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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과 올가미에서 벗어나다
2018년 01월 31일 (수) 10:33:56 조무융 강도사 webmaster@cry.or.kr
(시140:1~13)
주님, 악인에게서 나를 건져 주시고,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정직한 사람은 주님 앞에서 살 것입니다. ‭‭시편‬ ‭140: 1,13‬ ‭RNKSV‬‬
1. 1 ~  5 구원을 위한 기도와 악도의 계획
2. 6 ~ 11 위에 말한 악도를 벌하심에 대하여
3.12~13 구원받을 일에 대한 신념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 만나고 나면 마음이 닫히고 그런 사람이 있지요.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쉽게 답하기는 좀 어려운 문제이기는 한데 보면 좋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안 좋은 사람이 있어요.
  기독교에서 원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원죄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맨 처음에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죄와 관련을 시켜서 원죄를 이해를 해요.
  사실 오리지날 하다고 하는 것 원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이라는 뜻이어요.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아주 오래된 사건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는 말할 수 없는 악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원죄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악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는 상당히 좋은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전혀 예기치 않은 부분에서 좀 나쁜 부분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악인으로 규정하고 싶어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원래 그래 말하는 순간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요. 원래 그렇게 태어 났는데 어떻게 해요. 그렇지요. 그래서 애매한 부분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역사속에서 악의 현실이 있지요.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이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뭐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악이 없는 곳 고통이 없는 곳을 꿈꾸었지요.
  뭐 엘도라도라든지 유토피아라든지 그런 시절을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했느냐  황금시절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황금시절 그런 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누구와의 갈등없이 그런 것을 꿈꾸지요. 그런 세상이 있어요. 없어요.
  흥미로운 것이 유토피아라고 하는 말이 유토피아는 유 프라스 그리고 토피아로 되어 있는데 토피아는 토포스 장소라는 말에서 나와요. 유라는 말은 없다는 말입니다.  없는 장소입니다. 원래 없어요. 그런 장소는 없다
  세상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고통이 없는 세계를 마음속에 투사한 세계를 유토피아가 아닐까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악인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어요. 그 이야기이지요.
  여러분 그래서 시편에서 탄식시가 많아요. 악한 현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함께 보려는 시편도 역시 마찬가지여요
  한번 읽어 볼까요 시 140: 1- 13입니다.
  이 시편 읽으니까 정말 악인들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괴롭히는지 다양한 면모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인간의 인간됨은 마주보는 관계속에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와 정규씨와의 관계가 정상적이면 서로 바라보는 일에 꺼림이 없지요. 정규씨도 나를 보는데 서로 신뢰하고 아끼고 그런 관계이지요.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 문제가 좀 생겨나면 마주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럽지요. 그래서 보고 싶지 않아요. 눈을 피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기 때문에 등을 돌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의 관계는 마주 보게 만들지만 서로 갈등하게 하는 단계는 등 돌리게 만드는 것이지요. 죄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등을 돌리게 만들어요. 그런데 서로 마주 보고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래서 인간이라는 글자를 보면 사람인과 사이 간자가 있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인이라고 하는 글자는 둘이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사람의 구성은 홀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홀로는 넘어질 수 밖에 없지요 좀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지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사이 간자가 들어간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존재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재라는 것이어요. 그렇지요. 이것이 인간이어요.  이 관계가 아름다울 때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사이좋다 사이가 좋은 것이어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할 때 거리도 있는 것이고 너무 멀어지지 않아요. 이것이 사이 좋은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사이 존재인데 둘 사이가 너무 멀어진 것이야 그렇지요. 거기서 우리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외이고 고통이지요.
  누군가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항상 소외의 감정을 내 속에 만들고 고통의 감정을 만들어요. 소외와 고통이 깊어지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그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기가 쉬운 것이지요.
  이것이어요. 관계의 멀어짐이 곧 악의 실체인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됨은 누군가의 필요에 내가 응답함을 통하여서 나를 구성해 가는 것 사랑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에리폼이라는 사회 심리학자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요소가운데 책임이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것이어요.
  영어로 책임을 뜻하는 단어 리스퍈스 비리티라는 단어가 있지요. 그 단어는 리스판스의 말의 명사형이이요. 리스판스는 무엇이어요 반응하다 응답하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존재는 누군가에게 응답함으로서 다시 이야기 하면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서 사랑을 구현하고 그 사랑을 구현할 때 비로서 사람이 된다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이런 관계를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 시인의 현실은 어떻느냐 하면 악인들에게 외워쌓여 있는 상태 마주 바라보는 관계가 아니라 적대시 하는 그런 관계에 가득차 있는 그런 삶속에 살고 있지요.
