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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기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려면
2008년 08월 20일 (수) 16:33:18 이수미 holysumi@hanmail.net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나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 강의 들으러 간다. //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엇을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 육첩방 : 다다미를 여섯 장씩 깔아놓은 일본식 작은 방

윤동주라는 시인은 어쩌면 너무 잘 알아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왠지 교과서나 시험에 나오는 그놈의 시(詩)라는 것은 그러니까 너무나 지겹고 싫은 게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윤동주의 시를 학생들과 함께 읽는 걸 좋아합니다. 입시지옥에 얽매어있는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윤동주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역시 학생이었죠. 민족이 처한 현실에서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지금의 학생들도 급변하는 현실에서 개인의 존재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끊임없이 느끼고 있으니 처지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0교시때문에 아침밥 굶어야 하고 열심히 하고 싶어도 열등반으로 낙인찍혀야 하는 학생들 말입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작가의 마음에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위 작품에서도 역시 화자의 마음은 심란합니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 대학 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 강의 들으러 가는 현실’ 때문입니다. 대학 등록금 천만 원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정말 가슴에 와 닿는 구절입니다. 부모님이 힘들게 보내준 그 비싼 등록금을 고작 5년 전, 10년 전에 했던 강의 그대로 되풀이하는 늙은 교수 강의를 듣는데 써야 하는 현실, 순수했던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친구들과도 죄다 연락이 끊긴 상황, 그것이 남의 나라 육첩방에 혼자 앉아 있는 화자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현실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별다른 고민 없이 시를 너무 쉽게 쓰는 자신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우리는 힘든 현실에 처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합니까? 어떤 이들은 현실을 외면한 채 담을 쌓아 올립니다. 최근 경기도의 어느 기숙사 고등학교에 대한 비리 문제로 인터넷이 떠들석했습니다. 학교의 비리 속에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학생들의 슬픈 현실을 담은 동영상이 떠돌아다녔고요. 그런데 그 상황에 대해 그 학교 졸업생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교를 선택해서 간 것은 다 그럴 줄 알고 간 것이다.(이 학교는 뺑뺑이 돌려 배정받는게 아니고 선택해서 가는 학교입니다.) 좋은 대학 가서 성공하려고 간 게 아니냐? 그 정도 노력과 희생 없이는 인생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식의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문장도 좋고 내용도 감정적이지 않게 잘 풀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람에게는 그 상황의 원인을 단순히 개인에게만 돌렸다는데 있습니다. 그 글의 문맥을 보니 분명 그 학교에 잘 적응하고 시키는 대로 공부만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간 사람 같았습니다. 살기 힘든 현실을 외면하고 ‘좋은 대학 가는 것’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목표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출세하고 돈 많이 벌 수는 있겠죠.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외면한 현실이 더 끔찍하게 변하여 자기 삶 안으로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현실을 모르고 철없이 쌓아올린 모래성 같은 인생은, 괴물처럼 덤벼드는 현실 앞에서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현실을 미워합니다. 왜 자기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인생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움과 원망은 자기 자신만 갉아먹을 뿐입니다. 무기력하고 약한 심정으로 살기 힘든 세상을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불행을 전부 남 탓으로 돌리다가 전혀 관계없는 것에 화풀이를 합니다. 자기와 상관 없는 사람을 그냥 찔러 죽이기도 하고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것에 방화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자기가 원망했던 괴물같은 현실이 실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을 모른채 말입니다.

윤동주는 어떻게 합니까? 조용히 창 밖을 바라봅니다. 여전히 육첩방은 남의 나라이고 창 밖에는 밤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등불을 밝히고 어둠을 조금 내몰게 됩니다. 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윤동주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시의 특징 중 하나가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나의 나라.’라는 구절이 어순만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시에서 의미 없는 반복이란 있을 수 없죠. 처음 구절은 ‘밤처럼 어둡고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있는, 게다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남의 나라’ 라는 의미로 처한 현실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부분은 똑같은 현실이지만 단순히 힘들다는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든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거기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두 눈 똑바로 뜨고 ‘직면(直面)’한 것입니다.

‘직면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애써 낮춰 보지도 않지만 과장되게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직면’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감추고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때로는 남들에게 떠벌려 동정을 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직면’한다는 것은 더더욱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에서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가시를 주셨으나 이는 나를 쳐서 자고 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육체의 가시를 놓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지만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절이 서운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 앞에서 자기는 아무런 결함이 없는 양 그 육체의 가시를 덮어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가시를 인정합니다. 인정하고 나니 그 육체의 가시조차 은혜로 받아들여집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직면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니까 어린애처럼 무턱대고 때를 쓸 때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고 자기 의를 세워 세상을 헤쳐 나가려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거기에서 도망하려 하지도 않고 원망하려 하지도 않는 그 모습. 그것이 ‘직면’이 아닐까요?

이 시의 화자가 현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다시 ‘직면’하게 되면서 갑자기 그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직면을 하면 무엇을 해야 할 지 분명히 보이게 됩니다.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몰아내봅니다.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아침이 와야겠죠. 그 아침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할 일이 없서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이 그의 의지입니다.

잘 알고 있겠지만 윤동주가 이런 고민을 하고 또 이런 결정을 내린 그 용기의 근원이 바로 그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면 괜히 제가 뿌듯합니다.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믿음'을 언급할 수 있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양심을 지키는 일임을 가르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 때나 이번 총선 때나 세상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 즉 현실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더럽고 치사한 세상, 자기까지 오염되기 싫다며 눈 감고 귀 막고 사는 사람들도 있고 아니면 다른 거 다 따지지 않고 무슨 교회 장로더라 무슨 교회 집사더라 하면 무조건 표를 던진 사람들도 있었죠.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신앙적 양심은 두 눈 똑바로 뜨고 그 더러운 현실을 보게 만들고, 또 무엇을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 줍니다. 올바른 행동 이전에 직면의 과정을 겪는다면 힘들지만 어렵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처한 현실을 직면하게 되면 되는대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작정 '좋은 대학 가고 좋은 회사 들어가서 출세하고 돈 많이 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테고 그것이 진짜 믿음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막연한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도 그저 막연하게만 느끼게 되고 그 막연한 하나님의 섭리는 곧 잊혀져버리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내 상황은 이러한데 하고 싶은 일은 저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기도하게 되면 더욱 깊은 기도, 진실된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니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윤동주에게 ‘고뇌만 하지 행동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약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윤동주를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총칼 들고 직접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이육사 같은 시인도 있었지만 이 둘을 어떤 기준으로 놓고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둘 다 치열한 현실을 살고 간 훌륭한 시인입니다. 윤동주는 학생으로서 충분히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윤동주에게 감탄하는 것은 현실을 덮어두지 않고 힘들지만 직면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내면을 들여다보고 고민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시로서 보여준 것도 용기이고 훌륭한 행동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도 용기를 내야 할 때라 생각됩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려면 직면을 통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 글은 CCM비평전문지 'ccmer'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고교 국어교사, 삼일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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