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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
2017년 06월 14일 (수) 20:05:45 김태복 목사 webmaster@cry.or.kr
(요8:31-36)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유인 것 같습니다. 이숙영 아나운서가 쓴 수필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가용을 탈 때가 가장 자유를 누린다고 합니다. 자가용만큼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가령 남자들의 예를 들어보면 마누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아이들도 머리 컸다고 툭하면 반항하지요, 회사에 가면 아래나 위나 모두 상전이라 그 비위를 맞추노라 보면 한없이 피곤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자가용만은 시동을 걸면 언제나 원하는 대로 가주고, 멈추라면 멈춰주고, 카세트에 테이프를 넣으면 즐거운 음악이 금방 흘러나옵니다. 아무리 크게 틀어도 누구 하나 방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가용 안이 현대인들의 유일한 자기만의 공간이라는 논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거리에서 보면 차안을 안방 이상으로 요란스럽게 꾸미거나 최고급 오디오 세트를 장치한 차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려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유가 없이 모두 무엇인가 매여 지내고 있습니다. 어느 분은 자취나 하숙생활을 하다가 장가만 가면 그 때부터 자유와 행복이 넝쿨째 굴러올 줄 알았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아내가 얼마나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혼자 살 때는 늦잠 자고 싶을 때 늘어지게 자고, 무엇을 사고 싶을 때 마음대로 했는데 이제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혼자 살던 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여자들도 마차가지 고백입니다.
 
동기 목사의 큰딸이 노처녀임에도 시집을 안 가려고 한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시집간 딸의 친구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친구들이 결혼하고 나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너나없이 말하면 샘이 나서라도 결혼하고 싶을 터인데, 결혼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지지고 볶고 사는 이야기뿐이요, 심지어 어떤 친구는 ‘너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 그 때가 제일 좋았다.’고 말하니 결혼할 의욕이 점점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키엘케골이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혼자 독신으로 살아 보라, 후회하게 될 것이다. 결혼하여 보라. 그 때도 후회하게 되라”고 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마음대로 돈을 쓰면서 자유롭게 살 줄 알았더니, 돈이 점점 많아지니까, 돈에 매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돈 때문에 근심이 더 생기고, 더 욕심에 매이고 가족이나 친척 사이에도 점점 의가 상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어느 분은 육신의 정욕에, 어느 분은 나쁜 습관에, 어느 분은 명예욕에, 어느 분은 과거의 받은 마음의 상처에, 어느 분은 죽음의 공포에 매여 살므로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을 언제나 매이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매임으로부터 벗어나 자유 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진정한 자유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을 만날 때에 진정한 자유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본문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것을 설명하려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는 한문으로 풀이하면 ‘참된 이치’ ‘참된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를 번역하면 ‘참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모든 것들이 환하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구약 때는 진리가 모호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지, 죄의 원인, 구원, 세상의 종말, 사탄, 영원한 천국 내용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과거의 것이나 미래의 것이나 다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감추었던 것들이 나타나게 되었기에 예수님이 곧 진리 그 자체이신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매인 것을 끊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쉬게 함, 이것이 자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집, 좋은 음식을 먹고살면서도 쉼이 없습니다. 평안과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생의 무거운 짐, 인간관계에서 오는 무거운 짐, 병고의 짐, 물질의 짐, 근심의 짐, 가족 때문에 오는 짐이라도 예수님께 안고 오는 자에게는 그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자유 하는 쉼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믿고 왔을 때, 과연 예수님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게 해주셨습니다.
 
요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인간관계로 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면서 전혀 쉼이나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아주 음란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을 많이 피워 관계하는 남편들에게 번번이 쫓기다 보니 다섯 명의 남편이 되었는지, 아니면 창녀로서 기둥서방이 다섯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여자에게는 큰 고통의 짐은 바로 음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큰 변화, 큰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마시는 코카콜라의 창업자 아사 지 캔들러 2세는 술 중독에 빠져서 아무리 노력해도 헤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한 채 살므로 가정과 그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있는 중, 어느 날 자가용을 타고 가는 도중에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너는 너 자신을 제거해야 한다. 너는 너 자신을 배격해야 한다. 너는 너 자신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거룩한 음성은 “술을 먹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 그 이야기를 자기 부인에게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함께 기도하자고 한 후 너무나 감동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 그 동안 그 부인은 남편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캔들러도 입을 열어 기도하기를 “주님,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하려고 노력하면 나를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부터 모든 자만심이 사라졌고, 새로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영적으로 가난해졌습니다. 그는 한없이 울었고 생애 처음으로 영혼의 깊은 평안을 느꼈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간 이후로는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이기심과 돈에 대한 애착에서도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수입의 75%를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얼마나 물질로 채워주시는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 예수님께 여러분을 매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맡기십시오. 그 때에 예수님이 대신 그 짐을 맡으시고 여러분에게 자유하심을 허락해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멍에를 멜 때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31-32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란 배우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그러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배우는 길이 무엇입니까? 좀 전에 말씀 드린 마11:28에 이어 29절에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가 마음의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려면 주님이 맡기시는 멍에,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시는 멍에, 그 달란트, 그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결코 배울 수 없습니다. 어느 성도는 열심히 성경공부를 합니다. 벧엘 공부를 마치면 크로스웨이 공부, 그 다음은 두란노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래도 만족이 안 되면 신학교까지 입학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 십자가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꾸라지처럼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집니다.
 