  우리가 악인들에게 외워쌓여 있다면 힘들지요. 생각만 해도 힘들어요. 마주치기 싫고 그런 장소에 가시 싫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표현하지 않는다 하다라도 그 존재가 내가 꿈꾸고 있는 미움의 기운이 나를 굉장히 약화 시켜요.
  그런 것이 있어요. 정말로  이것이 영적 느낌이기도 한데요. 그런데 이 시인은 지금 그런 악인들에게 외워싸여 있어요. 악인 혹은 포악한자 교만한자 악담하는 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참 인생 힘들지요.
  구조를 한번 보면
  여러분 1절을 보면 악인이 등장합니다. 1절에 그리고 포악한 자가 등장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교차 대구법인데요.
  11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악담하는 자 나오고요. 포악한자 똑 같이 나오지요.
  1절에 나오는 포악한 자가 11절에 등장했습니다.
  3절에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한다 그 입술아래 독사의 독이 있다 했지요.
  9절에 보면 나를 외워 싸는 자들이 그들을 덮데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덮게 하소서  입술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악인의 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악인의 그 포악한 자가 등장하는데
  8절에 보면 악인의 소원 악한 꽤 이게 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차 구성 되고 있어요. 마치 그림 물감을 짜가지고 이렇게 찍어서 이렇게 놓는 것 그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그 악인들을 이 시인은 무엇이라고 이 시인은 교만한 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5절입니다. 5절에 보면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에서 빠져 있는 것이
  6절과 7절 이야기를 안 했고요 그 다음에 12절과 13절을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데카몰식을 구성되어 있는 그 이야기가 시인의 상황인데
  6절과 7절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 바라보고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우리소서 했더니 주님께서 선생의 날에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고백이지요. 악인들의 현실 속에서 주님이 나를 지켜 주셨다
  주님이 12절 13절에 가면 그 경험 때문에 그가 자기 개념을 보편화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고난당한 자를 변호해 주신다.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신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굉장히 악인들의 현실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없어서 하나님만 의지했더니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가 되어주셨다는 이야기를 6절과 7절은 개인의 고백으로 이야기 하고 있고 11절과 12절은 그것을 보편적 고백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의 구성이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 시인이 왜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 원인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지 않아요.
  다만 고난의 시간에 6절과 7절에서 볼 때 고난의 시간에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한 것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예수님도 말씀 하셨지만 어두움이 빛을 미워하거든요. 왜 그럴까요? 빛은 어두움을 폭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폭로하지요. 그래서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사회성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성호씨가 무엇을 잘못을 저질렀어요. 대책이 없어요. 그런데 이게 폭로될 것 같으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 잘못에 끌어 드리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죄의 사회성이어요.
  얼마전에 신문에 보니까 옛날에 지존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그랬는데 거기에 살아남은 여성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지존파가 자기들의 범죄가 드러날까 무서워서 그 여성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살해 행위에 가담하도록 만드는 이런 것들이 죄의 사회성입니다.
  죄가 악마적인 것은 그런 것이지요.  홀로 저지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기 죄속에 끌어 드리려고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청소년 시기에 나이 많은 사람들은 위선적이지만 청소년들은 위악적인 때가 있습니다. 일부러 센척하기 위해서 욕도 많이 하고 그러니까 기죽지 않으려고 나도 센척하고 위악적으로 처신하지요.
  그래서 어떤 사회가 규범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일에 내가 끼어들면서 너 무엇하지 무엇하지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친구들 끼어들게 만들기도 하지요. 이것이 미숙한 사람들의 특생이라고 보겠는데요.
  그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진위와 진정성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 시대로 이야기 하면 왕따 당하는 것이지요 너 혼자 의롭다 너 혼자 깨끗해 그런 것이지요. 우리 이런 경험들이 있지 않아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실지로 보면 자기 안위만을 위해 크게 어려움을 겪을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질것 눈을 감고 내 현실 아니니까 등 돌리면 연루될 일이 없으니까 크게 어려울 것이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악한 세상을 악한 세상으로 폭로하기 때문이어요. 그것이 아주 폭력적 방식으로 폭로 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 찔근 눈 감고 사는 사람은 아니야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겪는 곤경이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 하는데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일반화를 경계해야 하는 데 이 이야기는 꽂여요. 두 종류의 사람이 무엇이냐 하면 고통 앞에서 돌아서는 사람과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누군가가 겪는 고통을 보고  내일 아니니까 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있고 내가 저 일에 연루될까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차마 모른척 할 수 없어서 내가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우리 시대에는 대게 무엇이라고 가르치느냐 하면 참견하지 마 닫혀 안 돼 너는 나와 너는 끼지마 대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공공성이 사라진 세상이어요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런 것은 디스토피아라고 이야기 합니다.  뒤집히 유토피아지요.
