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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그 아름다움”
2019년 04월 10일 (수) 08:09:05 양의섭 목사 webmaster@cry,or.kr

생명의 말씀 : 누가복음 23:39-43
[눅]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1.
    영국에서 열린 비교 종교학 회의에서 세계 각국의 종교 전문가들이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기 위해 토론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갖고 있는 독특성을 여러 가지 내놓고 다른 종교와 비교하며 하나씩 지워 나갔습니다.
 
    성육신?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야기는 타 종교에도 있습니다. 부활? 본질상 조금 다르긴 하지만 죽은 자의 환생 이야기 역시 타종교에 있는 것입니다. 방언, 입신? 타 종교에도 있고, 병 치료? 역시 다른 종교에도 다 있습니다. 정의, 성결, 신령함, ... 다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토론이 길어지고 있는데 유명한 신학자 C. S. 루이스가 방을 잘못 찾아 그 곳엘 들어왔습니다. 방안의 열띤 분위기에 루이스 목사는 물었습니다. “토론 주제가 뭡니까?” 이에 동료들이 전 세계 종교 중에 기독교만이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는 중이라고 말하자 루이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거야 쉽죠, 은혜 아닙니까?”
 
    2.
    은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놀라운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개념은 인간의 모든 본성과는 상반됩니다. 우리는 뭔가를 해야, 도를 닦아야, 금욕을 해야 하나님의 사랑, 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의 법전, 모두 이러한 인간의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뿐입니다.
 
    이 은혜의 하나님이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납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는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행악자 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행악자 둘은 모두 실제로 악을 범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행악자라고 합니다. 근데 어떤 악을? 복음서에 의하면 이들은 아주 유명하고도 악한 강도들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모두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 정도의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두 행악자, 강도 사이에 예수님께서 매달리셨습니다. 여기엔 당대 종교 지도부의 악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두 행악자 사이에 예수님을 세움으로, 예수님 역시 행악자로 비쳐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두머리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악한 인간의 의도를 뛰어 넘어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한쪽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참 못되고 뻔뻔한 인간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가 없습니다. 그저 단순히 자기 살 길만 찾을 뿐입니다.
 
    이렇게 한쪽 편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할 때, 다른 편 강도는 이런 태도를 보입니다. “...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강도는 그나마 하나님의 공의를 압니다. 자기들이 한 짓도 압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자기들이 지금 당하는 고통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평상시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들었고, 어쩌면 멀찍이서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것을 봤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그 예수님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는 그의 다음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나는 이 사람이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잘 나갈 때,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불치의 병을 척척 고쳐주고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환호할 때, 오병이어의 역사를 이루었을 때 이런 고백을 했다면 이해가 되는 고백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입성할 때, 이런 고백을 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요? 어떤 처지인가요? 자기 몸도 책임지지 못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나 자기나 같은 처지입니다. 꼼짝 없이 당했습니다. 꼼짝 없이 옷이 벗겨졌고, 꼼짝 없이 매질을 당했고, 꼼짝 없이 십자가를 졌고, 꼼짝 없이 고통 중에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꼼짝 없이 사람들의 욕설을 듣습니다. 같은 고통, 같은 괴로움 속에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처지와 다를 바 없는 그 예수를 향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간청합니다. 이거야 말로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건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는 차원이 아닙니다. 참된 구원에 대한 갈구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강도가 요청한 것은 훗날에, 아주 먼 훗날에, 이 세상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 때, 이렇게 당신 곁 십자가에서 죽은 이 죄인을 기억해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예수님은 ‘아니다, 그 날까지 갈 것도 없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오늘 구원을 선포하시고, 오늘 천국에 함께 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왜 이런 축복을 하시는가요? 그가 구원받아야 할 사람임을 아셨습니다. 어떻게? 자기나 나나 별 차이 없이 고통당하고, 괴로움 당하고, 멸시 당하는데, 그럼에도 당신을 향한 그의 믿음의 고백 하는 걸 들어보니, 이건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기로 택하신 백성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란 고백을 했을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인간이 아닌 내 아버지시니라’하셨던 것처럼, 그런 같은 느낌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그런 고백을, 그런 간청을 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감동이 예수님께 찾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 장면은 기독교의 은혜를 매우 독특하게 표현해 주는 장면입니다. 세상의 법으로 이런 강도가 어찌 죽을 때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는 그렇게 잔인하게 죽어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죄인까지 회개할 때, 손을 내밀 때 주저하지 않고 손을 붙잡아 주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3.
    하나님은 은혜이십니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목사인 ‘필립 얀시’의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영성훈련, 금욕, 신학 지식, 의로운 명분을 위한 성전, 그 무엇도 소용없습니다.
 