그렇게 100날을 믿어보십시오. 주님을 결코 배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말씀을 먹기만 하고 일하지 않는 자가 됨으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자가 될 뿐입니다. 주님을 배우는 길은 내 멍에, 내 짐은 주님께 맡기어 버리고 주님이 맡기시는 멍에,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면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맡기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당하는 고난과 손해, 아픔과 배신, 핍박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맡기시는 멍에를 질 때에는 많은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아픔, 주님의 눈물을 만의 하나라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부활의 기쁨도 체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솟구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는 대부분 감옥에서 썼는데 그 때에 가장 많이 쓴 내용이 ‘감사하라’는 것과 ‘기뻐하라’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비입니다. 주님이 맡기시는 멍에를 메고 주님의 좁은 길을 떠날 때는 처음에는 힘들지만, 그러나 좁은 길을 따라 가면 갈수록 점점 자유가 넘치는 것을 체험합니다. 여러분 넓은 길로 가면서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로운 것 같지요? 아닙니다. 그 길은 가면 갈수록 점점 허망을 느낄 뿐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진리의 좁은 길을 갈 때만이 주어지는 것이요, 그 길을 가면 갈수록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 점점 넓어 가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차가 철로 위에서 힘차게 달릴 수 있고, 물고기가 물 안에서만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주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깊이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와서 나의 전부를 맡기십시오. 나의 자신, 나의 자존심, 나의 모든 답답한 문제, 나의 모든 계획의 짐을 주께 맡겨 버리십시오. 그리고 대신 주님이 맡기시는 멍에인 내 달란트, 내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따라 주님을 배우십시오, 그 때에 주님의 큰 쉼, 큰 자유를 체험하시게 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자유 해 집니까?
(1)자기로부터 자유 해 집니다.
목회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보면 놀랍게도 자기에게 매여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라는 자의식(自意識)이 너무 강해서 교만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자기 가문, 자기 부함, 자기 지위에 너무 깊이 매여 있어서 누가 조금만 그것을 무시하면 대단히 화를 냅니다. 반대로 어느 분은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 보니 열등의식에 깊이 매여 있습니다. 자기는 이 정도의 대우를 받아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므로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의외로 목회자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또한 어느 분은 과거에 받은 상처에 늘 매여 있어서 신앙의 발전을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을 씁니다. 그러므로 성공함으로 남들이 대단히 여길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한 만큼 높여주지 않으니까, 불만에 매입니다. 실패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얼마나 비웃을까 하는 것에 과민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께 와서 자기를 완전히 맡기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바르트 신학의 대변자 브른너는 말하기를 “진리는 오직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지하는 자가 비로소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 의지할 때에 비로소 자기라는 큰 올무에서 벗어나 자유의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만사가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분은 식구들이 찬송을 부르는 중에 평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십니다.
 
어느 분은 머리에 축도를 한 후 얼마나 후에 돌아가시고, 어느 분은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십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성도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남편을 원망하고 마지막까지 며느리를 욕하고, 어느 분은 식구들을 들들 볶으면서 “물 달라”, “일으켜 달라”, “왜 나를 병원으로 안 데려가느냐? 돈이 아까우냐?”고 하면서 원망으로 가득 찹니다. 어느 권사 분은 무엇이 보인다고 손을 휘 저으며 무섭다고 야단을 피웁니다.
 
