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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골짜기에서 만난 세 명의 영의정
2016년 10월 25일 (화) 17:27:40 이승철 장로 webmaster@cry.or.kr
 
서울 중앙선 양수역에서 부용리 거쳐 목왕리까지 가는 골짜기 풍경
 
   
 
 "오늘은 산에 오르지 않고 골짜기를 따라 걸으며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들을 만나보도록 할까?"
"역사 속의 인물들이라면, 이 골짜기에 유명한 사람들의 무덤이 많은가 보네, 누구누구야, 몇 사람이나 되는데?"
 
일행들이 금방 반응을 보인다. 3월30일, 며칠 동안 날마다 기세를 떨쳤던 꽃샘추위가 수그러져 모처럼 봄볕이 따사로웠다. 화요산행을 하는 날이었지만 아픈 무릎에 염증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골짜기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형편을 헤아려준 일행들이 고마웠다.
 
중앙선 전철 양수역에서 내려 철길 아래로 통하는 길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부용리로 가는 길 옆 마을 안쪽에 서있는 고목나무 한 그루가 모질게 추웠던 겨울을 잘 이겨낸 모습으로 멋지고 우람하다. 길가 쪽에 서있는 전봇대가 가리지 않았다면 훨씬 더 멋있는 모습이었을 것 같아 아쉽다.
 
나무묘목이 아닌 풀 묘판이 가득하고 예스러운 마을 이름들이 재미있는 골짜기
 
길은 골짜기 안쪽으로 구불구불 뻗어 있었다. 2차선 도로에 인도가 따로 없어 걷기가 불편하여 부용천을 따라 논둑길을 걷기로 했다. 길가에 있는 농가들의 모습은 봄볕아래 고즈넉하다. 어쩌다 눈에 띄는 사람은 밭에서 씨앗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저 묘판들 좀 봐? 나무 묘목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풀을 키우고 있네?"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일행이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 누렇게 변색된 풀들이 묘판에 가득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주 특별한 풍경이었다. 풀을 키우는 묘판이었다. 풀도 묘판에 재배를 하나? 나무를 키우는 묘목이 아니라 풀이어서 모두들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런데 이 골짜기를 걷는 동안 나타난 농가 주변 풍경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갈대, 억새, 그리고 수크렁 등 다양한 풀들을 묘판에 재배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어느 비닐하우스에서 묘판에 재배하는 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서울의 어느 구청에 납품할 것이라는 용도가 쓰여 있는 수크렁 씨앗이 커다란 자루에 담겨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이름은 본래 교골이었다는군."
또 다른 일행이 이번엔 마을 이름에 관심을 나타낸다. 부용리라고 했지만 본래 이 지역엔 작은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마을들을 통합하여 부용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근처에 있는 부용산 이름을 따 붙여진 마을이름이었다. 하천변 논두렁길을 걷는 느낌이 매우 좋다. 흙길이고 한쪽은 개울, 다른 한쪽은 논과 밭이 이어져 있어서 정겨웠기 때문이다.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며 만난 옛날의 마을이름들은 정말 정다웠다. 본래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가정마을은 참나무가 많아 '참나무쟁이'로도 불렸다. 교골은 계골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마을로 들어갈 때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리골은 향목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다리가 놓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상나무배기도 가정마을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향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참나무재이는 가정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로 참나무 정자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고 진목이라고도 불렸다.
 
가정마을에는 사시사철 더운 물이 샘솟는 더운 우물이 있었으며, 향목에서 양수리에 있는 건지미 마을로 넘는 고개는 '건지미 고개'라고 불렀다. 소리개는 강아지 이름이 아니고 향목마을에서 양수리 골용진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풀을 재배하는 묘판이며 예스럽고 정겨운 마을 이름들을 살펴보며 논둑길을 걷노라니 길이 막힌다. 길이 끝난 것이다. 할 수없이 자동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로 나섰다. 그런데 조금 걷노라니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산길 입구에 '동고 이준경 선생 묘역'이라 쓴 커다란 표지석이 나타난다.
 
묘역은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준경(1499~1572)은 조선 중기 중종임금과 명종, 선조 시대의 문신이다. 난세에 요직을 두루 거치고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특별한 치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쯤 조선에 붕당이 있을 것이란 내용의 유소를 임금에게 올려 조야의 규탄을 받았지만 후에 정말 동서붕당이 생겨 적중한 예언으로 유명해졌다.
   
