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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과 교회교육 (어린이주일)
2017년 01월 29일 (일) 06:06:31 김태복 목사 hipc6012@daum.net
 
(삼상2:18-36)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지금의 어린이들은 우리가 자라던 6․25 사변 때에 비하면 너무나 좋은 환경 가운데 사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나가서 펌프 물이나 마시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옷도 거의 단벌이고 학용품은 얼마나 엉망인지 잘 부러지는 연필, 누런 종이노트, 책가방도 없어서 책보에 싸서 다녔습니다. 요즈음은 자기 방에서 좋은 침대를 쓰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때는 한 방에 5-6명이 아이들이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했습니다. 요즈음 북한 용천에 달구지가 다니고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들을 보면 우리나라 60-70년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너무나 행복한 환경가운데 삽니다. 그런데 요즈음 아이들의 불행은 우리 어른들 때문에 발생합니다. 물질은 풍부해졌지만, 부모들이 자기들의 욕심 때문에 깨어지는 가정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중앙일보에 보면 부모들에 의해서 버려지는 아이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통계입니다. 2000년대 이후 3년간 매년 10,000명의 아이들이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혼이나 실직, 미혼모 등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부부끼리 싸우고 다투다가 수틀리면 아이들을 데리고 집단자살을 하는 경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문에 보니까, ‘부모가 무섭다’라는 제목으로 집단 자살하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엄마 아빠가 무섭게 싸우면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인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한국이 점점 이런 한심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까? 부모들에게 자녀에 대한 교육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기의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자녀살해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는 것은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그 부모에게 잠시 위탁하여 양육하도록 책임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 정신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 중에 자식들을 자기의 소유물로 알아서 성공시켜서 덕을 보려고 하거나 자식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고 막대한 교육비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점점 영적으로 노엽게 만들뿐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이 맡긴 자녀인 줄 알고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사람으로 교육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녀들 진정으로 위하는 자세로서 교육할 때만이 귀한 인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교육하기에는 점점 어려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하여야 이 아이들이 자라서 사회의 빛과 소금의 인재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자녀교육에 성공한 가정과 자녀교육에 실패한 가정이 대조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왜 그런 차이점이 생겼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그 차이점은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로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한나와 엘리 제사장의 자녀의 차이가 나옵니다. 한나의 자녀 사무엘은 위대한 인재의 싹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엘리 제사장의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불량배가 되어 온갖 도둑질, 음란행위를 성막에서 저지를 정도였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점을 만들어 냈습니까?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냐, 아니냐의 차이점입니다.
 
한나는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아이를 임신하지 못함으로 갖은 시련을 당하는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어린 사무엘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는 제사장이면서 기도에는 게을리 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한나가 성막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 취한 것으로 알고 야단을 칠 정도였으니, 이는 영적으로 무디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한나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사무엘도 어머니를 닮아 어릴 때부터 기도하는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아주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이나 의복, 좋은 환경이나 교육을 시켜 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훌륭한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너무나 성적 유혹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보호하심이 필요하기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를 하되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자기들의 욕심을 이루려는 기도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회에 유익 되는 인물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불량배가 판을 치는 환경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불타는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세 현모(賢母)라고 불러지는 여인은 그레고리우스의 어머니 논나와 크리소스톰의 어머니 안투사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입니다. 이 세 여인의 공통점은 자녀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였다는 데 있습니다. 영국의 설교가로 유명한 스펄전 목사는 자기 배후에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는 매 주일 우리 형제 자매들을 테이불 주위에 모아 놓고 성경을 읽어주며 기도하여 주었다. 그 기도 말씀은 나의 머리가 백발이 되기까지 잊을 수가 없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부모님과 교사 여러분들이여, 기도하는 어머니에게서는 사무엘 같은 귀한 인재가 나오지만, 기도하지 않는 부모에게서는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자가 나오다는 것을 명심하고 늘 기도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차이점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느냐 아니냐로 생기는 것입니다.
엡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세상 교육만 잘 시키면 일등 인간이 되는 줄 압니다. 아마 한국인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산모가 자기가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서 간호원에게 말하기를 “우리 남편에게 빨리 전화를 걸어서 아무 일류대학 부속유치원 근처에 땅을 사라고 말 좀 해주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엄마들은 얼마나 극성인지. 태어나자마자 세계문학전집을 마련하고 미쳐 한국말도 배우지 않았는데, 영어를 가르친다고 한 달에 몇 십만 원씩 주고 과외를 합니다.
 
아니, 아예 자기 남편은 한국에 기러기 아빠로 놓아두고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조기유학을 시킵니다. 이처럼 극성적인 교육열을 가진 한국에서 세계적인 인물이 벌떼처럼 나와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거의 노벨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강원도만한 땅에 사는 이스라엘은 세계 노벨상 수상자 중에 3분지 1을 차지할 정도이니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은 세상 교육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교육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 들 중에도 이런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기독교인 부모 중에도 자기 자녀가 한번이라고 학교에 빠지면 혼 줄을 내면서도, 주일날 교회학교에 결석하는 일에는 별로 중요시 여기지 않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일입니다. 고작해야 한두 번 지나가는 식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은 자기 자녀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물용 고기를 자기들 마음대로 취하여 먹는가 하면, 성막에서 심부름하는 여인들과 마음대로 동침하는 등, 음란을 저질렀다는 소리를 듣고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성직자라면 자기 가정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을 알고 너무나 기가 막혀서 펄펄 뛰면서 두 아들을 붙들어다 놓고 매를 치면서라도 훈계했어야 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했더라면 이런 불량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23-24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말투로 “얘들아, 그래서는 안 된다. 소문이 나쁘구나”라는 식의 충고가 바로 두 아들을 병들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교육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철저히 신앙교육을 시켰는지 어린아이가 젖을 뗀 후에 하나님의 집에 갖다 바쳤을 때에 울고불고 엄마의 옷을 잡았다는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마,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을 시키었고, 울면서 떼들 쓰면 매질하면서도 엄격히 훈련을 시켰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나는 아이가 자라감에 따라 옷이 점점 필요함으로 매년 성막에 올라올 때마다 옷을 지어다 입혔습니다. 그 때마다 아이는 ‘엄마를 따라 가겠다. 엄마하고 살고 싶다.’고 눈물로 떼를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라도 한나는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겉으로는 단호하게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몸이다.’라면서 단호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훈계로 가르치고 돌아서고는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한나는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을까요?
 
