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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주시는 하나님
2018년 12월 04일 (화) 14:47:02 엄인영 목사 webmaster@cry,or.kr
(습2:1-3)
 
지난 주에 하박국에 이어 오늘은 하박국과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스바냐 선지서를 통해 은혜와 진리를 나누겠습니다. 하박국서도그렇지만, 스바냐서도 한국교회에서 거의 설교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도 스바냐서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박국서도 그렇지만, 스바냐서도 참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가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책에서 제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많이 다르십니다. 오늘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은 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달콤한 솜사탕 같은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 나은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는 로봇같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믿고 있으니, 그 신앙생활이나 삶이 어떻게 건강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산타클로스같은 하나님이나, 솜사탕 같으신 하나님이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로봇같은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하고 멸절하는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심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저 달콤한 성경구절 몇 구절만 듣고 알고 나머지 성경은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을 한 권도 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전체를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러할 때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책만 그것도 요절 한 두 구절 암송하고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 샤론의 교우들은 성경 66권을 다 사랑하고 한 권도 빼지 말고 다 읽고 묵상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깊이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박국서를 통해 살펴 본 것처럼 스바냐 당시에는 남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원래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인데, 그 예루살렘이 더 이상 ‘평화의 도성’이 아니었고, 패역하고 더럽고 포악한 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바냐는 ‘하나님의 큰 날’이 다가온다고 예언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큰 날은 승리의 기쁨의 날이 아니요 영광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고 멸절하시는 우주적인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모이기를 힘쓰는 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 여호와를 찾는 자, 겸손과 공의를 구하는 자' 이런 자들을 숨겨주신다고 예언했습니다.
 
1장1절을 보겠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스바냐가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했으니까, 스바냐가 히스기야 의 4대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스바냐는 왕족으로서 기득권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바냐가 “요시야의 시대”에 부름을 받았다고 했는데, 지난 번에 살펴 본 것처럼, 요시야가 왕이 된 후에 성전을 청결케 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고는 최선을 다해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 아몬과 할아버지 므낫세가 세워놓은 바알 제단을 다 폐쇄해서 변소로 만들어 버리고, 바알 제사장들을 다 추방해버리고, 바알 우상을 전부 불질러버리거나 깨부셔서 냇가에 뿌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인도했습니다만, 워낙 므낫세가 분탕질을 해 놓아서 요시야의 개혁이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 시대에도 여전히 영적 어둠이 짙게 깔린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스바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선포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2절 이하부터 6절까지 제가 읽을 때니까 ‘진멸하고 멸절한다’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2절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다 세어보셨습니까? 몇 번 나옵니까? 이 짧은 문장 안에 “진멸하리라, 멸절하리라”라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분노로 타올랐던 것입니다. 그 자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왜 이토록 분노하십니까? 제가 전에 성경에서 계시하신은 여호와 하나님은 인격이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인격이라는 말은 약속을 중시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격자는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고, 그러므로 지킬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인격자라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이시므로,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고, 그러므로 약속을 지킬 것을 기대하시고 요구하십니다. 이 기대가 충족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근심하다가 급기야는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6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은 물론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도 역시 멸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 잘못하는 것도 심판의 대상이지만, 아예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나는 무신론자이다. 이런 과학문명시대에 무슨 종교가 필요있는가?”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무슨 굉장한 지혜를 가진 지성인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런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지 않는 자라는 차원에서는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도 결코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남유다 백성들을 보시면서 분노하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평안과 사회의 평화와 국력의 강함을 위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을 모르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면서 결국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바알을 섬기고 바알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가 어지러웠고, 온갖 거짓과 술수와 사기와 분쟁과 살인이 난무한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을 섬기는 사회는 반드시 이렇게 불행한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우리 하나님이 참다참다 급기야는 분노의 심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7절입니다.“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제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이 여호와의 날은 승리의 날이 아니요, 기쁨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요, 저주와 죽음의 날입니다. 그 날이 점점 가까워온다고 했습니다. 8절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하나님은 방백들과 왕자들에게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권력을 손에 쥐면, 그 권력을 가지고 제 뱃속 챙기지 말고 백성들을 섬기는 쓰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남유다 권력자들은 이방인들과 어울리면서 우상을 섬기고, 그러므로 자연히 권력을 남용해서 군림하고 힘없는 서민들의 문턱을 넘어서 약탈하고 강탈하는 포악한 짓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이제 심판하시는 날이 다가온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10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어문이라는 것은 ‘물고기 문’이라는 말인데, 우리 말로 하면 어시장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시장의 상인들도 다 타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문에서 곡성이 날 것이고, 11절에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여기 ‘막데스 거민들’은 예루살렘에 상가 지역을 말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고파는 지역이 막데스 지역인데 그들이 애곡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막데스 상인들도 역시 거짓 저울과 거짓 추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장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다 눈속임을 하면서 장사했던 것입니다.