 
 "이 양반이 이 골짜기에서 만난 첫 번째 영의정이네, 그런데 조금 전 왼쪽 길 입구에 있던 '이윤경'과 이름이 비슷하잖아? 혹시 형제지간 아닐까?"
 
그러나 비슷한 시대(1498~1562)병조판서를 지낸 인물이긴 했지만 그들이 형제였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골짜기 안쪽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길가에는 지난 번 폭설로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줄기가 부러져버린 소나무들이 안타까운 모습으로 서있었다.
 
"어, 저기 정창손 묘역 입구가 나타났구먼"
이번에는 오른편으로 몇 채의 가옥과 비닐하우스들이 서있는 사이로 뚫린 작은 골짜기 입구였다. 잠깐 올라가자 왼편 비스듬한 산자락에 조성된 묘역이 대단하다. 묘역 안내판을 살펴보니 정창손의 묘는 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창손(1402~1487)은 조선전기의 문신이다. 그는 고려사와 세종실록, 치평요람의 편찬에 참여했고 익대공신 3등에 오른 사람이다. 1469년에는 원상에, 1471년엔 좌리공신 2등에 올랐고 궤장을 하사받기도 했다.
 
한적한 산골짜기에서 만난 세 명의 영의정들
 
그는 1423년(세종 5)에 사마시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1441년에는 사섬서령이 되었고, 1444년인 응교 벼슬에 있을 때는 한글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어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세종임금의 한글제정에 반대한 벼슬아치들 중의 한 사람이다,
   
 
 1446년 집의 벼슬에 있을 때는 왕실의 불교숭상을 반대하여 재차 파직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는 직제학으로 승진하였고 1449년부터는 춘추관편수관과 ·수사관을 겸직하여 역사서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왕실의 출납을 담당하는 동부승지가 되었고 대제학과 ·병조판서 등을 거쳐 1453년(단종 1)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1455년(세조 1)인 우찬성 때 좌익공신 2등에 오르고, 봉원군이 되었다. 이듬해인 세조 2년에 단종 복위 세력들을 고변한 공으로 부원군이 되고 우의정을 거쳐 1457년 영의정이 되었다. 세조가 죽은 후 1468년(예종 즉위)에는 간신 유자광이 모의한 남이와 강순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이 되었다.
 
노련한 처세술로 영의정과 부원군까지 지낸 그였지만 그가 죽은 후 1504년 갑자사화 때는 연산군에 의하여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중종임금 때 신원이 회복되었고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 양반은 전에 TV에서 세종임금시절에 대한 드라마를 보니까 썩 바람직한 정치가가 아니었더구먼, 뭐랄까, 지조도 없고, 한글도 반대했고, 특히 세조에게 붙어 어린 단종임금을 복위시키려던 사람들을 고변이나 하고...쯧쯧"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후세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으려면 바른 정치를 해야 돼.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거든."
   
 
 일행들은 역사 속의 인물인 그의 행적을 대충 알고 있었다. 묘역 입구에는 제실인 동산제와 비각이 세워져 있었고 그 뒤쪽으로 비스듬하게 드넓은 묘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포근했다. 근처 소나무 그늘에서 점심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저 건너 논둑 좀 봐, 저 아주머니들 나물 캐나 봐."
목왕리 한음 이덕형의 묘역으로 가는 길가에서는 마을 아낙네 두 사람이 나물을 캐는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정겨운 모습이었다. 논둑에는 파릇파릇 작은 들나물들과 쑥이 돋아나고 있었다.
 