  디스토피아를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나와 무관하다고 만듭니다. 이게 정말 세상에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악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고 악인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렇지요. 악인은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타자화 하고 이웃을 타자화 하고 타자화 한다고 하는 말은 나와 무관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어요.  이것을 요즈음 학문에서 주로 무엇이라고 쓰느냐 하면 물화 시킨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사물을 뜻합니다. 사물로 만드는 것이어요.
  물화 시키는 것이어요. 타자화 시키고 물화 시켜 이것을 사회학적 용어로 이야기 하면 무엇이냐 하면 아까 이야기 하는 대로 타자롸 물화 시키는 이런 것을 누군가를 소외 시킨 것이지요.
  나의 바같 중에 나와 삶과 무관한 존재로 여기고 악인들의 특색입니다. 이것이 누군가를  소외 시키고 타자화 시키고 물화 시키고 이것이 악인들의 특색이어요.
  처음에 말할 때 악인하면 굉장히 거창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는 데 이렇게 타자화 시키고 물화 시킨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 공부를 잘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나의 현실과 무관한 것이지요.
  이것을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악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악인의 종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요. 다 비슷해요. 그러니까 삶의 습성이 어느 쪽을 향해 가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나는 그 악인들을 길에서 벗어난 자라고 생각을 해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자인데요 그러나 어쩻던 그 악인들은  인간의 삶을 얼음 공화국으로 만들지요.  겨울 공화국으로 만들어요.
 
1. 1~ 5 구원을 위한 기도와 악도의 계획
  2절 그래서 포악하고 속으로 악을 계획하고 싸우기 위해서 모이고 그렇지요.
  3절 기가 막힌 게 무엇인가 하면 뱀처럼 날카롭게 혀를 돌립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악인들이 주로 말이 사람들을 해하는 말을 하는데 여러분 뱀 혀 본적이 있지요. 델름 델름 갈라져 있지 않아요. 혀가 갈라진 까닭이 무엇일까요. 두말하기 위해서 뱀이 말을 함으로 갈라지게 만들려고
  그런데 이게 뱀이 눈이 나쁘데요 눈이 나빠 가지고 무엇을 보지 잘 못해서 그래서 혀로 열 같은 것을 감지하게 되는 데 그래서 외부의 정보를 갈라진 혀를 통해서 받아 드려가지고 자기 입천장에 있는 야콥신이라는 기관 속에 넣어서 정보 전달을 한데요.
  그런 역할을 한데요. 그런데 어쩻던 뱀의 혀가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불길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금방 느껴지는 것이 두말하는 사람 이게 뱀의 혀를 가진 사람이어요. 실체적으로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말하므로 사람들을 갈라지게 만들어요. 그 사람이 이야기 함으로 사람들을 분열 시키게 만들어요.
  여러분 갈라진 혀라고 하는 것은 두말하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동원 된 때가 많이 있습니다.
  3절에 악인들 그들의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갈라져 가지고 세상에는 두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칼이 있어요. 이 칼이 가정주부가 요리를 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또 외과 의사가 수술을 하기 위해 칼을 씁니다. 이 때 그 칼은 살리는 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활인검 그래요. 활 살리는 것이어요
  그런데 강도가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자기의 목적 달성을 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찔러요. 그러면 사람을 죽이는 칼이지요. 살인검입니다. 똑 같은 칼이 누구에게 들려 졌느냐에 따라서 그렇지요. 활인검이 될 수도 있고 살인검이 될 수도 있어요.
  문제는 사람이지요. 누구에게 사용되느냐 하는 문제인데요. 여러분 그래서 인간의 으뜸가는 특생이 있다고 한다면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입니다. 언어 언어라는 것은 때때로 나와 나운씨를 이어 주기도 하지만 나와 나운씨 사이에 있는 관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롬 3장 13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악인에 대한 이야기여요  죄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을 결국 그런 사람들 악인들 아까 악인들에 대한 다양한 규정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5절에서 한 마디로 요약이 되는 데 교만한자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괜찮아 그렇게 하는 물론 교만함이지만 교만은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고 자기를 신처럼 만들려는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이 한 마디가 있습니다.
