 없인 천국도 없습니다.
 
    회개가 사라진 심령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 같은 마음입니다. 완악해지고 완고해져서 말씀이 더 이상 그의 삶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에겐 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에 은혜의 세계가 활짝 열립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했지 자기들은 도무지 회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이미 어느 수준에 올라선, 천국은 맡아놓은 당상인 양 말씀에 대한 회개와 순종은 자기들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늘 타인들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과연 말씀을 지키는 지 아니 지키는 지 감시하는 역할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와 변화보다도 자기들의 방식, 전통이었습니다. 맨날 권위나 따지고 정통 교회냐 아니냐만 따지니 정작 인간의 변화에 대해선 무디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순수함도 없고, 회개와 순종의 의지도 없이 종교놀이나 하려는 이들에겐 아무리 하나님께 나아와 질문하고 기도해 봐야 응답이 없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늘 자기는 옳다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이에게는 말씀을 줘 봐야 말씀의 능력을 모르니 주나 마나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 현대에 들어서서 신학자들은 점점 회의적(懷疑的)이 되어 가고, 도리어 과학자들은 신앙적(信仰的)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신신학(死神神學)까지 나왔음에 반하여 과학자들 세계에서는 ‘창조과학회’가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의도가 다르기에 그렇습니다! 학문적 성취를 위해, 따지고 의문을 던지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은총도 없고 응답도 없을 것이나, 그러나 본래 따지기 좋아하는 과학자이지만 성경을 대할 때는 하나님을 향한 순진한 마음으로 접근해 가기에 그 순수함, 그 단순함에 주님의 응답과 은총이 내려 그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그 순수함에 성령의 감동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6.
    몇 해 전, 어느 권사님 댁에 갔더니 방의 경대(鏡臺) 위에 커다란 아기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손주는 아니고, 백인 아기 사진인데, 아주 해맑은 미소로 웃고 있는 아기 사진이었습니다. 이상한 듯 쳐다보는 나에게 권사님이 설명하십니다. 요즘, 자신이 늙어 가는 게 부쩍 느껴지는데 제발 주책 부리지 말고 아기처럼 되었으면 해서 맑게 웃는 아기 사진을 붙여놓고 매일 바라본답니다.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18:16)
 
    한 마디로,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서십시오! 순종할 마음의 자세를 갖고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위에 변화되는 이들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되고픈 열망에서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천국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든 종이 순종하겠나이다 하는 자세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가십시오. 설령 주님 앞에서 ‘싫어요’했다 할지라도 후에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금 순종의 자리에 나아가십시오. 어린아이 같은 순박한 믿음에 순박한 은혜가, 놀라운 은총이 풍성하기를!
 
    “언제나 내 모습 / 너무나 부끄러워 / 무릎으로 주님께 / 기도로 가오니 / 나 홀로 서 있는 / 죽은 내 영 깨우사 / 주님만 나를 깨워 / 내 영 살게 하소서 /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 내 안에 계시고 /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 나를 세워 주소서.”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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