그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갑니다. 그러면 이상하지요. 좀 전까지 자식 원망, 며느리 원망, 누구 원망, 갖은 잔소리를 다 하던 분이 숨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조용합니다. 누가 와서 흉을 보던지, 싸구려 관을 쓰던지, 화장(火葬)을 하던지 일절 말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해 집니다. 그런 모습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일류대학 출신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철저히 지킨 자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깨어지던 날, 자기를 십자가 안에서 버렸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안에서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높은 가문, 높은 학벌, 종교적 자부심 등을 모두 다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보니까, 또 내 속에서 자아가 쓴 뿌리처럼 살아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는 다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 함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때마다 주님의 강한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고후12장에 고백한 대로 자기가 약해질 때 주님이 강하게 역사 하시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여, 이 자리에 아직도 자기를 버리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까? 이 시간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십시오. 그 때 주님이 진정한 자유하심을 허락하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죄로부터 자유해 집니다.
본문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죄에 매여 삽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또 죄를 짓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죄의 습성, 방종, 연약함 때문에 넘어가고는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께 안고 와서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하십시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다시 와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십자가를 지고 일어나십시오.
 
그것이 성도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능력의 손에 사로잡힙니다. 나를 매고 있던 그 단단한 죄의 사슬이 벗겨지고 자유 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찬송가 190장을 작시한 분은 윌리암 코우퍼라는 분인데 과거에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인생에 대해서 절망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마차를 타고 마부에게 템즈강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은 런던에 짙은 안개가 끼여 있어서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달렸지만 목적지에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싫증이 난 코우퍼 씨는 내려서 거기까지 걸어가기로 하였는데 놀랍게도 코우퍼 씨는 마차가 멎은 곳이 자기 집 대문 앞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차는 맴돌기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코우퍼씨는 칼을 찾았지만 칼날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또 죽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목을 매었지만, 그가 의식불명일 때 끈이 끊어져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누구인가 자기의 죽음을 막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이상하게 마음이 밝아진 순간 성경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중에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 순간 코우퍼 씨는 믿음의 눈이 뜨여졌고,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깨닫고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그 감격을 글로 옮긴 것이 바로 찬송가 190장이었던 것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라고 했고 4절에서는 <날 정케 하신 피 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3)악한 영의 매임으로부터 자유 해 집니다.
한국 사람들 중에 많은 분들이 늘 영적으로 불안을 느끼며 삽니다. 미신에 매여 살기 때문입니다. 이사를 하는 데도 손 없는 날을 택하고 못을 박아도 어디 여행을 해도 아무 날이나 하지 않습니다. 무덤에 가서도 정한 시간에 묻혀야 하고 그 해에 무슨 띠가 되는 사람은 무덤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됩니다. 결혼 날짜도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야 되고 아무리 좋은 결혼 상대라도 궁합이 맞지 않으면 성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과학이 발달한 때에도 미신은 여전히 성행합니다. 무슨 중요한 공공 행사나 준공식 때도 고사를 지내고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들이 더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는다고 합니다. 지금 기독교의 교회당이 5만개이며, 목사가 10만 명을 헤아리지만 무당은 무려 50만 명으로 기독교를 훨씬 앞지르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마저 심지어 대통령 출마자도 무당에게 당선 여부를 점쳐본다고 하니 무속종교의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영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귀신이 음습한 곳에 산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숲 속, 동굴, 우물. 바위틈, 계곡, 가마솥, 접시, 식기, 절구통, 불, 기구, 못, 가위 등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믿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은 세 가지로 분열되는 데 혼(魂), 귀(鬼), 백(魄)이며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에 귀의하고 귀는 일반적으로 신주(神主)로서 영접되어 인가에서 제사를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집안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늘 불안하고 거기 매여 삽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귀신 따위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무 날 이사하든지, 결혼식을 아무 날 정하든지, 어디 장례식 집을 가든지. 심지어는 시신을 만지든지, 무덤에 가서 속을 들여다보든지 마음대로 해도 귀신이 장난하지 못합니다. 목회 하다 보면 어느 때는 오전에 장례식을 치르고 오후에는 결혼식을 주례합니다. 믿지 않는 집 같으면 큰일 날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귀신은 두려워하는 자에게 침투하기 때문이요, 예수님은 귀신의 왕을 이긴 분이시기에 예수님만 의지하면 덤비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미신을 많이 섬기던 분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제일 좋은 것은 이제는 영적으로 아무 것도 두렵지 않고 너무나 자유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진리 되시는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자요, 자유케 하시는 자인 줄 알고 예수님을 가장 귀한 우리의 보배로 높이십시다. 그 때 주님도 우리를 높이시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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