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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그리고 경건
2019년 02월 01일 (금) 10:12:09 양의섭 목사 webmaster@cry,or.kr

(로마서 12:1-2)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오늘 본문,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써서 보낸 편지입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 방문하기 전에 벌써 교회가 서 있던 곳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학, 신앙을 논리적, 조직적으로 기록하여 편지를 보냈는데 그게 로마서입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의 내용,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오늘 본문 12장부터 16장까지는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실천 내용입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아갈 때 제일 먼저, 제일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이 뭘까요? 사도 바울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제일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가짜입니다. 예배드리지 않고 집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들, 가짜입니다. 성도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림에 성공하지 못하는 성도는 신앙생활에서도 실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2.
    그럼 예배에 성공한다는 말이 뭔가요?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란 게 뭘까요? 이상한 소리나 하고 환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것인가요? 이상야릇한 조명과 인테리어로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내어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건가요?
 
    성경 본문을 잘 보면, ‘영적 예배니라’ 앞에 ‘3)’ 이란 숫자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맨 밑에 보니 ‘3) 합당한’ 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적예배’란 단어는 ‘합당한 예배’라고 번역해도 된다는 것인데,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게 더 옳은 번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는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로마서는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증언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랍니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는데, ‘너희 영’을 드리라가 아닙니다. 마음을, 정신을 드리라 하지 않고 ‘몸’을 드리랍니다. 막 굴리던 우리 몸을, 때로는 별 생각 없이 알코올에 절게 만들고, 세상 죄악에 익숙하던 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랍니다. 극장에 가선 2시간도 꼼짝 않고 영화에 몰입하던 몸, 그러나 교회에선 주일예배 1시간도 집중하지 못하고, 비비 꼬이는 그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랍니다.
 
    몸은 평상시 어디에 훈련시키느냐, 어디에 익숙하게 하느냐에 따라 상태가 많이 달라집니다. 오로지 세속적인 것에 익숙해 있는 몸은 거룩함과 신령함을 매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좋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고, 그러한 신령한 것을 좇는 이들과 교제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성도의 교제에 익숙한 이들은 도리어 세속적인 만남, 그러한 시간에 몸이 견뎌내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어디에 익숙한가요? 여러분의 몸은 교회에 오면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은 반응을 보이는가요? 아니면 도살장에 끌려온 소 같은 반응인가요?
 
    3.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뭔지 아는가요? ‘산 제물’이라고 해서 제물이 살아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숨을 쉰다는 게 아닙니다. ‘산 제물’이란 그 제물을 죽여서 그 몸, 각(角)을 떠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의 핵심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성, 자기 의지, 자기의 모든 것을 죽이십시오. 자기 스타일대로만 가기를 원하는 것들을 죽이십시오. 거룩한 시간에 세속을 향하려고 하는 욕망과 의지를 죽이십시오.
 
    주일날, 교회에 오지 않고 골프장 가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찾아가 권면을 했습니다. “집사님, 주일날 교회에 안 오시고 골프장 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러자 이러더랍니다.
 
   “목사님, 예배당에 앉아서 골프장 생각하는 거 보다는 골프장에서 교회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어이구 두야!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며 자기를 많이 죽이는 이에게 가장 큰 은혜가 있습니다. 산 제물로 드려지기 위해 자기를 죽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이 어찌 쉬웁니까?
 
    세상으로 향하던 이 몸을, 세상의 쾌락과 유혹, 욕망에 익숙해 있던 이 몸을, 거룩함보다 신령함보다 자극적이고 짜릿한 세상에 더 확실한 반응을 보이던 이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 위해 좋아하던 그 모든 것들을 죽인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실패합니다. 늘 넘어집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서두에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엄위하심으로 권한다고 해야 권위가 설 건데 ...
 
    그게 쉽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압니다. 넘어질 것을 이미 압니다. 실패할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무당이 회개하고 장로교인이 되었습니다. 근데 이 사람, 매번 예배 시간에 맨 앞에 앉아 좁니다. 무당으로 굿판에서 뛰던 이가 꼼짝 못하고 가만 앉아 예배드려야 하니 어찌 안 졸리겠습니까?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하지만 서서히 졸려옵니다. 그래서 앞에 앉아 맨날 좁니다. 이 사람, 하나님이 싫어하실까요? 천만에! 이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다가 안 된다고 ‘에이, 나는 틀렸어’하고 다시 죄악 속에 뒹굴지 마십시오. 나는 죄악 중에 쓰러질 때, 무서운 하나님 모습보다 큰 자비하심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는 다시 일어납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많이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내가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엄위하심으로 일어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오래 참아주심, 자비하심으로 일어나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합당한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몸, 세속과 죄악에 익숙해있던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단번에 안 되지만 계속해서 내 욕망을 죽이고, 내 자존심을 죽이고, 내 체면을 죽이고, 내 이기심을 죽이고, ...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시기에 불편함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자비하심이 있으니 단번에 안 되었다고 절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우리는 이 작업을 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품안에 안으실 때 껄끄러움이 없도록 계속 힘써가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평생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4.
    아울러 이 예배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본받지 말고’는 ‘쉬스케마티조’로, ‘겉모습을 따라하지 말라, 흉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세대를 흉내 내지 마십시오. 그것이 유행이라고 해서 무작정 따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내적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내적으로, 우리의 속이 변화를 받아야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이렇게 분별하는 삶입니다. 이 다양한 사회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이 자유로운 존재인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뭔지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님”(고전 10:23)을 알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그게 아닌 다른 것이다 하여 결단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은 무조건 안 먹고 안 자고 안 하고 .... 이런 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무조건의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이지 금욕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 특별히 금욕을 할 때에는, 안 먹고 안 자고 안 하고 할 때에는 무조건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분명한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합니다.
 
