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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2019년 01월 09일 (수) 09:28:56 엄인영 목사 webmaster@cry,or.kr
(마1ㅣ1-17)
2019년 희망찬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올 한 해 우리 샤론의 교우들의 삶과 가정에 우리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고, 진리 안에서 참 평안과 자유함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새해에는 신약성경을 차례대로 설교하려고 하는데, 오늘부터는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마태복음을 통해 은혜와 진리를 나누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원래 직업이 가버나움의 세리였습니다. 마9장9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곳”은 마9:1절에 의하면 “본 동네”라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 본 동네는 헬라말로 “호 이디오스 폴리스”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사시던 동네, 예수님의 홈그라운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사시던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마4:12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주로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 가버나움은 당시에 매우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들이 그곳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세관이 있었고, 중요한 곳이었으므로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번창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하시면서 많은 이적도 행하시고 하늘의 진리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을 마태는 “본 동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읍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이 마11:24절에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렇게 탄식하신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동네가 가버나움이었는데,그 가버나움의 세관에서 세리로 있던 마태를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9장 10절에,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이렇게 물었습니다. 9절에서 예수님이 부르시니까, 마태가 그 부르심에 따르기로 결단하고 그동안 정들었던 직장동료들을 초대해서 작별인사차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참석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러면서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리들’은 마태의 직장동료인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죄인들은 누구겠습니까? 여기의 죄인들은 세리가 세금을 정해주면, 가서 그 정해준 세금을 받아내는 세금징수관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집달리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가가 각 사람의 재산 정도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경매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거둬 바치겠다는 사람에게 세금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권한을 획득한 자들이 제 멋대로 세금을 매겨서 거둬갔던 갔으니, 얼마나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세금을 안내려고 하니까 세금징수원이 가서 강제로 집행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갑바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갑바이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두려움과 원성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갑바이들을 당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면서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가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세리들과 세금징수원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참석했다가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는 세리였지만,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다음부터는 완전히 과거의 삶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면서 전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그토록 기대하고 고대하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밝히기 위해 기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구약’이라는 말은 ‘옛언약’ 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많은 약속을 하셨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약속은 언젠가 때가 되면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가 다윗의 가문에서 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사11장). 그 메시야는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고,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메시야가 다스리는 세상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살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고, 갓난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 분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미가선지자를 통해서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는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에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뤄졌음을 밝히고 있는 책이 마태복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많은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고, 신약성경의 처음 책으로 마태복음이 배치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연결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마태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으려면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장1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이스라엘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벌써 유대적인 냄새가 풀풀 풍겨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존경과 경이의 대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자손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민족의 시조로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지금도 살아있는 왕입니다. 성지순례할 때 이집트에서 타바국경을 넘어 이스라엘로 넘어가면 제일 먼저 이스라엘의 국기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 국기를 보면, 흰 바탕에 별 하나가 떡 그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별을 “다윗의 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다윗같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뜻으로 국기에 별을 그려 넣고 “다윗의 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다윗은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 이후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하는’ 예수님의 족보가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새해가 되어서 성경을 읽겠다고 큰 맘 먹고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이렇게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하니까 잔뜩 기대하고 성경을 읽다가 “무슨 놈의 성경책이 산부인과일지 같으냐?” 