 
12절에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걸핏하면 이방 군대가 쳐들어오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런데도 그 와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정신없이 우상을 섬기면서 제 살 길만 궁리하는 놈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은 복도 못주고 화도 못내려”이러면서 맘 놓고 재물을 자기 집안에 쌓아놓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면서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서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삶을 천박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청사초롱을 앞세워서 예루살렘 거리를 샅샅이 뒤져서 전부 색출해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물이 노략될 것이고, 그들의 집을 멋들어지게 건축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할 것이고, 포도원을 가꾸지만 그 포도주를 마시지는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저들은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해가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기 객실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14절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는 그들이 애지중지하면서 모아놓은 은과 금이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에는 은과 금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2차대전시에 유대인들이 나치의 핍박을 받으면서 부지런히 은과 금을 숨겨 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은과 금이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은과 금을 많이 모아놓은 자들이 오히려 더 빨리 죽었습니다. 은과 금이 그들의 죽음을 재촉했습니다.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는 전혀 쓸데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 이렇게 우리가 1장을 살펴보았는데, 1장이 온통 “진멸하고 멸절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내용들은 보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잘된다 복준다고 하는 달콤한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분명히 질투하시는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 진멸하고 멸절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데, 전혀 이런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저 “God is so good”이런 노래나 흥얼거리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끝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인 줄 알고 있습니다. 왭니까? 이런 예언서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은 안 듣고 안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구약성경을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구약성경 대부분이 하나님의 질투와 진노와 심판의 내용들도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도들이 구약성경을 외면하고, 또 그러니까 목회자들도 구약성경 가지고 설교를 잘 하려 하질 않습니다. 그저 신약성경 중에서 그것도 바울서신 중에서 듣기 좋은 달콤한 한 두 구절 인용해놓고는 온갖 예화를 섞어 달콤하게 설교하고 치워버리는, 그런 설교가 범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시대처럼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동서남북으로 빨리 왕래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아모스 시대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심했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건강한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고,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은 저렇게 득세하는 통탄스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들이 목회자 탓만은 아니고 성도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리더십도 병들었고, 팔로우십도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성도들이 잘된다 복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니까, 목회자들도 거기에 맞춰 처세술이나 성공학 정도의 설교를 해댑니다. 그러니까 점점 강단이 왜곡되고 변질되어서 기복신앙이나 번영신앙 신비주의가 창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질 수 없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지금 교회가 이렇게 시들해지고 이단들이 창궐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진다면 리더십가 팔로우십이 다 병들었기 때문에 자꾸만 악순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달콤한 말만 들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목회자도 그런 말씀만 외치면 안되고, 성도들도 그런 말씀만 들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말씀도 빼지 말고 들으려고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라도 구약성경의 이런 두렵고 떨리는 말씀도 잘 봐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렇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러할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겨울에 북풍설한의 강추위를 보내고 봄을 맞이할 때의 기쁨이 더 큰 것처럼,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 계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알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진실로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2장1절을 보겠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모여봐라 모여 보라니까” 이런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의 격언에 “모이기를 폐하는 자는 지혜를 버리는 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거기는 지혜자도 있고 겸손한 자도 있어서, 들을 것도 있고 배울 것도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모이려하질 않고 이웃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독불장군처럼 이웃으로 향하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늘 우리는 이웃에게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고 귀를 열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그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다가오기 전에 좀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3절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우리 하나님이 그 우주적인 심판의 날에도 숨겨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데, 아무에게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모이기를 힘쓰는 자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들,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들에게 그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제 뱃속만 챙기는 사람들과 함께 도매금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세속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조금 손해가 나고 핍박을 받아도 굳굳하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려고 하고, 공의와 겸손의 모습을 잃지 않는 자들은 안전한 곳에 숨겨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바냐 당시에 안전한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겠습니까? 당시 바벨론이 천하를 호령하면서, 남유다를 침공해 들어오던 때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겠습니까? 여러분! 호랑이가 호랑이굴에서 나와 사람들을 물어 죽일 때,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호랑이굴입니다. 