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19.10.17 목 18:10
 
 
전체기사  기사모아보기 후원방법
> 뉴스 > 목회
     
이게 다인가 했는데...
2019년 06월 19일 (수) 11:00:56 양의섭 목사 www.cry.or.kr

생명의 말씀 : 사도행전 18:24-19:7
[행]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행]18: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행]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행]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행]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행]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행]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행]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1.
    설교는 잘 들어야 합니다. 그냥 ‘목사님, 오늘 나를 한번 감동시켜보세요’하는 자세로 있으면 분명히 좁니다. 나는 말이죠, 설교 시간에 조는 것은 설교하는 목사 책임이라고 믿던 이입니다. 그래서 졸지 말라고 우스갯소리도 하고, 별의별 제스추어도 다 해 왔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조금 변했습니다. 성경을 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구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모두가 집중하여 한 글자라도 놓칠까봐 주목하였습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말씀을 선포할 때 백성들은 모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쳐 잡고 선 채 들었습니다. 이 전통이 동방정교, 러시아 정교회에 그대로 있어서 그들은 여전히 두세 시간의 예배를 서서 드리더라구요. 그들의 예배당 안엔 의자가 없었습니다.
 
    신명기 6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국민교육헌장이라고 하는 쉐마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데, 대충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요? 설교를 들을 때는 집중하여 들으십시오.
 
    한 할머니가 교회에 갔다가 화를 내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할머니는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도무지 못마땅하다고 화를 내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 했더니 목사님이 설교 내내 입에 올리기도 망측하게 ‘소꼭지를 생각하지 말고,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무슨 소린지 몰라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웃으시며 그러시더랍니다. “허, 그것 참. 소극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설교였는데 ...”
 
    2.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두 사건이지만, 내용과 의미는 같은 맥락의 것입니다.
 
    먼저 18장의 사건, 에베소에 아볼로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 역사에서 아볼로는 특이한 사람인데, 그의 모습을 조명해 봅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인 도시 명으로, 당대 세계적인 큰 대학과 도서관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학문의 도시였습니다. ‘북 아프리카의 아테네’라고 불릴 정도로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도시민 3/5이 유대인으로,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이 융성한 곳입니다. 그 결과, 히브리어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이 탄생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때 구약 성경은 거의 모두 이 헬라어 구약 성경인 70인역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아볼로, 이렇게 소개됩니다.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 능통하였답니다. 즉, 구약성경에 능통하였답니다.
 
    그런데 그를 추가로 소개하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말하고 가르쳤답니다. 그게 뭘까요? 주의 도를 배웠다는 것은 뭘까요? 요한의 세례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인상이 너무 깊어서 그가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그 요한이 생전에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철저한 회개를 가르쳤고, 아울러 자기 뒤에 메시아가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고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하였으며, 그 후 얼마 못되어 체포당했고, 헤롯에 의해 억울하게 참수(斬首)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긴 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생전에 예수님을 증언하기를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이 사람, 예수라고 증언한 것뿐입니다. 그 후에도 세례 요한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가르침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구약 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아 예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죽음 이후의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볼로는 바로 이러한 세례 요한 파를 통해 세례를 받고,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구약성경을 통해 예언된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아볼로는 예수님에 대해 정말 말을 잘 하였습니다. 언변이 뛰어나고 구약 성경 지식이 해박했다고 하니 얼마나 말을 설득력 있게 잘 했겠습니까?
 
    게다가 그는 철학을 공부하고, 수사학을 공부했기에 그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와서 구약 성경 지식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정말 열정적으로 기막히게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볼로의 설교엔 뭔가 허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뭔가가 빠졌습니다. 2% 부족했습니다. 그게 뭘까요? 이를 듣고 있던 믿음의 부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추방된 유대인 부부로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 체험을 한 사람으로 평생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헌신적이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던 평신도 부부였습니다.
 
    이 부부가 아볼로의 설교를 들으며 뭔가 허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히 풀어 가르쳐 주었습니다.
 
