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전통이 깊은 나라엔 민족혼이 있다. 평시엔 없는 듯 잠자고 있다가도 나라가 위기를 만나면 민족혼이 불현 듯 일어난다. 몇 년 전 3월 11일 일본 동북지방에 있었던 지진여파로 후쿠시마원전이 1단계 폭발이 일어나고 그 이후, 그것을 즉시 덮지 않으면 엄청난 재앙이 온다는 보고가 나왔을 때, 그 사지(死地)에 누가 들어가서 그 일을 할 것인가. 그야말로 암담했다.

숨막힐듯한 적막이 흐르고 있을 때 돌연히 20명의 결사대가 사무라이 띠를 두루고 선뜻 나섰고, 이어서 70명의 특공대가 또 나오므로 해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그 정도에서 막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민족혼이고 사무라이 정신이다. 요즘은 어느 나라나 다문화 가정이 많아져 민족혼이란 말대신에 '국민혼'이란 말을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국민혼은 '중하(中華)정신'이고 미국은 '개척정신‘이고 영국은 '젠틀맨십’이고, 이스라엘은 그 옛날 야곱이 천사와 싸워 이겼을 때 하나님이 이겼다는 뜻으로 너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명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민족혼이라 한다. 그러면 한국의 국민혼은 무엇일까?

병자호란 때 콩고의 침략에 대항한 삼별초의 애국정신, 그리고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대청항쟁의 삼학사 정신, 신라 때도 그랬지만 고려시대나 조선조 시절에도 일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의병이 일어나 왜구를 물리쳤는데, 역시 그들이 모두 무명의 선비들이었다. 일본의 '사무라이'라는 말도 '싸울아비'(화랑도의 원래 이름)이 변음이라고 하거니와 '선비'야말로 한국의 국민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선비의 자격 요건은 학문이고 지조이고 품위이다. 그래서 (1)선비는 밤낮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지만, 위기를 만나면 학문 즉, 진리애의 정신이 용기로 승화된다. 논어에 나오는 행유여력 즉이학문(行有餘力卽而學問)이란 말도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2)지조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뜻인데, 돈이나 권력이나 쾌락이 유혹을 하고 폭력이 위협을 해도, 선비는 꺾일지언정 뜻을 굽히지 않는다. 즉 결연함이 있다는 뜻이다.

(3)품위는 겉 모습이고 위용이다. 선비는 외출할 땐 항상 정장을 하고 갓을 쓴다. 소낙비가 와도 자기의 리듬을 지키고, 선비는 품위를 그만큼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선비의 3대 덕목을 말할 때는 지분(知分), 지지(知止), 지족(知足)을 든다. ‘지분'은 분수를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정도(程度)를 지킨다는 뜻이다. 각자에겐 자기의 위치가 있고 순위가 있고 단계가 있다.

그것이 영구불변한 것은 아니지만, 정해지면 지켜야 한다. 그래서 분수는 질서를 만든다. '지지(知止)'는 어떤 행위를 하고 주장을 하다가도, 더 이상 나가면 판이 깨어진다 싶을 땐 스스로 그친다는 뜻이니, 자제력이고 억제력이고 절제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자기를 절대화 시키지 말아야 된다. 그래서 '지지'는 협력과 단결을 만든다고 한다.

‘지족'은 무엇이 자기기대에 못 미쳐도 웬만한 선에서 만족할 줄 안다는 뜻인데, 그것은 금욕이고 겸손이다. 그래야 감사심이 나오고 기쁨이 생기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우리나라의 국민성 중 고질적인 문제를 말하자면,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생긴 탐욕이고 이기심이고 배타심이고 무책임성과 노예근성이다. 이 병을 치유하지 않으면 한국의 내일에 희망은 없다. 이 문제를 풀려면 한국의 국민혼인 선비정신에 불을 붙여야 한다.

/새문안교회 공로장로