  창 3장 5절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이것을 따 먹으면 네가 신처럼 될 것이다. 말합니다.
  인간이 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자기가 정금이 되고 싶어 해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이 시대에는 그런 전능함을 주는 것이 있어요. 이 시대에는 전능함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돈입니다. 돈이 전능함을 준다고 생각을 해요. 맞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 시대는 돈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의 신화를 유포합니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돈이 가지고 있는 전능성의 신화를 유포합니다. 돈을 가지면 안 되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생명에 관한 것은 돈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세계에 눈을 떠야 하는 데 교만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자기 의지대로 끊임없이 이웃을 타자화 하고 물화 시킵니다.
  5절 그의 앞에 올무를 놓고 줄로 그를 넘어 뜨리려고 하고 그물을 걸어 옴짝 딸싹 못하게 하고 함정에 빠트리려고 합니다
  그러기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께 해야 할 것은 그 악인들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포악한 자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지요.
  이 시인은 그런 고통 속에 마침네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게 6절과 7절이었지요. 주는 나의 하나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가 고백합니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나이다.  이 전쟁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우는 그런 전쟁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면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도 전쟁이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라는 철학자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전선에 살고 있다 악과 선이 싸우는 보이지 않는 전선이 있습니다. 도스토에프스키라는 소설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인간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이라고 이야기해요.
  내 속에서 두 가지 마음이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전쟁의 날에 내 머리를 가려 주셨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감사의 고백이 나오는 것은 시련과 고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통과한 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이지요.
  시련과 고통을 알지 못하는 신뢰와 그것을 거친 후의 신뢰는 달라요. 굉장히 달라요. 그래서 저는 순수한 사람을 보면 늘 아슬 아슬하게 보입니다. 그렇지요. 아슬 아슬하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알지 못하는 순수함 이노센타라는 것은 그런 것인데 나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데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착하면 다 잘 될 것 같은데 악한 현실은 그 착함을 착함으로 안 받아 드리거든요.
  이것이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을 겪은 후에 시인이 지금 고백합니다. 삶의 악 조건이었지만 하나님께 의지 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2. 6~ 11 위에 말한 악도를 벌하심에 대하여
  8절부터 기도가 계속됩니다. 어떤 기도입니까? 악인의 소원을 허락하지 마소서  그의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스스로를 높일까 함이라
  그렇지요. 아까 이야기 했지요. 신처럼 됩니다. 자기가 굉장히 전능한 존재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 악인들의 꾀가 이루어지게 된다고 한다면 순박한 사람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아요 그래서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9절 나를 외워 싸는 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들 때 그들의 입술의 재난이 그들을 덥게 하소서.
 
  입술의 재난 여러분 말이라는 것이 부메랑과 같아요.
  말이라는 게 내가 누군가를 비난했던 그 말은 반드시 돌고 돌아 반드시 내게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어요. 세상이 그렇더라고요.  소문의 특색이 그런 것 아닙니까? 너만 알아라 다 알아요.
  그래서 이전에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님은 그 억압의 시대에 진정한 참 말은 유언과 비어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유언비어는 나쁜 말이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유언은 흐르는 말이야 그러니까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암흑한 시절에 사람들 사이에 유언이 비어는 쏘는 말이지요 억압자들은 그런 말들을 싫어합니다.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뜨거운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시며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번 숯불이 그들 위에 떨어진다 여러분 가끔 숯불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이야기냐 하면 숯불을 이마에 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잠언에도 나오고 로마서에도 나오고 무슨 뜻이어요.
  숯불을 악인의 머리위에 생각만 해도 뜨겁지요. 죽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 고통스럽지요. 여러분 우리가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 주님이 금지 했지요. 살인하지 마라고 옛 사람은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형제보고 바보라고 하면 안 돼
  여러분정규씨가 나를 보고 목사님 알고 보니까 바보야 바보라는 말은 사실은 어떻게 보면 좋은 말입니다. 바보 여러분 슬라브 권에서는 유로지비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보처럼 보이는 성자여요.
  바보처럼 살면서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그런데 평화를 만드는 바보들이 있어 예수님도 그런 의미에서는 바보입니다. 왜 십자가를 져 그렇지요. 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바보스런 것이지요.