거기가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가장 안전한 곳은 바벨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는 비록 포로로 잡혀가서 죽을 고생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레미야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보내서 바벨론 군대가 오면 저항하지 말고, 포로로 잡혀가라고 외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숨겨주시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올곧게 살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의 날에도 반드시 솟아날 구멍이 있게 하십니다. 우리 샤론의 교우들은 이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4절 이하는 전부, 이렇게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올곧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안전한 곳에 숨겨 놓으신 다음에, 그 주변의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안전한 곳에 보호하신 다음에 이제 마음 놓고 타락하고 변질된 예루살렘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1절입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었는데, 스바냐 당시의 예루살렘은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에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그들이 여호와의 계명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방백들, 재판장들, 선지자들이 다 타락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절에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이렇게 불의를 행하면서도 전혀 자신들의 삶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사는지 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6절입니다.“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아무리 경고를 해도 저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했습니다. 8절,“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이제 하나님이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방군대를 모아 쳐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던 것처럼,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둘러싸지 않았습니까? 스바냐를 통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고 14절 이하는 스바냐 시대의 남유다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스바냐 이후에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서 남유다가 망하고, 일단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오는데, 그 때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이제 죄값을 다 치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의 형벌을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남유다를 망하게 했는데, 그 원수 바벨론을 나중에 페르시아 고레스가 일어나서 무너뜨렸지 않습니까?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이제 하나님의 분노가 많이 풀려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복음송가를 지어서 부르고 있는데,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 구절은 우리를 향하신 말씀이 아니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통해, 비록 죽을 고생을 했지만, 정말 많은 것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 교만했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실망시키고 분노케 했구나!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이 왔구나! 그래서 이제라도 돌아가면 이번에야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이런 결단과 의지가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 하나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구절을 가지고 복음송가를 부르려면, 우리 안에도 “그렇구나! 이제 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까 이제 내가 사는 동안 하나님을 잘 섬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18절에“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는 “완전히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숨겨주신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죽을 고생은 했지만, 그 바벨론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를 처절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가르치고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도 그 때 바벨론의 포로기에 완성되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바벨론 포로기는 70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역사였습니다. 거기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니까 거기에서 다니엘같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바벨론을 좌지우지 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고, 또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다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또 나중에 에스더는 페르시아제국의 황후가 되지 않았습니까? 또 아닥사스다 왕 때에 에스라는 페르시아 황제의 법률담당 자문위원이 되었고, 느헤미야는 술맡은 관원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라가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우신 하나님이십니까?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이제는 끝이구나!”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리고 낙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아니다. 희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좀 잘 나갈 때 으시대고 교만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셔서 우리를 낮추십니다. 그러다가도 우리들이 완전히 희망이 없다고 하면서 절망하면, 왜 희망이 없냐고 희망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이 어려워져서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 그래서 겸손해지면 그때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놀라우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도 “깊도다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이렇게 탄복했던 것입니다(롬11:33).
 
사랑하는 샤론의 교우 여러분! 우리가 스바냐서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죄악된 모습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 버리면 진멸하고 멸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비록 소수지만, 모이기를 힘쓰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들은 숨겨두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보내 보호하시고, 거기에서 고난을 통해 모든 삶을 정결케 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해서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스바냐의 하나님은 신약성경의 결론인 요한계시록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런 스바냐의 하나님을 알고 있어야 요한계시록도 원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휴거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샤론의 교우들은 이런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올곧게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양들꽃푸른샤론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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