거기에서 위대한 사무엘이 나온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교육의 힘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이번 부상당한 북한 용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낍니다. 이번 참사로 많은 어린이들이 얼굴에 화상을 입고 유리 파면으로 눈이 다쳤음에도 수술도 맞지 못하고 진통제나 항생제, 화상연고나 링거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그냥 누워 있습니다. 얼마나 아플까요? 우리나라 어린이들 같으면 몸부림치면서 울 터인데 울지도 못한 채 꾹 참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나 무서운 교육을 받았으면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참을 수 있습니까? 교육의 힘은 이처럼 무섭습니다. 한나의 철저한 신앙교육이 어린 사무엘에게 그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신일교회 김성은 장로님은 해병대 대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분인데, 그는 29세 때에 별을 달 정도로 출세길이 빨랐습니다. 그는 처음 별을 달았을 때 아주 뻐기는 마음으로 고향에 갔습니다. 온 동네가 경사 났다고 대잔치를 벌리는 등, 환영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 할 어머니의 표정이 무엇인가 씁쓸한 모습이었습니다. 며칠간 쉬다가 돌아가는 날이 어머니가 그를 불러 앉혀놓고는 “얘야, 아무리 바쁘더라도 예배는 드리고 가야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날이 주일날이었던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에 어머니는 아들 앞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무릎을 보여주는데 깡마른 무릎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보아라. 여기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잊지 말고 어디 가든지 신앙생활을 잘하여야 한다.”라는 충고였습니다. 그 때에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깨달은 것은 그 동안 모든 위험과 위기에서 건짐 받는 것은 자기가 잘 나서 아니라 어머니의 저 불타는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는 곳마다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신일교회를 새로 건축할 때도 십 몇 억을 헌금할 정도로 신앙적이었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교사 여러분들이여, 다른 교육은 제대로 못해도 좋습니다. 신앙제일주의만을 철저히 시켜 놓으면 하나님의 큰 도우심을 통해서 귀한 인재가 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차이점은 본을 보이느냐 아니냐로 생기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귀로 배우는 교육보다 눈으로 배우며 가슴으로 배우는 교육이 최고의 감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한나의 교육은 말의 교육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본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자녀들이 비뚤어진 이유는 성직자인 아버지의 위선적인 삶 때문이었습니다. 백 번 천 번 떠드는 것보다.
 
한 번의 본을 보이는 모습, 기도하라고 백 번 외치는 것보다 경건히 기도하는 모습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보지 않는 것 같아도,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을 때에 부모나 교사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과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어느 교회 장로님이셨는데, 평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교회 와서 기도할 때는 얼마나 거룩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기도하는 모습이나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고 집안에서 조그만 일로 얼마나 화를 내는지 항상 불안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더 실망한 것은 한번은 아버지가 식구들을 데리고 운전하고 가는데 옆에 차와 접촉사고가 나서 차가 약간 우그러졌습니다. 그러자 차를 길에 세워놓고 얼마나 심한 말로 욕을 하면서 멱살을 잡고 싸우는지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더랍니다.
 
그리고 가장 자기를 낙심하게 만든 것은 교회 문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새로 오신 젊은 목사님이 당회나 제직회 허락도 없이 마이크와 스피커를 교체함으로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장로님들 중 일부가 목사님을 사정없이 몰아세우는데 자기 아버지가 앞장을 서더랍니다. 어느 날 밤에 그 목사님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눈물로 사정합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위선적인 아버지가 믿는 기독교를 믿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 용서를 기도 때마다 외치는 분이 어떻게 그 정도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그 뒤부터 교회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나가지 않다 보니 이제는 탕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까?
 
위선적인 본은 아이들의 심령에 독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려운 삶 속에도 부모님과 교사가 보여주는 희생적인 본, 용서의 본, 나누어주는 본은 자녀나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을 보이는 삶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녀들이나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를 닮도록 힘써야 가능합니다.
 
달은 발광체(發光體)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밤에 달은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태양을 향해 있을 때 그 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11:1에 보면 모든 성도들에게 ‘자기를 본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원래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 설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고백하기를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잔인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할 정도로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직 예수님 안에서 깨어진 후,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 예수님만 존귀해 여기는 삶을 살 때에 그런 경지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부모님과 교사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이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삶, 예수님만 존귀해 여기는 삶을 살면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제자들은 알게 모르게 귀한 영향을 받는 줄 믿어야 합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박대선 목사님은 어느 날밤 밤 1시까지 강의를 준비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오는데 옆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귀를 기우려 보니 연노하신 어머니가 자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가 매일 밤 1시나 2시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자기가 일제 시대나 6․25 사변 때 온갖 위기와 위험을 만날 때에 기적 가운데 구함을 받고는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잘 난 탓이 아니고 바로 어머니의 기도 탓일 줄 알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교사 여러분들이여, 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녀나, 교회 학교 학생들을 위해 (1)기도하는 부모나 교사가 되십시다. (2)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나 교사가 되십시다. (3)아무리 어려운 속에라도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의 본을 보여주는 부모와 교사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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