    뭘 더 정확히 풀어 가르쳐 줬을까요? 세례 요한이 보지 못한 것, 세례 요한이 경험하지 못한 것,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부활, 승천의 권세,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 ... 권세 있는 성도의 삶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번 이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아볼로,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공부를 했습니다. 박사 중에 박사입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예수를 증거 할 정도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지극히 평범한 부부, 그것도 브리스길라, 부인의 이름이 남편 아굴라 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보아 부인이 더 열정적으로 가르친 것으로 보입니다. 당대 대 학자인 아볼로가 당대의 상식으로 볼 때 불학무식한 여인네에게서 복음을 배웁니다. 놀라운 겸손입니다! 참 신앙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모습입니다.
 
    19장의 장면으로 갑시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바울이 에베소에 왔습니다. 그 곳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합니다. 이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했고, “요한의 세례니라”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도 여전히 아볼로와 같은 세례 요한을 통해 지식적으로 아는 이들이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예언된 예수만 알뿐입니다.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알지도 못한다고 답합니다. 성령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존재는 이미 구약 성경에 나타나기 때문에 압니다. 다만 그 성령의 오순절 강림, 그리고 그 성령의 뜨거운 역사와 엄청난 은사 베푸심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예수님을 다시 전하여줬고,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사도 바울이 안수하자 놀라운 성령 세례를 체험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는데, 그 증거로 방언이 터져 나오고, 예언을 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 뒤로 이들은 어떤 이로 변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론적인 신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권세 있는 성도가 되어 권위 있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3.
    오늘 우리는 이것을 고민해 봅시다. 아볼로, 그리고 에베소의 그 제자들은 뭐가 문제인가요? 그들도 ‘예수’를 말합니다. 심지어 ‘예수’를 설교합니다. 그런데 왜 신실한 신도들이 볼 때 문제가 느껴지는가요?
 
    본문에서 이런 문구가 내 눈에 들어옵니다. 18:25절에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예수에 관한 것을 말했답니다. 이들은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예수에 대해 들은 것, 예수에 대해 공부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안다’는 단어는 의미가 좀 다른 경우들이 많습니다. 안다 해도 이름 정도 아는 이, 아니 그 이상으로 내 신상 정도 아는 이, 그것을 넘어서 내 속까지 아는 이가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가 어느 날 학장님으로부터 조만간 남영동에서 전갈이 갈 테니 고분고분 하라는 사전 주의를 받았습니다. 남영동이란 당시 중앙정보부의 모처(某處)로, 고문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마침내 어떤 이가 날 만나자고 합니다. 그런데 남영동이 아닌 광화문 새문안 교회 옆 옛 교보 빌딩 지하 다방이 있는데, 거기서 만나잡니다. 누군지 얼굴을 모른다니까 와 보면 안답니다. 그래서 약속된 시간에 갔더니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넓은 다방 안 저쪽에서 손을 흔드는 이가 있습니다. 처음 보는 이였는데, 앉자마자 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나에 대해 사돈의 팔촌까지 쫘악 꿰고 있었습니다. 내가 할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모릅니다. 중앙정보부에서 나에 대한 정보 수집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했지만, 나에 대해 사돈의 팔촌까지 말할 수 있지만, 내가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지까지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는 나를 모른다. 내 마음이 어떤지, 내가 뭘 고민하는지, 내게 어떤 꿈이 있는지, ... 그는 나와 교제가 없었기에, 나와 살아보지 않았기에 나에 대해 ‘안다’하지만 그 정도, 차원은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가요! 교회 다니지 않는 이들도 예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아는가요? 예수님을 체험해 보았는가요?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에 관하여 말할 뿐, 예수를 증언하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기를 묵상하다 보면, 솔직히 마음에 드는 생각은, 욥의 3 친구들의 말이 옳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욥의 3 친구들과 엘리후의 말이 더 경건하고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욥22:21-22,29)
 
    욥의 말이 아닙니다. 친구들의 말입니다. 이렇게 욥의 친구들의 말은 거의 다 은혜스럽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들입니다. 반면에 욥의 말들은 거의 항변에 가깝습니다. 억울하다고 울고불고 항변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은 욥의 친구들의 말이 더 옳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욥을 편들어 주십니다. 욥의 말은 어떻게 보면 불손하고, 교만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어 주십니다. 왜? 욥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었습니다. 욥이 고민하는 것은, 자기가 고통당하는 것도 고민이지만, 그것보다 더 고민스러운 것은 자기와 함께 하던 하나님이 어디 가셨는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3-9)
 
    그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하시던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아예 함께 살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한 것 같이 욥도 하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말한 것입니다.
 
