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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바른 성서관을 세워야
2019년 05월 15일 (수) 08:25:35 김태복 목사 webmaster@cry,or.kr
한국교회, 바른 성서관을 세워야(4월 30일, 은솔아카데미 설교)
(눅4:18-19)
 
제가 1967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풀리지 않는 문제가 기독교 국가에 가까운 미국에서 흑인 노예를 매질하는 장면을 보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 주인의 모습 하며,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최고 수준에 이른 독일에서 600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만행(蠻行)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쿤타 킨테의 이야기를 담은 ‘뿌리’라는 미(美) 드라마를 보면, 아프리카 흑인들이 백인들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오는 동안 배 밑창에서 죽어 나가고, 백인의 농장에서 매질에 시달리면서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거나 성폭력 당합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노예들이 매질을 당하는 현장에서 백인 주인이 성경을 읽는 모습입니다.
 
2004년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잘린 머리카락들과 그것으로 만든 카펫, 산더미처럼 쌓인 어린아이들의 신발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땅, 신교(新敎)의 중심지, 신학과 예술, 철학의 중심지였던 독일에서 이런 천인공노할 잔혹한 나치주의자들이 배태(胚胎)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공통점은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교훈보다, 구약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게는 복과 은혜, 성공과 승리를 베푸시지만, 주의 나라를 위협하는 이방인들에게는 가혹하게 진멸하시는 분처럼 비춰 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살해된 엄청난 수의 이집트의 장자들, 여리고성 사람들, 가나안 일곱 족속들 등 구약에는 이방인들의 피 냄새로 진동합니다.
 
1863년 링컨이 노예제도 폐지를 선언했지만, 지금까지 인종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바로 구약에 근거합니다. 인종차별의 근거는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사건입니다. 홍수가 너무 참담했는지 노아는 만취해서 나체로 천막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들 처음 목격한 아들 함은 밖에 나가 형과 아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집어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노아는 술이 깨어 이 사실을 알고 창9:25에서 함을 저주하여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해석이 셈은 아시아인의 조상이고, 야벳은 유럽인의 조상, 함은 아프리카 흑인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남부인들은 노예제도의 근거로 레25:44 “네 종은 남녀를 막론하고 네 사방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사올 것이며”라는 기록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수많은 종교전쟁이나 십자군 전쟁,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시 대통령의 부자가 중동과 아프카니스탄에서 끔직한 전쟁을 벌인 근거도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인자하고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너무나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님을 로마제국의 왕궁이나 대제사장의 저택에서 탄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강원도 만한 작은 나라, 끝없이 강대국의 침략 받던 약소국, 로마 식민지였던 유대 땅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짐승 냄새가 진동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왜 이런 누추한 곳에 태어나게 하시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성장하게 하셨습니까?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왕궁이나 제사장 저택, 혹은 귀족들이나 명문 가문의 비단 침구에서 출생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비천한 자들이 감히 찾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마구간에 누워 계시니 남루한 목자들도, 나그네였던 동방박사도 찾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물이 낮은 곳으로 모이는 것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 계신 예수님에게 모든 인종이나 빈부귀천, 소외된 자나 병든 자들이 그 앞에 와서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나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눈먼 자들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들에게 자유롭게 하려고 오셨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칭 거룩한 자들인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율법사들과 관계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천한 어부들을 중심으로 제자를 삼으시고 온갖 절망적인 병자들, 그리고 유대인들로부터 완전 소외된 세리나 창기들과 교유(交遊)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모든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 당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마5:17)을 통해서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반 토막에 불과한 구약만 가지고는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시작한 이슬람교를 보십시오. 어린 청소년들을 무자비한 자살폭탄으로 만들고, 무자비한 율법으로 여성들을 천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됨으로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신약보다는 구약에 더 기울어 있는 느낌입니다.
 
2년 전인가, ‘뉴스앤조이’라는 기독교 주간지와 인터뷰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제게 “과거 목회를 돌아보시면서 가장 후회되는 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빈촌(貧村)에 위치한 교회이기 때문에 빈자와 병자, 실패자들이 많다 보니 소망과 용기를 준다는 의미에서 복과 은혜, 성공과 승리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함으로 너무 기복주의 교인들을 양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후회가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구약에는 복 받는 성경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신약은 별로 없습니다. 특별히 신28장에 가면 빈촌교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3-6절에 보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얼마나 복이 임하는지 광주리와 반죽 그릇도 받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교인들은 큰 소리로 ‘아멘’하면서 얼굴이 활짝 핍니다. 그러나 십자가 삶을 강조하거나 받은 은혜와 축복만큼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면 예배 후 악수하는 손이 차겁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목회가 십자가와 부활 없는 구약식의 기복주의 메시지만 강조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입니다.
 
진정한 신자의 모습은 마16:24에 나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맡겨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죽고 부활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자기중심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만 받으려 합니다. 이처럼 구약에만 머물고 있는 기복주의 신자들이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이 복과 은혜, 승리와 성공만 강조한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은퇴 후 구약의 법을 ‘약자 보호법’이라고 해석하는 성경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7일 안식일과, 매 7년마다 안식년을 주어서 땅도 쉬게 하셨고, 안식년이 7번 되는 해를 희년(稀年)이 되면 종을 해방시켜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중심인 십계명도 잘 살펴보면 약자들을 보호하는 계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1-3계명을 보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땅의 신은 바알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진 채 간구하는 것을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요지이다.
 
그러나 바알은 어떠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자기를 경배만 하면 번영과 창대의 복을 준다는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바알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성공과 복을 받으려는 기복주의자들이나 강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이었습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쟁하면 약자들은 강자들 앞에서 백전백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우상을 금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4계명에서도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아무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쉬지 않고 종이나 가축을 부려 먹으려는 강자들에게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 법을 강조하고 있다는 해석이 옳은 것 같습니다.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도 약자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늙으신 부모나, 살인이나 간음 당하는 자, 도둑질당하는 자는 다 약자입니다.
 
99마리의 양을 가지고도 가난한 이웃의 한 마리의 양을 탐하는 자, 자기 사욕을 채우기 위해 거짓증거를 하는 자는 다 강자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지 않은 구약, 약자 편이 아닌 강자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구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런 해석은 엄청난 문제점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단 94회 총회장을 지낸 양곡교회 지용수 목사는 지난 1월 13일 설교하기를 “제사장 아들이 제사장 되는 건 세습이 아니라”고 하면서 교회 세습을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아니, 신약 어디에도 목사가 제사장이라고 언급된 곳이 없음에도 그런 해석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그 목사가 신학적으로 미숙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구약을 중심해서 너무나 번영주의 신학에 빠져 있고 이런 신학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한국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점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바로 서려면 우선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재해석함으로 한국교회 성서관을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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