    남들이, 모든 교인들이 기도한다고 나와서 열심히 기도한다구요? 모두들 봉사한다고 얼떨결에 따라나와 열심히 봉사한다구요? 모습 자체는 아름답지만 경건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든 행위, 행동에는 방향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어디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습관적인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지 분별하며 그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참된 경건입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이런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삶인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갈 수 있는지.
 
    그러기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합니다. 마음을 한 번 새롭게 해 보십시오. 전에 당연시 하던 삶의 자세를 버리십시오. 어제까지 옳다고 여기던 것들을 버리십시오.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자기중심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바꿔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변화를 받습니다.
 
    변화는 그냥 일어나는가요?
 
    종종 이런 기도를 드리는 분들을 봅니다. “강권적 역사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나는 이런 기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강권(强勸), 억지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코를 꿰어 끌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중요한 일,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강권하시는 방법을 쓰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강권 보다는 나에게 감동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리곤 결정하게 하십니다.
 
    5.
    변화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어느 날 갑자기 뒤집어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을 새롭게 하십시오. 구태의연한 생각을 버리고, 그런 마음을 버리고, 정말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마음, 성령의 조명, 성령의 감동을 따라가며 용기를 내어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은혜가 보입니다. ‘아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구나!’하는 주님의 뜻을 내 삶 속에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냥 살지 마십시오. 고민하며 사십시오. 기도하며 사십시오. 물으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뭔지 늘 고민하며 사십시오.
 
    이렇게 사는 것이 경건의 삶입니다. 경건은 폼(form)이 아닙니다. 경건은 세상 흉내 내기를 포기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내적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길을 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정말이지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아 사는 것입니다. 경건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가 아닙니다.
 
    오래 전에 한 때 한국교회에는 청평의 모 기도원을 중심으로 깡패, 건달들이 회개하고 목사가 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도사 시절에, 섬기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이런 류의 부흥사를 강사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첫날 밤 집회를 하는데, 어디선가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몰려오더니 뒷자리에 자리를 쫘악 잡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잘 하지 않던 이들이 찬송을 부르는데 얼마나 일사분란하게 박수를 치며 찬송을 하는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통성 기도를 하는데 예배당이 떠나갈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 목사들이었습니다. 어떤 목사? 주먹세계에 있다가 한꺼번에 예수 믿고 군소 교단에서 목사가 된 이들이었습니다. 큰 형님이 집회한다니까 의리의 사나이들이 다 동원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 책에 보니) 이런 목사들이 한번은 수련회를 가다가 싸움이 났습니다.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이 일어나더니 왕년의 솜씨들을 발휘하여 대판 싸움을 벌였습니다. 폼은 아주 경건한 목사의 폼인데, 내적으로 완전히 변화 하지 못하였습니다.
 
    직함이 경건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직분이 경건을 입증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이기에 경건하다고요? 장로이기에, 권사이기에, 집사이기에 경건하다고요? 천만에 말씀! 직함이 뭐든, 직분이 무엇이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는 삶에 경건은 자리 잡습니다. 세상에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선 아닙니다. 경건이 참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그 경건의 노력이 온전한 성도를 만듭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아가면, 경건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자리 잡습니다.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위적인 경건, 위선적인 경건을 버리고, 자연스레 내 생활에서 예수님이 보이도록 힘써 산다면, 우리에겐 경건이 자리 잡습니다.
 
    6.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겐 기본이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에게만 기본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 만물에는 기본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그것만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본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본은 뭔가요? 하나님을 향한 가장 아름다운 자세, 예배!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가장 선한 자세, 경건!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를 죽이고 죽이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런 제물로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세상을 흉내 내지 아니하고 내적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좇아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대로 살기 위해 힘쓰는 것, 아니, 자기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가기 위한 몸짓, 경건! 그리스도의 향이 물씬 풍기는 경건!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나를 보시고 미소를 지으실 때, 온전한 예배가 드려진 것이며, 이웃들이 나를 보고 예수님을 볼 수 있을 때 온전한 경건이 내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배 그리고 경건, 그것은 우리의 기본이며, 그 기본에 충실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큰 기쁨 속에 좋은 것들로 풍성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올해는 예배와 경건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향기로운 삶으로 복되게 살아갑시다.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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