하고 실망해서 덮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길게 늘어놓고 있습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 더라”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별히 마태는 14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게마트리아 계산법’이라고 하는데, 이 계산법은 히브리어의 자음이 나타내는 숫자를 가지고, 히브리 단어의 뜻을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게마트리아 계산법은 당시 유대교 랍비들이 많이 사용했었는데, 저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태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히브리어 자음은 22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자음에 지정된 숫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오는 열 개의 자음은 1부터 10까지의 수를 나타내고, 다음의 8개의 자음은 20부터 90까지의 숫자를 나타내고, 나머지 4개의 자음은 100, 200, 300, 400의 숫자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각각의 단어의 숫자를 매기는 방법을 게마트리아 계산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라는 이름은 달렛 바브 달렛으로 되어 있거든요. 달렛은 4요 바브는 6이요 달렛은 4니까 도합 14가 됩니다. 이렇게 다윗의 이름의 수가 14인데, 놀랍게도 예수님 족보를 세어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가 14대요, 바벨론에서 그리스도까지가 14대 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세히 따져보면 14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14대가 맞는데,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는 17대입니다. 지금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3명의 왕이 빠져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했는데, 이 요람이 열왕기에서는 여호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왕국 왕 아합과 놀아나던 남왕국 왕 여호사밧이 여호람을 낳고, 여호람이 아하시야를 낳았잖아요. 그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칼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여호람의 아내 아달랴가 왕이 되려고 아하시야의 아들들, 그러니까 자기 손자들을 다 죽이고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축출되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요아스가 왕이 됩니다. 그리고 요아스가 아마샤를 낳고, 아마샤가 웃시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팩트인데, 8절에는 여호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하면서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이 3명의 왕을 빼먹고 있습니다. 왭니까? 14대에 맞추려고 하다보니까 그랬던 것입니다. 또 바벨론으로부터 예수님까지는 13대만을 적어놓고는 14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4대가 되려면 12절의 스알디엘 다음에 ‘브다야’를 첨가해야 합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상3장을 참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를 다윗의 이름의 숫자인 14대에 맞추려다 보니까 무리한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무오설을 믿는데, 이 성경무오설이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지, 성경이 철자 한 자도 틀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원본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사본입니다. 성경은 오랫동안 사본에 사본을 만들어왔는데, 그러는 동안 철자라든지 하는 부분들이 조금씩 틀린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문제가 될 만큼은 아니라는 뜻으로 성경무오설을 믿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마태가 예수님을 다윗의 가문에서 탄생하신 메시야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게마트리아 계산법을 가지고 무리하게 강조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이 족보에는 굉장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대단한 신앙의 선조를 둔 가정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남성들의 이름들이 빼곡이 적혀있는데, 그 사이로 여성들의 이름도 보입니다. 3절에 ‘다말’이라는 여성이 나오고, 5절에는 ‘라합’과 ‘룻’이 나옵니다. 6절에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나오고 16절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옵니다. 지금 마태가 굳이 여성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구나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이스라엘여인들이 아니라 이방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런 이방여인들을 굳이 밝히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5명의 여인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큰 고난을 통과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삶의 고난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 쉽게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이런 믿음의 가정에서 탄생하셨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여성이 다말입니다. 오늘 말씀 3절에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다말에 관한 내용은 창세기3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만, 훗날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이 자기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이야기도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당황스럽고 수치스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4천 년 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 시대에 여성의 최고의 사명은 자식을 낳는 일이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면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 당시의 풍습과 오늘 우리의 풍습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다말사건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인 예수님 당시에는 수혼법이 있었습니다.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 풍습입니다. 이런 유대의 풍습을 오늘 우리 시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2천년 전에는 그것이 당연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말사건은 지금부터 무려 4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면서 다말사건을 보아야 합니다.
 
다말은 유다의 큰아들인 엘에게 시집을 갔는데, 엘이 그만 하나님 앞에서 못된 짓을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둘째 아들인 오난이 다말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만 오난도 하나님 앞에서 못된 짓을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셋째 아들인 셀라도 죽을까봐 다말을 친정으로 쫓아버렸습니다. 유다가 다말을 “자녀도 낳지 못하고, 남편만 죽이는 며느리구만 이거!” 이런 생각으로 쫓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죄도 없었던 다말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웬만한 여성 같았으면 절망했을 것입니다. 체념하고 인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그 어려운 상황을 지혜와 용기로 이겨냈습니다.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뒤집어씌우는 남성중심의 사회의 풍조와 맞서 싸웠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말이 유다에게서 아기를 출산했는데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 중의 한 아기가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 된 베레스였습니다. 다말은 억울한 누명을 벗고 승리한 여성이 되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복된 여성이 되었습니다.