목왕리 삼거리에 이르자 오른편 개울 건너 잔디밭에 작은 비각이 바라보인다. 구름다리처럼 생긴 철제 다리를 건너가 보니 한음 이덕형의 신도비다. 그런데 정작 영정각과 묘는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시 도로 3거리로 나와서 살펴보니 목왕리 방향 오른쪽 도로를 향해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 이 길로 올라가면 있겠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 올라갔지만 한음선생의 무덤이나 영정각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길에서 만난 주민에게 물으니 잘 못 올라왔단다, 삼거리에서 왼편 길로 조금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터덜터덜 걸어 다시 삼거리에서 왼편 길로 접어들자 저만큼 개울건너에 영정각이 서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아이쿠 다리야, 한음 선생이 장난을 쳤나? 오늘 우리들을 헷갈리게 해서 다리품을 많이 팔게 하네, 오성 이항복이 근처에 없어서 심심했던 것 아녀 허허허"
 
길을 잘 못 들어 헛걸음을 많이 한 일행들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한음의 영정각은 나지막한 산자락 밑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덤은 영정각 뒤쪽 작은 봉우리 위에 있었다. 참 특이하게도 신도비와 영정각, 그리고 무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이준경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오성 이항복과 더불어 수많은 이야기로 회자되는 한음은 1580년(선조 13)에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정자를 거쳐 사가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듬해 박사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거쳐 1592년에 예조참판에 오르고 대제학을 겸임했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가 되어 일본 사신과 화의를 교섭했으나 실패했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선조임금을 정주까지 호종했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파송되어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했다. 귀국 후에는 한성부판윤으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을 상대하는 접빈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당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린 당쟁에서 중간노선을 지켰으나 결국 남인에 가담하게 되었다. 1598년에는 우의정이 되었고 곧 좌의정에 올랐다. 왜란이 끝난 1601년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와 강원도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힘쓰고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선조말년에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곧바로 영의정에 복직했다. 그러나 그는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당하여 양근에서 살다가 죽었다. 인조 때 복권되어 포천에 있는 용연서원에 배향되었다.
 
"이 양반이 조선시대 오성 이항복과 더불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가장 많이 남긴 분이잖아."
일행들도 모두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한음 이덕형은 올곧은 정치인으로서 정도를 걸어 많은 치적을 쌓았지만, 특히 오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백사 이항복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며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오성과 한음에 대한 선조임금의 신임은 남달랐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전쟁기간동안 병조판서를 번갈아 역임했던 두 사람은 국가존망의 위기를 수습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정치인들로 통한다. 한음과 막역지우였던 백사 이항복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오성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그래서 백사인 호보다 오성으로 더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오성 이항복과 더불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한음을 만나다
 
한음 이덕형도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그리고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이란 최고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음 이덕형은 1561(명종 16)년에 태어나 1613(광해군 5)년에 세상을 떠났고, 친구인 오성 이항복은 1556(명종 11)년에 태어나 1618(광해군 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성 이항복이 한음 이덕형보다 5살이나 위였지만 관직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으며 결혼은 같은 해에 했다. 오성은 권율장군의 딸을, 한음은 정승 이산해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니 당시 최고의 명문거족끼리의 혼사였던 셈이다.
 
"한음 선생도 영의정을 지낸 분이니 오늘 이 골짜기에서 세 명의 영의정을 만난 셈이군, 우리들이 오늘 횡재한 걸까, 재수가 좋았던 걸까?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텐데 말이야 허허허"
 
"어디 옛날뿐이겠어? 요즘 국무총리를 만나려고 해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일행들이 골짜기를 따라 올라오면서 만난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세 사람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감동을 한다.
 
"이보게 한음, 자네 부인 배꼽 밑에 검은 점이 한 개 있더구먼."
오성 이항복이 어느 날 한음에게 넌지시 농담을 던졌다.
 
"이 실없는 친구야,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아직 보지 못했는데."
오성의 농담을 웃음으로 받아넘긴 한음이 그 날 밤 부인에게 오성이 던진 농담을 말하자 한음 부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며칠 후 한음 댁을 방문한 오성대감 앞에 먹음직스러운 떡 접시가 놓였다. 오성이 맛있어 보이는 떡 한 개를 대뜸 집어 입속에 넣고 씹는 순간, 으악! 오성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엣퉤퉤!!!를 연발하는 것이 아닌가. 방안엔 금방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거짓말을 함부로 하는 입은 똥이나 먹는 게 제격이지 호호호"
그 때 사랑방 문 앞에서 누군가 호호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었다.
 
영정각 근처에 있는 지장사를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설핏 기울었다. 일행들은 한음과 오성이 남긴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다시 골짜기 길을 따라 양수역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꽃소식을 앞세우고 다가오는 봄의 햇살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홍익교회 장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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