    신학자와 경건한 할머니, 누가 더 하나님을 잘 아는가요? 누가 더 예수님을 잘 아는가요? 차원이 다릅니다.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예수님을 말하지 말고 자신의 삶 속의 예수님을 말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사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사십시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날마다 나를 이끌어 주셔야 하고, 내게 감동을 주시고, 말씀을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성령님, 나를 이끌어 주십시오. 내 안에서 역사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제게 허락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해 말하는 이가 아니라 예수의 삶을 사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4.
    세례 요한의 제자들, 구약 성경에 대해 능통하고, 말 잘하고, 적절히 예수에 대해 말도 하고, 그러면서도 고상하고, 품위를 지키고, 점잖고, 클래식컬(classical)하고, ...
 
    그런데 뭔가가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희생, 그 고난, 그리고 그 영광의 부활, 이를 증언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도덕성과 윤리성만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도덕 선생입니다. 완벽한 성인입니다.
 
    그러나 뭔가 빠졌습니다. 매우 중요한 게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빠졌습니다. 그 죽음과 부활과 성령의 권세가 빠졌습니다. 폼은 그럴 듯한 기독교인인데, 예수의 생명력(生命力)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름은 이어갈 수 있습니다. 명맥은 이어갈 수 있습니다. 평생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긴 힘듭니다. 그렇게 해선 세상은커녕 내 가정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이는 성령 세례를 사모하십시오.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세례 받고 신자로 살긴 사는데, 에베소의 제자들처럼 성령이 계심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말은 잘 하는데 능력은 없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자, 성령의 은사가, 즉 성령의 선물이 제자들에게 쏟아져 내립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입신을 하고,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고, 인내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하고, ...
 
    그리스도인으로 은사를 안 받은 이가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 형편과 성격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여러분의 신앙을 증진시킬 수 있는, 믿음의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사가 무엇이든 이름으로만 사는 신자가 아닌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영적 카리스마가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5.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신앙적 지식과 고상함, 클래식하고도 인텔릭한 점잖은 신앙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더 놀라운 영적 세계,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는 영적 권세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느껴지는 영적 권위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성령 세례를 받으십시오. 겸손하게 자기를 비우고 성령님의 역사와 감동을 초청하십시오. 생각 없이 사는 이에게 성령의 역사와 권세가 임하는 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며, 사모하며, 섬기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십시오. 성령께서 생각하게 하십시오. 성령께서 나를 통해 행하게 하십시오.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의 역사와 감동을 따라가십시오!
 
    여러분의 경건 시간에, ‘성령의 세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여러분의 기도의 골방에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을 기름 붓듯 부으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 소리(http://www.cry.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가장 많이 읽은 뉴스
아, 통합측 총회여! 김삼환 목사의
예장통합, 명성교회에 굴복
멈추지 않는 교인 수 하향곡선, 한국
예장합동 총회①개막 전 '첫 여성 안
성령의 지배 받는 삶
가을 총회를 준비하면서
자식농사 망치는 10대 비결
9월의 선교편지
제 4강 요엘 2:18-32 하나님의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최근 올라온 기사
제 2강 아모스 1: 9-2: 3 무...
‘전도왕’들의 한 가지 공통점
우리가 그런 교회가 되자
허목과 송시열 이야기
기도소리를 높이라
받은 은혜를 가치 있게
‘성자 목회자’들이 ‘두목 목회자’로...
하나님의 능력은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
신간(혐오를 혐오한다)
제 1강 아모스 1:1- 8 이웃 나...
편집자가 추천하는 기사
[NCCK 공동선언문 파문] 기독자교수협은?
이만희 "나는 구원자 아니다"
옥한흠 목사 장남 "오정현 목사는..."
변방 목회 40년
지금은 절망 아닌 기다림의 시기
회사소개 | 후원안내 | 저작권보호 | 광고안내 | 제휴문의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제호 크리스천웹진 소리 | 등록번호 경기도아00217 | 등록연월일 2009. 7. 3 | 발행인 김태복 | 편집인 김태복
발행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986-1 두산위브아파트 101동 506호 | 전화 및 FAX 031-577-9411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태복
Copyright 2007 소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cry.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