  그런 의미의 바보 말고 나를 모욕하고 멸시하기 위해서 화가 나지요. 내 속에 핏기가 살아나지요.  피 속에 생명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살인이야 그런 맥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에 숯불을 얹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숯불을 얹으면 뜨겁게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분 뜨거운 숯불이 누구위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관용 용법으로 누구 누구를 몹시 부끄럽게 하다 그런 뜻이어요.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해 달라 그런 이야기이지요.  잠언과 로마서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10절 불 가운데 깊은 웅덩이에 그들로 하여금 빠져 일어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깊은 웅덩이는 급류입니다. 급류에 휘말리는 것이어요. 급류에 휘말려서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똑 같은 이미지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사야 43장 2절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사르지도 못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똑 같은 상황입니다. 누군가에 적용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사용 되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11절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면 포악하는 자는 재앙에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로다 말합니다.
  악담하는 자의 명분은 혀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 보고 요즈음 그런 말 잘 안 하는 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 보고 안 다니는 사람들이 비웃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저 사람들은 말은 잘해 그래서 말은 잘해 그래서 들으면 기분 좋아요 나보고 말을 잘한대 정말 백지인 것이지요.
  말은 잘해 그 말속에는 무엇입니까? 삶이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조롱이지요. 여러분 속상한 일이지만 누가 성호씨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렇게 이야기 하면 성호씨가 나보고 설교하는 거야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요.
  설교하는 것이야 설교는 무엇입니까? 옳은 소리이기는 한데 마음에 와 안 닿는 소리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전도된 현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쩼던 혀의 사람을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이 제가 해 왔던 이야기입니다 마는 막스 피카르트라는 사람의 말을 기억하는데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에 불과하다 침묵할지 모르고 끝없이 말하는 사람은  무언가 말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이 저지른 여러가지 이 세상에서의 일들을 업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카르마라는 단어인데 업가운데 가장 심각한 업은 구업입니다 입으로 짓는 구업 말로 짓는 죄가 큰 것이어요.
  11절 악담하는 자 혀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하는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하고 말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대로  악인들의 현실 속에 그 교만한 이들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었던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다 실존적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어떻게 한다고 확장해 보편적 경험으로 이것이 12절과 13절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내가 알거니와 이제는 알게 되었어요 여호와는 고난당한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배푸시니이다. 하고 말합니다.
  고난 당한자를 변호하시는 하나님 대게 사람들은 고대 세계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대게 힘 있는 사람들 편을 든다고 인식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고통 받은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어내십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대받고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찾아 오셔서 그들의 인권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였던 것이지요.
  여러분 어느 변호사님이 계신데 그 변호사님이 70년대에 인권 변호사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70년 80년대에 그런데 그 변호사님하고 이야기하다 보니까  나는 사실 겁 많은 사람이야 그런데 인권 변호사다고 사람들이 그러는 데 어쩌다 그러셨어요.
  여쭈어 보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민주화하다가 애쓰는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히고 권력에 눈치를 보는 변호사들이 아무도 변호를 해 주려고 해 주지 않아요.
 
  젊은이들이 변호인도 없이 법정에 서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가슴이 아팠어 그래서 그 변호사님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차마 그 젊은이들을 혼자 둘 수는 없었어요.  믿음은 차마이즘이 아닌가요. 차마에다가 이즘을 붙였어요. 말을 조어를 만든 것이지요. 차마 볼 수 없었어 그들의 고통을 그 변호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손해 보기로 작정하는 것이 아닌가요.
  내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손해 보는 일 할 줄 아닌가요.   하나님도 그래요.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할 수 있는 분이시지요. 무엇이 부족해요. 그런데  고통 받는 자의 삶에 연루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이것이 이 시인의 고백인 것이어요.
 
3.12~ 13 구원받을 일에 대한 신념
  12절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그들을 옹호하고 지켜 주시는 분이시지요. 그리고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지요.
  13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이 때 의인은 여러분 나는 의로와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 때 의인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이고요 하나님의 마음에 기준으로 삼아서 자기의 마음을 늘 조율해 가는 사람이어요.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의인들인데요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의 이름에 감사합니다. 막연한 주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은 실체이시오 그 주님은 어떤 분이셔요. 고난당하는 사람을 변호하시는 분이시죠 그 이름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악인이 득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라고 해도  그러나 악의 현실은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안개처럼 이것이 믿음 속에  있는 사람의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그래서 이야기 합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라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정직해 그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선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허리를 고쳐 세우고 일어선 존재들이 결국은 주의 앞에서 살리라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 갑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악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돈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거기에 몰두하다 보니까 무엇이야 하면 사랑해야 될 이웃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타자화 시키고 물화 시킵니다. 인간 소외 시킵니다. 악이 악을 더합니다.
  그러나 유사 전능함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들에게 일어서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면 참 좋겠습니다.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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