    또 은혜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약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종차별, 오만, 포르노, 간음,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그 분의 사랑은 그대로다.”(Philip Yancey,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그렇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그 무슨 노력을 해서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내 상태와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무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제한하려 하지 말고, 그 무한한 은혜의 바다에서 은총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범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범죄는 분명 하나님께서 눈살을 찌푸리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진 않습니다.
 
    필립 얀시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각 사람을 끈에 매어 붙들고 계신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끈은 끊어진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매듭을 지어 끈을 다시 묶는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레 그 분께 더 가까워진다. 우리 죄가 계속해서 끈을 끊을 때마다 하나님은 매번 다시 매듭을 묶어 우리를 끌어당기신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그러기에 로마서는 증언합니다.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안에 삽시다.
 
    ‘데이비드 씨멘즈’(David Simans)라고 하는 상담학자가 있습니다. 일생동안 많은 사람들을 상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많은 상담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라고 하는 잡지에 논문으로 실었는데, 그 논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많은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정서적 문제의 주요 원인은 첫째,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고 둘째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풀 줄 모르는데 문제가 있다. 사랑은 베풀면서 참 사랑을 깨닫고 배우게 돼있는 것인데 말이다. 베풀지 않으니까 받은 사랑도 모르게 된다.”
 
    무슨 소린지 아십니까? 복음적이라 하는 이들, 오래 믿었다, 경건하다, 말씀적이다, 보수적이다 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늘 긴장되고 때론 심한 죄의식 속에 산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남들을 향해서도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않고, 용서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동시에 이웃들에게도 엄격합니다. 일견 매우 경건해 보이고, 성스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참 사랑을, 그 무한한 은혜를 모르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은혜가 충만한 은혜의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은혜 보다는 비(非) 은혜적인 요소들, 책망, 책벌, 율법과 법 조항들, ... 이런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No!
 
   16세기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이렇게 생전에 썼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요? 은혜! 은혜 없는 성도는 참 성도가 아닙니다. 은혜를 모르는 성도는 그리스도인도 아닙다.
 
    4.
    성경에는 상당히 많이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은혜’라는 단어만 찾아보았더니 275회 나오더라구요. 이 은혜라는 단어가 신구약 성경에 골고루 나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몇 번 나올까요?
 
    누가복음 5회, 요한복음 3회, 총 8회 나옵니다. 너무 적게 나옵니다. 왜 복음서에는 이 은혜라는 단어가 이렇게 적게 나올까요? 내 나름대로 묵상하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이야기 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가 다 은혜입니다. 구태여 어느 하나를 꼬집어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그 귀한 모든 말씀들,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 앞에 나와서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가 어떠한 죄인이더라도, 심지어 현행범으로 사람들이 돌을 들어 쳐 죽이려던 간음한 여인까지 다 용서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은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죄의 저주 아래에 고행과 고행 속에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하나님은 은혜이시고, 그 은혜의 화신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염치없지만 그 죽음의 현장, 숨넘어가는 그 현장에서도 강도가 손을 내밀자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은혜, 그 죽어 마땅한 강도도 막차를 타고 구원을 얻을 정도의 은혜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얻지 못할 은혜가 어디 있는가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난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지켜본 사람으로 자신있게 말하는데, 경건 생활을 잘 하는 의인보다, 은혜를 얻은 죄인의 얼굴이 훨씬 더 밝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이 훨씬 더 맑습니다! 난 차라리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겠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름 중엔 “은혜” 란 이름이 많은데, 대부분 여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왜 여자에게 많을까요? 여자는 언제나 무조건 용서해야하고 베풀어야 하기에 그런 것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이건 성차별입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은혜’ 얼마나 아름다운 이미지인가요! 그런 아름다움을 가지라고 여성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유은혜’라고, 우리를 아름답게 해 줄 한 아기가 태어나 잘 자라고 있습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이십니다. 이 은혜를 누리십시오. 이 은혜를 베푸십시오.
 
    사순절 다섯째 주간,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이번 한 주간, 은혜를, 용서와 사랑을 베풀며 삽시다. 새벽에 일어나 무릎을 꿇읍시다.
 
    아무리 내가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 할지라도, 아니 성자(聖者)라 할지라도 은혜를 모른다면 난 껍데기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늘 생명을 부여하시고, 이 추한 죄인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주시는 그 은혜. 이 부끄러운 죄인을 위해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은혜, 이 은혜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가 어디 있는가요?
 
    이번 한 주간, 이 은혜의 샘에 나아와 모든 것을 용서받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큰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은혜를 베풀며 사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은혜의 정수(精髓),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에 중심에 자리 잡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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