 
또 두 번째 여성인 라합은 어떻습니까? 라합 이야기는 여호수아서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에게는 3개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먼저 시대를 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여리고시대는 이제 끝나고 이스라엘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믿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는 영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숨걸고 정탐꾼들을 숨겨주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정탐꾼들중의 한 사람과 결혼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살몬입니다. 라합이 살몬을 보는 순간 진짜 남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살몬에게 목숨을 걸었고, 훗날 그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고, 결국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라합은 시대를 보는 안목, 영적인 세계를 보는 안목, 또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개척한 멋진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기록된 룻은 어떠했습니까? 룻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룻이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사별한 룻의 장래를 생각해서 자꾸 재혼하라고 다그치니까 룻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1:16-17)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절대로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어머니와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룻은 정말 마음이 곱디고운 여성이었습니다. 지금 고집을 부리다가는 자칫하면 굶어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시어머니가 재혼하라고 했겠습니까? 그래도 룻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늙은 시어머니 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참으로 생각이 깊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또 네 번째로 기록된 밧세바는 어떻습니까? 밧세바에 대한 이야기는 사무엘하11장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윗이 밧세바를 보자마자 그 미모에 넋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신앙도 아름다웠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늙어서는 주변의 이방여인들 때문에 변질되었습니다만, 젊었을 때는 얼마나 믿음이 좋았습니까?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누구 덕입니까? 당연히 어머니 밧세바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가 솔로몬을 신앙의 사람으로 길러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는 경건한 조상들, 경건한 가정들이 많았다는 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아버지 되는 마리아와 요셉도 그러했습니까? 오늘 말씀 18절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머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했는데, 남녀의 사랑의 결실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마리아의 몸을 덮어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녀가 애기를 가진 것입니다. 지금은 뭐 처녀가 애기를 갖는 일이 다반사여서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 당시는 처녀가 애기를 가지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에게는 인생의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알 리 없는 약혼자 요셉에게 버림받고,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했음을 알려주는 천사에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마리아도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약혼한 마리아의 배가 불러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는 아닌데, 그러면 누구겠습니까? “어느 놈팽이지?” 이렇게 요셉이 오해할 법도 했습니다. 아마 요셉이 경솔한 사람이었다면 “이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한다.” 이러면서 동네방네 떠벌이면서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19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했습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양보하고 보내줘야지.”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너그러운 마음입니까?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어떤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들어서 그 문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는 큰 문제도 코딱지만하게 돌돌 말아서 별 것 아닌 문제로 해결해 버립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요셉이 참으로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여성들은 한결같이 참신앙의 여성들이었습니다. 삶이 어려워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고난과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창조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지혜와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렇게 살도록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참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축복이나 바라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 명예를 추구하게 하고, 출세를 바라게 하고,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오히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세상 역사의 물꼬를 새롭게 트게 합니다. 고난을 능히 이기게 하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 참 사랑의 피워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요란해도 참으로 향내 나는 삶을 살게 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이 참신앙의 모습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조상들이 그러했고, 예수님의 부모님들이 그러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넓은 마음과 넓은 생각을 가진 부모님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경건하게 자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샤론의 여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옹골차게 개척해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삭막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사랑을 가져오고, 평화를 가져와서 살맛나는 세상, 정이 통하는 따스한 세상이 되도록 모든 힘을 아끼지 않는 여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샤론의 남성들은 요셉과 같이 마음과 생각이 넓고 깊은 의로운 남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늘 자녀에게 심어주는 아버지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샤론의 가정들은 한결같이 요셉과 마리아 같은 멋진 부모가 떡 버티고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부모들이 믿음대로 살지 않으면, 자녀들이 부모가 사는 대로 믿게 됩니다. 믿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로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믿음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렇게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보고 요셉이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가 와서 자초지종을 알려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마리아가 부정한 여인이 아님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그러면서 장차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고지해 주셨는데, 21절에“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했습니다. 천사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는데, 예수는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류를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라는 말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죄입니까? ‘죄’라는 말은 헬라말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이 말의 원뜻은 ‘화살이 표적을 벗어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세우셨던 창조질서가 있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고, 피조물들끼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더불어 살라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위대한 창조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창조질서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도 찬양하지 않고 섬기지도 않고, 피조물들끼리는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싸우고 서로 뜯어먹으면서 죽이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창조질서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질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질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창1장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이 첫째 명령이고, 둘째 명령이 바로 29절에 이어지는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기 위해서는 씨 맺는 채소와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채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0절에 보면 더 놀라운 명령이 있습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는 인간 뿐 아니라 땅의 모든 짐승들과 하늘의 모든 새들도 푸른 풀을 먹고 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모든 생물들이 채식을 하면서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채식동물들 중에서 서로 싸우고 잡아먹고 하는 채식동물들 보았습니까?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위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31절처럼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들이 채식을 하게 되면, 싸움과 전쟁이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참 샬롬, 참 평화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질서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것을 깨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고, 채식하는 것이 아니라 채식하는 주변 짐승들이나 동료들을 잡아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있는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갑질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갑질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전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인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한창 벗어난 상태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내시고 또 보내시면서 “내게로 돌아와서 내가 세운 창조질서를 지켜라! 서로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라!” 이렇게 외치고 외쳤지만, 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로마군대를 물리쳐서, 물리적인 체제변혁을 꾀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깨어진 창조질서의 회복을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는 다윗같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더 크고 넓고 깊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생겨서 그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샤론의 교우들은 진실로 예수님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심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헌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양들꽃푸른샤론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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